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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38
출애굽기 20장 7절 [제53-56문]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의 내용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을 통해 그의 말씀 가운데 정하신 모든 종교적 예배와 규례들을 받아 준수하며 순수하고 완전하게 지키기를 요구하십니다. 반대로 형상들이나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정하지 않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은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한 예배에 있어서 열심이 특심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영광이 다른 대상에게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형상을 만들거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정하지 않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은 자신을 미워하는 것으로 여겨 그 죄에 대하여 갚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정하신 모든 종교적 예배와 규례들을 받아 준수하는 자들, 그리고 순수하고 완전하게 지키는 자들에게는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만 죄에 대해 갚는 부분에 있어서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한다고 하시는 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그 은혜를 천 대까지 베푼다고 하실 때 저주보다는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시는 게 하나님의 마음임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세 번째 계명을 살피겠는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53문부터 56문까지 제3계명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53문은 계명 자체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제49문. 제3계명은 어떤 것입니까?
답. 제3계명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입니다(출20:7).
제1계명이 예배의 대상과 관련하여 생각하도록 한다면, 제2계명은 예배의 방법과 관련하여 생각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제3계명에서는 예배의 자세 혹은 태도와 관련해서 생각하도록 하는데, 여기 보면 여호와의 이름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혹은 여호와란 표현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소개할 뿐 아니라, 자신을 계시하신 모든 것이 그의 이름에 포함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의 속성인데, 하나님은 자신이 알리신 그 이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의 속성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이름과 속성에 대하여 제3계명은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혹은 헛되게, 거짓되게, 무가치하게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 그분의 속성에 합당하게, 그분의 말씀에 합당하게,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는 유익이 되도록 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보존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피하라는 것이고, 언제든지 그리고 어디서든지 경외함을 가지고 신중하게 그 이름을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하나님의 이름과 속성만이 아니라 그의 규례들, 말씀, 그리고 행사들까지 그의 이름 안에서 해석하고 있는데, 제3계명을 통해 요구하시는 것과 금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제54문과 55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제54문. 제3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들(마6:9, 신28:58), 칭호들(시68:4), 속성들(계15:3-4), 규례들(말1:11,14), 말씀(시138:1-2), 행사들(욥36:24)에 대해 거룩하고 경건한 사용을 요구합니다.
제55문. 제3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3계명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게 하신 어떤 것에 대해 모든 불경스러움과 남용을 금합니다(말1:6-7,12, 2:2, 3:14).
먼저 제3계명에서 요구하시는 바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면(합신 총회 공과 참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하실 때 그의 이름과 칭호, 그리고 속성과 규례와 말씀과 행사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말이나 생각, 글을 쓰거나 신앙을 고백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이름을 거룩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그 이름으로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물론 원문을 번역하는 데 있어 ‘hw:hoy_[예호바]’를 ‘여호와’로 번역하거나 혹은 이것을 ‘야훼’로 불러야 한다는 말도 있고, 또 ‘!yhil~a>[엘로힘]’을 하나님으로 번역할 때 우리는 한분 하나님에 대한 강조로 ‘하나님’으로, 가톨릭에서는 하늘에 계신 분을 강조한다고 해서 ‘하느님’으로 번역하기도 하지만, 뿐만 아니라 이 단어가 복수라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바들이 있지만 이런 단어적인 문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떠한 이름으로 알리실 때 그 이름 안에 담겨 있는 의미를 알고서 불러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과 15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스스로 있다는 이 말은 ‘있다’, 혹은 ‘존재하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 맨 처음부터 알리신 것처럼(창1:1) 그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누군가에 의해 있는, 누군가에 의해 존재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있게 하는 자입니다. 