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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20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원
광주제일고등학교 3학년 김태희
숙성
변태같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사람을 핥는 게 좋다. 무슨 페티시가 있는 게 아니라 미식의 영역에서다. 사람마다 피부의 소금기가 다른데, 이 짓을 오래 하다보면 그 맛 차이 만으로 사람들의 감정 같은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내 아내에게선 씁쓸하고 조금 매운 맛소금 같은 맛. 음, 분노와 고통스러움이다.
아내를 처음 만난 곳은 자살 명소, ‘M대교’ 위였다. 아마 그 누가 보더라도 그녀가 죽으려고 한단 걸 눈치 챌 수 있었을 거다. 난간에 팔을 기댄 채 수면만 바라보는 그녀 옆에 멈춰섰다. 걱정과 군친이 동시에 돌았다. 아직, 죽으려하는 사람은 맛본 적이 없었으니까. 천천히 입을 뗐다.
“아가씨, 고민 있어요?”
“꺼져.”
생각보다 차가운 반응이었다. 더 말을 걸었다간 뺨이라도 때릴 기세여서 조용히 그녀를 지켜봤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뺨을 칠 때 혓바닥을 내밀면 맛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대담해졌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기 무섭게 손바닥이 날아왔다. 혀를 낼름 내밀었다.
황홀한 맛이었다. 그 맛과 뺨을 때리는 격통에 쓰러져버렸다. 그녀는 옆에서 손톱을 깨물며 날 바라봤다.
“이제 좀 진정됐어요?”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깽값으로 술이나 사달라며 그녀를 자주 가던 바에 데려갔다. 국내에선 드물게 와인이 훌륭한 집이었다. 난 소믈리에란 이유로 싼 가격에 와인을 대접받았다. 그녀는 바에 들어설 때부터 당황한 눈치였다. 걱정마요, 제가 살게요. 하곤 샤또 브리앙을 주문했다.
다리에 서 있던 이유를 물어도 그녀는 그저 술만 들이킬 뿐이었다. 내려놓은 와인 잔에 그녀의 얼굴일 굴곡져 비쳤다. 목젖부터 관자놀이까지 이어진 큰 흉터와, 팔목에 그어진 수많은 선도 어렴풋이 보였다. 말없이 수십만을 호가하는 술을 먹고, 먹였다. 와인이 돌자 그녀는 말을 쏟아냈다. 외롭고, 힘겨운 삶. 얼굴에 난 큰 흉터의 출처,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땐 나도, 그녀도 울었다. 난 그녀를 안아주었고, 그녀도 내 품에서 펑펑 울었다. 그날 밤, 난 그녀를 맘껏 맛봤다. 역시 황홀한 맛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 난 결혼을 제안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길 이엃게 대한 사람은 없었다며 승낙했다.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반지를 끼우고 손등에 키스할 때. 황홀한 맛은 옅어지고, 행복하다. 그 인위적인 달짝지근한 맛만 남았다는 걸.
와인은 으깨진 포도를 동굴에 보관해둔 것이 발효되어 버린 것에서 시작됐다. 맛이 변한 이후, 난 아내와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집에도 최대한 늦게 들어갔다. 일부러 립스틱을 셔츠에 묻히기도 했다. 아내는 밤마다 흐느끼고 있었다. 흐느낌을 들으면 마음이 아파왔지만, 으깨진 포도를 생각하며 버텼다. 그 포도도 분명히 고통스러웠겠지, 하면서. 흐느낌이 멎고 그녀가 잠들었다 싶을 때, 난 그녀를 핥았다. 여러 맛을 거쳐 천천히 그때의 황홀함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통증이 결실을 맺은 날, 그녀는 ‘M대교’에서 뛰어내렸다.
장례를 마치고, 난 ‘M대교’로 갔다. 가만히 난간에 팔을 걸치곤 수면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내 뺨을 때리며 혀를 내밀었다. 통증이 느껴진 후에, 맛이 내 혀를 감쌌다. 으깨졌구나, 중얼거리며 황홀한 맛을 음미했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20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상
고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배경령
뿔의 통증
1
정수리에서 아릿한 통증과 함께 뿔이 자라기 시작했다. 뿔을 처음 발견한 건 내 옆자리에 앉은 태오였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이차방정식을 풀어내는 중이었다.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태오와 마주보았을 때 태오의 눈에는 당혹감이 서려있었다. 태오는 주위를 둘러보더니(아이들은 모두 이차방정식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 정수리에 뿔이 났어.
농담인가 싶어 별 생각 없이 정수리에 손을 갖다댔을 때, 작고 뭉툭하고 또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소음에 나를 향해 따가운 시선을 보내거나 혹은 노골적으로 비웃었지만 다시 자신들의 문제에 집주앻ㅆ다. 교탁 너머 의자에 앉아 졸던 담임은 멍한 얼굴로 무슨 일이니, 하고 물었지만 나도 아이들도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은 다시 졸기 시작했다. 교실에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태오만이 간간히 내게 괜찮냐는 신호를 보내올 뿐이었다.
2
엄마는 나를 낳았다. 나는 엄마의 자식이다. 그래서 엄마는 나를 기른다. 엄마는 미혼모, 하지만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아빠는 미혼부가 되지 않는다는 것. 나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애써 받아들였다. 엄마는 돈을 벌기 위해 바빴다. 매일 아침마다 식탁 위에 놓여있는 지폐 몇 장이 엄마와 내가 한 지붕 아래에 살고 있다는 걸 증명해주었다. 이따금 얼굴을 맞대는 순간이 오면 엄마는 예의상의 질문을 했다.
밥은 먹었니, 학교는 어떠니.
밥은 못 먹었어. 엄마가 준 돈을 빼앗겼거든. 학교는 지옥 같아. 나는 돈을 빼앗기고, 아무와도 말하지 않아. 그곳에서 나는 없는 사람, 그래서 죽어버린 기분이 들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니 집에서도 나는 이미 죽어버린 게 아닐까 생각해. 그래도 옆자리 태오라는 애는 말을 걸어주는데. 말 그대로야. 거는 게 아니라 걸어준다. 어차피 바라지도 않지만.
