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 또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살후 2:3).
내가 그들과 함께 세상에 있었을 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켰나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을 내가 지키었고 멸망의 아들 외에는 그들 중 아무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으니 이로써 성경이 이루어지게 한 것이옵니다(요 17:12).
필자는 이러한 주제의 글을 수차 썼었으며 기회 되는 대로 계속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비웃는 자들, 조롱하고 침뱉는 자들이 있었고 계속 나타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경고의 글을 먼저 남기는 바이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곧 적그리스도의 모형이자 장래 나타날 그의 화신이라고 하는 교리에 대해서 트집잡고 거부할 것 같으면 당신들은 요 17:12에 대해 합리적 반박을 해야 한다. 다만 그 반박은 김성철씨의 어설픈 반박처럼 "헬라어가 어쩌고 저쩌고"여서는 안되고 반드시 공히 의사소통이 되는 한글 성경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까페에는 헬라어로 일상 의사소통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하는 헬라인들의 게시판이 아니므로 헬라어에서의 진짜 의미가 어쩌고 저쩌고 운운하며 자기말 성경 트집잡을 사람들은 꺼지기 바란다.
살후 2:3은 예언의 지표에서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살후 2:1-12는 마지막 때(20-21세기)와 휴거 직전의 일들에 대해서 담고 있으며 우리가 휴거되기 전에 있을 상황을 나타내기 때문에 잘 읽어보아야 한다. 물론 이미 자기가 마귀의 자식이라고 인정한, 즉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매한가지로 대환란 불구덩이로 뛰어들겠다고(심청이 인당수 뛰어들듯) 작심한 사람들은 관심둘 필요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당신들의 길을 쭉 계속 가기 바란다."
2:3 한 구절만 놓고 말할 때 이해가 불가능할 것이므로 많은 사람들을 배려해 1절부터 말해야 하겠다.
2:1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 앞에 우리가 함께 모이는 일에 관하여 이제 너희에게 간구하노니,
"형제들아", 2:1은 거듭난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주는 말씀이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전혀 상관이 없는 얘기다. 요새 목사들은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분리해서 설교할 줄을 거의 모른다. 그렇게 배우지 않았고 그 목사들 자체가 거듭나지 않은 자들이 대부분이라 논점을 자주 일탈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거듭남 설교를 계속하면서도 수치를 모르게 된 것이다. 교회의 본시 정의는 "이미 거듭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무리"를 말한다. 거듭나지 않은 채로 거듭난 회중 가운데 있다면 그 사람은 빨리 거듭나야 하는데,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거듭남에 대한 설교를 가끔 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어떤 교회들처럼 1년 내내 거듭남만 떠들어대는 교회는 정신이 나간 교회라고 볼 수 있다. 혹은 그곳의 거듭나지 않은 교인들을 완전히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려고 작정한 목사이거나이다. 생각해 보라. 거듭나지 않은 채로 몇 년만 교회 다녀도 아주 사악한 지옥의 자식이 되는데 매주 거듭남이란 말을 들으면서도 거부하고 살면 얼마나 악독한 사람이 되겠는가? 그런 교회는 목사부터 거듭나야 된다.
어쨌든 이 구절은 거듭난 사람들의 소망이 무엇임을 알려준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인데 그것은 "그 앞에 우리가 함께 모이는 일"로 다시 설명된다. 다시 말해 마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 혹은 "열 처녀의 비유"는 살후 2:1과 무관한 비유라는 것이다. 상기 필자가 설명한 대로 교회의 사전적 정의는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이다. 더구나 그리스도 앞에 모인 형제들 가운데 염소 부류나 게으른 다섯 처녀가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처녀들은 게다가 복수의 처녀들이므로 한 신부가 될 수 없다.
복수냐 단수냐가 성경 문맥에서 중요하지만 이것만큼 중요한 대목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휴거된 후에 여성으로 "성치환"되어서 여자의 몸으로 실제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하는 게 아니다. 그 결합은 실제 "부부의 성적 결합"과도 전혀 무관한데 말이다. 오히려 우리는 천사들과 같이 될 것이고 천사들은 여자로 나타난 경우가 성경에 전혀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러므로 "열 처녀" 운운하면서 예수님이 각각의 성도들과 남자 여자로 혼인하는 것처럼 가르치는 자들을 경계하라. 그들은 영지주의와 곧잘 결탁하고 신비주의로 가게 되어 있는데 주로 여자 목사들이 "에로티시즘"과 결합된 "신랑과 신부들"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 마귀의 교리에 말려들지 말라.
