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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十八回 周襄王避亂居鄭 晉文公守信降原
제38회: 주양왕이 난을 피해 정나라에 머물고 진문공이 신의를 지켜 원성(原城)을 항복시키다.
話說,周襄王聞宮人小東之語,心頭一時火起,急取牀頭寶劍,趨至中宮,來殺太叔。纔行數步,忽然轉念:「太叔乃太后所愛,我若殺之,外人不知其罪,必以我為不孝矣。況太叔武藝高強,倘然不遜,挺劍相持,反為不美。不如暫時隱忍,俟明日詢有實跡,將隗后貶退,諒太叔亦無顏復留,必然出奔外境,豈不穩便?」嘆了一口氣,擲劍於地,復回寢宮,使隨身內侍,打探太叔消息。回報:「太叔知小東來訴我王,已脫身出宮去矣。」襄王曰:「宮門出入,如何不稟命於朕?亦朕之疏於防範也!」
한편, 주양왕이 궁녀 소동(小東)의 말을 듣고, 일시에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솟아 급히 침상 머리맡의 보검을 들고 중궁으로 달려가 태숙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몇 발자국을 달려가다가 갑자기 돌려 생각하기를, “태숙은 태후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내가 만약 그를 죽인다면, 바깥사람들은 그의 죄를 모르고 반드시 나를 불효자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태숙의 무예는 나보다 훨씬 나으니 만약에 불손한 태도로 칼을 빼 들고 상대한다면 도리어 좋지 못할 것이다. 잠시 참았다가 날이 밝기를 기다려 사실을 밝힌 후에 장차 외후를 중궁의 자리에서 폐하여 내쳐야겠다. 그렇게 되면 태숙이 다시 머무를 염치가 없게 되어 반드시 외국으로 달아날 것이니 어찌 편리하지 않겠는가?” 하고, 탄식하여 숨을 내쉬더니 칼을 땅에 던지고, 다시 궁궐 침실로 돌아와서 심복 내시를 시켜 태숙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내시가 돌아와 보고하기를, “태숙은 소동이 대왕에게 호소한 것을 알고 이미 궁궐 밖으로 탈출했다고 합니다.” 했다. 주양왕이 말하기를, “궁궐 문을 출입하는데 어찌하여 나에게 보고하지 않는가? 이것 역시 궁궐 단속을 너무 소홀히 한 나의 잘못이로다!” 했다.
次早,襄王命拘中宮侍妾審問。初時抵賴,喚出小東面證,遂不能隱,將前後醜情,一一招出。襄王將隗后貶入冷宮,封鎖其門,穴牆以通飲食。太叔帶自知有罪,逃奔翟國去了。惠太后驚成心疾,自此抱病不起。卻說頹叔桃子,聞隗后被貶,大驚曰:「當初請兵伐鄭,是我二人;請婚隗氏,又是我二人。今忽然被斥,翟君必然見怪。太叔今出奔在翟,定有一番假話,哄動翟君。倘然翟兵到來問罪,我等何以自解?」即日乘輕車疾馳,趕上太叔,做一路商量:「若見翟君,須是如此如此。」
다음 날 아침, 주양왕이 중궁의 시첩들을 잡아 와서 심문했다. 처음에는 변명하며 심문에 복종하지 않았으나 소동(小東)을 불러내어 대질시키자 마침내 숨기지 못하고 말하여, 태숙과 외후의 전후 추악한 전모가 하나하나 전부 드러났다. 양왕이 외후를 정궁의 자리에서 폐하여 냉궁에 가두고 그 문을 봉하여 잠근 후 담장의 구멍으로 음식을 통하게 했다. 태숙 대(帶)는 스스로 큰 죄를 지었음을 알고 적(翟)나라로 달아났다. 혜태후는 놀라서 심장병이 들어 이로부터 자리에 눕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한편, 퇴숙과 도자는 외후가 중궁의 자리에서 쫓겨나 유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당초에 적(翟)나라에 군사를 청해 정나라를 공격하자고 한 것이나, 외후에게 청혼하게 한 것은 우리 두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갑자기 외후가 중궁의 자리에서 쫓겨났으니, 적나라 군주가 반드시 우리를 의심할 것입니다. 태숙이 지금 적나라로 달아났는데, 그는 반드시 거짓말로 꾸며서 떠들 것이고, 만약 적나라의 군사들이 쳐들어와서 죄를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명할 수 있겠소?” 하고, 그날로 가벼운 수레로 질주하여 태숙의 뒤를 쫓아가 만나서, 길에서 의논하기를, “적나라 군주를 만나면 이러저러하게 합시다.” 했다.
不一日,行到翟國,太叔停駕於郊外。頹叔桃子先入城見了翟君,告訴道:「當初我等原為太叔請婚,周王聞知美色,乃自取之,立為正宮。只為往太后處問安,與太叔相遇,偶然太叔敘起前因,說話良久,被宮人言語誣謗,周王輕信,不念貴國伐鄭之勞,遂將王后貶入冷宮,太叔逐出境外。忘親背德,無義無恩,乞假一旅之師,殺入王城,扶立太叔為王,救出王后,仍為國母,誠貴國之義舉也。」翟君信其言,問:「太叔何在?」頹叔桃子曰:「現在郊外候命。」翟君遂迎太叔入城。太叔請以甥舅之禮相見,翟君大喜。
하루가 안 되어 그들 일행이 적나라에 이르자, 태숙은 교외에 수레를 세웠다. 퇴숙과 도자가 먼저 성안으로 들어가 적나라 군주를 만나 호소하기를, “당초에 우리가 태숙을 위하여 청혼을 했는데, 주양왕이 외후가 미모임을 알고 스스로 취하여 정궁으로 삼았습니다. 외후가 태후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태숙을 만나서, 우연히 태숙이 전날의 인연을 말하다가 이야기가 길어져서 궁인들의 무고를 받았습니다. 주양왕이 경솔하게 그 말을 믿고, 귀국이 정나라를 정벌해준 공로도 생각하지 않고, 마침내 외후를 정궁의 자리에서 내쫓아 냉궁에 유폐시키고, 태숙도 나라 밖으로 추방했습니다. 형제간의 우의를 망각하고 또한 남에게서 받은 은혜를 저버리니, 이것은 의리도 없고 은혜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희에게 한 무리의 군사를 빌려주시면 왕성으로 쇄도해 들어가 태숙을 왕으로 세우고, 외후를 구출하여 예전처럼 국모로 받들겠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귀국의 의거일 것입니다.” 하니, 적나라 군주가 그 말을 믿고 묻기를, “태숙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퇴숙과 도자가 말하기를, “지금 교외에서 군주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했다. 적나라 군주가 즉시 태숙을 맞아 성안으로 들였다. 태숙이 사위가 장인을 뵙는 예를 청하니, 적나라 군주가 크게 기뻐했다.
