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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6장 59-64절
내가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본문에 앞서 본문 앞에 있는 요한복음 6장 전체를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1절 이하 13절은 오병이어 사건 자체를 다룹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그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그 선지자’로 여기면서도 그를 세상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 말을 그의 입에 두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아니 히브리서의 증거에 의하면 모세보다 뛰어나고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자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둔 말씀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무엇으로 삼고자 했는가? 세상 임금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세상 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을 사람들로부터 따로 떼어놓으셨고, 또 자신은 사람들을 보내시고 난 뒤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셨다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한 거기에 머물기보다는 인성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를 더욱 가까이하고자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사건이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던 제자들은 큰 풍랑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께서 친히 바다 위를 걸어오심으로 인해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오병이어를 통해 알리시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데, 여전히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목적은 세상 임금을 삼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은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요6:26-27) 물론 기적 자체는 봤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장정만 5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이시는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이 표적은 본 까닭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적을 봤지만 기적을 통해 알리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분명하게 알리시기 위해 구약 만나 사건과 연결시켜 말씀하시는데, 만나 사건의 핵심은 어디 있느냐? 요한복음 6장 32절과 3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일단 만나 사건에 대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라고 하면서 이것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만나는 외적으로는 육적인 배고픔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있지만, 본래 의미는 세상의 생명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알리십니다. 여기에 대한 비교를 49절과 50절에서 다시금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 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즉 만나 자체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나를 통해 알리시고자 하는 참된 뜻,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주고자 하시는 참 떡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떡은 무엇인가? 35절에서 밝힙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결국 만나 사건의 핵심, 나아가 오병이어의 핵심이 무엇인가 할 때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떡이요, 자신을 먹고 마시는 자만이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40절을 보시면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한때 초대 교회에서는 성찬과 관련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는 것으로 실제 인육을 먹는 것으로 오해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를 찾는 자들, 또 세상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는 자들은 오병이어 기적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라고 하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왜 믿지 않았는가? 3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은 아들에게로 가고 또 그를 믿지만, 믿지 않는 것은 결국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유무는 믿는 자의 지혜, 믿는 자의 지식, 믿는 자의 열심, 믿는 자의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셨는냐, 아니면 주시지 않았느냐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 말씀으로 하자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믿음의 유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이 믿지 않은 것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 특히 예수님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는 말씀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수군거립니다(41).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는 요셉이요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42). 쉽게 말해 그는 그의 부모를 통해 낫지 하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다시금 말씀하시기를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하십니다. 앞서 믿음의 유무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냐, 아니냐, 다시 말해 선택된 자인가 아니면 유기된 자인가에 따라 믿음이 주어지느냐, 주어지지 않느냐가 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끄셔야지 만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올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유무는 선택과 유기에 있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이끌어 그를 믿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45절로 가면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는 방편이 무엇인가 할 때 그의 말씀으로 그렇게 하심을 알리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증거 하는 선지자들을 통해 그렇게 하신다는 것도 알리십니다.
