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민비의 참변
일공사 삼포오루는 조선 정계를 주목하여보고 또 민비를 둘러싸고 있는 민씨들의 행동을 살피였다. 개화당 정권을 궁중으로 거두어 들여 개화당은 차차 물러가게 하고 친로파가 점점 들어서게 되니 이것이 모두 민비가 위패를 연락하여 된 일이다.
삼포오루는 먼저 대원군을 가보고 정권의 요동이 불가함을 말하고 을미(乙未) 8월 20일에 임의 해산을 당하였던 훈련대와 일본 검객(劍客)들을 시켜 먼저 궁중에 들어가게 하고 조선인 우범선(禹範善) 이두황(李斗璜) 등이 앞에 서고 삼포오루는 뒤좇아 권내에 들어가 정계의 환국을 청하니 왕이 이에 친로파인 안경수 이완용 이범진 등을 면직시키고 이재면으로 궁내대신 조희연으로 군부대신 유길준으로 내부대신 서리 어윤중으로 탁지부대신 장박으로 법무대신 서리 서광범으로 학부대신 정병하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으로 경무사 김윤식으로 외부대신 김홍집으로 총리대신 이렇게 내각을 조직하였다.
우범선이 이두황과 검객 1대는 건청군 민비에게 달려들어 검객의 칼에 민비는 최후를 마치었다. 일인들의 흉계는 남의 나라 국모도 생각지 않고 이런 참사를 무단히 행하고 나라의 국민 전체를 무시하였으니 우리 국민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원한이다.
그리하여 민중들의 비분한 마음을 물 끓듯이 누를 수 없이 지방 각처에 의병이 일어나 원수를 갚자는 소리가 들린다. 각국 공사들은 삼포를 보고 일인들이 칼을 차고 남의 나라 왕궁에 들어가 왕비를 살해함이 불가다고 질문하니 일인들도 저희들의 누명을 쓰지 않으려고 이 사건은 광도재판에 붙여 삼포이하 일인 40여명을 광도감옥에 가두고 재판하였는데 결국은 대원군에게 누명을 덮어 씌웠으니 이런 간교한 일이 어디 있는가.
그리고 왕을 위협하여 민비를 폐하여 서인을 삼았다가 황태자의 정리를 생각하고 도로 빈으로 올렸으니 이것이 을미 8월지변이라 한다.
삼포는 가고 대신 소촌수태랑(小村壽太郞)이 공사로 오고 다시 개혁에 착수하여 구력을 폐하고 양력을 쓰게 하고 국력 개국 504년11월 17일이 곧 안력으로 개국 505년 1월 1일로 하고 어린아이의 종두규칙을 발포하고 경성에 소학교를 설립하고 동래에 우편사무를 개시하고 군제는 변경하여 중앙에 친위와 지방엔 진위대를 두기로 하고 양력 11월 30일은 일세일원(一世一元)의 년호를 세우되 명년부터는 년호를 건양(建陽)이라 할 것을 반포하다. 또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다.
남의 나라군대가 칼을 차고 그 나라 왕궁에 들어가 그 나라 황후를 죽인 것이 잘못이라고 각국 공사가 일본공사 삼포를 보고 질문하였는데 소위 조선대신이라는 자는 한사람도 일본공사에 항의한 자가 없으니 실상은 황후를 일인들이 죽인 것 아니오 실상은 조선 역신들이 죽이었다. 이런 역신들을 앞에 두고 나라를 맡긴 황후는 죽음을 자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