遂撥步騎五千,使大將赤丁同頹叔桃子,奉太叔以伐周。周襄王聞翟兵臨境,遣大夫譚伯為使,至翟軍中,諭以太叔內亂之罪。赤丁殺之,驅兵直逼王城之下。襄王大怒,乃拜卿士原伯貫為將,毛衛副之,率車三百乘,出城禦敵。伯貫知翟兵勇猛,將軘車聯絡為營,如堅城一般,赤丁衝突數次,俱不能入。連日搦戰,亦不出應。赤丁憤甚,乃定下計策,於翠雲山搭起高臺,上建天子旌旗,使軍士假扮太叔,在臺上飲宴歌舞為樂,卻教頹叔桃子各領一千騎兵,伏於山之左右,只等周兵到時,臺上放砲為號,一齊攏殺將來。
마침내 적나라 군주는 보병과 기병 5천을 뽑아 적정(赤丁)을 대장으로 삼아 퇴숙과 도자와 함께 태숙을 받들어 주나라를 쳤다. 주양왕은 적나라 군사들이 국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대부 담백(譚伯)을 사자로 삼아 적나라 군중으로 보내어, 태숙이 내란을 일으킨 죄를 설명하려고 했으나 적정이 사자를 죽이고 군사들을 몰아 왕성 아래에 바싹 다가왔다. 주양왕이 대로하여 경사(卿士) 원백관(原伯貫)을 대장으로 삼고, 모위(毛衛)를 부장으로 삼아 전차 300대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적을 막게 했다. 원백관이 적나라 군사가 용맹하다는 것을 알고, 전차를 서로 연결하여 성곽같이 견고한 영채를 세웠다. 적정이 여러 번 돌격했으나 영채를 돌파할 수가 없었다. 적나라 군사가 매일 싸움을 돋웠지만 주나라 군사들은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적정이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이에 계책을 정하고 취운산(翠雲山)에 높은 누대를 만들어 그 위에 천자의 깃발을 세우게 했다. 군사 한 사람을 태숙으로 분장시켜 그 누대 위에서 술을 마시며 노래와 춤을 즐기도록 했다. 그리고 퇴숙과 도자에게 각기 일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취운산 좌우에 매복하게 하고, 주나라 군사들이 이르기를 기다려서 누대 위에서 포성을 울리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무찌르기로 했다.
又教親兒赤風子引騎兵五百,直逼其營辱罵,以激其怒。若彼開營出戰,佯輸詐敗,引他走翠雲山一路,便算功勞。赤丁與太叔引大隊在后准備接應。分撥停當。卻說,赤風子引五百騎兵搦戰,原伯貫登壘望之,欺其寡少,便欲出戰。毛衛諫曰:「翟人詭詐多端,只宜持重。俟其懈怠,方可擊也。」挨至午牌時分,翟軍皆下馬坐地,口中大罵:「周王無道之君,用這般無能之將,降又不降,戰又不戰,待要何如?」亦有臥地而罵者。原伯貫忍耐不住,喝教開營。營門開處,湧出車乘百餘,車上立著一員大將,金盔繡襖,手執大桿刀,乃原伯貫也。
또 그의 아들 적풍자(赤風子)에게 5백 기병을 이끌고 그 영채에 바짝 가까이 가서 욕을 해 성내게 하고, 만약 그들이 진영을 열고 출전하면 거짓 패하는 척하여 그들을 취운산으로 통하는 길로 유인하면 공로로 쳐주겠다고 했다. 적정은 태숙과 함께 나머지 대군을 인솔하고 뒤에서 접응을 준비하도록 했다. 한편, 적풍자는 기병 5백 기를 이끌고 싸움을 돋우었다. 원백관이 망루에 올라 바라보고 군사가 매우 적은 것을 얕보고 나가 싸우고 싶어졌다. 부장 모위가 간하기를, “적나라 사람들은 속임수가 많습니다. 오로지 신중하게 있다가 그들이 해이해지기를 기다려서 공격해야 합니다.” 했다. 정오 무렵까지 기다리자 적나라 군사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땅에 앉더니 모두 크게 욕하기를, “주양왕은 무도한 임금이라 저렇게 무능한 장수를 썼구나! 항복하든지 말든지, 싸우든지 말든지 도대체 무엇을 기다리느냐?” 했다. 그리고 땅바닥에 누워서 욕하는 군사들도 있었다. 원백관이 더 참지 못하고 진영의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영문이 열리자 전차 백여 대가 돌진해 나갔다. 전차 위에 금빛 투구에 비단 전포를 입고, 손에는 자루가 긴 대도를 든 원백관이 서 있었다.
赤風子忙叫:「孩兒們快上馬!」自挺鐵槊來迎戰,不上十合,撥馬往西而走。軍士多有上馬不及者,周軍亂搶馬匹,全無行列。赤風子回馬,又戰數合,漸漸引至翠雲山相近。赤風子委棄馬匹器械殆盡,引數騎奔山後去了。原伯貫抬頭一望,見山上飛龍赤旗飄颭,繡傘之下,蓋著太叔,大吹大擂飲酒。原伯貫曰:「此賊命合盡於吾手!」乃揀平坦處驅車欲上。山上檑木砲石打將下來,原伯正沒計較。忽聞山坳中連珠砲響,左有頹叔,右有桃子,兩路鐵騎,如狂風驟雨,圍裹將來。
적풍자가 황급하게 외치기를, “너희들은 빨리 말에 올라타라!” 하고, 장창을 꼬나 쥐고, 주나라 병사들을 맞아 싸우다가 10여 합도 되기 전에 말을 돌려 서쪽으로 달아났다. 미처 말을 타지 못한 많은 적나라 군사들은 주나라 군사들에게 어지럽게 말을 빼앗겨 전혀 대오를 짓지도 못했다. 적풍자가 말을 돌려 또 몇 합을 싸우다가 점점 취운산 가까이 유인했다. 적풍자가 말과 무기를 거의 버리고 몇 명의 기병만을 데리고 산 후면으로 사라졌다. 원백관이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산 위에 용이 그려진 붉은 깃발이 나부끼고 수놓은 비단 일산 아래에서 태숙이 큰소리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원백관이 말하기를, “저 역적의 목숨은 이제 내 손에 끝날 것이다!” 하고, 그는 즉시 평탄한 곳을 골라 전차를 몰아 산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자 산 위에서 통나무와 바위들이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원백관이 어쩔 수가 없을 때, 갑자기 산속 평지에서 연달아 포성이 울리더니 왼쪽에 퇴숙이, 오른쪽에 도자가 철갑기병을 거느리고 미친 바람과 소나기처럼 원백관과 그 군사들을 포위했다.
原伯心知中計,急教回車,來路上已被翟軍砍下亂木,縱橫道路,車不能行。原伯喝令步卒開路,軍士都心慌膽落,不戰而潰。原伯無計可施,卸下繡袍,欲雜於眾中逃命。有小軍叫曰:「將軍到這裏來!」頹叔聽得叫聲,疑為原伯,指揮翟騎追之,擒獲二十餘人,原伯果在其內。比及赤丁大軍到時,已大獲全勝,車馬器械,悉為所俘。有逃脫的軍士,回營報知毛衛。毛衛只教堅守,一面遣人馳奏周王,求其添兵助將。不在話下。頹叔將原伯貫綁縛獻功於太叔。太叔命囚之於營。
원백관이 적의 계략에 빠졌다고 생각하여 급히 전차를 돌리게 했으나, 올라온 길은 이미 적나라 군사들이 나무들을 어지러이 잘라서 종횡으로 길을 막아 전차가 갈 수 없었다. 원백관이 소리쳐서 보졸들에게 길을 열게 했으나, 군사들이 모두 마음이 황망하고 간담이 떨어져 싸우지 않고 달아났다. 원백관이 해볼 계책이 없어 수놓은 전포를 벗어버리고 무리들 속에 섞여 도망치려고 했다. 어떤 졸개가 고함치기를, “장군이 이 속에 왔다!” 하니, 퇴숙이 그 고함 소리를 듣고 원백관인 줄 의심하여 적나라 기병을 지휘하여 뒤쫓아서 20여 명을 사로잡았다. 과연 원백관이 그 속에 있었다. 적정의 대군이 이르렀을 때는 이미 적나라의 대승으로 끝났고, 그들은 전차와 말, 무기들을 노획했다. 도망친 주나라 군사가 영채로 돌아와 부장 모위에게 보고하니, 모위는 오로지 진영을 굳게 지키고, 한편으로 사람을 주양왕에게 보내어 증원군과 도와줄 장수들을 요청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퇴숙은 원백관을 포박하여 태숙에게 바쳤다. 태숙이 명하여 진영에 가두었다.
