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바람따라 걸어그리고 백범 김구가는 길 - 경교장
세계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해, 임시정부로 한명의 호기로운 사내가 들어선다. "이곳이 임시정부입니까?" 그리고 그 사내의 말, "저를 임시정부 문지기로 써주십시요" 이 사내의 이름은 백범 김구 선생, 훗날 임시정부 주석에 오르며, 대한독립을 위해 한 평생 바친 위대한 인물이다. 임시정부는 백범 김구를 빼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일본의 탄압으로 임시정부가 와해를 위기에서도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넘기고, 당시 중국까지 뻗었던 일본에게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도시락 폭탄을 던지게 함으로써, 일본의 시라카와 대장이 즉사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 사건은 당시 상해 임시정부를 바라보던 장제스(장개석)의 시선을 완전히 변하게 만들고, 이후부터 상해 임시정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장제스의 행동은 훗날 얄타회담에서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게 함으로써, 식민지 생활을 청산하는 요소로 자리잡게 된다. 조선이 합병될 당시와 비슷한 시기에 류쿠(오키나와) 역시 일본에 합병을 당했지만, 누구도 류큐에 대해 독립을 주장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 날의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길이 길이 역사에 남을 큰 사건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결의를 행하러 가기 전, 윤봉길 의사와 백범 김구는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는데, 백범 김구의 시계가 낡은 것을 본 윤봉길 의사가, 백범 김구에게, 저는 이제 두어시간 밖에 쓸 수 없다며 시계를 교환할 것을 제안, 윤봉길 의사와 백범 김구의 시계가 바뀌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경교장의 전경>

<경교장의 안내문>
이러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본에게 쫓기다시피 상해에서, 항정우로, 다시 충칭으로 이동하면서 일본에 끊임없이 항전을 하였다. 일본군을 도망쳐서, 파촉령 산맥을 지나 충칭으로 왔던 김준엽, 장준하 선생이 남긴 기록을 보면 충칭에서의 임시정부의 삶은 매우 고단했다고 한다. 심지어 먹을 것도 풍족하지 않아, 김준엽, 장준하 선생의 환영 만찬은 싸구려 술에, 간단한 요깃거리가 전부였다고 하니, 이러한 임시정부의 활동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김준엽, 장준하 등 일단의 탈출병사들이 충칭으로 온다는 소식에 백범 김구는 나라를 빠앗기고, 그 이후의 세대들이 온전히 일본인이 되었는 줄 알았는데, 그대들을 보니, 내 생각이 기우였다는 사실을 전하며, 감격에 겨워했다. 이 사건 이후 임시정부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늘어나는 가 하면, 일본의 패망 직전인 1945년 8월 미국과의 연합작전을 수행, 계획하던 중에 일본의 패망소식을 전해듣는데, 이 날에 분위기를 "무거운 적막감만 돌았다"고 전한다. 이후 많은 이들이 일본의 패망이 조그만 늦어졌더라도 우리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며 애통했다.
<백범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

<환국 전 임시정부 청사에서 찍은 사진>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 이후 1945년 11월 환국을 했던 백범 김구 선생은 미군정의 차가운 냉대와 한때의 동지였던 이승만과의 갈등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신탁통치와 관련하여, 반대입장을 나타내는가 하면,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은 분단으로 이어진다며, 결사반대하며 북으로가 김일성을 만나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김일성 역시 백범 김구 선생을 이용한 대외적인 선전) 이러한 이승만과 미군정의 갈등은 이내 불신으로 씨앗으로 커가게 되고, 이후 1946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당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 당하며 서거하게 되고, 이후 국민장으로 치뤄진 장례식 이후 현재의 효창공원에 안장이 되었다.
<암살당했던 당시 입고있었던 옷, 선혈 자국이 아직도 그래도 있다>
<경교장 내 집무실, 이곳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의해 서거하게 된다>
<유리창에 선명한 총탄 자국, 한국 현대사의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다>
<경교장 위치>
경교장은 최초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건물의 형태였는데, 환국을 했던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생활하면서, 축첨대신 경구교의 다리를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했다고 전한다. 이곳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의해 서거할 때까지 생활하면서, 건국활동 및 신탁통치 및 남한만의 선거를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는 측면에서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한 많은 흔적을 가지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선생에게 소원이 뭐냐고 물었을 때, 내 소원은 통일, 완전한 통일이라고 이야기 했던 선생의 말은 아직도 현실이 되지 못한 한국 현대사의 아픈 상처이지만,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뒷날 대한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애쓰신 선생의 공적은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차후 효창공원과 경교장,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의 흔적을 담은 곳들로 이야기가 있는 여행을 구성해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잉태했던 1945~53년의 역사적 현장, 사실 등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이 곳 경교장, 현재는 서대문역 쪽에 위치한 강북삼성병원 내에 있고, 완전히 개방되어 잘 조성되어 있다. 다만 이러한 사적이 이제까지 병원 내 부속건물로 씌여졌다는 사실은 뒷맛을 씁쓸하게 하는 아쉬움으로 남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지금이라도 이렇게 돌아온 경교장이, 그래서 더 반가운지도 모르겠다.(2013.10.25 by 김희태)
첫댓글 백범김구선생님이 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과 우리가 있습니다.
경교장 사실상의 한국의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