바로 이 단어에서 ‘hw:hoy_[예호바]’, 우리말 번역으로 여호와란 단어가 파생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를 때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알고 불러야 합니다. 그만이 스스로 계신 분이시기에 스스로 계신 그분만이 창조주 하나님임을 인식하고서 불러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어떤 ‘칭호’를 통해서도 자신을 알리시기도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전능한 하나님’(창17:1), ‘만군의 여호와’(삼상17:45), ‘아버지’(사63:16), ‘주 하나님’(계1:8) 등입니다. 이런 칭호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는데, 그렇게 알려주신 바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러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과 칭호를 부를 때 우리는 그분이 들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상의 경우는 많은 부분 외적으로 보이는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입이 있어서 말하지 못합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코가 있어도 냄새를 맡지 못합니다.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우상은 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시115:4-7).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도 않으며, 물질적인 존재도 아니십니다. 그러나 말씀하십니다. 보십니다. 들으십니다. 그리고 친히 역사하십니다. 바로 이 사실을 하나님은 다양한 칭호들을 통해 알리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을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셨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4문에서 하나님이 영(요4:24)이시라는 사실을 말하면서, 그의 존재(출3:14), 지혜(시147:5), 권능(계4:8), 거룩(계15:4), 공의, 선하심, 진실하심(출34:6-7)에 있어서 무한하시며(욥11:7-9) 영원하시며(시90:2) 불변하시다(약1:17)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그러한 분인 줄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 없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거짓되고, 헛되게 부를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자신의 ‘규례와 말씀’을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이시며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지난주 우리가 살폈던 것처럼 예배의 규례를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드려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 전체가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섯째로 하나님은 자신의 ‘행사’를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셨습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섭리의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역사도 펼치십니다. 때문에 창조주로, 섭리하시는 분으로, 구원하시는 분으로 알고 믿는다면 그에게 감사와 찬송 외에 드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분을 불러야 합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나중에 살피겠지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첫 번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그의 이름을 합당하게만 사용해야 합니다. 그의 이름과 칭호, 그리고 그의 속성, 그의 규례와 말씀, 그리고 그의 행사를 그만이 영광 받으시도록,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용하지 않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제3계명에서 금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알게 하신 어떤 것에 대해 모든 불경스러움과 남용을 금한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대요리문답 제113문을 통해 설명되고 있습니다. 우선 그 부분을 읽어드리면, “제3계명에서 금지된 죄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요구된 대로 사용하지 않거나(말2:2); 무지하게(행17:23), 헛되게(잠30:9), 불경하게(말1:6,7,12, 3:14), 미신적으로(삼상4:3-5, 렘7:4,9,10,14,31, 골2:20-22), 사악한 언사로 남용하거나, 아니면 그의 칭호들, 속성들(왕하18:30,35, 출5:2, 시139:20), 규례들(시50:16,17), 사역들을(사5:12) 신성모독과(왕하19:22, 레24:11) 거짓 맹세로(슥5:4, 8:17) 사용하는 것; 죄악된 모든 저주들(삼상17:43, 삼하16:5), 맹세들(렘5:7, 23:10), 서원들(신23:18, 행23:12,14), 제비뽑기(에3:7, 9:24, 시22:18); 우리의 맹세들과 서원들이 합법적인데 어기거나(시24:4, 겔17:16,18,19); 불법적인데 이행하는 것(막6:26, 삼상25:22,32-34);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불평하고 싸우듯이 따지며(롬9:14,19,20), 호기심으로 파고들며(신29:29), 잘못 적용하는 것(롬3:5,7, 6:1,2, 전8:11, 9:3, 시39편); 말씀이나 그 일부를 잘못 해석하고(마5:21-48) 잘못 적용하고(겔13:22) 어떤 식으로든지 곡해해서(벧후3:16, 마22:24-31) 불경한 조롱들(사22:13, 렘23:34,36,38), 호기심 가득하거나 무익한 질문들, 헛된 말다툼들을 하거나, 거짓교리를 주장하는 것(딤전1:4,6,7, 6:4,5,20, 딤후2:14, 딛3:9); 말씀이나 피조물들이나 하나님의 이름 아래 속한 어떤 것들을 마법(점, 마술)이나(신18:10-14, 행19:13) 죄악된 정욕과 행위로(딤후4:3,4, 롬13:13,14, 왕상21:9,10, 유4) 남용하는 것;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와 방식들을 비방(행13:45, 요일3:12), 경멸(시1:1, 벧후3:3), 욕설(벧전4:4), 어떤 식으로든지 대적하는 것(행13:45,46,50, 4:18, 19:9, 살전2:16, 히10:29); 위선적으로 혹은 사악한 목적으로 종교를 고백하거나(딤후3:5, 마23:14[=눅 20:47], 6:1,2,5,16); 그 고백을 부끄러워하거나(막8:38), 불일치하게(시73:14,15) 지혜 없이(고전6:5,6, 엡5:15-17) 열매 없이(사5:4, 벧후1:8,9) 추악하게 