종합적으로 이해하자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시간 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되 그의 말씀으로 이끄심으로 믿음을 주시는 그런 방식입니다. 거기에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구약에서는 만나를 먹이심으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알리셨고(신8:3), 지금 요한복음 6장에서는 오병이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생명의 떡임을 알리시고 계신 것입니다. 심지어 이 오병이어와 무엇을 연결시키시느냐 하면 성찬과 연결시킵니다. 물론 성찬 재정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입니다(고전11:23). 그러나 성찬 재정에 앞서 성찬과 동일한 의미의 내용을 요한복음 6장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는데, 51절을 보시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53절 이하 55절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으로 이어집니다. 59절을 보시면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오병이어와 관련하여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지만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라는 것입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예배의식을 위해서, 혹은 각종 집회 및 교육훈련을 위하여 세운 장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오병이어와 관련해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의 이 가르침이 공적인 가르침이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하게 세운 12 사도들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참석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공적 가르침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60절입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여기에서는 ‘제자 중 여럿’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오병이어와 그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찾았던 무리와는 분명 다른 성격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세우신 12제자와는 또 다른 제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66절에 의하면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고 말씀하는 반면 67절 이하에서는 ‘열두 제자’에 대하여 떠나지 않는 것으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60절의 ‘제자 중 여럿’은 66절의 제자들이고, 열두 제자와는 또 다른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무리가 아니라 제자로 칭해지고 있는 것은 적어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예수님을 찾고 있는 무리와는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오병이어와 관련하여 말씀하실 때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면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는 말씀에 대하여는 이 말씀이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수군대고 있는 겁니다. 특히 ‘어렵다’는 이 말은 단단한, 거친, 난폭한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단단한 돌과 같다는 것입니다. 너무 단단해서 들어가려야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좀 부드러우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너무 거칠고 난폭하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즉 이전까지는 어땠는지 몰라도 적어도 요한복음 6장의 가르침 속에서 그의 가르침이, 그의 말씀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내놓고 있는 것이 ‘누가 들을 수 있느냐’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에게 듣는 귀가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이 어렵기 때문에 누구도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지를, 자신의 믿음 없음을 생각하지 않고 말씀하고 계시는 분에게 모든 탓을 돌리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단단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단단할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무지함과 불신이 가득할 뿐입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는 이런 마음을 ‘돌 같은 마음’(11:19), ‘굳은 마음’(36:26)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9:9)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즉 왜 그리스도의 말씀이 걸림돌이 되느냐? 본성적으로 사람은 돌 같은 마음, 굳은 마음,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돌 같은 마음, 굳은 마음이 살처럼 부드러워져야 합니다.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이 통회하면서 겸손해져야 합니다(사57:15 참조). 그래야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돌 같은 마음,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시는 분이 누군가? 결코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새 영’ 곧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저들은 “이 말씀이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고 의문을 가지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면, 또한 말씀하신 바를 깨닫게 해 주시면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언제나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롬11:33)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또 믿음 안에서 조명하심으로 깨닫게 해 주시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에 앞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도록, 또 그 말씀이 우리 마음 가운데 새겨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비록 제자로 불리지만 요한복음 6장의 가르침 속에서 그의 가르침이, 그의 말씀이 걸림돌이 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61절입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여기 보면 스스로 아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심으로 사람이 되셨지만 본래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물론 각 본성에 고유한 것을 각 본성으로 행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과 인성의 연합 때문에 인성을 취하셨다고 해서 신성이 아는 것을 인성이 모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인성을 취하여 계시지만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어 있고 신성은 사람의 마음을 살펴 모르시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이라고 칭해지는 저들이 무엇 때문에 수군거리는 줄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예수님의 말씀이 저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이 아무리 진리일지라도 모든 사람이 다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두 부류로 나눠집니다. 진리를 받는 자들이 있고, 진리로 인하여 걸려 넘어지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이 베드로전서 2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기도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벧전2:6-8)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사도 베드로가 구약 성경에 근거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구약에서부터 지금 신약 시대에 이르기까지 항상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부딪치는 돌,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 저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이 아닙니다. 특히 무리들의 경우는 오병이어 기적으로 인하여 세상 임금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기적 자체가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까? 오병이어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뜻에 있습니다.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한 것, 바로 이 일을 위해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 왔다고 한 것, 그리고 생명을 얻는 길은 자신의 살을 먹고 자신의 피를 마셔야 한다는 것, 이런 말씀들이 저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겁니다. 