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겨울은 그 꼬리가 길었습니다.
지난겨울은 일찍 오기도 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심으려고 준비해 두었던 수선화, 크로커스, 원종 튤립 따위의 종구(種球)를 심지 못했습니다. 예상보다 일찍 땅이 어는 바람에 비닐하우스 안에 임시로 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좀 더 일찍 심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 탓이었습니다.
올해는 봄이 1주일쯤은 늦게 오는 듯합니다. 입춘 즈음에는 아침 기온이 영하 15℃, 2월 말에는 영하 10℃가 이어지는 추위가 이어졌습니다. 늦은 눈도 많이 내렸습니다. 그 때문인지 봄 들어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괴불나무와 생강나무 꽃도 1주일쯤 늦게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원 일의 시작도 여느 해보다는 좀 늦게 시작한 듯합니다. 그만큼 요즘의 일손이 더 바빠진 것도 같고요.
올해는 나래실아침농원의 뜨락과 정원을 어찌 가꾸고 돌볼까? 본격적인 일을 시작하며 다시 한번 생각을 간추려봅니다. 가장 으뜸이 되는 생각은 ‘우리의 것들을 정원 안으로’ 들이는 일입니다. 이것은 오래전에 이곳에서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졌던 생각이기도 합니다. 가능하다면 내 주위에 있는 우리의 것들로 나의 정원을 꾸몄으면 했습니다. 화려하고 독특한 것이기보다는 수수하고 평범한 우리의 것이 내게는 더 좋습니다.
지지난해 집수리와 함께 집 주위의 뜨락을 새로 조성한 뒤 시작한 것이 산방(山房) 뒷산에서 자라는 우리의 것들을 정원 안으로 들이는 일이었습니다. 진달래와 철쭉, 올괴불나무와 생강나무, 산목련과 개회나무, 고광나무, 만병초, 찔레, 무궁화, 팥꽃나무, 개복숭아 나무 따위의 우리 나무를 뜨락의 곳곳에 심었습니다. 복자기나무와 주목, 구상나무를 옮겨심기도 했습니다. 하늘나리와 처녀치마, 제비꽃과 민들레, 깽깽이풀과 은방울꽃, 원추리와 범부채, 돌단풍과 산수국, 오이풀, 벌개미취와 개미취, 꿀풀과 무릇, 금낭화와 매발톱꽃, 작약과 목단, 붓꽃과 금붓꽃, 산국, 꽈리 따위의 풀꽃들을 뜨락에 들였습니다.
지난해 심은 것들이 하나둘 솟아오르고 꽃을 피울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해 채우지 못한 공간이 있습니다. 또 새로 심은 것들이 고사한 것도 없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비인 공간에 이미 지나간 이번 주에 제법 많은 나무를 심었습니다. 산림조합 묘목장에서 10여 종의 묘목을 주문해서 배달받았습니다. 제일 먼저 고사한 만병초를 캐내고 5년생의 무궁화를 심었습니다. 은회색 수피(樹皮)를 가졌고 수형이 좋은 것입니다. 그 가격이 5천 원, 믿기지 않는 가격이었습니다. 창가의 뜨락에 반송과 자목련 사이에 확연히 눈에 뜨이는 자리입니다. 그간 무궁화 가꾸기를 거듭 실패했는데, 드디어 제법 큰 우리의 나무 무궁화를 가꾸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씨앗에서 싹을 틔우고 꺾꽂이해서 심은 아주 작은 묘목의 7그루를 포함에서 모두 8그루의 무궁화가 뜨락에서 자라게 됐습니다.
수형이 좋은 역시 5년 생쯤의 라일락 한 그루는 산방(山房) 앞 통나무다리 건너 왼편 도랑둑에 심었습니다. 해마다 달리아를 심었던 자리입니다. 농원 안길의 길섶에도 여러 떨기의 라일락이 있지만, 이 라일락은 우뚝한 소관목(小灌木)의 모습으로 자랄 것입니다. 옥매(玉梅) 한 그루는 왼편의 도랑둑에 심었습니다. 흰 꽃이 피는 것일까? 붉은 꽃 매화일까? 곧 꽃이 필 테지만 그 모습이 궁금하기만 합니다.
지난해와 올해 뜨락을 가꾸는 또 하나의 생각은 이른바 ‘자연주의 정원(Naturalistic Garden)’으로 뜨락과 농원 안길을 가꾸는 것입니다. 자연주의 정원은 자연적인 요소가 우세한 자유로운 모습의 정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태적으로 건강한 환경을 조성하면서 다년초 중심의 식물을 심어 가꾸고 다양한 초본(草本)과 목본(木本) 식물의 조화를 도모하는 혼합적 식재(Mixed planting)의 방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구조화와 획일화를 지양하고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중시합니다.
