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휴양촌 마을식당에서 식사를 맛있게 하고 바로 옆 수로(계곡?)를 따라 묘로 올랐다 400여 미터 오르면 된단다
묘역까지 마을길 포장이 잘 이어져 있다
언덕을 오르니 이내 정자와 함께 독서왕 백곡 김득신의 소개석판이 나타났다
백곡 김득신은 조선중후기 시인이자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柏谷)이다. 할아버지는 진주성 싸움의 용장 김시민이고 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김치(金緻)이며, 어머니는 사천 목씨(泗川睦氏)로 목첨(睦詹)의 딸이고, 부인은 경주 김씨이다. 젊은 나이의 김시민이 진주성에서 죽자 큰형 아들인 남봉 김치를 입양해 대를 잇게 하였다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 노둔한 편이었으나, 아버지의 가르침과 훈도를 받아 서서히 문명을 떨친 인물이다. 당시 한문사대가인 이식(李植)으로부터 “그대의 시문이 당금의 제일”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부할 때에 옛 선현과 문인들이 남겨놓은 글들을 많이 읽는 데 주력하였는데, 그 중 「백이전(伯夷傳)」은 1억 1만 8천 번(1억 번은 현재의 10만 번에 해당)이나 읽었다고 하여 자기의 서재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 하였다.
맨 위엔 아버지 김치의 묘소가 있다
남봉 김치(1577년(선조10)-(1625년(인조3))선생은 1609년(광해군1년) 제주판관을 역임하였으며 본관은 안동(安東),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심곡(深谷)이다.
남봉공은 1597년(선조30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설서(設書)를 거쳐 1608년 사가독서(賜假讀書)를 했다. 이 외에 사복사정(司僕寺正)·이조참의(吏曹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간(大司諫)을 거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부제학(副提學)·병조참지(兵曹參知)를 역임하고 인조 초 동래부사 역임 후 경상도관찰사로 재직 순시 중 사망했다.
김득신의 출생지는 불확실하지만, 충청도 증평이란 추정도 있다. 부친을 따라 여러 곳을 옮겨 살다가 부친이 사망한 1624년(21살) 이후 과거에 급제하는 59살 이전에는 주로 지금은 충남 천안시에 속하는 충청도 목천 인근에 살았다고 한다.
김득신은 10세가 되어서야 겨우 글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기억력도 남에 비해 크게 떨어져 방금 외운 것도 돌아서면 잊을 정도였다고 한다. 심지어 그의 부친 김치(金緻)는 아들 김득신에게 공부를 멈추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는 노력은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밥을 먹을 때도, 걸어갈 때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한 권의 책을 몇만 번이나 읽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 정도였다.
김득신이 찬한 남봉 김치의 묘비
아버지 김치는 경상도관찰사까지 한 문신이므로 문인석 등이 석물로 만들어져 있다
한때 외삼촌 목서흠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지만 역시나 그를 깨치게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김득신은 1642년(인조 20년) 39세의 나이로 충청도 지방에서 치러졌을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였다. 소과(小科)에 속하는 진사 시험에 합격하면 벼슬자리에 나아가는 것은 아니고, 서울의 성균관 입학과 진짜 과거시험이라고 할 수 있는 문과(文科)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이었다.
이후 김득신은 과거에 여러 차례 응시했다가 실패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마침내 1662년(현종 3년) 환갑이 다 된 나이인 59세 때 드디어 과거(문과)에 급제(합격)했다. 요즈음으로 치면 환갑이 다 된 나이에 행정고시에 합격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김득신 묘의 동자석도 김득신 마냥 엄청 뚝심있게 생겼다
김득신은 서울에서 병조좌랑, 성균관직강, 예조정랑 등 몇몇 관직을 지냈다
김득신은 나이탓인지 7~8년 정도 후에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충청도 괴산으로 내려가 독서재 취묵당(醉墨堂)을 짓고 시(詩)를 지으며 살았다.
그는 81세 때인 1684년 괴산 땅에서 지내던 중 재물을 노린 도적 떼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당시로선 천수의 삶을 누렸다고 할 수 있지만, 마지막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었음은 안타깝다.
[출처] 김득신의 龍山/龍湖|작성자 묵이지지
묘비의 글은 조선후기 글씨에 능했던 유재 이현이 지었고 글씨는 김득신 9촌 조카인 김봉지의 글씨이다
김봉지가 우리 취옹공 오정원의 사위이니 수촌공 등도 김득신의 이야기를 익히 들었을 터이다
김봉지의 증조부는 김시민의 4촌동생 김시양이다 김봉지의 아들 김덕유는 무신란에 언루되어 서인 노론들에게 피화를 당한다
그렇다보니 김시민의 업적을 헌양하는 행장도 정조대에 와서나 남인학자 정범조가 지어 세상에 알린 것이다
묘역 맨 아래에는 이조판서 화은군 안동김씨의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