기적 자체가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더욱 걸림돌이 될 만한 말씀을 하시는데 62절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62절을 근거로 해서 보자면 저들에게 걸림이 되고 있는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 왔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떡이라고 한 것도 걸림돌이 되고 생명의 떡이신 자신을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도 걸림돌이 되지만, 무엇보다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 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1절과 42절만 보더라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심지어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란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시면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저들에게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늘로부터 내려왔다는 것도 걸림돌이 되는데, 인자이면서도 이전에 있던 곳, 다시 말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그래서 인자인 자신이 참 하나님임을 증거 한다면 더더욱 걸림돌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 왔다고 할 때 지금은 사람의 모양과 형체로 오신 참 사람이지만 하늘로부터 왔기 때문에 참 하나님으로서 참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지금 저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고, 나아가 내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시니 더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에게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의 모양과 형체를 가지고 있는 참 사람인데 어떻게 참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전혀 파악이 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12제자와 구별되는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위대한 선지자, 무리들조차 고백하는 것처럼 모세와 같은 그런 선지자로 여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신 사건에서 12제자들이 고백한, 정확하게는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제자들의 고백인데, 그들이 고백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14:33)라는 고백이 저들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양과 형체를 취하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낮추신 자로서 그들에게 적응하여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도 믿지 않는데, 어떻게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고 해서, 인자이지만 다시금 영광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해서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혹 그래도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을 직접 목격하면 믿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6장에 기록된 거지 나사로와 관련된 내용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31)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들의 복음 전파를 통해서도 듣지 아니하면 아무리 죽은 자가 살아나 복음을 증거 한다고 할지라도 기적 때문에 믿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나아가 승천을 본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어떠한 기적이든, 아무리 놀라운 기적을 보여준다 할지라도 기적을 통해 믿는 법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참된 믿음으로 이끄는가?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6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여기서 영과 육을 대조적으로 말씀합니다. 그리고 영에 대해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른 말이 곧 영이라면 육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르지 않은 말, 그리스도의 말씀과 상관없이 무리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생각과 뜻이 육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병이어 사건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면 오병이어 자체는 육체의 유익만 줄 뿐입니다. 오병이어를 경험했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다 영적으로 산 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만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나를 먹었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라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육적으로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그것이 곧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럼 오병이어를 통해 영적 유익을 얻는 자는 누구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들입니다. 실제 그의 살을 먹고 실제 그의 피를 마신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먹고 마시는 자들, 그들이 영적인 유익을 받습니다. 생명, 그것도 영원한 생명과 관련하여 유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살리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 자체를 주목해서는 안 됩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을 먹이셨다는 것 자체만 주목해서는 안 됩니다. 만나를 먹이신 그 사건 자체도 주목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의 말씀을 주목하지 않는 오병이어, 그의 말씀을 주목하지 않는 만나 사건, 그의 말씀을 주목하지 않는 모든 기적의 내용은 무익할 뿐입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성찬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로 인하여 교회가 성찬을 한동안 멈추기도 했지만 올해부터 다시금 성찬을 행하게 됩니다. 이때 성찬에 참여한다고 해서 다 유익을 받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찬 자체,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는 떡을 먹는다고 해서 유익함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는 포도주를 먹는다고 해서 유익함이 있는 게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자체에 유익함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찬에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성찬에 앞서 말씀으로 인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하여 우리는 믿음으로 화합해야 합니다. 여기에 유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우리의 영적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익은 그의 말씀을 제쳐놓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 4장 5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고 말한 것은 결코 가벼운 가르침이 아닙니다. 