頹叔曰:「今伯貫被擒,毛衛必然喪膽。若夜半往劫其營,以火攻之,衛可擒也。」太叔以為然,言於赤丁。赤丁用其策,暗傳號令。是夜三鼓之後,赤丁自引步軍千餘,俱用利斧,劈開索鏈,劫入大營,就各車上,將蘆葦放起火來。頃刻延燒,遍營中火球亂滾,軍士大亂。頹叔桃子各引精騎,乘勢殺入,銳不可當。毛衛急乘小車,從營後而遁。正遇著步卒一隊,為首乃是太叔帶,大喝:「毛衛哪裏走?」毛衛著忙,被太叔一鎗刺於車下。翟軍大獲全勝,遂圍王城。 周襄王聞二將被擒,謂富辰曰:「早不從卿言,致有此禍。」
퇴숙이 말하기를, “오늘 원백관이 사로잡혔으니 모위는 틀림없이 간담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만약 밤중에 그 진영을 기습하여 불로 공격한다면 모위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하니, 태숙이 옳다고 생각하여 적정에게 그 말을 했다. 적정이 그 계책을 써서 비밀리에 명령을 전했다. 그날 밤 자정 후에 적정이 도끼로 무장한 보병 천여 명을 직접 인솔하여 주나라 진영의 밧줄과 사슬을 자르고 대채를 기습했다. (진영을 둘러싼) 전차 위에 갈대를 놓고 불을 질렀다. 잠깐 사이에 불길이 번져 온 진영 안에는 불덩어리가 어지럽게 넘실거려서 군사들이 크게 혼란했다. 퇴숙과 도자가 각기 정예 기병을 이끌고 승세를 타고 쇄도해 들어가니, 그 날카로움을 당해 낼 수 없었다. 모위가 급히 작은 수레를 타고 영채의 뒤로 달아나려고 하다가, 마침 보병 한 무리를 이끈 태숙과 마주쳤다. 태숙이 큰소리로 외치기를, “모위는 어디로 달아나느냐?” 하니, 모위가 놀라 허둥대다가 태숙이 휘두른 창에 찔려 수레 밑으로 떨어졌다. 적나라 군사가 크게 이기고, 마침내 왕성을 포위하였다. 주양왕이 두 장수가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부신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경의 말을 듣지 않아 화가 여기까지 미치게 되었소.” 했다.
富辰曰:「翟勢甚狂,吾王暫爾出巡,諸侯必有倡議納王者。」周公孔奏曰:「王師雖敗,若悉起百官家屬,尚可背城一戰。奈何輕棄社稷,委命於諸侯乎?」召公過奏曰:「言戰者,乃危計也。以臣愚見,此禍皆本於叔隗,吾王先正其誅,然後堅守以待諸侯之救,可以萬全。」襄王嘆曰:「朕之不明,自取其禍!今太后病危,朕暫當避位,以慰其意。若人心不忘朕,聽諸侯自圖之可也。」因謂周召二公曰:「太叔此來,為隗后耳。若取隗氏,必懼國人之謗,不敢居於王城。二卿為朕繕兵固守,以待朕之歸可也。」周召二公頓首受命。
부신이 말하기를, “적나라 군사의 기세가 사나우니, 왕께서는 잠시 순행하시면 제후들이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왕을 귀국시켜줄 것입니다.” 했다. 주공 공(周公孔)이 아뢰기를, “왕의 군사들이 비록 싸움에 졌다 하지만, 만약 백관들의 가속들을 모두 일으키면 아직 성을 의지하여 한 번 싸워볼 만한데, 어찌하여 가볍게 사직을 버리고 제후들에게 목숨을 맡기려 하십니까?” 했다. 소공 과(召公過)가 아뢰기를, “싸우자고 말만 하는 것은 위험한 계책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이 재앙은 모두 숙외로부터 생긴 것입니다. 왕께서는 먼저 숙외를 죽여 정의를 밝히신 후에 성을 굳게 지키면서 제후들의 구원군을 기다린다면 가히 만전을 기할 수 있습니다.” 했다. 주양왕이 탄식하기를, “짐이 밝지 못하여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였소. 지금 태후께서 병이 위독하니, 내가 잠시 이 자리를 피하여 태후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오. 만약 사람들이 나를 잊지 않았다면, 제후들이 듣고 스스로 도모할 것이오!” 했다. 인하여 주양왕이 주공과 소공에게 말하기를, “태숙이 이곳까지 쳐들어온 것은 외후(隗后) 때문이오. 태숙이 만약 외후를 취하더라도 나라 사람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여 왕성 안에 거주하지는 못할 것이오. 두 분의 경들께서는 나를 위하여 군사를 정비하여 굳게 지켜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시오.” 하니, 주공과 소공이 머리를 조아리고 명을 받았다.
襄王問於富辰曰:「周之接壤,惟鄭、衛、陳三國,朕將安適?」富辰對曰:「陳衛弱,不如適鄭。」襄王曰:「朕曾用翟伐鄭,鄭得無怨乎?」富辰曰:「臣之勸王適鄭者,正為此也。鄭之先世,有功於周,其嗣必不忘。王以翟伐鄭,鄭心不平,固日夜望翟之背周,以自明其順也。今王適鄭,彼必喜於奉迎,又何怨焉?」襄王意乃決。富辰又請曰:「王犯翟鋒而出,恐翟人悉眾與王為難,奈何?臣願率家屬與翟決戰,王乘機出避可也。」乃盡召子弟親黨,約數百人,勉以忠義,開門直犯翟營,牽住翟兵。
주양왕이 부신에게 묻기를, “우리 주나라와 땅이 이어진 정나라, 위(衛)나라, 진(陳)나라 중에서 어느 나라로 가는 것이 좋겠는가?” 하니, 부신이 대답하기를, “진(陳)나라와 위(衛)나라는 허약하여 정나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하니, 주양왕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적나라 군사로 정나라를 쳤는데, 정나라가 나에게 원한을 품고 있지 않겠는가?” 했다. 부신이 말하기를, “신이 정나라로 가시라고 대왕께 권한 이유는 그렇게 행하는 것이 바른길이기 때문입니다. 정나라의 선조는 주나라 왕실에 공을 많이 세웠습니다. 그들의 후손들도 틀림없이 그 일을 잊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왕께서 옛날에 적나라를 시켜서 정나라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그래서 정나라는 불평을 품고 있습니다. 진실로 정나라는 밤낮으로 적나라가 주나라를 배반하여 자신의 순종함이 해명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왕께서 정나라로 가시면, 정나라는 반드시 기뻐하며 맞이할 것입니다. 또 어찌 원망을 하겠습니까?” 했다. 주양왕의 뜻이 결정되었다. 부신이 다시 청하여 말하기를, “왕께서 적나라 군사의 예봉을 뚫고 성 밖으로 나가시게 되면 적나라 군사들이 모두 막아서 왕에게 어려움이 될까 두렵습니다. 어떻습니까? 신이 가속들을 거느리고 적나라 군사들과 결전을 하겠으니 왕께서는 그 틈을 이용하여 성 밖으로 탈출하십시오.” 했다. 이에 자제와 종족들을 모두 불러 수백 명을 모아서, 왕에게 충성과 의리를 다해야 한다고 권면하여, 성문을 열고 바로 적나라 진영으로 돌진하여 적나라 군사를 끌어내었다.
