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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현
2018년 2월 3일 ·
[한국인들이 frame-laden thinking을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하는 게 비과학적인 것이죠]
제가 어제 아침에 특별한 생각없이 평소에 하던데로, 한의학은 비과학적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비과학적이다라는 주제로 포스팅을 했어요. 제가 이렇게 처음 쓴 것도 아니라서 저는 지나가면서 과거에 했던 얘기를 또하는 것에 불과했는데, 개인적으로 신기한 sensation을 경험했는데, 그 글에 대한 like가 수백명에 이르고, 페친신청이 수십건에 이를 정도였어요. 그리고 제가 페친신청을 한 분들의 페북을 클릭해보니(제가 개방형으로 페북을 운용하니 스크리닝하는 것은 아니고-간혹 예쁜 젊은 여성의 야릇한 사진만 있는 것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이 거릅니다- 페친이 될 분들이 최소한 어떤 분들인지는 알고 싶죠) 대게 한의학 분야에 종사하신 분들이 많았어요. 하루 사이에 소소하게 페북에 스크랩하고 커멘트를 올리는 정도였던 저의 하루 일상이 갑자기 바뀌고 갑자기 한의학계에 많은 분들과 페친이 되었습니다. 제가 주로 페친이 대학교/고등학교 동문정도였다가 예기치 않은 분야와 갑자기 엄청난 인연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래서 제가 체험한 phenomena에 대해서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제가 그동안 한의학계가 '비과학적이라고' 얼마나 몰아세움을 당했는지 새삼 미루어 헤아리게 되었어요. 제가 (동양)의학과 과학성에 대해 딱히 연구를 한 적도 없고 저는 사실 한의학이 어떻게 교육되는지도 몰라서(제가 기껏 아는 것은 방대한 동의보감이나 본초강목같은 과목을 달달 외운다는 피상적인 수준) 어서 제가 포스팅한 것은 저는 그냥 상식적인 수준 정도의 내용밖에 안되는데, 그 정도의 상식 수준으로 '한의학의 비과학론 비판'도 한의학계에 계신 분들에게는 적어도 정서적으로 속시원한 면이 있지 않았을까 싶구요.
그러면서 제가 혹시 한의학계에 누가 될지도 모르지만 제가 또 일반화시켜보고 싶은 것은 한국에서 갑과 을의 도식이 존재하고 갑 또는 갑의 편을 드는 측이 을을 frame-laden thinking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의학의 경우엔, 의학이 갑으로 한의학이 을로 포지션되고 갑의 위치에선 의학이 집요하게 을을 몰아넣고 있는데 그때 쓰이는 전가의 보도가 '과학성'이라는 것이고 그만큼 한의학계는 '비과학적'이라고 시달렸던 거에요. 의사협회의 예산 중에는 아예 대놓고 한의학을 겨냥한 '한방대책 특별기금", "한방대책 특별위원회"가 존재하고 "한의사 현대의료기기 허용 저지"도 명시화되어 있어요(여기에는 심지어 원격의료 저지도 포함되어 있거둔요-무지하게 기득권스러운데 이는 넘어가죠).
(의협신문 기사)
http://www.doctorsnews.co.kr/news/articleView.html...
의사들이 한의학을 비과학이라고 또는 비과학적이게 만들려고 괴롭히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들의 기득권 보호이고 밥그릇 지키려는 것이니 거기에서 '과학성'을 내세우는 것은 한의학업계에서 봐도 그러려니 할 수 있을 거에요(서양의학의 과학성의 문제는 제가 말한 바 있죠). 그런데 아마도 한의학 종사자들에게 더 상처가 되는 것은 대중의 태도일 것이라고 여겨져요. 싸우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게 그런 것이죠. 대중 역시 의학 대 한의학 구도에서는 대체적으로 의학을 (은근) 지지하거든요. 그 논리는 똑같은 과학성이구요. 이에 대해서도 제가 그렇게 선험적/선입견 스러운 과학성 판단을 하고 있는 게 비과학적이고 그만큼이나 한국 대중이 과학적 사고를 못한다고 비판한 게 문제의 포스팅이었어요.