뜨락은 다년초 중심의 여러 초본 식물이 그 바탕을 형성하고 몇몇 작고 큰 키의 나무들로 식재되어 있습니다. 경사면을 보호하기 위해서 계단식으로 쌓은 바위 틈새와 뜨락에 그들이 각자의 영역을 만들며 공생합니다. 뜨락의 바탕을 이루는 초본 식물은 크로커스, 원종 튤립, 무스카리, 뉴욕 애스터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우리의 토종 식물입니다. 일일이 이름을 말하기 어려울 만큼의 다양한 것들이 있고 올해도 여러 가지가 더 늘어날 겁니다. 대부분이 아주 낮게 자라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큰 키로 자라는 것들도 없지 않습니다. 초본 식물 사이에서 함께 자라는 나무들로서는 목련과 자목련, 반송, 주목, 분꽃나무, 복자기나무 따위의 키 큰 나무도, 키가 작은 떨기나무인 돌장미(Rock Rose), 찔레, 진달래, 철쭉, 산목련, 고광나무, 생강나무, 미스킴라일락, 무궁화 따위의 것들도 있습니다. 5년생쯤의 무궁화 한 그루를 며칠 전에 심기도 했습니다.
그 개념조차 생소한 ‘자연주의 정원’의 방식을 따른 나의 정원은 누군가가 ‘하늘 정원(Sky Garden)’이라고 말하는 정원일지도 모릅니다. 바위가 틈새를 만들어주는 비인 공간에 큰 키의 초본 식물들이 하늘을 찌를 듯 불쑥 솟아서 자라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마타하리, 범부채, 오이풀, 왕고들빼기, 부처꽃, 개미취 따위와 같은 것입니다. 큰 키의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의 정원을 ‘바람의 정원’이라고나 할까요? 누군가가 ‘바람에 불리는(blown in on the wind)’ 정원이라고 명명한 그런 공간으로 가꾸고 있습니다.
산방의 뒤편은 산과 이어지는 경사진 반그늘의 공간입니다. 측백나무가 병풍처럼 둘러 있는 안쪽의 후원이라고 하기에는 경사가 좀 심한 공간이 있습니다. 절반쯤의 면적에 반그늘을 좋아하는 산마늘을 심어보았는데, 잘 자라고 있습니다. 작년 봄에 심은 것들이 싹을 올리고 있습니다. 나머지 공간에도 산마늘을 더 심어야겠습니다. 산방 위쪽의 소나무 동산은 아직 가꾸어지지 않은 공간으로 예닐곱 그루의 소나무와 한 그루씩의 돌배나무, 물박달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이들 나무 아래의 공간에 봉긋한 언덕을 만들려고 합니다. 지난해 흙을 채워서 쌓아놓기는 했지만, 작업을 진행하지 못한 채로 겨울을 났습니다. 그 공간은 진달래, 철쭉, 올괴불나무, 고광나무, 생강나무, 좀작살나무, 조팝나무 따위의 우리 산 나무가 자라는 동산으로 꾸밀까 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떨기나무 아래의 빈자리는 무엇으로 채울지는 생각을 좀 해봐야 하겠습니다.
농원 안길의 가장자리를 따라 형성되는 자투리 공간에는 줄지어 개나리, 산수국, 원추리, 벌개미취, 곂삼잎국화, 개미취. 접시꽃, 부처꽃, 꽃무릇, 플록스, 루드베키아, 에키네시아 따위의 다년생 식물이 심겨 있습니다. 라일락, 매실나무, 자두나무, 체리 따위의 나무들이 심겨 있기도 하고요. 나머지 공간에는 해마다 백일홍, 풍접초, 개미취, 코스모스, 칸나, 글라디올러스 등 1년생 종류의 초화(草花)를 매년 새로이 심어서 가꿉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빈 가장자리에는 어떤 것을 새로이 심을까도 궁리를 해봐야 하겠습니다.
재작년 상반기에 뜨락을 새로 조성한 뒤에 두 해 동안 심었던 것들이 새싹을 올리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뜨인 것은 상사화, 그리고 수선화, 그다음은 원종 튤립, 원추리, 민들레, 무릇과 같은 것들입니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복수초, 노루귀, 깽깽이풀은 눈에 잘 뜨이지도 않더니 어느새 꽃을 피웠네요. 오늘 아침 꽃샘추위가 찾아와 기온이 영하 4℃로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솟아나고 있는 것들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나뭇가지는 벌거벗고 땅 위의 풀대들은 겨우내 모두 사그라져서 모두가 죽은 듯, 아무것도 없는 듯했는데, 새봄의 경이로운 소생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꿈꾸었던 뜨락의 정원이 꿈만은 아닙니다. 그 꿈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환희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2025.3.29.)
첫댓글 나래실 정원이 한알의 밀알씨앗이 되어 나래실 전체가 아름다운 공원이 되길 기도해 봅니다. 자그마한 꿈을 키워나가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 백의 하나라도 그럴리가 없으리라 확신합니다만, 산불을 늘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