엄마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먹었어, 잘 지내 정도의 뻔한 대답을 했다. 엄마는 내 정수리에서 뿔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처음에는 겨우 손톱만 하던 뿔은 어느새 엄지손가락 굵기만큼 커지고 길이만큼 길어졌다. 머리카락 가르마를 잘 타서 가려보는 건 이제 어림도 없었다. 나는 밖에 나갈 때마다 모자를 써야했다. 내 뿔의 존재를 아는 유일한 사람인 태오는 아무도 뿔을 징그러워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자신부터가 그 말을 믿지 않는 듯 했다. 뿔이 자랄수록 주변의 통증이 심해졌다. 머리가 뜨겁고 지끈거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진통제를 몇 알씩 삼켰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건 뿔의 통증이다, 낫게 하는 약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3
뿔은 더 이상 모자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자랄수록 점점 끝이 뾰족해져서, 결국에는 모자를 뚫고야 말았다. 쉬는 시간 도중의 일이었다. 이번에는 내 뿔의 성장을 목격한 사람이 태오가 아니었다.
야, 쟤 머리에서 뿔이 자라고 있어!
이제껏 교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무관심했던 아이들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곳곳에서 나를 둘러싸는 웅성거림, 나만 외딴 곳으로 몰아넣는 비웃음소리, 곁눈질로 내 눈치를 살피는 태오. 나는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 도망쳤다. 모두가 내 뿔을 쳐다보고 비웃을 것만 같아 고개를 최대한 아래로 숙인 채로. 누군가 내 팔을 잡아챘다. 태오였다. 태오는 헐떡거리며 숨을 골랐다. 이번에 그의 눈에 서린 것은 안쓰러움, 혹은 망설임.
뿔이 자라는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나는 태오의 팔을 떨쳐내고 계속 달렸다. 태오는 친절한 사람. 친절한 위선이야말로 나를 정말 아프게 만든다.
나는 모두가 나를 봐주기를 바랬는데, 그들은 내가 아니라 내 정수리에 솟아난 뿔을 보고, 나는 뿔 때문에 아프다. 나는 계속해서 달렸다. 통증이 나를 집어삼키기 전까지, 뿔이 나보다도 훨씬 크게 자라나서 그 무게로 나를 짓눌러버리기 전까지. 정말 혼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누군가 나를 잡아주기를 바랬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20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상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 3학년 권은빈
통증
내 머릿속에는 개미 한 마리가 산다. 개미는 내 두개골 안쪽을 내키는대로 파먹으며 유유자적 거닐다가 이따금씩 통증을 불러일으킨다. 담임선생님과 상담실에 앉아 얘기를 나누는 내내 개미는 가만히 았지 않았다. 선생님은 관자놀이를 꾸꾸 눌러대고 있는 내 오른손 대신 왼손을 꼭 붙잡은 채 말했다. 수민아, 사회에서 나오되면 벌레가 돼. 통념을 벗어나지 말자. 응? 선생님의 눈빛은 마치 다친 개를 보는 것처럼 선했다. 나는 삐걱거리는 근육을 움직여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애들 사이에선 내가 이단아로 간주되고 있다는 걸 선생님은 몰랐다. 통증을 견디고 있는 내 이마 위로 뜨거운 땀 한 줄기가 고름처럼 흘러내렸다.
반지를 들킨 것은 순전히 실수였다. 짝꿍에게서 빌린 책을 찾으려 가방을 뒤지다 반지케이스를 떨어뜨렸다. 너 남친 있어? 어느새 옹기종기 모여든 아이들의 호기심은 먹이를 찾아낸 개미떼의 식욕만큼이나 짙었다.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는 나의 어깨를 누군가 감싸 안았다. 설마 여자는 아니지? 내가 예상하기론 아마 그 순간 개미는 내 머릿속으로 기어들어왔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반지케이스가 교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이들이 더듬이로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얘 그거야.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길이 적의를 상흔마냥 남긴 채 서서히 멀어져갔다.
상담을 마치고 돌아온 교실은 한바탕 파티가 끝난 후처럼 어수선했다. 자리를 찾아 걸어가는 내 뒤로 음식물 찌꺼기 같은 목소리들이 따라붙었다. 벌레를 향한 인간들의 공포어린 시선이었다. 두개골 안쪽이 쑤셔왔다. 다시 개미가 날뛰고 있었다. 제발 얌전히 있어. 나는 개미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꼭 이렇게 날 아프게 만들지 않아도 된다고, 원하는 게 있다면 나에게 말로 해달라고, 우리는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통증은 멈추지 않았다. 이마를 짚고 눈을 감고 있는 내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얘, 너 괜찮니? 이제야 개미가 내 목소리를 들은 걸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부릅떴다. 처음 보는 얼굴엔 웃음기가 잔뜩 어려있었다. 나 삼반 얜데. 노골적이고 은밀한 목소리였다. 네가 걔야? 개미는 끝까지 나와 대화할 용의가 없는 것 같다.
통증이 조금 멎어들고 나니 나는 어느새 학교 옥상으로 향하고 있어싸. 개미가 나와 이야기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곤 처음 보는 아이를 미칠 뒤 마구 뛰었다. 다리가 욱신욱신 떨려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았다. 옥상의 찬 바람이 인정사정 없이 얼굴을 때렸다. 이 공간에 온전히 나 혼자라는 걸 깨닫자 그제야 외롭게 웅크리고 있던 마음이 쏟아져 내렸다.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물병처럼 왈칵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 아팠다. 벌레로 살아가는 인간의 세상이. 그 속의 나의 존재가. 세상은 변하지 않고 흘러가겠지만 그속에서 나는 단지 존재에 대한 확신 하나면 충분했다. 개미가 천천히 귓바퀴를 타고 머릿속에서 빠져나온다. 통증이 점차 멎어가고 개미는 여전히 세찬 바람을 탄 채 어디론가 다른 숙주를 찾아 떠난다. 개미가 다시 내게 침투할 일은 없을 거라 확신할 순 없겠지만 지금 통증이 아물어가고 있다는 건, 내겐 일종의 희망이었다. 떠나가는 개미를 따라 내 눈물도 잦아들어가고 …… 나는 그제야 조금 후련해졌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20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하1
안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장예은
낙타의 지붕
낙타의 눈이 별을 담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낙타의 눈을 덮어주었던 눈썹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한 모래바람과 먼지는 유려한 눈썹 위에서 미끄러져 사라지고 나타는 사막을 거닐며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우리 동네 집들을 붉었다. 촌스럽게도 붉었다.