襄王同簡師父左鄢父等十餘人,出城望鄭國而去。富辰與赤丁大戰,所殺傷翟兵甚眾,辰亦身被重傷,遇頹叔桃子,慰之曰:「子之忠諫,天下所知也,今日可以無死。」富辰曰:「昔吾屢諫王,王不聽,以及此。若我不死戰,王必以我為懟矣。」復力戰多時,力盡而死。子弟親黨,同死者三百餘人。史官有詩讚曰: 「用夷凌夏豈良謀?納女宣淫禍自求。驟諫不從仍死戰,富辰忠義播《春秋》。」富辰死後,翟人方知襄王已出王城。時城門復閉,太叔命釋原伯貫之囚,使於門外呼之。
주양왕은 간사보(簡師父)와 좌언보(左鄢父) 등 10여 명과 함께 성을 나가 정나라를 향하여 달아났다. 부신과 적정이 크게 싸워 살상한 적나라 군사가 매우 많았다. 부신도 또한 몸에 중상을 입었다. 그때 퇴숙과 도자가 다가와서 부신을 위로하기를, “그대의 충성스러운 간언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이오. 오늘은 죽지 않는 게 좋겠오.” 하니, 부신이 말하기를, “옛날 내가 누차 왕에게 간했지만 왕이 듣지 않아 일이 이렇게 되었소. 만약 내가 싸워서 죽지 않는다면 왕은 틀림없이 나를 원망할 것이오.” 하고, 다시 한참 동안 힘써 싸우다가 기력이 다하여 죽었다. 자제와 종족들도 함께 죽은 자가 300여 명이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찬양하기를, “오랑캐를 불러 중원을 쳤으니 어찌 좋은 계책이라 하겠는가? 적나라 여자를 들여와 음행하게 하여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였네. 아무리 간해도 듣지 않아 끝내 싸움에 나가 죽으니, 부신의 충성은 춘추시대에 빛났도다!” 했다. 부신이 죽은 후에 적나라 사람들은 주양왕이 이미 왕성을 빠져나간 것을 알았다. 그때 성문이 다시 닫히자, 태숙이 명하여 사로잡힌 원백관을 풀어서 문밖에서 성문을 열라고 소리치게 했다.
周召二公立於城樓之上,謂太叔曰:「本欲開門奉迎,恐翟兵入城剽掠,是以不敢。」太叔請於赤丁,求其屯兵城外,當出府庫之藏為犒,赤丁許之。太叔遂入王城,先至冷宮,放出隗后,然後往謁惠太后。太后見了太叔,喜之不勝,一笑而絕。太叔且不治喪,先與隗后宮中聚闊。欲尋小東殺之,小東懼罪,先已投井自盡矣。嗚呼哀哉!次日,太叔假傳太后遺命,自立為王,以叔隗為王后,臨朝受賀。發府藏大犒翟軍,然後為太后發喪。國人為之歌曰:「莫喪母,且娶婦,婦得嫂,臣娶后。為不慚,言可醜!誰其逐之?我與爾左右!」
주공과 소공이 성루 위에 서서 태숙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성문을 열고 태숙을 맞이하고 싶지만, 적나라 군사들이 따라 들어와 약탈할까 두려워서 감히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하니, 태숙이 적정에게 청하여 군사들을 성 밖에 주둔시키면, 마땅히 부고에 쌓여 있는 재물로 군사를 위로하겠다고 하니 적정이 허락했다. 태숙이 마침내 왕성으로 들어가 먼저 냉궁에 이르러 외후를 석방한 후에 혜태후를 가서 뵈었다. 태후가 태숙을 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해 한번 웃더니 절명했다. 태숙이 또한 혜태후의 장례도 치르지 않고 먼저 외후와 궁중에서 서로 즐겼다. 이어서 소동을 찾아 죽이려 했으나 소동이 죄가 두려워서 이미 먼저 우물에 몸을 던져 자진했다. 애달픈 일이었다. 다음 날 태숙이 거짓으로 태후의 유명이라 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후에 숙외를 왕후로 삼아 조정에서 하례를 받았다. 태숙은 주나라의 부고를 열어 적나라 군사를 크게 위로한 후에 태후의 상을 치렀다.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노래하여 이르기를, “저녁에 모친이 죽었는데, 또 아내를 취했네. 형수를 취하여 아내로 삼고, 신하가 왕후를 취했네. 그래도 부끄러운 줄 모르니, 말하기도 더럽도다. 누가 그를 쫓아내겠는가? 나와 그대가 해야 하겠지!” 했다.
太叔聞國人之歌,自知眾論不服,恐生他變。乃與隗氏移駐於溫,大治宮室,日夜取樂。王城內國事,悉委周召二公料理,名雖為王,實未嘗與臣民相接也。原伯貫逃往原城去了。此段話且擱過不提。且說,周襄王避出王城,雖然望鄭國而行,心中未知鄭意好歹。行至氾地,其地多竹而無公館,一名竹川。襄王詢土人,知入鄭界,即命停車,借宿於農民封氏草堂之內。封氏問:「官居何職?」襄王言曰:「我周天子也。為國中有難,避而到此。」封氏大驚,叩頭謝罪曰:「吾家二郎,夜來夢紅日照於草堂。果有貴人下降。」即命二郎殺雞為黍。
태숙이 나라 사람들의 노래를 듣고 여론이 자기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을 알고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했다. 이에 외후(隗后)와 함께 온(溫)으로 옮겨가 머물렀다. 궁실을 크게 수리하여 매일 외숙과 즐거움을 나눴다. 왕성 안의 국사는 주공과 소공 두 사람에게 모두 맡겨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여 비록 명색이 왕이라고는 하나 실은 신하와 백성을 한 번도 접견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원백관은 도주하여 자기의 영지인 원성(原城)으로 갔다. 이 부분의 이야기는 더 하지 않겠다. 한편, 주양왕은 왕성을 탈출하여 비록 정나라를 바라보고 행군을 했으나 마음속으로 과연 정나라가 좋아할지 싫어할지 알 수 없었다. 그들 일행이 정나라의 범(氾) 땅에 이르렀다. 그 땅에는 대가 많고 공관은 없었다. 그래서 일명 죽천(竹川)이라고도 불렀다. 주양왕이 그곳 사람에게 물어서 정나라 경계에 들어온 줄 알았다. 주양왕은 즉시 수레를 멈추게 하고 농민 봉씨(封氏)의 초당을 빌려서 머물려고 했다. 봉씨가 묻기를, “무슨 벼슬을 하고 계십니까?” 하니, 주양왕이 말하기를, “나는 주나라 천자이다. 나라 안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몸을 피하여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했다. 봉씨가 크게 놀라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며 말하기를, “저희 동생이 지난밤에 붉은 해가 초당에 비치는 꿈을 꾸었다고 했는데, 과연 지존께서 오셨습니다.” 하고 즉시 동생을 불러 닭을 잡고 저녁을 준비하게 했다.