제가 어제 포스팅에 대해 댓글도 많아서 간단한 답도 하곤 했는데, 상당히 개인적으로 충격적인 댓글을 지인으로부터 받은 거였어요. 그게 제가 요렇게 다시 포스팅을 또 하는 계기에요. 이미 댓글들은 대체적으로 한의학계 분들이 동감표시를 하는 것이었는데, 제 지인이(페친은 아닙니다) '한의사 중에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 '한의학은 아직도 멀었다' 와 같은 엄청난 과감한 주장을 서슴치 않고 하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제가 포스팅한 것과 그에 대한 댓글들로 보면 일단 한의학계에 우호적인 한의학홈그라운드같은 것이었는데, 불쑥 한의사와 한의학을 그렇게 싸잡아서 비판하는 댓글을 올리는 것이죠. 이것은 마치 바르셀로나 축구팬이 마드리드 홈구장 가서 마드리드 후졌다고 말하는 격이거든요. 이게 일반적으로 무리이고 예의도 아니지만(남의 집 가서 남의 집 후졌다고 하지는 않쟎아요) 또 다른 점에서는 그렇게 무리를 해도 된다고 여기는 그 사고 자체였어요. 그리고 제가 아는 지인이다 보니 그 지인은 자연과학 출신이구요. 제가 '충격과 공포'의 와중에서 답한 것은 메시지로만 하면 '원래 practise에서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는데 한의학계만 유의하게 이상한가?' '인체라는 시스템의 어려움을 볼 때 한의학만 거리가 먼 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의학 자체가 거리가 멀다' 고 답했던 것이죠.
저의 지인이 좀 과감한 편이기는 하지만 지인이 솔직한 탓도 있다고 봐요. 자리가 좀 어색해서 그렇지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이 한의학에 대해 평할 때 호의적이기도 하지만, 대단히 강하게 비판하는 경우가 많아서 지인이 그런 점에서는 특별한 것은 아니거든요. 제가 비록 충격과 공포를 느꼈지만 지인이 과감하게 던지는 말들이 사실은 대중에게 흔히 있는 것이기도 하고 그게 한의학계 종사자들은 자주 경험하거나 또는 피해의식처럼 다가오는 것이었을 거에요.
제 지인이 자연과학 출신이다 하는 것 등도 제가 더 충격을 받게 한 계기이지만 사실은 별로 큰 의미는 둘 게 없어요. 제가 지인에게 응답한 것 중에 어차피 한국에 '과학적인 과학자'도 드문만큼이나 한국인들은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한 게 있어요. 제가 '과학적인 과학자'라고 할 때 '과학적'의 의미가 선입견에서 최대한 자유롭고자 하고 그래서 통계 개념으로 하면 늘 '귀무가설=유의성이 없다'에서 출발할려는 것이거든요. 신약이 효과가 있다고 할 때 귀무가설은 일단 효과가 없다에요. '귀무'라는 번역어는 이래서 대단히 잘 만든 개념으로 보통 기호로 쓰는 H0보다 좋아요. 제가 언급한 바와 같이 체계적인 임상시험 즉 약을 인정하는 표준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일단 심각한 부작용이 없다고 치는 전임상 넘어서) 귀무가설을 깰 수 있냐 없냐이죠. 그 전에는 약은 '효과가 있다더라'는 viral로 인정받았어요. 이 점에서 이명래고약이나 지금의 굴지의 세계적인 제약회사나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동네 약국하다가 '용한 약'을 만들어서 이게 히트하는 것이었죠. 여기서 용하다고 하는 것은 과학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게 '용하다'는 것 자체도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 수도 있거든요. 신약 효과 검증할 대 플레시보효과를 걸러내기 위해서 위약을 쓰는 통제그룹을 두는 것이 '믿고 싶은 바'를 걸러낼려고 하는 것이죠. 