서울의 최초 개발지역에 인접해있던 우리 동네는 시간이 멈췄다. 붉은 벽들은 부의 상징이었다는 할아버지의 의기양양한 말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가슴을 넓게 펴고 대학교에서 받은 건축훈장을 들이댔다. 낡은 플라스틱에는 ‘우리 학교를 증축한 노고를 치하합니다.’ 라고 적혀 있었다. 할아버지의 팔뚝에는 우리 동네 집들을 지었다는 영광의 상처도 자리 잡고 있었다. 어쨌건, 이 모든 일은 과거의 일이다. 새마을 운동이 적힌 동네 어르신의 모자, 옷장 깊숙이 숨어있는 아빠의 낡은 교련복이 지금 나와 무슨 상관이 있던가? 지금 가장 안타까운 일은 우리 집 지붕 밑에 살고 있는 김 아저씨 집 기와가 깨졌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 집에서 떨어진 낡은 기와에 의해서 말이다. 와장창, 기와가 깨지는 소리가 온 동네에 울렸다. 나는 옥상에서 타고 있던 인라인을 벗어던지고 지붕 밑을 바라보았다. 작은 기와 하나가 아저씨집 기와 네 개를 깨뜨리고 지붕은 형태를 유지하는 목각, 집의 천장까지 드러나 있었다. 노란 장판이 틈 사이로 보였다.
나는 곧장 할아버지에게로 달려가 상황을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리저리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어이, 김사장 아직도 기와를 굽는가? 기왓집 김할아버지였다. 김할아버지는 우리 집에 옥색 기와를 선물한 아저씨였다. 전화기 너머에는 피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에이, 사장님. 요즘 누가 돌기와를 쓴답니까. 고무기와를 쓰죠.
김아저씨는 택시를 운전했다. 평일에는 밤늦게까지 택시를 운전하다가 주말에는 충혈된 눈으로 동네에서 담배를 피웠다. 나는 지붕의 파편이 떨어졌을 김아저씨 댁의 노란 장판을 떠올렸다. 애기가 없음이 천만다행이었다. 김아저씨댁 부인은 김아저씩의 가난하고 불규칙한 생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애를 데리고 떠났다. 그러니 자신의 집 기와가 깨졌다는 사실도 몰랐을 터였다.
나는 무작정 다른 집 문을 두들겼다. 기와를 쓰는 집으로 나는 옥상에 올라가면서 보았던 기와를 쌓아둔 집을 골라갔다. 첫 번째 집은 우리 동네에서 큰 슈퍼를 하는 집이었다. 저기 기와 남는 것이 좀 있나요? 하지만 슈퍼 아줌마는 바쁘니 말 시키지 말라며 자리를 떴다. 두 번째 집은 몇십년 전부터 있던 약국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의심스런 눈초리로 말을 무시했다. 세 번째, 네 번째 집도 모두 같았다. 다들 붉어진 눈을 부릅뜨고 나를 경계했다.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지붕이 무너진 김아저씨의 집으로 돌아왔다.
거, 미안하게 됐습니다. 김아저씨의 집에는 어째서인지 할아버지와 지친 기색을 띄는 김아저씨가 서있었다.
“우리 손녀가 인라인을 좋아해서 타다가 진동 때문에 떨어진 듯 한데 내일이면 기와가 오니 오늘은…”
밤이 되었다. 해는 지고 별이 차오를 시간, 나는 자꾸만 충혈 어있던 아저씨와 동네 사람들이 떠올랐다. ‘기와가 없어’ 다들 고장난 라디오처럼 이 말만 뱉었다. 그럼 귿ㄹ의 지붕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오래전부터 지내왔을 그들의 집은 충혈이라도 된 듯 붉었다. 빛나던 옥색기와가 깨지던 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들려왔다.
쨍그랑, 파편이 흩어졌다. 생각이 길을 잃은 것 같았다. 나는 결국 눈을 감았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20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하2
인천중앙여자상업고등학교 3학년 이림
무관심한 나, 이기적인 너
햇빛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날, 중학교 때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나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때는 친했지만 고등학교에 올라온 뒤로는 연락을 안했다. 뭐, 예상은 했다. 친구는 인문계에 간 뒤 어느 순간부터 잘 노는 애들이랑 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특성화 고등학교에 와서 그냥저냥 지냈다. 소위 말해서 급이 안 맞는 것이다. 연락을 끊을 만도 하게.
근데 자기가 먼저 끊어놓고 연락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이없어서 액정에 쓰여진 ‘소희’라는 이름을 들여다보는데 전화가 끊겼다. 아, 벌써 1분이 지났나. 하지만 내가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필요하면 자기가 먼저 전화를 걸겠지. 안 걸면 안 거는 거고.
나는 심드렁하게 액정을 들여다보다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타인을 신경 쓸만큼 나는 하가하지 않다. 전산세무3급 문제집과 프린트가 들어있는 가방을 고쳐맸다. 빨간불이 초록불로 변했다. 학원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필요하긴 했나보네. 학원이 끝난 뒤 꺼낸 핸드폰에는 부재중이 다섯 통이나 있었다. 귀찮음 이상으로 성가셨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나한테 이러는 거지. 중얼거리고 있는데 또 소희한테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전화를 받았다.
“나, 나 좀 도와줘. 나 임신했어.”
힘없는 목소리 안에 담긴 말은 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이지 않았다. 듣자마자 내 입에서는 미쳤냐. 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소희는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맞아. 나 미쳤나봐. 라고 대꾸했다.
소희는 많은 얘기들을 털어놓았다. 애 아빠는 한 살 연상인데 폭행사건에 연루돼서 교도소에 들어갔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몸이 안 좋고 헛구역질까지 나와서 혹시나 하고 테스트기를 사용했더니 두 줄이 나왔다, 아빠가 알면 때릴 게 뻔해서 말 못하겠다, 등등 텔레비전에 흔히 나오는 얘기들이라 별 감흥이 없었다.