거룩하게 되는 것, 구별되도록 만드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합당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 없이, 기도 없이 거룩해지고 구별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행사 저런 행사를 많이 하고, 또 그런 행사들을 통해 뭔가 교회가 힘을 얻는 것처럼 유익한 것처럼 나타내 보일지라도 참된 말씀의 선포가 없다면 수없이 많은 행사를 하고 거기에 사람이 모인다 할지라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유익하게 보이는 것처럼 하는 형태만 있을 뿐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먹고 마심으로 배부른 것은 있을 수 있지만 영적 유익, 살리는 유익은 결코 없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교회의 유익은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거기에 교회의 유익이 있고, 성도의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만 있다고 해서 그 말씀의 유익을 듣는 모든 자가 받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61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64절에서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앞선 내용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면서 말씀을 드렸지만 믿음의 유무는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시는 자들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다 믿는 게 아니라,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만 믿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64절이 있습니다.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64절은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십니다. 내가 지금 너희에게 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럼 왜 믿지 않는가? 저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부분은 아니지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심지어 12제자 중 자신을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처음부터 아신다는 말씀을 예지예정의 입장에서 아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즉 누가 믿지 아니할지를 미리 아시고, 또 12제자 중 누가 자신을 팔 자인지 미리 아시고 그들이 아닌 자들을 택하셨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아신다는 것은 영원 전에 작정하신 바에 대하여 아신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예지예정이 아니라 예정에 대한 예지로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예지예정에 대하여 조금 설명하자면, 알미니안주의의 대표적인 주장입니다.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결국 인간이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구원의 유무가 있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들은 인간이 타락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영적 선을 행할 수 없을 만큼 타락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그들의 주장 가운데 하나가 조건적 선택인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실뿐만 아니라 미리 아시기 때문에 예지에 근거해서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지예정입니다. 예지에 근거해서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신다고 하는 것의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선택이 하나님께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근거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믿을지, 아니면 믿지 않을지를 미리 보실 뿐이고, 인간의 선택에 근거해서 예정하신다고 하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예수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신다고 하실 때 아시는 그것이 조건과 원인이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모든 것을 작정하시되 인격적 피조물에 대해서는 선택과 유기라는 이중예정을 하셨는데, 바로 작정하신 바 혹은 예정하신 바를 미리 아신다는 측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예정하셨다는 것이 실행의 역사 속에서 믿음 없음으로 나타난다고 할 때 하나님을 죄의 저자 혹은 원인자로 돌릴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시는 상태에서의 인간이 마귀의 유혹을 받아 자신의 의지의 자유를 방치한 결과로 오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것을 작정하셨다고 할 때 죄까지 작정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작정하셨다면 작정하신 대로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하나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바는 없습니다. 우리의 논리를 따르자면 하나님 탓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탓을 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무지요, 우리의 죄악 됨을 나타내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라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얼마나 깊고 풍성한지 죄의 저자가 아닌 방식으로 죄를 작정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64절 상반부에 있는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단지 기적만 보이신 것이 아니라 기적에다 말씀이라는 인을 치심으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드러내셨지만, 듣고도 믿지 못하는 저들의 무지와 불신에 대하여 분명히 나타내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요, 자신의 말씀이 곧 영이기 때문에 생명을 위하여 주고 계시지만 그 말씀이 어렵다고 함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함으로 걸림이 되고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화합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제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뿐만 아니라 어떤 말씀에 대하여는 받아들이는 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에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믿음으로 먹고 마셔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됨에도 불구하고 믿음 없음으로 나타나는 것은 분명 그들의 무지요, 그들의 어리석음이요, 그들의 나태함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믿음 없음에 대하여 책망하기도 하십니다. 그럼 믿음이 주어지는 것은 우리의 지식 때문이고, 우리의 지혜로움 때문이고, 우리의 열심과 성실 때문인가? 그러나 여기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사실은 누구도 예외 없이 다 무지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이요, 하나님 앞에서 나타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들 중에 믿음이 발휘되는 것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고, 영원 전부터 선택하셨기 때문이고,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부르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영으로 그들에게 전한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고,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때 살리는 것은 영이요, 영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믿음이 내 지혜, 내 지식, 내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 전에 택하시고 때가 되어 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 믿게 된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말씀이 있는데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있다면, 심지어 말씀이 없다 할지라도 일반계시를 통해 핑계할 수 없다고 할 때 말씀이 있다는 것은 더더욱 핑계할 수 없는 자로 있다면, 이런 내용 때문에 믿는다는 것이 내 쪽에 원인으로 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그 선물을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에게만 주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