정말 귀무가설을 하나 깨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지 모르죠. 그러고서도 그렇게 통과한 약이 시중에 사용되다가 부작용이 발견되어서 도로 철수되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보니 신약에서 최근 많이 제기되는 게 너무 신약이 안 나온다는 것이거든요. 최근에 접한 바에 의하면 치매치료제도 시도한 게 에컨대, 100이고 그 중에 혹시나 1-2개가 가능성이 있었는데 그마저도 결국 최종단계를 못 넘어가고 접었다는 것이거든요. 이렇게 신약이 어려운 것이고 그만큼 귀무가설을 넘어서는 게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도 쉽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의 일상의 선입견은 너무나도 손쉽게 귀무가설을 넘어서요. 그게 사람들이 편의적인 싸잡아서 그루핑을 하는 거에요. 예컨대, 한의사가 이상하면 싸잡아서 한의학이 이상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반대로 (양)의사가 이상하면 의사가 개인이 이상하다고 하는 거에요. 최근에 신해철에게 부당한 수술을 했고 그런 식으로 모두 4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의사가 실형을 선고받았죠. 그런데 아무도 의학이 문제라고 말하지는 않고 다만 그 의사 개인의 일탈로 여겨요. 그런데 그 의사가 시술한 위 수술이 그 의사가 새롭게 창조한 것은 아니고 practise에 있는 것인데 다만 의사가 과용 적용한 것인데두요. '과용'이라는 것 자체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 거에요. 그런데 바꿔서 한의사가 시술을 해서 그런 사고나 나면 한국인들의 반응은 뻔해요. '역시 한의학은 안되, 갈 길이 멀어-정확하게는 길이 안보여-' 이런 식인 것이죠. 여기서 한국인들이 귀무가설을 너무 쉽게 넘어버린다는 것은 한의학에 이상한 practise를 하는 사람이 의학에 비해 '유의하게' 많은지를 한국인들은 아무 통계적 검증을 하지도 않은 채 그렇게 결론내버린다는 거에요. 이미 한의학=비과학, 의학=과학 이런 싸잡은 frame-laden thinking을 쉽게 해버리는 것이거든요. 제 지인의 경우를 봐도 자연과학 출신도 쉽게 못 피해가버리는 함정 또는 편의성인 것이죠.
싸잡아 그룹핑하는 게 자연상태에서 생존해야 하는 동물로서 인간에게는 필요했겠죠. 적(나쁜 것), 아군(좋은 것)을 대단히 순식간에 파악해야 하고, 한 두 번의 경험으로 일반화해야 했을 것이거든요. 예컨대, 자연상태에서 빨간 빛깔이 드는 식물을 입에 댔다가 독성으로 괴로와했다던지 또는 친지가 그것을 봤다던지 하면 빨간 빛깔이 도는 '모든' 잎은 피하는 게 자연상태의 인간에게는 효과적인 전략인 것이죠. 그래서 싸잡아서 그루핑하는 게 본능적 면이 있죠. 그런데 과학은 그것을 깨는 거에요. 엄밀하게 증명하기 전까지는 '싸잡아서는 안된다'는 게 과학의 정신인 것이죠.
그래서 그런 과학성은 분야로서의 과학, 직업으로서의 과학을 넘어서서 보편적으로 근대인에게 요구되는 자질인 거에요. 근대정신으로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모두에게 동등한 한 표를 줘야 한다는 것도 사실은 '귀무가설'이거든요. 이런 인간에 대한 귀무가설이 서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투쟁을 했어요. 열등한 그룹이 존재하고
그런 열등한 그룹에게는 투표권을 안 줘야 한다는 것이었쟎아요. 여성참정권이 선진국에서도 2차대전 이후에나 조금씩 허용되기 시작한 게 그런 것이죠(선진국의 이상주의를 수입한 한국은 놀랍게도 서양보다 빨리 보편 투표권이 주어졌죠).