襄王問:「二郎何人?」對曰:「民之後母弟也。與民同居於此,共爂同耕,以奉養後母。」襄王嘆曰:「汝農家兄弟,如此和睦,朕貴為天子,反受母弟之害,朕不如此農民多矣!」因淒然淚下。大夫左鄢父進曰:「周公大聖,尚有骨肉之變。吾主不必自傷,作速告難於諸侯,料諸侯必不坐視。」襄王乃親作書稿,使人分告齊、宋、陳、鄭、衛諸國。略曰:「不穀不德,得罪於母之寵子弟帶,越在鄭地氾。敢告。」簡師父奏曰:「今日諸侯有志圖伯者,惟秦與晉。秦有蹇叔、百里奚、公孫枝諸賢為政,晉有趙衰、狐偃、胥臣諸賢為政,必能勸其君以勤王之義,他國非所望也。」
주양왕이 묻기를, “동생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봉씨가 대답하기를, “소인의 계모가 데려온 동생입니다. 소인과 이 집에 같이 살면서 같이 먹고 같이 농사를 지어 계모를 봉양하고 있습니다.” 했다. 주양왕이 한탄하면서 말하기를, “그대 농부 형제들도 이렇듯 화목하게 지내는데 짐은 귀한 천자가 되었으나 오히려 어머니와 동생으로부터 해를 입었으니 내 처지가 그대 농민보다 못하구나!” 하고, 처연히 눈물을 흘렸다. 대부 좌언보가 나와 말하기를, “주공 단은 성인이셨지만 일찍이 골육의 변란을 당했습니다. 왕께서는 너무 마음을 상하지 마십시오. 빨리 제후들에게 어려움을 알리면, 제후들이 틀림없이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주양왕이 이에 직접 편지를 써서 사자로 하여금 제(齊)나라, 송(宋)나라, 진(陳)나라, 정(鄭)나라, 위(衛)나라 등에 전하게 했다. 편지의 내용에 대략 이르기를, “짐이 부덕하여 모후가 총애하는 동생 대(帶)에게 죄를 얻어 왕도를 떠나 정나라의 범(氾) 땅에 나와 있음을 감히 고하노라!” 했다. 간사보가 아뢰기를, “지금 제후들 중에 방백(제후의 우두머리)에 뜻을 둔 사람은 오로지 진(秦)나라 군주와 진(晉)나라 군주뿐입니다. 진(秦)나라는 건숙, 백리해, 공손 지 등 여러 어진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고 있고, 진(晉)나라는 조쇠. 호언, 서신 등의 어진 신하들이 정사를 맡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들의 군주에게 천자를 모시라고 권할 것이나 다른 나라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했다.
襄王乃命簡師父告於晉;使左鄢父告於秦。且說,鄭文公聞襄王居氾,笑曰:「天子今日方知翟之不如鄭也。」即日使工師往氾地創立廬舍,親往起居,省視器具,一切供應,不敢菲薄。襄王見鄭文公頗有慚色。魯宋諸國,亦遣使問安,各有餽獻。惟衛文公不至。魯大夫臧孫辰字文仲,聞之嘆曰:「衛侯將死矣!諸侯之有王,猶木之有本,水之有源也。木無本必枯,水無源必竭,不死何為?」時襄王十八年之冬十月也。至明年春,衛文公薨。世子鄭立,是為成公。果應臧文仲之言。此是後話。
주양왕이 이에 간사보에게 명하여 진(晉)나라에 알리게 하고, 좌언보에게 진(秦)나라에 알리게 했다. 한편, 정문공은 주양왕이 범 땅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천자는 오늘에서야 적(翟)나라가 우리 정나라보다 못하다는 것을 안 모양이구나!” 하고, 그날로 공사(工師)를 범 땅에 보내어 임시거처를 짓게 하고, 자기도 친히 가서 기거하면서, 생활 기구를 살펴서 일체를 공급하여 소홀함이 없도록 했다. 주양왕은 정문공을 보고 자못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노(魯)나라와 송(宋)나라 등이 역시 사신을 보내어 문안하고 각각 음식을 바쳤다. 오직 위문공은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노나라 대부 장손신은 자가 문중(文仲)인데 그 소식을 듣고 한탄하여 말하기를, “위후가 장차 죽겠구나! 제후에게 왕이 있음은 마치 나무에는 뿌리가 있음과 같고, 물에 그 근원이 있음과 같다. 나무에 뿌리가 없으면 반드시 말라 죽고, 물에 근원이 없으면 반드시 마르게 되니, 위후가 어찌 죽지 않겠는가?” 했다. 그때가 주양왕 18년(기원전 633년) 겨울 10월이었다. 다음해 봄에 이르러 위문공이 죽고 세자 정(鄭)이 즉위하였는데, 그가 성공(成公)이다. 과연 장문중의 말과 같이 되었다. 이것은 뒷날의 이야기다.
再說,簡師父奉命告晉。晉文公詢於狐偃,偃對曰:「昔齊桓之能合諸侯,惟尊王也。況晉數易其君,民以為常,不知有君臣之大義。君盍納王而討太叔之罪,使民知君之不可貳乎?繼文侯輔周之勳,光武公啟晉之烈,皆在於此。若晉不納,秦必納之,則伯業獨歸於秦矣。」文公使太史郭偃卜之。偃曰:「大吉!此黃帝戰於阪泉之兆。」文公曰:「寡人何敢當此!」偃對曰:「周室雖衰,天命未改。今之王,古之帝也,其克叔帶必矣。」文公曰:「更為我筮之。」得《乾》下《離》上《大有》之卦,第三爻動,變為《兌》下《離》上《睽》卦。
한편, 간사보가 주양왕의 명을 받들어 진(晉)나라에 고하니, 진문공이 호언에게 물었다. 호언이 대답하기를, “옛날에 제환공이 능히 제후들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주왕실을 받들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지금 우리 진(晉)나라는 군주가 자주 바뀌어 백성들이 그것을 예사로 여겨 군신 간의 대의를 알지 못합니다. 주군께서 어찌 주양왕을 천자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태숙의 죄를 토벌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군주는 둘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지 않으십니까? (저희 선조인) 문후(文侯)께서 주왕을 보좌한 공훈을 잇고, 무공(武公)께서 진(晉)의 공적을 연 것을 빛내는 것이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우리 진(晉)나라가 주양왕을 천자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지 않아서, 진(秦)나라가 반드시 주양왕을 천자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면, 방백의 자리는 오직 진(秦)나라에 돌아갈 것입니다.” 했다. 진문공이 태사 곽언에게 점을 치게 하니, 곽언이 말하기를, “크게 길합니다. 이것은 황제(黃帝)가 판천(阪泉)에서 싸운 징조입니다.” 했다. 진문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어찌 감히 이 일을 감당하겠는가?” 하니, 호언이 대답하기를, “주나라 왕실이 비록 쇠퇴하기는 했지만, 천명은 아직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왕은 옛날의 제(帝)에 해당합니다. 출병한다면 태숙 대를 틀림없이 이길 것입니다.” 했다. 진문공이 말하기를, “다시 나를 위해 산가지로 점을 쳐 보시오.” 하니, 곽언이 아래는 건(乾), 위는 리(離)인 ‘대유(大有)’ 괘(卦)를 얻었는데, 그 세 번째 효(爻)가 움직여서 아래 태(兌), 위는 리(離)인 ‘규(睽)’라는 변괘(變卦)를 얻었다.
