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레위기 19:11-18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내 삶을 살아내는 것은 정말 쉽지가 않습니다. 어떤 성도든지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고 어디에나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압니다. 그 하나님은 한 사람의 영혼과 마음과 잠시 머리에 스쳐가는 생각까지도 다 아시고 감찰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 앎이 믿음이 되면 행함이 즉 삶과 순종이 나오지만 하나님에 대한 앎이 그저 지식과 정보로 끝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경멸하는 죄악이 나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귀신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떤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도록 자신을 계시하였고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믿지 않습니까? 믿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믿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타락한 교만 즉 내가 내 몸과 마음과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그 자아숭배를 멈춰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없는 겁니다. 육신대로 말입니다. 육체의 정욕과 탐심과 감정으로 내 자신을 섬기는 그 자아숭배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 매인 종이 되어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되는 겁니다. 그게 싫은 겁니다. 사탄이 하나님 밑에서 순종하고 종노릇하는 것이 싫어 타락한 것이 아닙니까? 그 사탄에 미혹에 넘어가 타락한 것이 인간 아닙니까? 타락한 인간은 그래서 마귀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는 마귀의 자식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처럼 내가 주인이 되어 나를 이해 내 마음대로 사는 그 마귀의 자식이 교회에서 주여 주여 하는 성도들 중에도 많다는 겁니다. 안타까운 말이지만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자녀보다는 마귀의 자식이 더 많은 것입니다. 얼마나 더 많은지는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율법에 열심을 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너희들의 아비는 마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그 영혼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은 너희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시고 마귀의 자식 즉 사탄의 종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행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과 의와 영광을 위한 자아숭배였던 겁니다. 마귀의 자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척 한 겁니다. 그 마음과 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볼 때에는 아주 헌신적이고 대단한 믿음 같아 보였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던 겁니다.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가짜였던 겁니다.
이 시대의 교회 안에는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겠느냐는 겁니다. 세상의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과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척 주여 주여 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는 성도들이 같은 것은 그들 모두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인 됨을 포기할 수 없는 겁니다. 결국은 끝까지 내가 내 인생이 왕과 주인이 되어 내가 나를 위해 살고 싶은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믿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정해 놓은 그 범위와 틀 안에서 믿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무엇을 시켜도 내가 하고 싶지 않고 원하지 않으면 절대로 하지 않는 겁니다.
십자가를 만난 사람과 만나지 못하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의 차이가 거기서 납니다. 십자가를 만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아도 자존심이 상해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면 기어코 합니다. 자신을 낮추어 십자가에 못을 박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순종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절대로 안 합니다. 그 대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열심히 하는 겁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자기 믿음을 확증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자아숭배입니다. 믿음은 자기 마음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타락하고 교만한 마음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내 마음을 전부 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 번 말하지만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 즉 나를 십자가에 부인하고 순종하는 그 십자가의 길을 가야 그 때 믿음을 인정해주시는 겁니다.
목회자는 그 길로 성도들을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이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온전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된답니까?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열심히 해서 된다고 합니까?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나를 십자가에 못을 박고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 그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으로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울면서 하는 겁니다. 억지로라도 하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로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가는 그 인생의 마지막 길은 그 육체가 원치 않지만 자신을 십자가에 부인하고 주님만을 따라가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교회 청소도 해보고, 화장실 청소도 해보고, 설거지도 해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그것은 저도 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열심히 한다고 제에게 뭔 이익이 돌아오겠습니까? 제가 두 번 할 것 한 번은 안 해도 될 뿐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부려먹고 싶어서 그럽니까? 솔직히 제가 청소해야 제 마음에 듭니다.
제가 하는 말이 듣기 싫으면 안 들으면 되고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하면 됩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 개의치 않습니다. 이런 작은 교회에 오는 것만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그저 오기만 하면 감사한 그 자리에 여러분을 머물게 하고 그 이상으로 끌려고 하지도 이끌지도 안는다면 저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지 못할 겁니다.
모기가 가만히 앉아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갑니다. 사람은 모기가 자기 먹을 만큼 피를 다 먹고 간 다음에 가렵고 따갑고 아프면 뒤늦게 압니다. 성도의 피를 가만히 빨아 자기의 유익을 얻는 삯군이 그렇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당장 내 귀에 듣기 좋은 말을 하고 내 마음을 사려고 하니 자기 영혼이 죽는 것을 모릅니다. 만약 제가 삯군이 된다면 여러분에게 많은 사랑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목사님 최고라고 하겠죠. 그 나물에 그 밥이 되는 겁니다.
저는 미움을 받아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천 사람, 백 사람에게 미움을 받아도 단 한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목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저도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지독한 자아숭배자입니다. 교회에 나와 주여 주여 해도 그 마음과 영이 십자가를 만나 회개하고 거듭나지 못하면 다 자아숭배자입니다. 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셨어도 늘 자신과 싸워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까지, 말씀까지, 순종까지 이용하여 자아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은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라면 종노릇하고 낮아지는 것은 뭐든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라면 어떤 굴욕이든지 다 받고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못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를 십자가에 버리고 못을 박고 낮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들에게 거룩으로 요구하는 계명들이 그래서 다 십자가를 말씀하는 겁니다. 단순히 도덕과 윤리와 바른 생활과 양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부인하는 것이 곧 거룩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에서 내 이웃을 향한 정직한 삶, 사랑과 배려와 섬김과 나눔 즉 거룩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거룩이며 언제나 내 삶을 내 앞에서 지켜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만나 회개하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건전지가 없으면 랜턴은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어둔 밤에 짐만 되는 겁니다. 건전지가 있어도 약이 다 떨어지면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능력과 빛을 발하게 하는 에너지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 우리의 마음과 영에 충만해집니까?
십자가의 은혜가 있을 때입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의 그 은혜가 내 안에 충만할 때 나를 부인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십자가의 빛 즉 믿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 빛으로 나오는 거룩이 이웃을 향한 섬김과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룩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시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사라지면 육신만 남은 겁니다. 육신대로 사는 이름뿐인 성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로 충만하여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그 거룩한 믿음의 빛을 발하는 진짜 그리스도인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