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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유토피아, 쌍문동, 지금상황>의 줄거리:
도대체 유토피아와 도봉구 쌍문동 그리고 나의 지금의 상황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걸까요? 이 셋을 연관짓게 하는 공통 고리는 바로 '행복'입니다. 쌍문동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이 된 동네이지요. 한 평론가는 이 드라마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판타지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행복감을 위해 미래의 유토피아를 상상해 내고, 과거의 쌍문동을 판타스틱하게 그려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지금 행복할 수 없어서 나타난 결과라는 점이 아플 따름입니다.
유토피아, 쌍문동, 지금상황
(욥기 36:1~33)
5.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6.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7.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시며
8. 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9.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10.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11.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12.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유토피아, 쌍문동, 지금 상황>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유토피아, 쌍문동, 지금 상황’
“응답하라”라는 제목의 드라마 시리즈를 많은 분들이 시청하셨을 것입니다. 저도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를 보았는데, 이 드라마가 왜 그렇게 유명해졌는가에 대해서 평론가들이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나리오인데 제가 본 응답하라 1988은 스토리 전개가 굉장히 엉성했습니다. 그런데 제작진이 작품을 소개한 내용을 보았더니 제작의도가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언제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평론가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이 한 문장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거리가 생깁니다. 흔히 할 수 있는 질문일 수 있지만 제작의도 측면에 의미를 두어 생각해 보자면 “당신은 언제쯤이면 진정으로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겠습니까?”라는 질문과도 상통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은 행복한 시절을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사람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도봉구 쌍문동의 한 골목을 배경으로 해서 몇 가정이 함께 살아갑니다. 쉽게 말하면 쌍문동을 에덴으로 만들었습니다. 영웅적 요소를 넣는다든지 개연성 부족한 설정을 출발점으로 삼는 대신 1988년을 회상하면 떠올릴 수 있는 광경을 사실적으로 연출하였습니다.
문제는 드라마 속에서 나쁜 사람과 그들에 의해 벌어지는 악한 현실이 나오지 않고 착하고 아름다운 순간들만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때가 참 행복했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대부분의 과거는 힘들었고 어려웠던 시절조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름답고 흐뭇한 추억으로 변합니다. 응답하라 1988은 이러한 과거에 대한 속성을 완벽하게 긍정적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한 평론가는 이 작품에 대해서 “사실적으로 그려낸 판타지”라고 평가했습니다. 1988년 도봉구 쌍문동에는 실제로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 착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대 배경을 사실적으로 연출을 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를 했지만, 실제 상황과는 다르게 그려냈기에 판타지입니다. 그러나 이 판타지가 요즘 미국에서 유행하는 영웅들이 나오는 영화처럼 허무맹랑하고 과장되게 그려진 것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더 많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토피아가 미래의 에덴을 그리는 것이라면,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인 쌍문동은 과거를 에덴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보통 미래적인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발상의 전환을 통해 과거의 1988년 쌍문동의 한 골목을 유토피아로 만들어냄으로서 인기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작의도를 알고 보면 한 가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행복감을 느끼는 반응의 이면에 지금 행복한 것은 영영 불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절망적 질문이 떠오릅니다. 행복은 왜 미래적 유토피아를 통해서만 얻어진다고 생각하고, 또한 과거를 사실적 판타지로 만들어서야 느낄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행복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응답하라’라는 말은 지금 나의 행복은 어디에 있는지 응답하라는 요구일 수 있습니다. 제작진의 첫 번째 질문도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언제입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언제일지를 생각해보았더니 1988년의 이상적인 가족공동체의 모습을 판타스틱하게 그려냄으로서 응답하게 했습니다. 또한 미래지향적인 사람에게는 유토피아가 그 응답이 될 것입니다. 즉 나의 행복에 대해 과거와 미래가 응답하는데 왜 지금은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느냐는 것인데 오늘 본문이 이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제 엘리후의 네 번째 변론이자 마지막 변론이 시작됩니다.
5절에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도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일까요? 앞장에서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듯이 말하는 것을 보면서 착각 속에 빠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하나님께 적중하지 못하여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상황으로 보았습니다. 엘리후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착각하는 이유는 주관적 필요성에 의해 하나님을 찾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돈이 없다면 재정적 결핍이 안 좋다고 판단합니다. 즉 선악과를 따먹은 자가 주관적인 필요성에 의해 하나님과 관계하려는 것은 완전히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적중하는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 전체의 의미를 제로로 만들 정도의 통찰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지금 주어진 상황에 대해 주관적이고 주도적으로 반응하는 과정 중에 만들어졌습니다. 재정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그 상황에 반응합니다. 즉 그 문제를 주도적으로 취급하게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 내가 느끼는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만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주관적이고 주도적으로 판단해서 헛다리짚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시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계획하시고 뜻하시고 행동하시는 일에 실수나 착각이 있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라고 한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보잘 것 없어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악인이든 의인이든 빠짐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섭리하시며 주도적으로 계획을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엘리후의 독특한 통찰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입니다.