偃斷之曰:「《大有》之九三云:『公用享於天子。』戰克而王享,吉莫大焉!《乾》為天,《離》為日。日麗於天,昭明之象。《乾》變而《兌》,《兌》為《澤》,《澤》在下,以當《離》日之炤。是天子之恩光炤臨晉國,又何疑焉?」文公大悅,乃大閱車徒,分左右二軍,使趙衰將左軍,魏犨佐之;卻溱將右軍,顛頡佐之。文公引狐偃欒枝等,左右策應。臨發時,河東守臣報稱:「秦伯親統大兵勤王,已在河上,不日渡河矣。」孤偃進曰:「秦公志在勤王,所以頓兵河上者,為東道之不通故也。如草中之戎,麗土之狄,皆車馬必由之路,秦素未與通,恐其不順,是以懷疑不進。君誠行賂於二夷,諭以假道勤王之意,二夷必聽。更使人謝秦君,言晉師已發,秦必退矣。」
곽언(郭偃)이 판단해서 말하기를, “‘대유(大有)’의 구삼(九三)에 이르기를, ‘공이 (대유로써) 천자께 형통하게 한다(公用亨于天子)’고 했습니다. 이것은 싸워 이겨서 왕을 형통하게 한다는 뜻이니, 이보다 좋은 점괘는 없습니다. 또한 건(乾)은 하늘이고 리(離)는 태양을 가리키니, 이는 해가 하늘에 떠올라 만물을 밝게 비친다는 뜻입니다. 건(乾)이 변하여 태(兌)가 되고 태가 변하여 택(澤)이 되어, (택은 혜택이라) 택(澤)이 아래에 있고 이(離) 즉 해가 비취게 되니, 이것은 천자의 은혜가 우리 진(晉)나라에 밝게 비치는 것입니다. 또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했다. 진문공이 크게 기뻐하여 이에 대대적으로 전차와 군사를 검열하여, 좌우 이군(二軍)으로 나누어 조쇠를 좌군대장으로, 위주를 부장으로 삼고, 극진을 우군대장으로, 전힐을 부장으로 삼았다. 진문공은 호언과 난지 등을 이끌고 좌우에서 지원했다. 이윽고 출병하려고 할 때 하동(河東)을 지키는 장수가 보고하기를, “진(秦)나라 군주가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왕을 돕기 위해 이미 황하 가에 주둔하여 며칠 내에 황하를 건널 것입니다.” 했다. 호언이 나와 말하기를, “진(秦)나라 군주가 천자를 도우려고 황하 가에 주둔한 것은 동쪽으로 나가는 길이 통하지 않아서입니다. 초중(草中)의 융족과 여토(麗土)의 적족(狄族) 땅을 전차와 말이 모두 지나가야 하는데 진(秦)나라가 평소에 이 두 종족과 수호를 하지 않아서 그들이 순종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군께서 뇌물을 두 오랑캐 종족 군주들에게 주고 길을 빌려 왕을 도우려는 뜻을 설명하면 두 오랑캐 종족 군주들이 틀림없이 들어줄 것입니다. 또한 사람을 진(秦)나라 군주에게 보내 사례하고 이미 진(晉)나라 군사가 출발했다고 하면, 진(秦)나라 군사는 반드시 물러갈 것입니다.” 했다.
文公然其言。一面使狐偃之子狐射姑,齎金帛之類,行賂於戎狄,一面使胥臣往河上辭秦。胥臣謁見穆公,致晉侯之命曰:「天子蒙塵在外,君之憂,即寡君之憂也。寡君已掃境內興師,代君之勞,已有成算,毋敢煩大軍遠涉。」穆公曰:「寡人恐晉君新立,軍師未集,是以奔走在此,以禦天子之難。既晉君克舉大義,寡人當靜聽捷音。」蹇叔百里奚皆曰:「晉侯欲專大義,以服諸侯,恐主公分其功業,故遣人止我之師。不如乘勢而下,共迎天子,豈不美哉?」穆公曰:「寡人非不知勤王美事,但東道未通,恐戎狄為梗。晉初為政,無大功何以定國,不如讓之。」乃遣公子縶隨左鄢父至氾,問勞襄王。穆公班師而回。
진문공이 그 말을 따라, 한편으로 호언의 아들 호사고를 시켜 황금과 비단을 가져가서 융적에게 뇌물로 주고, 또 한편으로는 서신을 시켜 황하 가로 가서 진(秦)목공에게 말을 전했다. 서신이 진목공을 알현하고 진문공의 명을 전하면서 말하기를, “천자께서 나라 밖으로 몽진 중이십니다. 군주의 걱정하는 바는 곧 저희 군주의 걱정이기도 합니다. 저희 군주께서는 이미 경내의 군사를 모아 군사를 일으켜서 군주의 수고로움을 대신하셨습니다. 이미 계획을 다 짰으니 감히 군주의 대군이 멀리 진군하는 수고로움을 면하게 하고 싶어 하십니다.” 했다. 목공이 말하기를, “과인은 진(晉)나라 군주가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처 군사를 모으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하여 과인이 천자의 어려움을 구하기 위해 분주히 여기에 왔소. 이미 진(晉)나라 군주가 대의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니 나는 마땅히 돌아가 승전보를 기다리기로 하겠소!” 했다. 건숙과 백리해가 모두 말하기를, “진문공이 대의를 혼자서만 행하여 제후들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다. 주군께서 (출병하여) 그 공을 나누지 않을까 걱정하여 사람을 보내 군사를 멈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기세를 타고 나아가 천자를 같이 모신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진목공이 말하기를, “과인도 왕을 돕는 것이 아름다운 일인 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다만 동쪽 길이 뚫리지 않아 융(戎)과 적(狄)이 방해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또한 진(晉)나라 군주는 처음 정치를 하니 큰 공이라도 세우지 않으면 어찌 나라를 안정시키겠습니까. 그에게 양보하는 편이 좋습니다.” 하고, 이에 공자 집을 보내 좌언보를 따라 범(氾) 땅으로 가서 주양왕을 위문하게 하고, 진목공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卻說,胥臣以秦君退師回報,晉兵遂進屯陽樊,守臣蒼葛出郊外勞軍。文公使右軍將軍郤溱等圍溫,左軍將軍趙衰等迎襄王於氾。襄王以夏四月丁巳日復至王城,周召二公迎之入朝。不在話下。溫人聞周王復位,乃群聚攻頹叔桃子,殺之,大開城門以納晉師。太叔帶忙攜隗后登車,欲奪門出走翟國。守門軍士,閉門不容其去。太叔仗劍砍倒數人。卻得魏犨追到,大喝:「逆賊走那裏去?」太叔曰:「汝放孤出城,異日厚報。」魏犨曰:「問天子肯放你時,魏犨就做人情。」太叔大怒,挺劍刺來,被魏犨躍上其車,一刀斬之。軍士擒隗氏來見。
한편, 서신이 진문공에게 진목공이 군사를 물려 돌아갔음을 고하자 진(晉)나라 군사는 마침내 진격하여 양번(陽樊)에 주둔하니, 그곳을 지키는 장수 창갈(蒼葛)이 교외에 나와 군사를 위문했다. 진문공이 우군 장군 극진을 시켜 온성을 포위하게 하고, 좌군 장군 조쇠에게는 범 땅으로 가서 양왕을 영접하게 왕성으로 호위하게 했다. 주양왕은 그해 여름 4월 정사(丁巳) 일에 왕성으로 돌아오니, 주공과 소공이 맞이하여 조정에 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온성의 사람들이 주양왕이 복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떼를 지어 퇴숙과 도자를 공격하여 죽이고, 성문을 크게 열어 진(晉)나라 군사들을 맞아들였다. 태숙 대는 서둘러 외후를 수레에 태우고 성문 밖으로 탈출하여 적(翟)나라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성문을 지키는 군사가 문을 닫고 달아나지 못하게 했다. 태숙이 칼을 빼 들고 군사 몇 명을 베어 죽였다. 문득 위주가 쫓아오더니 큰소리로 외치기를, “역적 놈이 어디로 달아나려 하느냐?” 하니, 태숙이 말하기를, “그대가 나를 성 밖으로 나가게 해준다면 후일에 크게 보답하리라!” 했다. 위주가 말하기를, “천자에게 물어보고 너를 놓아주어도 좋다고 하면 그때 내가 인정을 쓰겠다.” 하니, 태숙이 대로하여 칼을 들어 찌르려고 다가오자 위주가 수레에 뛰어올라 단칼에 태숙을 베어 버렸다. 군사들이 외후를 붙잡아서 위주 앞으로 데리고 왔다.
