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 無所不在 詩九十篇
此詩이삭왓트引爲讚頌. 且以畵示意 尤覺壯嚴崇高. 如朝日上峯 萬物嬋娟 使人有灵感毘. 虛峯朝日遠照 美貌光景 不可形言. 欲觀此日出 而投㝡峰上 旅級至明晨, 遠東恍惚 空色稀微. 其下大小聲華羅列 如讚頌, 日輪削出芙蓉之色. 海雲与天相接 蕩樣無此. 朝日如新粧之婦 徐徐出帳, 爲自然之物印畵 禮讚, 寂無一聲此時. 욥先知讚美曰 地面變化 萬物如衣新衣云. 此日出之光景 今人起敬 壯嚴崇高 感得超越之神.
詩人欲其存在迎承 迎其崇嚴 不勝感激. 擧兩手禮拜 感得其灵力降. 有一人, 又感無窮 又知我有限 故又無價値. 不放招頊曰, ‘請離我 我罪人也.’ 吾等亦感其無窮 如是禮拜乎? 又有一人 俯伏而進.
森羅萬象之背後 省實在者. 我欲面謁 暗誦題想, 不有我身 其心中 自然湧出者感謝也. 卽吾等之禮拜也. 我進望之時 托此人之感想 而進乎? 曉彼峯上 只日猶爲感激, 況万有實在者乎?
吾等讀此九十詩 而果如이삭와트感激乎? 主我之太陽, 復臨于空中 爲我希望. 吾等欲視 日出上峯 望遠東者乎? 不然深眊瞝瞭 不知朝日之上乎? 彼日光感動世界禮拜者 如電氣拔動乎? 榮精之彩雲 不過如水蒸氣乎? 聲華 不過如地層聲出者乎? 地球上各人種 不過如各動物乎? 然此各種生命 懸在何處乎? 其內有實在者, 如電流之互相感應.
願吾身体興樂妙 覺得象理之服認識何如? 이삭와트氏 以詩欲之示我 以万有之主 實無所不在也. 猶人進至時 欲頌九十詩 而進望禮拜 實合理的禮拜也.
063.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 / 시편 90편
이 시는 아이작 왓츠(Isaac Watts)가 인용하여 찬송가를 지었습니다. 또 의미를 채색해보이니 더욱 장엄하고 숭고함을 깨닫게 합니다. 마치 산꼭대기에 떠오르는 아침 해와 같이 만물이 아름답고 사람에게 영감을 일으키게 합니다. 빈 산봉우리에 아침 해가 멀리서 비춰오면 아름다운 광경은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일출(日出) 보려고 최 상봉에 올라가 밝아오는 새벽에 이르면, 멀리 동쪽은 황홀하고 물체와 비실재의 구별조차 어렴풋합니다. 그 아래에는 온갖 아름다운 광경들이 나열하고서 찬송하는 것 같으니, 태양은 연꽃처럼 아름다운 색깔을 빚어냅니다. 구름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출렁거림이 이 같은 장관이 없습니다. 아침 해는 갓 치장한 새색시처럼 서서히 장막에서 나오는 것 같고, 자연의 만물을 그림으로 찍어내어 예찬하니, 고요하기까지 하여 이때에는 소리 하나 없습니다. 욥 선지자는 찬미하기를, 지면(地面)은 변화하여 만물이 새 옷을 입은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일출의 광경은 지금 사람들에게 경건을 일으켜 장엄하고 숭고한 감격으로 초월의 하나님을 깨닫게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존재를 받들어 모시고 그 숭엄함을 받아들이니 감격을 이기지 못합니다. 두 손을 들고 예를 다해 경배하니 그 영력이 내려옴을 감득합니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또 무궁한 감격을 느끼고 또 자신의 유한함을 알게 되었으므로 또 무가치함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삼가는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청하오니 저를 떠나주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들 역시 그 무궁한 감격을 느끼고 이와 같이 예배합니까? 또 한 사람[나병자]이 있었으니, 엎드려서 나아갔던 사람입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배후에는 보살피는 실재자(實在者)가 있습니다. 그 분을 내가 만나고 싶어서 그런 주제를 생각으로만 암송(暗誦)을 해도, 내 몸은 직접 뵙지 못하지만 마음속에서 자연으로 솟아나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예배입니다. 내가 나아가 삼라만상을 바라볼 때 이러한 인간의 감상으로 나아갑니까? 저 산 위에 돋는 단지 아침의 태양마저도 감격하게 되는데, 하물며 실제로 존재하시는 분이겠습니까?
우리가 이 시편 90편을 읽으면 과연 아이작 왓츠의 감격과 같습니까? 주님이 나의 태양이시고, 공중에 다시 임하실 때 나의 희망이 되십니다. 우리가 산 위에 해 뜨는 광경 보려하면 먼 동쪽을 바라다보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심히 어두워서 아침의 돋는 태양을 알 수가 없습니까? 저 태양의 빛이 온 세계를 감동하여 예배하는 것은 마치 전기가 발동하는 것과 같습니까? 고운 구름의 영화로움이 수증기에 불과할 뿐입니까? 자연에서 들리는 소리들은 지층(地層)에서 나오는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까? 지구상의 각 인종은 불과 각종 동물들과 같을 뿐입니까? 그러나 이들 각종 생명은 어디에 매달려 있습니까? 그 안에는 실재자(實在者)가 있으니, 마치 전류가 서로 감응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신체가 흥겹고 즐거운 묘미를 원할 때 현상의 이치에 대한 인식이 어떠합니까? 아이작 왓츠가 이 시편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은 만유의 주님은 실로 무소부재(無所不在) 하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성소에 나아갈 때 시편 90편을 찬송하면서 예배에 행진하였던 것도 진실로 이치에 맞는 예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