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原序
憶戊戌年間寓居鍾岡老屋三楹筆硕与刀尺雑陳以是為苦多坐小圃之旁荳棚箐花蜂蝶悠揚雖饮煙屢絶意気自若時閲東国地誌得一首軌苦吟弥日稚子童婢皆聞而誦之可知其用心不浅也是歲戀官次修入燕手抄一本寄潘香祖庶常及見潘書大加嗟賞以為兼竹枝詠史宮詞諸体之勝必伝之作李墨莊為一題一絶祝編修另求一本異地同殼差可為楽伝不伝不須論也己亥以後供奉内閣被
聖主恩十年七遷官俸祿足以資衣食堂宇足以置讓硯顧
職務控偬不喜作詩有作皆率爾而成非復疇昔之苦险公 退之暇見此卷為兒童輩所読不覚帳然題之如此乙巳仲
秋古芸居士
余此卷庚戌秋携至燕中紀曉嵐尙書寂好故贈之羅両峯云勤寄飽以文続刻不足斎叢最中力求無以応両案頗快快次修再入燕見両峯案頭置一本烏欄書字画精妙知従曉嵐処借鈔也
中国之士嗜書如此余篋中更無副本茫然不知旧註之如何考訂於史再為箋釈亦自笑其癖也
壬子 仲春又題
1875년(무술년) 무렵 종암(鍾岡)의 낡은 집에 몸소 거처하며 붓과 먹물, 칼과 자 등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어 고생이 많았지만, 작은 뜰 곁의 초가집 앞에서 꽃과 벌레, 나비가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보며 의기소침하지 않고 오히려 상쾌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 동국지지(東國地志)를 읽다가 한 수의 시를 짓게 되었는데, 시 구절이 날로 정갈해졌고 어린 아이와 하인들도 다 외웠으니 그 노력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해에 관직에 연연하여 서울로 올라가 직접 한 권을 베껴 판홍조(潘香祖)에게 보냈더니, 그는 자주 제 글을 보며 탄식하고 칭찬하였습니다. 예술적 재능을 두루 겸비한 이들은 반드시 작품을 전해줄 것이라 하며, 이목장(李墨莊)에게 제목과 절구를 하나씩 지어달라고 축수하였습니다. 편수관에게도 다른 본을 구하라고 했지만, 같은 판본인지는 즐겁건 즐겁지 않건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1879년(기해년) 이후로는 내각에서 봉직하며 성주(聖主)의 은혜를 입어 10년 동안 7번이나 관직을 옮겼고, 녹봉으로 의식을 해결할 수 있었으며 관사도 괜찮아서 서재를 차릴 수 있었습니다. 직무 때문에 시 짓기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가끔 있었고 억지로 하지 않았으며 고생 겪던 옛날과는 달랐습니다. 물러나 한가해진 뒤 이 책자를 보니 아이들이 읽고 있어 무심코 다시 제목을 달았습니다.
1905년 가을 고운거사(古芸居士) 낙서.
이 책자는 1898년 가을에 제가 서울로 가지고 갔다가 교란(曉嵐) 상서에게 주었는데, 그는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분이었습니다. 나종봉(羅兩峯)이 말하기를 "부지런히 오랫동안 모아 완성된 문집이니 다시 간행할 만하다"라고 했지만, 저는 부족하여 중력을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나종봉의 안을 보니 대단히 기쁘더군요. 다시 서울에 올라가 나종봉의 책상 위에 있는 한 권의 오란서자화(烏欄書字畫)를 보니 정말 정교하여 교란에게서 빌려 베껴온 것임을 알겠더군요.
중국 선비들은 책을 이렇게 애호하는데 제 책가방 속에는 이제 더는 복본이 없어 옛 주석이 어떠했는지 혼란스럽고, 사료를 다시 상고하여 주석을 단다면 그 버릇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1902년 봄에 다시 제목을 단다.
二十一 都懷古詩
儒 洲 柳得恭 恵風 原著
完 山 李德懲 戀官 訂
愛 山 金鎭浩 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