犨曰:「此淫婦,留他何用!」命眾軍亂箭攢射。可憐如花夷女,與太叔帶半載歡娛,今日死於萬箭之下。胡曾先生詠史詩云:「逐兄盜嫂據南陽,半載歡娛並罹殃。淫逆倘然無速報,世間不復有綱常。」魏犨帶二屍以報郤溱,溱曰:「何不檻送天子,明正其戮?」魏犨曰:「天子避殺弟之名,假手於晉,不如速誅之為快也!」郤溱嘆息不已,乃埋二屍於神農澗之側。一面安撫溫民,一面使人報捷於陽樊。晉文公聞太叔和隗氏俱已伏誅,乃命駕親至王城,朝見襄王奏捷。襄王設醴酒以饗之,復大出金帛相贈。文公再拜謝曰:「臣重耳不敢受賜。但死後得用隧葬,臣沐恩於地下無窮矣。」
위주가 말하기를, “이런 음란한 계집을 살려서 어디에다 쓴단 말인가?” 하고, 즉시 군사들에게 명하여 어지럽게 활을 쏴서 죽이도록 했다. 가련하게도 오랑캐의 꽃같이 아름다운 여인은 태숙 대와 만나 반년을 즐기다가 이날 수많은 화살을 맞고 죽었다. 호증선생의 역사를 읊은 시에 이르기를, “형을 내쫓고 형수를 훔쳐 남양 땅에 살더니, 즐긴 지 반년 만에 재앙을 만났구나! 음녀와 역신에게 만약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았다면, 세간에 삼강오륜을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했다. 위주가 두 구의 시체를 끌고 와서 극진에게 보고하자 극진이 묻기를, “죄인들을 함거에 실어 천자에게 보내 그 죄를 묻게 하는 편이 옳지 않았겠소?” 하니, 위주가 말하기를, “천자가 동생을 죽였다는 오명을 피하여 우리 진(晉)나라의 손을 빌린 것은 빨리 죽여 일을 명쾌히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했다. 극진이 탄식해 마지않다가, 이에 두 구의 시체를 신농(神農) 땅 개울가에 묻어주도록 했다. 한편으로 온성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또 한편으로 사람을 시켜 양번에 주둔하고 있던 진문공에게 승첩을 고했다. 진문공이 태숙과 외후가 이미 죽임을 당했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어가를 타고 친히 왕성으로 가서, 주양왕을 뵙고 승첩을 아뢰었다. 주양왕이 잔치를 베풀어 대접하고, 다시 황금과 비단을 내어 진문공에게 하사했다. 진문공이 두 번 절하고서 감사의 말을 올리기를, “신 중이는 감히 왕께서 하사하신 물품들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단지 신이 훗날 죽은 뒤에 수장(隧葬 ; 굴을 파서 장사지냄)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신은 지하에서 폐하의 무궁한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 했다.
襄王曰:「先王制禮,以限隔上下,止有此生死之文,朕不敢以私勞而亂大典。叔父大功,朕不敢忘!」乃割畿內溫、原、陽樊、攢茅四邑,以益其封。文公謝恩而退。百姓攜老扶幼,填塞街市,爭來識認晉侯,嘆曰:「齊桓公今復出也!」晉文公下令兩路俱班師。大軍屯於太行山之南,使魏犨定陽樊之田,顛頡定攢茅之田,欒枝定溫之田,晉侯親率趙衰定原之田。為何定原之田,文公親往?那原乃周卿士原伯貫之封邑,原伯貫兵敗無功,襄王奪其邑以與晉,伯貫見在原城,恐其不服,所以必須親往。顛頡至攢茅,欒枝至溫,守臣俱攜酒食出迎。
주양왕이 말하기를, “선왕께서 예를 만드실 때 임금과 신하의 신분을 구분하여 생사의 한계를 두었소. 짐이 사사로운 수고 때문에 왕실의 법칙을 문란하게 할 수는 없소. 그러나 경의 큰 공을 짐이 어찌 잊을 수 있겠소?” 하고, 이에 기내(畿內)의 온(溫), 원(原), 양번(陽樊)과 찬모(攢茅) 네 고을을 문공에게 하사하여 그 봉지에 더해 주었다. 문공이 감사의 말을 올리고 물러 갔다. 백성들이 노인들은 부축하고 어린아이는 손을 붙잡고 나와서 길을 가득 메우고는 진문공을 보기 위해서 서로 다투면서 말하기를, “제환공이 지금 다시 나타났구나!” 했다. 문공은 명령을 내려 좌우 두 갈래 군사들을 모두 회군하여 태항산(太行山) 남쪽에 주둔시키고, 위주는 양번의 땅을, 전힐은 찬모의 땅을, 난지는 온의 땅을 접수하게 하고, 진문공 자신은 친히 조쇠를 거느리고 원의 땅을 접수하러 갔다. 진문공이 왜 직접 원 땅을 접수하러 갔는가? 원읍은 주나라 왕실의 경사 원백관(原伯貫)의 영지였기 때문이었다. 원백관이 적(翟)나라 적정(赤丁)과 싸움에 져서 공을 세우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으므로 주양왕이 그 봉읍을 빼앗아 진문공에게 하사한 것이다. 그래서 진문공은 원백관이 원성(原城)에서 불복할까 걱정하여 친히 갔다. 전힐이 찬모에 이르고, 난지가 온 땅에 도착하자 두 고을을 지키는 관리들이 모두 술과 밥을 갖고 나와서 맞이했다.