행하거나(롬2:23,24) 다시 타락함으로(갈3:1,3, 히6:6) 고백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만 말씀드리면, 무엇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무지하게, 혹은 헛되게, 혹은 불경건하게, 혹은 미신적으로 남용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또한 사악한 언사로 남용하거나, 아니면 신성모독과 거짓 맹세로 사용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많은 예를 들 수 있겠지만 몇 가지만 생각해 보면, 사도행전 17장 23절에서 사도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여러분, 알지 못하면서도 그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여기는 것을 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러나 2계명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우상은 자기를 위한 것으로 있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라면 그 대상에 대하여 무지하더라도 만들어 섬기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무지함으로 섬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무지는 곧 죄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3장 34절에서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고 말씀하기도 하시는 겁니다. 알지 못하고서 하지만 그것조차 사함을 받아야 할 악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불신자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사실이 죄로 지적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라기 1장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제사장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선 6절과 7절입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그리고 12절에서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경건하게 사용할 수도 있고 불경건하게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말라기에서는 제단에 드리는 예물과 관련해서 말씀하고 있지만, 우리의 삶 전반을 통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든다면 사무엘상 4장에 보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였을 때 그 이유가 언약궤가 함께 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한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언약궤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기도 하셨지만, 그것 자체를 어떻게 사용하고자 했느냐 하면 미신적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와서 싸웠지만 여전히 패배하는, 심지어 언약궤까지 빼앗기는 수치를 당하는 일까지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제사장으로 있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고 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아버지인 엘리까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이나 그 일부를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하고 어떤 식으로든지 곡해해서 불경한 조롱들, 호기심 가득하거나 무익한 질문들, 헛된 말다툼들을 하거나, 거짓교리를 주장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너희는 이렇게 알고 있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고 하시면서 구약의 율법을 올바르게 해석하실 때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만큼 말씀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석과 함께 적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에서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두개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합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마22:24-28) 이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9)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 즉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무지가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 오해, 즉 그릇된 해석으로 나타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16절의 말씀으로 하자면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23장에서는 우리말 번역으로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히브리어의 뜻은 ‘여호와의 무거운 짐’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무거운 짐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3절은 그의 계명이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증거하고 있지만, 저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던 겁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경스럽게 조롱하는 것과 같은데, 이런 내용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를 불평하고 싸우듯이 따지며, 호기심으로 파고들며, 잘못 적용하는 것도 금하십니다. 그런 측면에서 예정을 거부하는 자들,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를 거부하고 우연으로 돌리는 것들을 하나님이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부분을 공부할 때 말씀을 드렸지만 우연이란 없습니다. 우연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행이라는 말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행이라는 말의 의미가 뜻밖에 일이 잘되어 운이 좋다는 그런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모든 일은 그의 뜻의 의논대로 역사됩니다(엡1:11).
