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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38
에베소서 4장 22-24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전체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죄와 비참함에 대하여, 그리고 죄와 비참함에서의 구원에 대하여, 그리고 구원에 대한 감사에 대하여 다룹니다. 특히 우리의 죄와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에 대하여 성경은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임을 말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공로가 일부라도 들어가는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이때 어떤 이들은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이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비참한 처지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굳이 선행을 해야 할 이유도, 의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할 때 그러한 구속은 그의 성령으로 그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일과 분리할 수 없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은 행함이라는 열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고 행함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지만, 참된 구원이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았다고 할 때 그 믿음 안에는 행함이라는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세 가지 이유에서 선행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만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을 행해야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두 번째로 믿는 우리가 그 열매로 자기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세 번째는 우리의 경건한 삶을 통해 우리 이웃들도 그리스도께로 인도함 받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선행은 우리의 구원이 값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고 해서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있습니다. 선행이 구원을 얻을 만한 이유와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선행 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을 주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서 계속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행이 없다면, 오히려 감사하지 않는 악한 삶을 계속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을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결코 없습니다. 비록 우리의 부패성을 따라,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따라, 또한 우리의 부족함을 따라 선행이 아닌 악행을 저지를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대상은 반드시 그 자리에서 돌이켜 선행을 열매로 갖게 하십니다.
이러한 돌이킴을 회심이라고 하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8문부터 90문까지 이 회심에 대하여 다룹니다. 먼저 88문입니다.
88문. 참된 회심, 혹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은 몇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까?
답. 두 가지인데, 옛 사람을 죽이는 것과 새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고전6:1-11, 고전5:7, 고후5:17, 엡4:22-24, 골3:5-10).
방금도 말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자, 중생케 된 자라 할지라도 우리 안에는 부패성이 남아 있으며, 연약하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돌이키게 하십니다. 때문에 중생된 자의 돌이킴, 하나님께로의 회심은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회심에는 몇 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는가? 요리문답은 두 가지로 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는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성경으로부터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인데, 오늘 본문만 하더라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4장 22절 이하 24절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여기서 옛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할 때는 그런 옛 사람을 벗어 버리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따르는 것입니다.
옛 사람, 새 사람이라는 표현은 골로새서 3장에서도 나오는데, 5절 이하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5-10) 결국 진정한 회심이란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새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럼 옛 사람은 무엇이고, 새 사람은 무엇인가? 옛 사람은 죄인 혹은 사람의 부패한 본성을 의미합니다. 반면 새 사람은 죄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하는 자 혹은 중생한 사람의 본성을 의미합니다. 맨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부패한 본성을 가진 자로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상태로 만드셨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아담과 하와가 처음 창조될 때는 무죄의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 언약을 스스로 파기함으로 무죄의 상태에서 죄의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타락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은 언약은 아담 개인이 아니라 아담의 허리 안에 있는 모든 인류를 대표로 한 것입니다. 때문에 아담의 타락은 모든 인류의 타락과 같습니다. 그가 범죄 했을 때 그 안에 있는 모든 인류가 그와 함께 범죄하여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이후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이러한 사람을 성경은 옛 사람이라고 표현하는데, 에베소서 2장 2절과 3절의 상태에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러나 새 사람은 이어지는 4절 이하의 상태에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4-6) 즉 본래는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고(엡2:1) 또 죽을 수밖에 없는 자였지만, 그런 상태에 있는 자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내심으로 그와 함께 하늘에 앉게 하신 자들, 그리고 장차 그렇게 될 자들, 그들을 새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하면 옛 사람에서 새 사람이 된 자들, 다시 말해 중생케 된 자들은 모든 죄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로 있게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례와 관련해 살필 때 이런 질문이 있었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0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씻음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때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행하신 제사에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죄 사함을 받고, 또한 성령으로 새롭게 되고, 그리스도의 지체로 거룩하게 되어 점점 더 죄에 대하여 죽고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죄를 씻는다는 것은 우리의 죄책을 씻어 제거하신다는 것으로 설명 드린 바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그러나 죄가 죄책과 부패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때 여전히 부패는 남아 있습니다. 그러한 부패를 성령 하나님의 씻음으로 제거되는데, 이때 요리문답은 성령으로 새롭게 되고 그리스도의 지체로 거룩하게 되어 점점 더 죄에 대하여 죽고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점진적입니다. 점진적으로 죄에 대하여 죽임으로 우리 안에 있는 부패와 오염을 제거하시고 거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들로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거룩하게 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회심이 옛 사람을 죽이는 것과 새 사람을 살리는 일, 두 가지로 되어 있다고 할 때 중생된 자의 상태는 모든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죄책이 제거되어 있는 상태, 그러나 여전히 부패와 오염 가운데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한 것처럼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런 상태에서 우리를 살리신 상태에 있음과 동시에 오늘 본문이 말씀해 주고 있는 것처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할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옛 사람, 즉 우리 안에 있는 이 부패와 오염을 죽이라는 것이고, 새 사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답게 나아갈 것을 권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옛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무엇이고, 새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89문과 90문입니다.