卻說,魏犨至陽樊,守臣蒼葛謂其下曰:「周棄岐豐,餘地幾何!而晉復受四邑耶?我與晉同是王臣,豈可服之。」遂率百姓持械登城。魏犨大怒,引兵圍之,大叫:「早早降順,萬事俱休!若打破城池,盡皆屠戮!」蒼葛在城上答曰:「吾聞『德以柔中國,刑以威四夷。』今此乃王畿之地,畿內百姓,非王之宗族,即王之親戚。晉亦周之臣子,忍以兵威相劫耶?」魏犨感其言,遺人馳報文公。文公致書於蒼葛,略曰:「四邑之地,乃天子之賜,寡人不敢違命。將軍若念天子之姻親,率以歸國,亦惟將軍之命是聽。」因諭魏犨緩其攻,聽陽民遷徙。
한편, 위주가 양번 땅에 도착하니, 그 고을을 지키는 관리 창갈(蒼葛)이 그의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주나라가 기(岐)와 풍(豊)땅을 버리고 남은 땅이 얼마나 있어 진(晉)나라가 또 네 고을을 받는가? 나와 진(晉)나라는 똑같은 왕의 신하들인데 어찌 내가 복종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병장기를 든 백성들을 이끌고 성 위에 올라 대치했다. 위주가 대로하여 병사들을 이끌어 성을 포위하고 큰소리로 외치기를, “빨리빨리 항복해라. 만사가 모두 끝날 것이다. 만약 성을 함락하면 모두 남김없이 죽이겠다!” 하니, 창갈이 성 위에서 대답하기를, “내가 들으니, ‘덕으로써 중국을 다스리고 형벌로써 사방 오랑캐에게 위엄을 세운다.’고 했다. 지금 이곳은 바로 왕께서 다스리는 땅이다. 기내(畿內)의 백성은 왕의 종친이 아니면 왕의 친척들이다. 진(晉)나라도 역시 주양왕의 신하인데 어찌 병사들을 끌고 와서 위협하여 탈취하려 하느냐?” 했다. 위주가 그 말에 마음이 움직여 사람을 보내 진문공에게 알렸다. 진문공이 편지를 써서 창갈에게 보냈는데, 대략 이르기를. “네 고을은 곧 천자가 하사한 땅이라 과인이 감히 명을 거역할 수 없소. 장군께서 만약 천자의 친척임을 생각하신다면 성안의 백성들을 이끌고 주나라로 귀국하시오. 그래야만 장군이 천자의 명을 따르는 것이오.” 했다. 그리고 위주에게 공격을 늦추고 양번성의 백성들이 옮겨갈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蒼葛得書,命城中百姓:「願歸周者去,願從晉者留。」百姓願去者大半,蒼葛盡率之,遷於軹村。魏犨定其疆界而還。再說,文公同趙衰略地至原。原伯貫紿其下曰:「晉兵圍陽樊,盡屠其民矣!」原人恐懼,共誓死守,晉兵圍之。趙衰曰:「民所以不服晉者,不信故也。君示之以信,將不攻而下矣。」文公曰:「示信若何?」趙衰對曰:「請下令,軍士各持三日之糧,若三日攻原不下,即當解圍而去。」文公依其言。到第三日,軍吏告稟:「軍中只有今日之糧了!」文公不答。是日夜半,有原民縋城而下,言:「城中已探知陽樊之民,未嘗遭戮,相約於明晚獻門。」
창갈이 편지를 받아 보고 성안의 백성들에게 명령하기를, “주나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는 가고, 진나라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남아라.” 하니, 백성들이 대부분 가기를 원했다. 창갈이 그들을 모두 데리고 지촌(軹村)으로 옮겨갔다. 위주가 경계를 정한 후에 돌아갔다. 한편, 진문공은 조쇠와 함께 땅을 빼앗으려 원성에 도착했다. 원백관이 거짓으로 그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진나라 군사가 양번성을 포위하여 그 백성을 모두 죽였다.” 하니, 원성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함께 목숨 걸고 지키기로 맹세했다. 진나라 군사들이 포위하자, 조쇠가 말하기를, “백성들이 진나라에 복종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진나라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군께서 신의를 보이셔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공격하지 않아도 성은 스스로 함락될 것입니다.” 했다. 문공이 말하기를, “어떻게 신의를 보여야 하오?” 하니, 조쇠가 대답하기를, “군사들에게 각자 3일 치의 식량을 가지고 만약 3일 동안 원성을 공격하여도 함락되지 않으면 즉시 포위망을 풀고 물러가겠다고 하십시오.” 했다. 문공이 그 말에 따랐다. 3일이 지나자 군 사무관이 와서 고하기를, “군중에 오늘 먹을 양식밖에 없습니다.” 하니, 진문공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밤중에 원성의 백성들이 성에 줄을 타고 내려와서 말하기를, “성안에는 이미 양번의 백성들이 아무도 살해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내일 저녁에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했습니다.” 했다.
文公曰:「寡人原約攻城以三日為期,三日不下,解圍去之。今滿三日矣,寡人明早退師。爾百姓自盡守城之事,不必又懷二念。」軍吏請曰:「原民約明晚獻門,主公何不暫留一日,拔一城而歸?即使糧盡,陽樊去此不遠,可馳取也。」文公曰:「信,國之寶也,民之所憑也。三日之令,誰不聞之?若復留一日,是失信矣!得原而失信,民尚何憑於寡人?」黎明,即解原圍。原民相顧曰:「晉侯寧失城,不失信,此有道之君!」乃爭建降旗於城樓,縋城以追文公之軍者,紛紛不絕。原伯貫不能禁止,只得開城出降。髯仙有詩云:「口血猶含起戰戈,誰將片語作山河?去原畢竟原來服,譎詐何如信義多?」
진문공이 말하기를, “과인이 원래 3일의 기한을 정하여 성을 공격하고 그 동안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포위망을 풀고 돌아가기로 했다. 오늘이 그 3일째 되는 날이다. 과인은 내일 아침 일찍이 군사를 물리려고 한다. 그대 백성들은 스스로 힘을 다하여 성을 지켰으니, 이제 다른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다.” 했다. 군 사무관이 청하기를, “원성의 백성들이 내일 저녁에 성을 바치려고 하는데 주공께서는 어찌하여 잠시 하루를 더 머물러 성을 함락시키지 않고 돌아가려 하십니까? 만약 식량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면 양번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즉시 가서 구해올 수 있습니다.” 했다. 진문공이 말하기를, “신의는 나라의 보배라 백성들이 의지하는 것이다. 3일간의 명령을 누가 듣지 않았겠는가? 만약에 내가 다시 하루를 더 머문다면 이것은 신의를 버리는 것이다. 원성을 얻고 신의를 잃어버린다면 백성들이 어떻게 나를 믿고 의지하겠는가?” 했다. 진문공은 다음날 새벽이 되자 즉시 원성의 포위를 풀게 했다. 원성의 백성들이 서로 의논해 말하기를, “진문공이 성을 얻지 못해도 신의를 잃지 않으려 하니 이것이야말로 도리를 아는 군주라 하겠다.” 하고, 이에 다투어 성루에 항복하는 깃발을 세우고 줄을 타고 성을 내려와 진문공의 군사를 따르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원백관이 백성들의 행동을 막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염선(髯仙)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한사코 버티면 싸우지 않을 수 없는데, 누가 몇 마디 말로써 산하를 정했는가? 원 땅을 떠남으로써 원 땅을 얻었으니, 속임수가 어찌 신의만 하겠는가?” 했다.
晉軍行三十里,原民追至,原伯貫降書亦到。文公命扎住車馬,以單車直入原城,百姓鼓舞稱慶。原伯貫來見,文公待以王朝卿士之禮,遷其家於河北。文公擇四邑之守曰:「昔子餘以壺飱從寡人於衛,忍飢不食,此信士也。寡人以信得原,還以信守之。」使趙衰為原大夫,兼領陽樊。又謂郤溱曰:「子不私其族,首同欒氏通款於寡人,寡人不敢忘。」乃以郤溱為溫大夫,兼守攢茅。各留兵二千戌其地而還。後人論文公納王示義,伐原示信,乃圖伯之首事也。
진(晉)나라 군사들이 30리쯤 갔을 때 원성의 백성들이 뒤를 쫓아오고 원백관의 항복 문서도 도착했다. 진문공이 수레와 말을 멈추게 하고 홀로 수레를 몰아 바로 원성으로 들어갔다. 백성들이 북을 두드리고 춤을 추면서 경축했다. 원백관이 와서 진문공을 뵈니, 진문공이 원백관을 주왕실 경사의 예로 대한 후에 그 집을 하북에 옮겨 살게 했다. 진문공이 새로 얻은 네 고을의 태수를 임명하면서 말하기를, “옛날에 자여(조쇠)가 항아리에 비상식량을 가지고 위나라로 나를 따라올 때 배고픔을 참으며 먹지 않고 가져와서 바쳤다. 이것이 신의 있는 선비다. 과인이 신의로써 원읍을 얻었으니, 다시 신의 있는 선비에게 지키도록 해야겠다.” 하고 조쇠를 원읍의 대부로 명하고 겸하여 양번도 관할하게 했다. 다시 극진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종족도 돌보지 않고 남보다 먼저 난씨와 함께 마음을 합쳐 나를 맞이하였으니, 과인이 감히 잊을 수가 없다.” 하고, 이에 극진을 온읍의 대부로 삼고 겸하여 찬모도 관할하게 했다. 각각 병사 2천 명을 남겨 두어 그 땅을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뒷사람이 논하기를, 진문공이 주양왕을 환국시켜 의로움을 행하였고, 원읍을 치면서 신의를 보여주어, 패업을 도모하는 첫 일을 했다고 하였다.
畢竟何時稱伯,且看下回分解。
마침내 언제 방백을 칭할 것인가.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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