“근데 왜 나한테 전화했는데?”
“말이 통하는 애가 없어. 넌 상담도 잘 해주고 말도 통하잖아.”
“상담해줄 생각 없는데? 나 바빠.”
소희는 내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침묵 속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숨소리가 통증을 참는 소리 같았지만 위로해주지 않았다. 무슨 이익이 있다고 굳이? 먼저 버렸으면서 필요하니까 바로 찾다니, 정말 이기적이다. 이 이상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서 나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는 다시 걸려오지 않았다.
몇 달 뒤, 전산세무3급을 딴 나는 이번에는 학교실습실에서 ER실기를 연습했다. 오래 하다보니 눈이 아팠지만 꿋꿋이 계속했다. 그러던 중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보니 소희였다. 그 일이 있은 뒤로는 전화를 안 하더니 웬일이지. 뭐, 아빠한테 맞고 쫓겨났나보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전화를 받았다.
“너무 힘들어서 술을 마셨더니 애가 유산됐어. 무섭고 아파. 나 때문에, 애가, 아이가…….”
소희는 반쯤 흐느끼며 말했다. 너무 힘들어서 술을 마셨다는 말이 나를 탓하는 걸로 들렸다. 그래서 나는 전화를 끊은 뒤 아예 수신거부를 했다. 자기가 술 마셔놓고 왜 나한테 책임전가를 해. 지가 잘못해서 지가 통증을 느끼는 거면서. 난 잘못한 게 없다. 관심조차 없다. 근데 내 탓이라고 하다니, 뻔뻔할 정도로 이기적이다.
“아, 어이없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소희의 번호를 아예 삭제했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20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하3
전주근영여자고등학교 2학년 배린
통증
진이 짤막한 건배사를 외친 뒤 날개뼈를 매만졌다. 얼굴이 벌겋게 익어갈수록 날개뼈가 콕콕 아파왔다. 옆에 앉은 이대리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진이씨 부끄러운가봐. 얼굴이 빨개졌네. 진이 작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진이 한숨을 쉬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두 볼이 진한 다홍빛이었다. 진이 아직도 아파오는 날개뼈를 매만지며 한 손으로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에 손을 넣고 멍하니 서있던 진이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앞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는 일은 진이 가장 싫어하던 것이었다. 부끄러움을 느낄수록 늘 날개뼈가 아팠다. 엄마는 그런 진을 보며 천사가 깃털을 하나씩 뜯어가는 구나, 했다. 부끄러운 일을 하면, 날개의 깃털을 천사가 뜯어가는 거라고. 진은 아무것도 없는 날개뼈를 매만질 때마다 늘 그 말을 떠올렷다. 날개뼈가 조금씩 욱신거리면, 정말로 무언가가 뜯기는 느낌이 들었다.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진은 오묘한 어수선함을 느꼈다. 김대리가 엉거주춤 일어나서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대여섯명 되는 사람들이 김대리의 눈을 피하며 술잔을 매만지거나, 서로 속닥거렸다. 김대리가 조금 숙였던 고개를 슬쩍 들어올렸다. 순간 김대리의 눈이 진과 마주쳤다. 진은 뜻 모르게 당황스러워 지는 기분에 김대리의 눈을 피했다. 김대리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았다. 조용히 고기가 구워지는 소리만 가득했다. 김대리가 외투를 챙겨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막혔던 소리가 터져 나오듯 모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이대리도 진에게 말을 걸었다. 매일 저래. 꼭 저렇게 분위기를 망친다니까. 진은 늘 굿ㄱ자리에만 앉아 조용히 있는 김대리가 도대체 어떤 식으로 분위기를 망친다는 건지 조금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슬쩍 끄덕이며 네, 했다. 날개뼈가 다시금 아파오는 것 같았다.
진은 다음 날 늦게까지 남아 야근을 했다. 모두가 간 시각, 고요한 사무실은 진과 김대리 뿐이었다. 김대리는 낮 시간에 실수한 서류를 검토하느라 바빠 보였다. 진이 눈을 느릿하게 껌뻑였다. 피로감이 뻑뻑하게 느껴졌다. 짐을 챙기고 의자에서 일어난 순간, 언제 왔는지 모를 김대리가 진의 쪽을 바라보았다. 진은 조금 흠칫한 뒤 평정심을 잃지 않고 물었다. 네 김대리님. 진의 말이 들리자마자 김대리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 굳이 말을 걸려던 건 아니었는데. 김대리가 조금 웃었다. 진이씨, 저기 별 봤어요? 진이 그의 말에 커다란 창문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하늘이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진이 어색하게 말하며 가방을 고쳐 맸다. 평소에 한 마디도 하지 않던 김대리가 갑자기 왜 이런 시각에 말을 거는지 알 수 없었다. 김대리가 진에게 손짓까지 하며 창문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진이 머뭇머뭇 그를 따라갔다. 봐봐요. 저기. 김대리가 손가락을 들어 창문의 오른쪽 끝 부분을 가리켰다. 김대리의 손끝으로 시선을 올리자 정말 무언가가 보였다. 김대리가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천사가 흘린 눈물 같지 않나요? 진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네. 김대리가 하늘만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요즘은 별이 잘 안 보여요. 천사도 이제 안 우나봐요. 진이 손가락으로 날개뼈를 매만졌다. 이상하게 날개뼈가 조금 쓰려왔다.
