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현(玹), 자는 군미(君美)이고, 성은 조(趙), 본관은 한양(漢陽)으로 우의정 휘 연(涓)의 5대손이다. 고조 휘 련(憐)은 병조 참판을 역임하였고, 증조 휘 운명(云明)은 판관을 역임하였고, 조부 휘 영걸(英傑)은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다. 부친 휘 수곤(壽崑)은 찰방을 역임하였는데, 장수를 누려 절충장군(折衝將軍)에 가자(加資)되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모친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괴은(乖隱) 선생 구(球)의 따님으로 가정(嘉靖) 계묘년(1543, 중종38) 3월 1일에 서울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칠팔 세에 사서(四書)에 통달하여 강(講)에 응할 정도였다. 스물다섯 되던 정묘년(1567, 명종2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는데, 문장과 필법이 모두 뛰어나다는 칭송을 받았다. 여러 차례 문과에 떨어지고, 만력(萬曆) 무자년(1588, 선조21)에 성균관의 추천으로 송라 찰방(松羅察訪)에 제수되었다. 임진년(1592)에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이함(李涵)과 최현(崔晛)을 모두 휘하에 두었는데, 적을 상대한 일이 매우 많았다.
계사년(1593)에 종부시 직장에 제수되어 진휼청 낭청을 겸하였다. 당시 왜적이 물러간 지 얼마 안 되어 기근과 전염병으로 온 고을이 고통을 당하였다. 공은 침식도 잊은 채 굶주린 백성을 몸소 구휼하였는데 전염되는 것도 피하지 않고 살려낸 백성이 매우 많았다.
을미년(1595)에 임실 현감(任實縣監)에 제수되고, 병신년(1596)에 체차되었다.
임인년(1602)에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다가 공조 좌랑으로 옮기고, 직산 현감(稷山縣監)이 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갑신년(1604)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병오년(1606)에 병이 들어 4월 10일에 훈도방(薰陶坊)의 살던 집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해 6월에 포천(抱川) 가차리(加次里)의 승지공 무덤 아래 묘향(卯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타고난 효성과 우애를 지닌 분이었다. 승지공이 일흔을 넘기면서 심한 설사병을 앓았는데, 공은 한데서 기도하고 똥을 맛보는 등 부친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마침내 승지공의 병이 낫자 사람들은 공의 효성에 감응한 것이라 말하였다. 전후로 상을 당해서는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맏형수를 잘 봉양하고 두 누이를 잘 섬긴다는 칭찬을 들었다. 두 고을의 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집에 한두 섬의 곡식도 없었고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다. 공은 나이 세 살 때에 종숙(從叔)인 진사 휘 해수(海壽)의 양자로 나갔는데, 형님이 후사도 없이 죽자 국법에 따라 본종(本宗)으로 돌아왔다.
부인은 전주 이씨(全州李氏)로 부친은 생원 극함(克諴)이며, 왕자 근녕군(謹寧君) 농(襛)의 후손이다. 가정 을사년(1545, 인종1) 1월 13일에 태어났는데,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다. 풍족한 가산(家産)을 욕심 없이 담박하게 보니 할머니가 훌륭한 품성을 지녔다고 칭찬하였다. 출가한 뒤로는 남편의 뜻을 따르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 부녀자의 도리를 다하였다. 계사년(1593, 선조26)에 종기를 앓다가 9월 11일에 생을 마감하였다. 거창(居昌) 웅곡(熊谷)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가 병오년(1606, 선조39) 가을에 이장하여 공의 무덤 왼쪽에 합장하였다.
슬하에 아들 하나만 두었는데, 바로 증 참찬 부군 휘 익남(翼男)이다. 효행으로 향천(鄕薦)에 선발되어 벼슬이 사섬시 봉사에 이르렀다. 처음에 증 승지 문화(文化) 유개(柳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들 경(絅)은 판서를 지냈고, 딸은 증 참판 윤열지(尹悅之)에게 출가하였다. 뒤에 봉사 진천(鎭川) 송응일(宋應一)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낳았는데, 아들 구(緱)는 일찍 죽고, 딸은 강석황(姜錫璜), 강익장(姜益章), 현감 허립(許岦)에게 출가하였다.
경은 이조 판서 김찬(金瓚)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낳았는데, 아들 위봉(威鳳)은 시직(侍直)을 지냈고, 딸은 현감 이유정(李維禎), 판관 이돈림(李惇臨), 이정징(李井徵)에게 출가하였다. 윤열지는 아들 감역 곤(坤)과 서(垿)를 두었고, 딸 둘은 군수 이하악(李河岳)과 조원석(趙元錫)에게 출가하였다. 구는 도사 이호(李灝)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생원 위명(威明)이다. 강석황은 아들 원(源), 참봉 유(遊), 위(渭)를 두었고, 딸은 윤매(尹楳)에게 출가하였다. 강익장은 딸을 낳았는데 남환(南煥)에게 출가하였다. 허립은 딸을 낳았는데 생원 권덕임(權德任)에게 출가하였고, 진사 등(墱)을 후사로 삼았다. 위봉은 아들 둘과 딸 셋을 두었고, 위명은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외손, 증손, 현손들은 많아서 다 기재하지 않는다.
아, 불초한 손자 경이 20년 가까이 할아버지를 모셨는데, 항상 슬하에 두고 어루만지며 말씀하시기를,
“네가 우리 가문을 키울 수 있겠느냐? 부지런히 노력하라.”
하셨으니,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다행히도 경(卿)의 반열에 올라 3대가 추은(推恩)되었지만, 감히 선조의 가르침을 게을리 않고 따라 하늘의 복을 받은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선조를 생각하니 눈물이 흘러내린다. 대략 그 시말을 위와 같이 기록한다.
[주-D001] 조부 …… 묘갈음기 : 이 글은 저자의 조부 조현(趙玹, 1543~1606)에 대한 묘갈음기(墓碣陰記)이다. 조현의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군미(君美)이다.[주-D002] 장수를 …… 가자(加資)되고 : 본서 권15 〈증조증좌승지부군묘갈(曾祖贈左承旨府君墓碣)〉에 “80세를 누려 수작을 받았다.”는 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