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문의 시간
『삶이란 운명이 아니라 살아서 살아내는 것입니다.』
창세기 38:28-30. 406,405장
28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12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말씀이 정말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야곱의 아들 유다에게는 엘과 오난 그리고 셀라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유다는 엘을 위해 다말이라는 며느리를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7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해 엘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계대결혼 풍습에 의하면 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동생이 형을 위해서 후사를 남기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야 형의 몫으로 유산을 상속받아 남은 가족이 연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동생 오난은 어차피 자신의 씨가 되지 않을 것을 알고 형수에게 들어갔지만, 씨를 주지 않았습니다. 다말 입장에서는 얼마나 모욕이고 치욕입니까? 그런데 오난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행동이라 그도 하나님이 치셨습니다.
엘과 오난을 보고 유다는 남은 아들 셀라마저 혹 잃게 될까 봐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셀라가 장성하였지만, 그 아들에게 계대결혼의 의무를 다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 다말의 남은 인생은 어떻게 될까요?
다말은 어떤 평가를 받으며 살아야 할까요?
다말은 적어도 스스로 주저앉아서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시아버지를 속였지만, 포기하는 인생, 운명에 맡겨 사는 인생은 아니었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를 속이고 씨를 받아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며느리 다말이 임신하게 된 사실을 알고 유다는 셋째 셀라가 형의 후사를 도모하지 않도록 한 자신의 잘못은 모른 척하고 다말을 부정한 여인으로 몰아 화형에 처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유다는 그렇게 부담스러운 존재인 다말과 자신의 잘못을 지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말은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포기를 몰랐고 삶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여인입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준 반지와 지팡이 그리고 끈을 보여주며 자신을 임신시킨 주인공이 유다임을 밝힙니다. 자신의 잘못이 밝혀지자 유다는 다말을 처형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며느리 다말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다말을 통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다말은 비록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지만, 최소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자조하며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흘러 유다와 다말 사이에 쌍둥이가 태어났습니다. 먼저 태어나는 아들이 팔을 내밀자 산모들이 그 아들에게 붉은색 줄을 매었습니다. 장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이 첫째를 밀어내고 자신이 먼저 태를 열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산모들은 “네가 어째서 먼저 나오느냐?”라고 그의 이름을 베레스라고 지었습니다. 이 아들은 어머니인 다말의 삶을 단편적으로 보여주지 않습니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삶을 살아서 살아내려는 모습을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말과 베레스로 이어지는 족보를 통해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 다윗이 나오고 그 뒤를 이어 다윗의 열 번째 아들 솔로몬이 왕위를 이어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지 마십시오. 내게 정해진 숙명이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포기하지 말고 주저앉지 말고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다말과 같이, 베레스와 같이 열어주시고 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삶의 적용 : 나는 살아서 살아내고 있습니까?
마무리기도
운명에 맡게 사는 인생이 아니라 살아서 살아내는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