다음 날 김대리의 자리는 비워져있었다. 진이 김대리의 책상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이 깔끔했다. 그런데 오른쪽 그 끝에, 조그마한 먼지가 있었다. 진이 손가락을 들어 그것을 조심스레 집었다. 깃털이었다. 진이 깃털을 꾸욱 쥐며 반사적으로 어깨 아래를 만졌다. 불룩 튀어나온 날개뼈가 손끝에 걸렸을 뿐, 별다른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진이 얼굴을 붉혔다. 깃털을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20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하4
문정여자고등학교 3학년 전수현
집의 표정
집에도 표정이 있다. 가령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천장 모서리에 생기는 곰팡이 얼룩은 집의 감정이다. 나의 감정이고 나의 표정이다. 물론 그것을 지워내는 일은 나의 몫이었지만. 각각의 감정들을 쉬이 지울 수는 없다. 의자 위에 올라 곰팡이 얼룩을 지우는 날은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간식을 먹을 때다. 아빠가 잔업 수당을 받아 오는 날이면 우리 가족은 다같이 거실에서 통닭을 먹었다. 그럴 때면 닭 튀긴 냄새가 진동하는 방 꽃무늬 벽지 속 꽃이 정말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꽃이 금방이라도 온 집안에 피어오를 것처럼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본 내가 아이, 참 꽃 같네. 하고 혼자 중얼거리면 아빠는 헛기침을 한 뒤 돌아눕곤 했다. 아빠는 기쁨을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우리 집 지붕에서 물이 새기 시작한 것은 마침 우리 동네에서 재개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한 직후였다. 이 소식을 접한 누군가는 돈을 벌게 되었다며 기뻐했고, 누군가는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다며 슬퍼했다. 우리 집은 후자에 속했다. 아빠는 슬픔을 표현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아빠는 잔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뒤 재개발 통지서를 한참 들여ᄃᆞ보며 작은 한숨을 푹 내쉬곤 했다. 그 한숨은 곧 온 집안에 전염되었다.
지붕의 상처는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우리 가족의 시름이 깊어질수록 집도 시름시름 앓아갔다. 치울 수도 없을 정도로 불어난 곰팡이 얼룩, 누렇게 변해버린 꽃무늬 벽지 따위가 그 흔적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매캐한 공장 일을 마친 뒤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를 얻기 위해 발품을 팔았지만 별 소용은 없는 듯 했다.
이삿날이었다. 급한 대로 할머니 댁에서 지내며 거처를 알아보기로 한 뒤였다. 집을 더나기 전 잠깐 집의 외관을 살펴보았다. 누렇게 변해버린 외벽 사이 아픈 사람의 버짐처럼 피어오른 곰팡이 얼룩들이 눈에 띄었다. 구질구질한 우리 집.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나는 벽을 힘껏 걷어찼다. 벽이 슬퍼하는 것 같았다. 집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눈빛을 무시했다.
황급히 집을 떠나려고 하는 순간 집 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지붕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와르르, 지붕이 울고 있었다. 집의 표정은 나의 감정이고 나의 표정이다. 지붕보다 먼저 무너져 내리는 나를 바람이 일으켜 세웠다. 집이 불어오는 입김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숨결이었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20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하5
거제중앙고등학교 3학년 김보민
슈뢰딩거의 고양이
문을 연다. 창고는 참고 있다 터져버린 재채기를 하는 것 마냥 고운 먼지입자들을 뱉어낸다. 햇볕이 쨍쨍한 밖과는 다르게 창고 안은 서늘했다. 나는 가열된 숨을 내쉰다. 현장체험학습의 일환으로 도착한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고 채우는 반복적인 노동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들어간 창고엔 볼품없고 흠집난 사과들이 가득 담긴 상장들이 있었다. 아무리 볼품없는 사과일지라도 달콤한 향기가 진득하게 퍼져나왔다. 침이 고인다. 어떤 것들이라도 부드럽게 섞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진은 구석에 쌓여진 상자들을 톡톡 치며 말했다. 노란테이프로 투박하게 쌓여진 상자들은 비밀스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야, 김현수 요런 촌구석엔 꼭 이런게 하나씩은 있거든.”
왜지. 나의 물음에 대진은 대신 대답했다. 왜냐면 이 속에 어마무시한 돈다발을 숨겨놓은 거지. 나는 코웃음을 친다. 하지만 대진은 말보다 행동이 앞선 사람이었다. 내가 제지하기도 전에 상자를 열었다. 하지만 상자 속엔 새빨갛게 빛나는 홍옥만이 가지런히 놓여있을 뿐이었다.
“어, 이상하네. 어딘가 분명히 있을텐데.”
대진은 창고 안의 상자를 모두 열어볼 기색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쉰다. 사라진 우리를 눈치챌 것이 분명했다. 온전히 대진에게 쏠릴 화살들을 나와 같이 맞고 싶진 않았다.
“너 또 애들이 뭐라 그런다?”
상관없어. 뜯겨진 테이프와 같이 투박하게 내뱉는 대진의 주위로 새빨간 홍옥들이 가득하다. 그 어디에도 대진이 찾는 돈다발은 없었다. 이렇게 나서니까 애들이 싫어하는 거야. 고개 숙인 대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진의 목덜미엔 시퍼런 멍이 가득했다. 또 얻어맞은게 분명했다.
“당하고만 있진 않을 거야. 정강이를 발로 차버릴 거야.”
대진의 말에 여럿 떠오르는 얼굴들을 생각한다. 하지만 대진은 그러지 못할 것이다. 혹여 하더라도 다시 당할거라고. 적어도 내가 바라본 대진은 그랬다. 시퍼렇게 물든 통증의 무게를 말없이 감당하고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럴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마치 통증을 벗겨내는 듯한 대진은 마지막 상자를 연다. 어쩌면 섣불리 판단한 것일지도 몰랐다. 열려진 상자들처럼 대진은 돈다발을 찾지 못할거라고, 계속해서 통증을 안고 갈 것이라고. 어느새 벗겨진 새하얀 목덜미를 일으킨 채 대진은 미소 짓는다. 어쩌면 겉표면에 적힌, 밖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삶은 다를 수 있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20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려1
발곡고등학교 3학년 진수지
할아버지의 지붕
“아버님! 그걸 지금 왜 고쳐요, 진짜!”
눈꺼풀이 무겁다. 나는 떠지지 않는 눈을 뜨려 두 손을 들어 눈 위를 꾹 누른다. 뚝, 뚝. 내 옆에선 어제 밤새 내린 비 때문인지 은색 양동이 위로 물방울들이 떨어져 내렸다. 천장의 나무들이 진한 갈색으로 물들어 눈물 같은 빗물을 떨궈내고 있었다. 나는 창 밖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창문을 열어 고개를 쭉 내민다. 나이를 먹은 집은 창문을 여는 것도 힘겨운지 끼익, 하는 소름끼치는 비명을 내질렀다. 축축한 공기가 뺨에 달라붙고, 연한 물비린내가 났다. 엄마는 아빠가 술에 취해 사온 촌스러운 꽃무늬 앞치마를 입고 고개를 들고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무래도 지붕 위에 올라가 계신 것 같았다.