89문. 옛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다는 것을 마음 깊이 슬퍼하며, 그 죄들을 더욱 미워하고 그것을 피하는 것입니다(시51:3-4,17, 욜2:12-13, 롬8:12-13, 고후7:10).
90문. 새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마음 깊이 기뻐하며(시51:8,12, 사57:15, 롬5:1,14,17),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을 행하며 살기를 사모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롬6:10-11, 갈2:20).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하나는 내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인 것입니다. 내적인 것과 관련해서는 옛 사람을 죽인다는 것만 하더라도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다는 것을 마음 깊이 슬퍼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또 새 사람을 살린다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마음 깊이 기뻐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런 마음이 없는 것을 우리는 외식(外飾)이라고 합니다. 겉만 보기 좋게 꾸며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마음의 회심을 요구하십니다. 예를 들어 요엘 2장 12절과 13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반대로 마음 없이 행하는 것, 다시 말해 외식에 대해서는 경계하시며 진노하시는데, 이사야 1장 11절에서 1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그러나 마음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회심은 반드시 외적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옛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할 때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다는 것을 마음 깊이 슬퍼함과 동시에, 슬퍼하기 때문에 그 죄들을 더욱 미워하고 그것을 피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새 사람을 살린다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마음 깊이 기뻐함과 동시에, 기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을 행하며 살기를 사모하며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회심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마음만이 아니라 외적 행위에 대해서 말씀하기도 하시는데, 예를 들어 로마서 8장 12절 이하 14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장 16절 이하 26절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이러한 모든 내용 속에서 우리가 좀 더 주목하고 생각해야 될 표현이 있는데,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다는 것을 마음 깊이 슬퍼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죄에 대하여 마음 깊이 슬퍼해야 하는가? 죄의 결과 때문이 아닙니다. 죄를 지으면 죄에 대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두려움으로 인해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를 싫어하시기 때문이요, 죄에 대하여 진노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슬퍼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조차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관련해서는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백성들, 그러나 아담 안에서 타락한 자들의 죄를 제거하고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레11:45).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좀 더 정확히 번역하면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해 미리 정하셨을 정도입니다(롬8:29).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우리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칭해 주기도 하시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성적으로 아들이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 아들이 죄 가운데 있다고 할 때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 아들인 우리도 하나님 지식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압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지, 그리고 그 죄에 대하여 진노하실 수밖에 없는지를 압니다. 여기에 죄에 대한 슬픔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아프시게 한 것으로 인한 슬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죄악 된 행동은 미워하고 피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른 모든 선에 대해서는 행하며 살기를 사모하면서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회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회심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는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심시키시기 위해 기도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31장 18절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예레미야 애가 5장 21절에서는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자주 언급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5장 31절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11장 18절에서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가 유효적 원인이라면, 하나님께서 회심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들이 있는데 바로 율법과 복음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 말씀처럼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율법 없이 죄를 깨달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만이 하나님 앞에서의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준비케 하는 것이라면, 율법으로 준비 된 자들은 복음의 교리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 복음으로 인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긍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셔서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는 믿음은 반드시 다시금 율법을 보게 하시는데, 앞에서는 복음을 위한 준비로서의 율법이라면 여기서는 율법의 제3사용을 위한 것으로 있습니다. 즉 율법이 우리의 감사와 우리의 삶의 규범이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내용인지, 무엇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내용인지를 보게 하십니다.
율법과 복음이 도구적 원인이라고 할 때 믿음 또한 도구적 원인인데, 왜냐하면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없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11:6)라고 말씀합니다. 즉 믿음이 없으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사하신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안다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거기에 회심이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회심이 없는데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살리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심지어 성경은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고까지 말씀합니다. 이런 점에서 불신자들의 선을 하나님 앞에서의 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어쨌든 율법과 복음도 도구적 원인이요, 믿음도 도구적 원인이라고 할 때 율법과 복음은 외적인 것입니다. 반면 믿음은 내적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 역시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우리를 회심시키십니다.