특별히 제3계명 안에서 맹세와 관련해 해석하는 일들이 있는데, 신명기 10장 20절에서 하나님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여호와를 경외한다고 할 때 그를 섬기는 것과 그에게 의지하는 것만 말하지 않고 맹세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맹세하되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맹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내용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의지하는 데 있어 합당한 신앙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하시는가? 히브리서 6장 16절에 보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즉 맹세는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 크신 분이라는 사실, 하나님이 우리보다 탁월한 분이라는 사실, 아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맹세한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보다 높고 탁월하시고 크시기에 내가 말하는 것에 대하여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맹세는 모든 사람보다 높고 탁월하시고 크신 하나님 외에 다른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5장에서 맹세와 관련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마5:33-36) 여기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기 때문에 맹세 자체를 하면 안 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지만,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하늘과 땅, 그리고 예루살렘이나 자기 자신의 머리로 맹세하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으로 나타나더라도 죄는 아니라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3장 16절이나 18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저들에게 하늘로도 맹세하지 말고, 땅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예루살렘으로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가톨릭의 경우 성인의 이름이나 기타 피조물들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일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기만 하면 되는가? 그러나 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것에 맹세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에게 선과 유익이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맹세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정받을 수 있는 것으로만 맹세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저자인 우르시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히 어긋나지 않는 맹세만이 정당하며, 또한 참되고, 분명히 알고, 정당하며, 가능하며, 무게 있고, 필수적이며, 유익한 것들에 대한 맹세여야 하며, 그렇게 중요하게 확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이나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안전을 위하여 확증을 요구하는 일들에 관한 맹세여야만 정당하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해설, p.869)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히 어긋나거나 거짓된 것, 그리고 정당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맹세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거짓을 위한 맹세,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맹세, 가볍고 헤픈 맹세, 성급하게 맹세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주의를 해야 합니다. 맹세와 관련해 사사 시대 입다의 서원을 생각해 보면 전쟁에서 승리하여 집으로 돌아갈 때 자기 집 문에서 나와서 자신을 영접하는 그를 여호와께 돌려 번제물로 드리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삿11:31). 그리고 그를 처음으로 맞이한 이가 누구였느냐 하면 자신의 딸이었습니다.(삿11:34) 일반적으로는 맹세하고 서원했을 때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서원은 지켜서 죄악된 것일 때는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할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별력조차 없었던 시대가 사사 시대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분명하고 확실한 일, 그러나 거짓되고 악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와 이웃에게 선이 되는 것, 그러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에 맹세를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할 때 우리는 결혼 서약이라고 해서 맹세를 하게 됩니다. 그때 서약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야 하고, 맹세할 때도 그 말씀대로 하겠다는 마음으로 하게 됩니다. 물론 맹세를 하지만 반드시 맹세한 것대로 살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부패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할 수 없기 때문에 맹세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본성의 연약함으로 말씀대로 완전히 행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와 이웃에게 선이 되기 때문에 맹세하면서 맹세한 바를 지키도록 노력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칼빈은 모든 공적인 맹세는 가능하다고 말하는데(이하 기독교강요 초판 참조), 바울이 복음의 위엄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했던 맹세들도 그러한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롬1:9, 9:1 참조). 왜냐하면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사도들은 사사로운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적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임직과 관련된 맹세는 합당한 것입니다. 목사 안수 받을 때, 그리고 장로와 집사를 세울 때 맹세를 하는데, 합당한 것입니다. 또한 조약을 엄숙하게 하기 위해 왕들이 하는 맹세, 혹은 자기 왕의 이름으로 백성들이 하는 맹세 등 사사로운 욕심이 아니라 공공의 선을 위해 행하는 맹세 등도 가능하다고 말하는데, 오늘날 재판 과정 속에서 증인으로 출석하게 될 경우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이런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56문은 덧붙여 사려해야 할 것에 대한 질문입니다.
제56문. 제3계명에 덧붙여 사려할 것들은 무엇입니까?
답. 제3계명에서 덧붙여 사려할 것은 본 계명을 범한 자가 사람들로부터는 형벌을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주 하나님은 그의 의로우신 심판을 그들이 피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삼상2:12,17,22,24, 3:13, 신28:58-59).
여기에 대한 예는 앞서 언급한 엘리의 두 아들과 엘리의 죽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엘리의 두 아들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이렇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삼상2:12),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삼상2:17),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삼상2:22) 그리고 이런 아들들의 행실에 대하여 엘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삼상2:24)
여러분,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으로서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만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였습니다. 이런 저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을 말씀하시는데, 사무엘상 3장 13절입니다.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리고 그 결과가 앞서 언급한 사무엘상 4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사람은 저들의 악행에 대하여 벌을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위치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보다 높으시고 탁월하시고 크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일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때문에 두려워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실 때 목적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생은 아담 안에서 함께 타락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거나 혹은 다른 피조물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 가운데 일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창조의 목적과 동일한 목적을 요구하시는데,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으로 그분의 영광이 더해지거나 덜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시고 구속하셨다면 우리는 거기에 걸맞은 생이 되도록 우리의 삶을 살펴야 합니다. 제3계명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살피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