“하은아, 할아버지 좀 말려봐! 저 비싼 기와를 …”
엄마는 왼쪽 가슴을 퍽퍽 쳤다. 아빠는 그런 엄마 곁에 서 있다가 들어가자며 엄마의 손을 끌었다.
나는 마당으로 나갔다. 할아버지는 백조처럼 흰 와공복을 입고 지붕 위에 앉아 계셨다. 물에 젖어 썩은 나무를 파내고 그 위에 새로운 나무를 덧댄다. 물기가 남은 주변 나무 위에는 마른 수건을 대고 눌려 수분을 빼내다가, 그 위에 암기와와 수키와를 차례대로 정갈하게 올린다. 간단하고 쉬워 보이는 작업이지만 기와를 올리는 방향과 미세하게 각도가 엇갈리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비가 샌다며 할아버지는 몇 번이나 강조를 했었다.
“할아버지 그거 왜 고쳐요. 곧 이사가는데.”
“가긴 어딜 가! 우리집은 여기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할아버지의 눈빛이 굳건했다. 할아버지는 두껍고 거친 손으로 내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돈을 모아 산 집이다. 내가 3살 때 산 이 집을 보고 죽을 때까지 우리 집이라고 말하며 웃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했다. 할아버지의 새까만 눈동자가 지붕 위에 머물렀다.
까만 기와집. 이 말은 우리 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할아버지가 집은 지붕이 튼튼해야한다며 집을 개조해 올린 기와는 고풍스럽고 단아했다. 그런 집을 나도, 엄마도, 아빠도 사랑했다.
“우리 집인데…”
할아버지의 작은 중얼거림이 귓가를 맴돌았다. 하늘은 시리도록 파랬지만 불어오는 바람엔 아직 찬 기운이 듬뿍 묻어있었다. 이제 이 동네에 우리 집 밖에 남지 않아서 더 쓸쓸하게 불어오는 걸지도 몰랐다.
“이번 달 안에 나간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에 아빠가 나왔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 동네에 검은 색 페이트로 담장이나 창문에 엑스자를 그리던 사람들. 이제 옆 집 강씨 아저씨도 집을 팔았고, 우리 집도 그랬다. 재개발을 한며 윽박을 지르는 사람들에 애써 버티던 엄마와 아빠는 너무 지쳐버렸다.
그런 엄마와 아빠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이 일렁거렸다. 할아버지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검은 지붕 위에 앉았다. 손에는 검은 기와가 들려있는 채였다. 할아버지는 깊은 바다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 같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할아버지의 하얀 와공복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20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려2
광양제철고등학교 3학년 구다예
통증
난 빛에 약하게 태어났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때로는 어둡고 누런 빛 아래에서도 현기증을 느꼈다. 빛이라는 존재 하나에도 각막이 다쳐 일주일 넘게 불을 끄고 누워만 있던 적도 있다. 빛을 반사하는 모든 몸들이, 옷들이, 간판이 어지러워도 난 이를 악물고 걸어다녔다. 내 예민함의 근원은 엄마를 닮은 거였다.
열아홉에 오른쪽 난소를 떼어냈다던 엄마는, 날 낳은 후 두 번이나 더 배를 갈랐다. 날 낳다가 병원의 실수로, 남은 외쪽 난자가 자궁벽에 붙어 버렸다고 했다. 난소는 내 주먹보다 큰 혹으로 변해 자궁을 짓눌렀다. 엄마가 내게 핏덩이 같은 혹을 보여줬을 때, 난 그게 혹보단 붉은 돌덩이 같다고 생각했다. 그 돌덩이는 몇 번은 떼어내도, 부숴도 다시 엄마의 뱃속에 자리잡았다. 그녀는 밤마다 고통에 몸을 웅크린 채 흐느꼈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 널 낳은 거라고, 엄마는 입버릇처럼 내게 말했다. 특히나 병원에 다녀오는 날엔 나혼자 눕기에도 좁은 내 침대에 같이 누워, 날 낳아서 행복하다고 속삭였다. 병원에 다녀온 다음날엔 내가 눈에 보이기만 해도 소리를 질렀다. 눈에 안 보이는 곳에 가 있으라 하기도 했고, 다짜고짜 손을 치켜들며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난 그때마다 엄마에게 묻고 싶었다. 내가 미워? 나 때문인 거야?
열흘 전에도 엄마는 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난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병원 갔다 왔어? 엄마는 대답 대신 내게 이리 와보라고 손짓했다. 난 그녀의 장에 붙은 혹처럼, 엄마를 짓누를 정도로 꽉 붙어 누웠다. 널 낳길 잘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입에서 술냄새가 났다. 난 엄마를 등지고 누우려 몸을 돌렸다가, 형광등 빛에 눈을 질끈 감았다. 엄마가 나 또 수술해, 하고 말했다. 자궁을 아예 드러내기로 했다고. 나이 마흔 셋에 폐경 하긴 싫었는데……. 난 눈을 감고 있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현관문을 열자마자 엄마가 던진 양말에 가슴팍을 맞았다. 평소와 같은 시각이었는데도 엄마는 내게 왜 지금 들어오냐고 소리질렀다. 난 엄마가 싸고 있던 짐가방에 그녀가 던졌던 양말을 넣으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뭐가? 그녀가 되물었지만 난 뒤돌아 방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뒤통수로 날아왔다. 미안하다니까! 난 방문을 쾅 닫았다.