2:2 영으로나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고 하는 편지로나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웠다고 마음이 쉽게 흔들리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이라.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웠다"는 것이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할 일인가? 사도 바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초점이 무엇인지 봐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웠다"는 말이 생짜 거짓말이라고 논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날은 바울 때에도 가까웠고 지금도 가깝다. 이는 "하루가 천년 같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약 선지서들에서도 재림이 가깝다고 하셨기에 그것은 "하나님의 화법"이 그렇다. 그리고 실제적으로도 21세기 초인 지금은 하나님의 "일곱 체계(육천년 + 천년)에 따르면 천년왕국의 시작이 가까운 시대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웠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바울은 "마음이 쉽게 흔들리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날은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모이는 날이고 육신이 이 땅에서 취해져서 변화되어 셋째 하늘의 영광스러운 처소로 옮겨지는 좋은 날이다. 물론 거기 가면 그리스도의 심판석이 있고 얼굴 찌푸리고 꾸중들을 일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 땅에 계속 머물며 세상의 대환란에 동참하는 것보다야 백만배쯤 낫다. 그런데 왜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는 일이 바울 당시에 있었던가? 혹시 그때도 오늘날의 역사적 전천년주의 같은 사이비들이 바울의 가르침과 다른 이상한 종말론을 퍼뜨리면서 교인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는 무슨 헛소리를 했던 것일까? 필시 그랬던 모양이다. 왜냐하니 성경은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하시기 때문이다.
이미 있었던 것이 앞으로 있을 것이며 이미 된 것이 앞으로도 될 것이니, 해 아래 새 것이 없도다(전 1:9).
바울은 분명히 말씀을 전달했다. 그리스도의 날은 가깝지만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동요할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기근이나 전염병, 하늘에서 쏟아지는 피와 우박, 혹은 적그리스도의 형상에 경배하지 않으면 당하는 목베임 같은 일들이라고 하면 바울은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라는 약간의 "당위형" 문장으로가 아니라 "두렵겠지만 신앙의 힘으로 두려움을 애써 극복하자"고 해야 맞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2:3 아무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이는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 또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 그 날이 오지 아니함이라.
미혹하는 자들은 대충 어떤 소리를 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들은 후천년주의에서 하는 거짓말을 일부 했다.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고 온 세상에 믿음이 충만해지면 그때 예수님께서 덩실덩실 구름타고 호산나 다윗의 아들이여 찬송을 들으시면서 오셔서 "모두가 해피엔딩"이 된다는 사탕발림 종말론을 말한다. 실은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세상은 점점 완악해지고 거듭난 사람들조차도 믿음이 떨어지는 "배교의 충만"이 이르자 주님께서 오실 것이다. 이것까지는 우리 시대(라오디케아)에 비추어 볼때 익히 수긍이 가는 일이다. "복음은 이미 땅끝까지 전해졌다"고 볼 수 있지만 주님은 안 오셨고 대신 교회가 배교함으로 인해, 바른 말씀을 저버리고 철학과 신학을 추종하는 쭉정이들로 채워져 가고 있다.
두 번째,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은 분명히 적그리스도(계시록의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출현을 말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그가 출현하고 나서 7년 동안 땅의 왕좌에 앉을 것이다. 전3년 반은 평화라는 가면을 쓰고, 후3년 반은 마귀의 사나운 실체를 드러내고 다스릴 것이다.
2:3을 아무 사전 지식 없이 읽게 되면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야 교회가 예수님께 취해져 올라간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말로 보자면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이르지 않고"와 "그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이 한 맥락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영어 킹제임스에서 보면 두 단락을 연결하는 쉼표의 역할은 굉장히 크다.
이 사실을 깊이 이해하려면 시편을 공부했어야 한다. 각종 단락 기호, 쉼표, 세미콜론 등이 시대를 엄청나게 나누기도 한다.