이렇게 어려운 거에요. 그래서 섣불리 과학에 직업을 둔 경우라고 하더라도 '나는 과학을 직업으로 하니 과학적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안되는 거에요.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거에요. 귀무가설이라고 하는 것은 '과학자는 비과학자에 비해 과학적이다'라는 것도 과연 그게 유의한지 어떻게 입증할래하고 따지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귀무가설에 안 익숙한 한국의 과학자들은 과학이라는 것에 자동으로 기대면서 과학성을 스스로 갖고 있다고 착각을 많이 해요. 오히려 비과학자들은 과학을 모르니 스스로 비과학적일 수 있다고 인정할 수 있지만 과학을 직업으로 한 사람은 그런 겸손함이 없을 수 있어요. 이것은 의사도 마찬가지에요. 의사가 서양의학에 기반하니 과학적이다라고 스스로 판단해버리기 쉽상이고 그것을 일종의 '갑의 권위'로 삼는 것이죠. 그런데 의사가 과학자라고 하지 않는 것은 그게 practise이거든요. 사람들은 젊은 천재 과학자에게 열광할 수 있지만 '젊은 (한)의사'를 신뢰하지 않아요. 병걸리면 다들 reputation record가 쌓인 (한)의사를 검색하거든요. 임상경험이 많은 사람을 찾는다는 게 과학과 (한)의학은 이미 상대적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죠. 과학은 과학을 수행하는 사람에 의존하면 안되는 것이거든요.
한국인들이 싸잡아 그루핑 좋아하고 그것을 대놓고 말해버리죠.
서양 사람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근대성이라는 것을 늘 교육받으니 대놓고는 못하고 조심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그런 조심성도 없어요. 한국인들은 그렇게 싸잡아 그루핑하고 또 그것을 갑-을 관계로 전환시켜요. 수도 없이 많은 갑을 관계 설정이 되는 것이죠. 서구에서도 있는 편견 말고도, 출신지역, 학업성적, 부모직업, 아파트 출신, 귀한직업 등 엄청난 수준에서 편견 내지는 갑-을 위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그루핑을 해버리죠. 심지어는 과학도 그루핑해서 '과학성 과학' '비과학성 과학' 이런 식으로 위계화해요. 이게 한국인들의 그 지적 자산이 그만큼 근대에 기반하지 못하고 전근대를 그대로 현대로 가져와서 그런 것이니 만만치 않은 것이죠.
그런데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저는 '을'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서 봐요. 을로 시달리는 사람은 갑으로 군림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겸손하고 훨씬 더 많이 defense하려고 해요. 예컨대 의사가 의학=과학이라면서 그냥 일상을 계속해도 된다면 한의사는 '한의학=비과학'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훨씬 더 많은 defense를 해야 하거든요. 여성이 남성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훨씬 더 겸손하게 변호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요즘은 좀 덜 그러는지 어쩐지 모르겠는데 한참 한국의 정권을 TK가 잡고 있을 때는 서울에 온 전라도 사람들은 혹시라도 티나 보일까봐 교통질서도 어기지 않을려고 했다는 안쓰러운 사연도 본 적 있거든요. 물론 이러한 defense 자체도 지나치게 나타날 수 있지만 저는 그래도 defense도 필요없다고 느끼는 오만한 한국인들 그룹보다는 훨씬 더 근대적이고 저는 거기에서 근대성을 발견해요. 과도한 defense부담을 짊어지기는 한 것이지만 그러한 defense를 하는 것은 한국에 결핍되어 있는 것이고 그래서 그게 진보적인 것이거든요.
공자가 이웃나라의 장례식에 초대되었는데 그 나라 장례주관하는 사람이 '귀하는 어떻게 장례를 해야 예에 맞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그렇게 묻는 것이 예입니다'라고 답했어요. 자기가 맞았다고 단정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묻는 것이 공자의 예이고, 그리고 그게 놀랍게도 근대정신이에요. 고정관념을 배제하고 묻는 사람이 근대의 주역인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