엄마의 수술 날, 그녀는 내게 병원에 오지 말라고 했다. 난 수술을 핑계로 학교를 빠지고 나와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정오의 태양은 눈이 시리도록 밝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세며 걷다가 주저앉았다. 실눈을 떠 흐린 시야 사이로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 붉었다. 엄마의 그 혹들 사이에, 자궁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나 때문 아니야, 엄마……. 아니야……. 난 수술이 끝났다는 전화가 오고 나서도 한참을 그곳에 앉아 있었다. 병실에 들어서는 내게 엄마가 말했다. 내 보물 왔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20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려3
인천고잔고등학교 3학년 정서림
어린 매가 통증을 느낄 때
추-추! 나는 말고삐를 한 번 더 감아쥐어 외쳤다. 빨리 달리라는 구령을 하자, 말은 안장이 흔들릴 정도로 빨리 달렸다. 말발굽 소리가 박자를 타며 내 귓전을 맴돌았다. 안장이 흔들리며 온몸으로 아찔한 반동이 전해졌다. 해가 흩뿌리는 오렌지 빛 햇살에 초원이 불그죽죽하게 물들었다. 진홍빛 여명 너머, 유목민들의 무덤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목민들의 비석을 하나씩 꿰차고 있는 까마귀 떼가 보였다. 말이 무덤 앞에 다다르자 놀란 까마귀들이 대열을 맞춰 여명 너머로 날아갔다. 나는 말 위에서 풀쩍 뛰어내려와 할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보았다. 최고의 늑대 사냥꾼 아우츠의 무덤. 이곳은 내가 고민이 있을 때 종종 찾아오는 곳이었다.
비석 위로 사뿐히 햇살이 내려앉았다. [아파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고로, 너는 아름답다.] 할아버지의 묘비명이 보였다, 나는 할아버지의 무덤 앞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말은 어딘가에 고삐를 묶어 놓지 않아도 도망가지 않았다. 말도 할아버지의 흔적 안에 살고 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리용사나, 너도 할아버지를 기억하니?” 말은 코로 곱습곱슬한 이끼만 쿡쿡 거느렸다. 여명이 가신 쪽빛 하늘을 바라보였다. 울컥, 하늘이 일렁였다.
나는 할아버지의 무덤 위에 손을 얹고 말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좋아했던 노래야.” 나는 노래하기 위해 숨을 턱 끝까지 꽉 채웠다. 내 심장은 뭍으로 막 뛰어올라 온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뛰었다. 실개천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가락에 내 목소리를 얹었다. 밤하늘과 닿은 저곳-새벽별이 길을 알려주네-. 노래가 나를 이끄네, 떠나고 싶어. 그곳으로-. “잘했다. 우레흐. 넌 역시 내 손자야.” 할아버지가 생전에 해주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초원을 떠나 노래하고 싶었다. 매일 초원에서 소젖이나 짜던 애가 도시에 가서 뭘 하겠다는 거야. 대학을 나온 사람도 일자리가 없는 곳이 도시란 말이야. 매일 아빠가 하던 말이었다. 아빠는 내가 5살 때 도시로 나가 일자리도 없이 방황하다 빚을 지고 돌아왔다. 아빠는 그걸 걱정하는 거다. 뭣도 모르고 소젖이나 짜던 여자아이가 도시로 갈까봐. 그래서 자기처럼 실패하고 돌아올까봐.
난 가수가 되어 초원의 별똥별처럼 빛나고 싶었다. 밤하늘에 그어지는 은빛 실금. 파랗게 타오르다가 빨갛게 사라지는 빛의 파편. 그 찬란한 빛. 난 그렇게 빛나고 싶었다. 하지만 게르 안에서 내 편은 없었다. 딱 한 명만 빼고. 할아버지, 당신은 내 노래가 아름답다고 했지요. 내가 빛날 수 있다고 했지요.
“우레흐, 인생이란 말이다. 활을 쏘는 것과 마찬가지다. 처음 화살을 당길 때, 그 통증을 이겨내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통증을 이겨내고 손에 굳은살이 박히면 그 어떤 것도 잡을 수 있어. 어떻게 보면 통증은 참 아름다운 거란다. 살아있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나를 조금 더 큰 사람으로 만들어주니까. 그러니 우레흐, 앞으로 어떤 통증이 오더라도 이겨내라. 그리고 빛나라.” 할아버지가 해주셨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껏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듯, 조금씩 더 큰 구멍을 내며 날 갉아먹었던 슬픔도 서서히 사라졌다.
저 멀리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려는 어린 매가 보였다. 매는 어설프게 날개를 푸드덕 거리다가 수도 없이 지면으로 고꾸라졌다. 이런, 아프겠다. 나는 어린 매를 계속 바라보았다. 어린 매의 비행은 너무나 짧았고, 또 너무나 우스꽝스러웠다. 덜 자란 깃털만 폴폴 날렸다. 그러나 그 어린 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는, 그 어린매가 나와 비슷해보였기 때문이다. 어린 매는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힘차게 날아올랐다. 쪽빛 하늘을 부드럽게 유영했다. 성장통을 이기 어린 매의 비상이 시작된 것이다.
쿵쿵! 가승이 뛰기 시작했다. 끼오오옥! 매는 높새바람을 타고 내 머리 위를 날았다. 그 매를 보고 결심했다. 부모님을 설득해 도시로 나가겠다. 그리고 노래하겠다고. 목이 터져라. 나는 다시 한번 숨을 턱 끝까지 채웠다. 3
밤하늘과 닿은 그곳-. 새벽별이 길을 알려주네. 노래가 나를 이끄네. 떠나고 싶어. 그곳으로-!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20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려4
서울창문여자고등학교 3학년 조소연
그 지붕 위에는
빠진 이를 지붕 위에 날리면 밤귀신들이 그걸 가져다가 던진 이의 소원을 들어 주는데 써줄 것이라, 할머니는 이야기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비옥한 땅 위에 틔어 오른 새싹 같은 내 어린 이들을 모조리 뽑아다 파란 슬레이트 지붕 위로 던져버렸다. 슬레이트 지붕은 평상 위에 누워 바라보면 본적없는 저 남쪽의 바다를 닮아 있었다. 그 위에 떨어진 내 작고 누런 이들은 다시 그곳에 싹을 틔울 것 같았지만, 할머니는 그건 밤귀신님들을 욕되게 하는 소리라며 내 허벅지 안쪽을 비틀어 꼬집었다.
“이 할미는 절대루 아프지 않을 것이여. 당연 죽지도 않을 것이고, 그누 누구한티도 미움받지 않을 것이여.”
