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겨울산행기 2009.12.6 올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6일 아침의 기온은 영하6도였다. 경목산악회 송년 산행은 아차산으로 정했다. 280m의 낮은 산이라 누구나 부담없이 갈 수 있는 산이다. 아차산은 여러차례 가본 경험이 있지만 늘 동네 뒷산 가는 기분이다. 그러나 오늘 모이는 장소가 아차산역이 아니라 광나루역이라 코스가 다른게 틀림없 다. 추운 날씨에도 21명의 회원가족이 모였다. 처음 가보는 코스이고 몇년만에 가는 아차산이라 기대가 컸 다. 과연 그동안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차산은 이곳을 경계로 고구려와 백제간의 전쟁이 치열했던 곳이라 많은 유적지가 있고 아직 발굴작업이 한창 진행중인 곳이다. 그리고 아차산은 시내 한복판 주거지와 연결되어 있어서 이곳 주민들이 아침마다 산보하는 그야말로 사랑받는 산이다. 그래서 자치단체에서 많은 예산을 퍼부은 느낌이 들었다. 광나루역 1번출구로 나와 광장중학교와 초등학교 담벼락을 끼고 조금 가니 아차산 생태관찰로가 나오고 이를 통과하면서 오늘산행코스로 진입하였다. 광나루역에서 아차산 정상까지의 산행코스를 살펴본다. 광나루역 1번출구에서 아차산 입구까지(0.9㎞/15분)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1번 출구에서 나와 직진하면 오른쪽으로 빠지는 길이 나온다. 아차산 생태공원’ ‘광장동사무소’ 등 안내판이 있다. 광장중학교를 왼쪽에 두고 학교 담장을 따라간다. 이어 광장초등학교도 역시 왼쪽에 두고 가다 보면 생태관찰로다. 생태공원을 통과해 올라가면 아차산 입구. 아차산 입구 ~ 해맞이 광장(1.2㎞/30분) 아차산 표석 앞으로 난 길을 따라 관리사무소·약수터·화장실·휴게소를 차례로 지난다. 중간에 바윗길로 향 하는 자그마한 다리가 있으나 무시하고 직진한다. 30분 정도 걸으면 낙타고개 사거리. 왼쪽 길로 200m 정 도 걸으면 대성암 입구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간다. 계단에 이어 바위를 타고 조금만 오르면 곧 시야가 거 칠 것 없이 탁 트인곳, 바로 해맞이 광장이다. 해맞이 광장 ~ 아차산 4보루(1.2㎞/25분) 해맞이 광장에 서면 일망무제로 들어오는 광경에 눈맛이 시원하다. ‘서울의 우수경관 조망 명소’라는 안내 판이 있다. 올림픽 대교, 잠실대교, 강동대교…. 한강일대가 훤히 들어온다. 오르던 길로 계속 오른다. ‘아차산 1보루’를 지나면 평탄한 소나무 숲길이다. 평탄한 능선길을 걸으며 왼쪽을 보면, 멀리 북한산 인수 봉과 백운대가 우뚝 서 있고 오른쪽은 푸른 한강이다. 아차산 1보루→ 5보루→ 대성암 입구 표지판→ 3보 루를 차례로 지나 아차산 4보루 표지판까지 걷는다. 보통의 경우 아차산 4보루를 지나 용마산까지 가는 것이 일반적인 산행코스이나 오늘은 하산후 송년중식 이 예약되어 있어 아차산 4보루에서 회귀하기로 하였다. 하산하면서 대성암을 들르고 삼각점에서 영화사 방향으로 하산하였다. 1시가 넘어서 아차산역 부근에 있는 오리훈제고기집에서 송년중식을 하였다. 3층건물에 손님이 가득하다. 과연 손님이 많은 이유가 있다. 맛도 좋고 서비스도 좋다. 추운 날씨를 걱정했 는데 다행히 바람이 없어 도리어 산행하기 좋은 날이었다. 산행중 찍은 사진을 중심으로 아차산 산행을 되 돌아본다.
<후기 1> 아차산의 한자표기 평소 아차산 한자표기에 의문이 많았다. 지하철의 표기는 峨嵯山이다. 봉우리아, 우뚝솟을차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문화재 안내문에는 阿且山城으로 표기한다. 물론 백과사전에서도 阿且山城으로 되어 있 다.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광개토왕비"(414년)에 阿旦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旦과 且의 차이-- 旦과 且는 금석문이나 판각인쇄시 흔히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旦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나중 이름(중국황제가 작명하사)과 같아서 피휘하여 且로 썼다는 주장도 있으나 피휘의 경우 다른 글자를 택하 면 되지 하필 헷갈리는 且로 썼겠느냐는 반론도 있다. 고려시대 후기부터 본래의 아차에 훈을 붙여 峨嵯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1973년 국가사적 제234호로 지정고시때 삼국사기를 근거로 阿且山城으로 표기,공식 문화재 안내 문 등에는 이를 따르고 있다. <후기 2>아차산에서 전사한 백제 개로왕과 고구려 온달장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475년 백제의 개로왕(재위 455∼475)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한 3만여 명의 고구려군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아들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이 산성 밑에서 고 구려군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한성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또 고구려 평원왕 (平原王:재위 559∼590)의 사위 온달(溫達) 장군이 죽령(竹嶺)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려고 신라군과 싸우다가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백제 초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산성은 고구려가 잠시 차지했다가 신라 수중에 들어가 신라와 고구려의 한강유역 쟁탈전 때 싸움터가 된 삼국시대의 중요한 요새였다. 또다른 설에 의하면 온달은 온달산성이 있는 단양군 영춘면에서 역시 신라 선덕여왕의 군사와 싸우다 전사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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