내가 주도적으로 반응하는 과정 속에서는 하나님은 절대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 상황에 대해 반응하는 것은 판단하고 계획하며 추진해 나간다는 뜻입니다. 반응해서는 안 되고 응답해야 합니다. 응답하는 것은 주도적이지 못하고 피동적이고 수동적 입장을 취하는 것입니다.
재정적 문제가 생겼을 때에 응답하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이 재정문제를 허락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은 문제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주신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재정 문제는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어떤 문제든 마찬가지입니다. 건강 문제에 대해서도 내가 반응하는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악화됨을 걱정하고 약과 의사를 찾으며 금식기도하며 하나님을 찾습니다. 이런 것은 비록 하나님께 금식기도를 하고 있을지라도 내가 주도권을 쥔 상태일 뿐입니다.
그러나 응답하는 자는 건강이 안 좋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면서 허락하신 일로 여깁니다. 그럴 때에 병을 고치기 전에 병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응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병의 상황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기를 원하실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문제에 대해 주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주신 하나님께 지금 응답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후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관심 바깥에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0장 29절에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십니다. 미물조차도 하나님의 관심 속에 있다는 것이고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관심 바깥에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착각이 아닌 실질적인 관계가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시고 모든 인간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믿고 지금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응답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집에 돌아온 남편이 화가 나서 가방을 아내에게 던졌다면, 그 가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가방에는 상관없이 남편이 왜 그러는지를 물을 것입니다. 이것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던진 가방에 신경을 쓰며 그것을 어디에 놓아야 될지를 생각한다면 남편은 무시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돈 문제를 던지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던지신 돈 문제에 대해서 주도적으로 관여하면서 하나님을 찾으면 착각 속의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어떠한 상황이 주어졌든지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던지신 이유가 무엇일지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여쭈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바로 지금이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골목이나 미래의 유토피아와 같이 에덴이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응답하기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 일을 마음에 끌어들여서 고민하고 생각합니다. 자동적으로 판단하고 분석해서 그 결과를 따라 계획하고 추진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어떤 문제가 주어졌든지 지금을 행복한 순간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 응답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아닌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문제에 대해 죽었다고 여김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서 지금 주어진 재정문제보다도 하나님이 더 우선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화가 나서 가방을 던졌는데, 아내는 가방을 뒤적이며 월급봉투를 꺼내 물건 살 궁리만 한다면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돈 문제를 던지셨다면 돈을 더 사랑하는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건강 문제를 던지셨다면 건강 문제보다 하나님을 더 우선시하는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자녀 문제를 던지셨다면 내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녀보다 하나님을 더 우선시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있으면 아무리해도 자녀보다 하나님을 더 우선시할 수가 없습니다. 자녀나 돈이나 건강에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태복음 10장 37절에서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라고 말씀하셨고, 39절에서는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목숨이나 건강이 아닌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내 마음은 세상의 가치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곧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함으로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많은 문제가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라 이끌림을 받아서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내 앞에 놓인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뜻을 발사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로 행복하지 못한 채 십자가를 붙잡는 척하면서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돈 문제든 자녀 문제든 어떻게 끌고 가시든지 하나님의 뜻대로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결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전에는 세상 것들이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는데, 하늘로 만족한 자는 그러한 바람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평생 몸에 가시를 두셨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늘로 만족했기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미래에 에덴을 바란다면 유토피아에 대해 응답하는 것입니다. 응답하라 1988은 도봉구 쌍문동에서 과거의 에덴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미래도 과거도 복음 속에서 약속된 에덴은 아닙니다. 복음은 지금 응답하고 지금을 에덴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밝히 바라보는 것이 기도이며 말씀을 듣고 전하는 목적입니다. 내 마음이 지금 밝히 보고 있는 것이 십자가가 아니라면 우리는 지금에 대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서 주체적으로 보고 계획하고 판단하는 것이 곧 반응입니다. 반응하지 말고 응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끊임없이 주어지고 변화하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주체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체적 주도권 앞에서 응답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