당찬 할머니의 음성은 내 입안에 어린 욕들이 가득 맺히게 했다. 너덜거리는 잇몸은 갈수록 검붉어지는 것이 꼭 심해어의 지느러미 같았다. 입술과 혀는 벌거벗은 잇몸의 따뜻한 이불이 되어주었다.
5년이 지나도 10년이 지나도 깊게 패인 그 자리에 하얀 싹이 새로이 올라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새롭게 자라나는 것이라곤 슬레이트 지붕의 경계면 위로 조금씩 솟아 오르는 원자력 발전소의 시멘트 굴뚝이 전부였다. 저곳의 지붕은 얼마나 넓으면 저래도 굴뚝이 클까, 하고 나는 자주 생각했다.
“에라이 저 써글 놈들, 저 새끼들은 악마여 악마, 저것들이 우리 밤귀신님들 다 잡아 먹어버린 것이여. 아이고 어쩌나. 아이고 어쩌나.”
몇 해전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 선 이후 할머니는 어딘가 아프기 시작했다. 한 줄기 바람에도 픽픽 쓰러지고, 어쩔 땐 검붉은 피를 토하기도 했다. 병원에 한번 가보라며 할머니를 설득시켜 보았지만 그것조차 밤귀신님들을 욕되게 하는 짓거리라며 오히려 더욱 병원 근처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우편함에 발전소 확장을 위해 이 집을 철거할 것이라는 철고 계고장이 날아들었다. 어느새 얼굴이 반토막이 된 할머니는 그 철고 계고장을 보자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것만 같은 손으로 아무 싹도 자라나지 않는 내 잇몸을 주물럭거렸다. 이미 오래전에 뽑혀버린 싹들은 티끌만한 뿌리조차 남겨주지 않았다. 하다 못한 할머니는 자신의 이를 모조리 뽑아다 지붕 위로 던졌지만, 발전소의 지붕은 나날이 가까워만졌다. 눈을 감고 떴을 땐 이미 집채만한 포크레인이 우리 집 앞 대문을 서성이고 있었다.
“여가 어디라고 찾아든게야 이 악마눔들아!”
할머니는 포크레인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소리쳤다. 하지만 포크레인의 시동은 꺼지지 않았다. 포크레인은 그 커다란 집게 발로 할머니를 집어올려 논두렁에 던져버렸다. 꼬꾸라진 할머니의 허리는 다시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혀 끝에 닿는 잇몸의 촉감에서 비릿한 피맛이 감돌았다.
포크레인은 하늘을 향해 집게 발을 높게 치켜올렸다가 담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이어서 평상이 박살나고 수돗가가 뿌연 먼지바람만을 남기고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집게 발은 더 높게 고개를 뻗어 파란 슬레이트 지붕을 내리쳤다. 파란 지붕의 면과 내 시선이 평행하게 맞닿았다. 여기 퍼져있는 크고 작은 이들이 깊디 깊은 뿌리를 내리고 그 지붕 위에 복잡한 무늬들을 새기고있었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20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려5
덕원여자고등학교 3학년 김지현
시선에도 통증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그림자처럼 A양을 천천히 따라오는 무언가가. A양은 섬칫 소름이 돋았지만 그냥 요새 잠을 못 자 예민해진 탓이라고 단언했다.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오느라 피곤했다. A양은 눈을 감았다. 충혈된 탓인지 눈에 아릿한 통증이 몰려왔다. 사람이 꽉 찬 지하철 안은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그녀는 빨리 내릴 역에 도착하길 빌었다. A양은 역에 내려서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넉넉했다. 그녀는 물을 사러 역 내 편의점을 들어갔다. CCTV는 근엄하게 A양을 바라보았다.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CCTV의 시선은 집요하게 그녀를 담았다. 하지만 그녀가 신경 쓰이는 건 CCTV가 아니었다. 다른 시선. A양의 다리에 따가운 통증이 느껴졌다. A양은 주변을 휙 둘러보았지만 누구와도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A양은 자신이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리에 붙은 통증을 떨어뜨리려는 듯 크게 발을 내딛고,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걸었다.
A양은 회사에 도착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려는데 A양의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팀장님이었다. 팀장은 A양의 어깨를 뭉근히 다독였다. 그 손길을 떨쳐내고 싶었지만 A양의 몸은 돌처럼 굳었다. 팀장의 시선이 A양의 얼굴에서 가슴으로 느릿느릿하게 떨어졌다. 팀장은 오늘도 힘내자며 A양의 팔을 쓰다듬었다. 팀장이 자기 자리로 가고 나서야 A양은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팀장이 남긴 시선의 흔적은 A양의 몸에 낙인처럼 찍혀버렸다. 통증이 점점 더 심해졌다.
밤 9시쯤에야 끝난 업무에 A양은 지쳤다. 터덜터덜 지하철로 내려갔다. 바쁜 업무에 화장실 조차 마음대로 가지 못했던 A양은 이제야 용변이 마려왔다. A양이 용변기에 멍하니 앉아있자니 그녀의 눈과 분명하게 얽히는 시선을 느꼈다. 그녀는 좁디좁은 구멍에서 옅게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황급히 일어나 구멍에 휴지를 끼워 000넣었다. A양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에도 서너 개의 구멍이 오순도순 나있었다. A양은 입을 틀어막고 역무원에게로 달려갔다. 그녀의 말에 역무원은 전혀 몰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화장실은 그런 거 없던데.. 그가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역무원은 A양의 눈치를 보더니 시공사에게 연락을 해보고 조치하겠다고 우물거렸다. A양은 더 따지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지친 까닭에 그쯤하고 돌아섰다. 역무원의 시선이 등에 꽂혔다. 등이 따끔거렸다.
A양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엎어졌다. A양은 끝내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시선의 통증은 이미 몸 안 구석에 자리잡아 조금씩 크기를 키워갔다. 통증은 그녀를 천천히 갉아먹으며 온 몸을 누비고 다녔다. A양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느껴졌던 시선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온 몸에 통증이 찾아왔다. 내일은 달라지기를 자신이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게 되기를 고대하며 A양은 스르륵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