"배교하는 일"은 바울 당시와 상관이 없다. 그때는 교회가 얼마 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대배교"가 일어날 여건이 무르익지도 않았다. 여기서 말씀하는 배교는 20세기의 대배교를 말한다. 종교개혁성경(KJV)이 300년을 독주하며 전세계를 호령하다가 갑자기 수십 가지 마귀의 성서들이 나타나 왕좌를 탈취하려고 시도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시나브로 진행중이며 한국과 미국과 전세계에서 피터지는 영적 전쟁으로 계속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은 바울이 말씀하는 "배교"의 의미 첫번째라고 볼수 있다. 지금 WCC니 교황의 세계 종교 통합이니 하는 것들은 "끝물"이고 이미 영적 생명이 끝장난 개신교를 추슬러서 통합하는 "뒷정리 작업" 수준이다. 그래서 필자의 충고는 휴거 이전에 있을 또다른 "대배교"를 기다릴 필요는 없단 것이다. 배교는 이미 수십년 전부터 진행중이었다. 여기서 더 심한 배교는 일어날 것이 없다.
그러면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등장하는 사건은 배교 이후에 있을 것인가? 마치 문맥은 그런 것으로 착각할 수 있게 배열되어 있다. 그래서 보통 이 구절을 보면서 배교가 무르익으면 적그리스도가 오는구나,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배교가 다 되어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없어져야 올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부정 부패, 교회가 배교로 치달아도 계속 이 땅에 복음 전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있게 되면 적그리스도는 올 수 없다. 그가 오려면 무엇보다 교회가 사라져야 한다.
그래서 요 17:12를 보라는 것이다. 거기에 "멸망의 아들"이 쓰이기 때문이다. 친절하게도 살후 2:3은 멸망의 아들은 곧 죄의 사람이라고 알려주었다. "죄의 사람"은 종교 개혁자들이 교황에 대해 붙여준 이름이었다. 교황들이 적그리스도 자체라는 뜻에서 죄의 사람이라 불린 것이다. 교황들은 계속 바뀌고 있지만 적그리스도는 아직 오지 않았다. 종교 개혁자들이 틀린 것이다. 그들은 "모형들"과 실체를 잘 구분하지 못한 시대 분별의 색맹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마지막 교황이 적그리스도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기는 하다. 적그리스도는 부활할 로마 제국과 관련있으며(자세한 것은 다니엘서에서) 교황과 카톨릭은 적그리스도와 큰 바빌론 창녀의 완벽한 조건을 형성하고 있다.
멸망의 아들이라 불리는 유다 이스카리옷은 이미 나타났다가 밑으로(무저갱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두 번째로 나타나서 교황의 몸으로 3년 반 동안 바티칸에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3년 반 동안은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앉아 있을 것이다.
네가 본 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고, 앞으로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부터 나와서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 또 땅 위에 사는 자들, 곧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생명의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고 그러나 있는 그 짐승을 보고 놀랄 것이라(계 17:8).
"전에 있었다가"(유다 이스카리옷)
"지금은 없고"(교회시대)
"앞으로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부터 나와서"(대환란)
따라서, 살후 2:3에서 말씀하시는 "죄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지 않고서는"은 "전에 있었다가"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에 있었다가"(유다 이스카리옷)인 그 짐승을 볼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를 보고 싶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채 죽어 지옥에 내려가야 보는 것이 가능하다.
"앞으로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부터 나와서"는 정확히 말하자면 7년 대환란의 3년 반이 끝난 후에 있을 환란 중간 사건이다. 그때 로마 교황인 "흰 말 탄 자"는 암살 시도를 당하여 오른 눈과 오른 팔이 중상을 입고 코마 상태로 3일 동안 누워있게 될 것이다. 그 동안에 "깊은 구렁으로부터 나오는" 아폴루온의 영이 그 안에 들어간다. 그가 3일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내어 부활하게 되면 그는 악령 충만한 적그리스도로 온전히 변신한다. 그때부터 그는 마태복음 24장에서처럼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공격을 시작하고 유대인을 박해하고 잡아 죽이는 홀로코스트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그때 이스라엘은 계시록의 사내아이를 낳은 여인처럼 광야로 피하여 3년 반 동안 도피 생활을 해야 한다.
이 모든 사건 가운데 우리는 "전에 있었다가"인 적그리스도, "앞으로 ... 나와서"인 적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지금은 없고"인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시대 끝에 주님께서 오셔서 교회를 휴거시키시면 그때부터 계시록 타임라인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날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는지 의미를 알고 거짓 종말론을 가르치는 사기꾼들을 분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