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평한옥마을에 들어섰다
남계서원 탐방 때는 다시 해가 나와 그늘 밖으로 나가는게 지옥이더니 다시 뜨거운 햇빛을 구름이 막아준다
구름은 보통 안 좋은 이미지로 사용하는데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세상사 이치가 그렇다 존경하다가도 경멸하게 되고 지탄하다가도 장점을 발견하게 되어 다시 평가하게 된다
요즘 문재인 민정수석 조국을 사법개혁의 수장 법무부장관으로 임명하려 하는데 잡음이 많다
그렇게 청렴해보이던 조국이 온갖 적폐를 감추고 선한 얼굴만 드러낸 격이다
일두고택을 찾으려 개평마을에 들어설 때에는 바람도 제법 불고 해가 가리워져 산책하기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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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는 정여창이 스스로 지은 호다. ‘한 마리 좀벌레’란 소리,세상을 꿰뚫어 본 이 스스로 자신을 한없이 낮춘 옛선비의 품성이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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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고택 소슬대문에는 정려각으로 있어야할 효자, 충신 정려문 5개가 대문 위에 문패처럼 떡 버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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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이 집안이 어떠한 집안인지 들어가지 않아도 그 위세를 알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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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고택은 조선시대 5현 가운데 한 사람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으로 1570년 후손에 의해 사대부가로서의 면모를 고루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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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민속문화재 제186호로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중건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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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는 현 소유자 정병호의 고조부가 중건하였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서산군수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안채는 사랑채보다 건축연대가 올라가서 청하(淸河)현감을 지낸 선조가 300년 전에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충효절의'는 흥선대원군이 썼고 '백세청풍'은 김정희의 글씨라고 하나 고증은 안 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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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그런지 집 안 정원도 일품으로 가꾸어져 있다 석가산(石假山)의 원치(園治)이다 보통은 후원에 주력하여서 앞마당에는 취평(取平)한 채로 반듯하게 두는 일이 고작이나 이 집에서는 사랑채의 내루에서 내려다보며 즐길 수 있게 조산(造山: 인공산)을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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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집의 터에 있어서 500여 년을 연기(延基)하여오는 명기(名基)의 터전으로 풍수지리설을 운위하는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이 터를 열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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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랑채, 며느리에게 안채의 안방마님을 물려주고 뒤로 들어앉은 노마님이 주로 거주하던 곳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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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을 들어서면 一자형의 큼직한 안채가 있다. 왼쪽에 아랫방채가 있고 안채의 뒤편으로 별당과 안사랑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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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뒤로는 일곽을 이룬 가묘(家廟)가 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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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의 잔디는 일반 잔디가 아닌 세세한 잔디로 꾸며져 더욱 단정했고 단아하고 소박한 난간과 추녀를 받치는 활주(活柱 : 굽은 기둥)를 세우되 세간(細竿)한 석주(石柱)로 초석을 삼은 특색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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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주변에는 산석(山石)을 떠다 삼봉형(三峰形)으로 주산(主山)을 높게, 좌우를 그보다 낮게 하고 그 아래에 심곡(深谷)을 의태(擬態)하는 석곡(石谷)의 형성과 알맞은 배열로 나무를 심어 아름답게 꾸몄는데, 엄격한 법도에 따르고 있고 고형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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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고택 주변 솔송주문화관이나 눌재고택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한옥의 고품격이 느껴진다
솔송주는 정여창 집안의 가양주로 성종에게 진상한 전통 명주라 전해진다. 집안에서 전해오는 이름은 송순주(松荀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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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담고택인가 하동정씨 고가인지를 보고 나오는 길에 본 스레트지붕 사이 와송들이 번식해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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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 선생 12대손인 오담 정환필이 노사 기정진과 동문수학하며 남계서원 풍영루에서 글을 찬술하는 인연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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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영루 누각에 아직도 노사 기정진이 쓴 글이 남아있다
물론 오담 선생의 누각 중건기 등도 당연히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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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과 장독대를 두른 기와담장이 앙증맞다 그만큼 소중한 곳이었다는 뜻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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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평마을은 좌 안동 우 함양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유학자를 배출한 선비마을이다 돌담길을 따라 마을 골목골목을 둘러보며 냇가를 따라 걷다보면 옛 선조들의 생활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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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평마을은 도숭산과 산에서 흘러내리는 두 개울이 만나는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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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숭산 뒤쪽 천황봉에서 뻗어 내려오는 주맥이 셋 있는데 하나는 남쪽으로 향해 함양읍의 토대를 마련하고, 하나는 북으로 향해 안음현의 토대를 마련하며, 마지막 하나는 두 줄기의 가운데로 향해 도숭산을 거쳐 개평마을의 기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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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형이 '介(개)'자 모양이라 개화대 또는 개우대 마을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개평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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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평마을의 역사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원래는 경주 김씨 등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는데 14세기에 정여창의 증조부인 정지의가 처갓집인 이곳으로 들어와 근거지를 잡기 시작했고, 곧바로 풍천 노씨도 입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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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 노씨 입향조인 노숙동이 함양에 입향한 내력은 전설적이다. 노숙동이 과거에 급제하고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앞 종바위 근처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때 마을에 입거한 김점이 집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에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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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길조가 있다고 느낀 그는 하인을 시켜 주변을 살피게 했고, 종바위 위에서 자고 있는 노숙동을 발견했다. 김점은 그를 불러오게 해 융숭하게 대접했고 추후에 사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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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은 정복주의 사위이고 정복주는 정여창의 할아버지다. 즉, 하동 정씨가 먼저 개평에 입향하고 사위인 김점의 사위로 풍천 노씨가 들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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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평마을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양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인 일두 정여창과 문효공 옥계 노진이 배출된 이후부터다. 두 사람 모두 남명 조식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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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는 조선 시대 대표적인 도학자인 동시에 성리학자로 이기론, 심성론, 선악천리론 등의 사상을 기초로 소학과 가례의 실천적 효행에 모범을 보였으며, 특히 부모에 대한 효행을 삶의 근본으로 삼았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고 1504년 갑자사화 때는 부관참시당하는 고난을 받았지만 성리학사에서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5현으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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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명종 1년(1546)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박사, 전적, 예조낭관을 거쳐 지례 현감으로 있었으며 청백리로 뽑힐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선조 8년(1575)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퇴했고 그 후에도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 때문에 취임하지 못했다. 저서로 『옥계문집』이 있으며 남원의 창주서원, 함양의 당주서원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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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평마을에는 또 노씨의 전설이 담긴 종암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옥계천 좌우에 있던 다섯 개의 샘물 중 하나였다고 한다. 풍수지리로 볼 때 개평마을은 행주형 입지로 배에 구멍을 내면 배가 가라앉는다고 해 우물을 파지 못하고 자연 암반에서 솟아나오는 다섯 개의 우물만 사용했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마을에 우물이 파여 버렸다. 청하현감을 지낸 정덕재가 이를 알고 바위에 종암이란 글자를 새겨 누구도 소나무나 우물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한다 그 외 이 우물은 또 늦게 본 아들이 죽어 시름시름 앓는 어머니를 다시 소생시킨다는 효자 전설도 있어 먼 곳에서도 와 아들을 보기 위해 이 우물을 활용했다는 전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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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개평마을을 뒤로 하고 농월정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