이와 반대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성령의 은혜가 없이 과연 사람이 스스로 회심할 수 있는가?”, “사람이 과연 그의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발휘하여 신적인 은혜를 받도록 스스로 준비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답을 합니다. 가톨릭의 경우는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 긍정적으로 답을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그들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물론 빌립보서 2장 12절과 같은 말씀을 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나 이어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혹 다른 성경에서 13절 없이 12절과 같은 형태만 있다 할지라도 13절이 전제되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회심과 관련해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회심이 금생에서 완전한가? 앞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0문과 관련해서 언급했지만 거기서 이미 답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회심은 금생에서 완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내생에서 제시되는 바 완전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발전해 갑니다. 특히 로마서 7장에서의 사도 바울의 탄식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분명 중생한 자입니다. 회심한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탄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중생한 자요, 회심한 자이지만 죄와의 싸움이 있고, 그런 죄와의 갈등이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갈라디아서 5장 17절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에 두셨는가? 하나님은 분명 금생에서조차 완전한 회심으로 완전 성화에 이르게 하실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가? 우르시누스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첫째, 성도들이 낮아지고, 믿음과 인내와 기도에서 훈련을 받고, 또한 육체를 거슬러 싸우게 하며, 그리하여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완전함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고, 생각할 분량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게 하고, 날마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시143:2),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6:12)라고 기도하게 하기 위함이다. 둘째, 점점 더 완전에 이르도록 꾸준히 전진하도록 하며, 그 완전함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게 하기 위함이다. 발로 세상을 밟고, 그리스도인의 경주를 더욱 민첩하게 경주하도록 하며, 하늘에 가서야 비로소 약속된 기업을 충만히 누리게 될 것임을 알고서 하늘에 쌓여 있는 그 복락들을 사모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요리문답을 통해 가르쳐주고 있는 것처럼 진정한 회심, 즉 옛 사람은 죽이고 새 사람을 살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죄를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을 행하며 살기를 사모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선행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데, 91문입니다.
91문. 그러면 선행이란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레18:4, 삼상15:22, 엡2:10), 또한 그의 영광을 위해서(고전10:31) 참된 믿음으로 행하는 일들만이 선행이며(요15:5, 히11:6),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사람의 교훈에 근거한 것들은 선행이 아닙니다(신12:32, 사29:13, 겔20:18-19, 마15:7-9).
새 사람을 살리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선을 행한다고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선행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둘째, 참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일단 하나님의 율법은 선과 악의 기준입니다. 율법의 요약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 기준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다 죄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기준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는 것, 그것이 선입니다. 또한 율법의 기준에 따라 하나님이 금하시는 대로 금하는 것, 그것이 선입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은 죄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무엘을 통해 하신 말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라는 말씀은 참됩니다.
여기서 잠깐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명령하시지 않은 중립적인 것들에 대하여 루터주의의 경우는 행해도 되고 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명령이 없는 것은 명령된 것만큼의 구속력이 있다는 것으로 우리 마음대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줍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시는데, 먹고 마시는 문제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도록 한다면 우리의 모든 일상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르시누스의 경우는 그것들 자체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 사랑의 일반적인 본질에 참여하며, 과실을 피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동료들의 구원에 도움이 되고자 하여 행하는 것들인 경우에는 그런 부수적인 요건에 의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답변합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그것이 교회와 성도에게 유익이 되는가? 또한 이웃에서 유익이 되는가? 살펴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기준에 따라 행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5계명 부모에 대한 공경에 있어 믿지 않는 사람들 안에서 믿는 사람들이 볼 때 참 선하다고 할 만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을 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14장 23절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가 선하기 위해서는 율법의 기준도 중요하지만 그 선행의 뿌리가 믿음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믿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공로와 간구하심에 근거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5절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분리된 채로 선을 말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일에 나와 예배를 드릴 때 여러분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일에 나와 우리의 몸과 마음만이 아니라 물질 또한 드릴 때 그 물질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 정성이라고 생각하시면 하나님께서 결코 받으실 수 없는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정성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용납이 됩니다. 혹 율법에 순종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 순종이 100%의 순도를 가진 것이냐?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불완전한 순종을 그분의 완전한 순종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용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중보자 없이, 이런 중보자에 대한 믿음 없이는 결코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행위가 선하기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우리 자신을 높이거나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선행이라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의 선행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선행은 반드시 하나님 사랑에 근거하고, 하나님을 존경하고, 그에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과 감사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의 영광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참된 선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행은 오직 신자만 가능합니다. 불신자는 불가능합니다. 불신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그 어떤 일도 시작할 수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생하지 않는 모든 인간은 본질상 악하며 죄 가운데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마7:11, 엡2:1). 그러나 신자는 율법의 기준에 따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86문에서 살폈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과 그만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해, 또한 믿는 우리가 그 열매로 자기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 또한 우리의 경건한 삶을 통해 우리 이웃들도 그리스도께로 인도함 받도록 하기 위해 선을 행하는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선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