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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만의 무인도, 기도의 섬>의 줄거리:
오대호 중에 온타리오 호에 흩어져 있는 1,800여개의 섬을 가리켜 천섬[Thousand island]이라고 합니다. 이들 섬 중에는 개인 소유가 많다고 하네요. 그런데 우리도 예수를 믿는 한 이렇게 섬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무인도여야 합니다. 이 무인도로 들어가야만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연결을 위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무인도, 기도의 섬
(마가복음 9:25~29)
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만의 무인도, 기도의 섬>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나만의 무인도, 기도의 섬’
제자들이 귀신을 쫓을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묻자 예수님께서는 29절에서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런 종류의 귀신의 특성을 두고 연결단절의 귀신이라는 별명을 붙여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기도의 내용은 22절에서 귀신들린 소년의 아버지가 했던 것과 같은 귀신이 떠나기만을 바라는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서는 같은 사건에 대해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까닭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을 염두에 두자면 제자들을 비롯해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믿음의 기도가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본문 19절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말씀하시며 한탄하셨습니다.
귀신들린 소년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영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또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연결을 끊게 하는 연결단절의 귀신을 쫓는 기도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연결로 나타나게 됩니다. 제자들 또한 하나님과 연결됨을 이룰 수 있었더라면 귀신을 쫓아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곧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마음가짐입니다. 이 믿음은 기도하지 않고는 가질 수가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써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귀신이 쫓겨나가는 역사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을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연결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가 실제로는 하나님과 소통을 이루지 못하였고 소통단절의 귀신이 들어온 소년의 상태와 다름없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불에 뛰어드는 삶이었고, 무언가에 몰입해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물에 빠지는 삶이었습니다. 하던 일이 안 되면 마음이 새까맣게 타는 것 같고 때로는 우울하게 가라앉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했기에 좌절하게 되고 입에 거품을 물고 이를 갈듯이 분노하고 억울함에 마음이 휩싸였습니다. 걱정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느라 새파랗게 질려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도에 대해 생각하며 하나님과 연결되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연결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만의 무인도가 있어야만 합니다.
미국에 있을 때에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지대에 있는 오대호 중에 온타리오 호를 배로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온타리오 호에는 1,800여개의 섬이 흩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섬을 천섬(Thousand island)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섬들 중에는 개인이 소유한 섬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선민으로써 하나님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를 위한 무인도를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무인도가 없는 삶에서는 기도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도 악순환의 기도를 반복해왔습니다. 삶의 현장에는 언제나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합니다. 육체의 감각으로 관계하는 세상이 있으며, 믿음으로 관계하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중에서 마음이 어느 쪽을 첫 번째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현실로 여기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예를 들어 돈이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이때에도 두 가지 선택지가 존재합니다. 돈이 없는 상황을 우선적 현실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우선적 현실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몸이 아플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아픈 것을 우선적 현실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곁에 와 계신다는 것을 우선적 현실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첫 번째 관심의 대상 즉 현실로 삼는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세상을 현실로 붙잡고 나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찾아도 불에 들어가고 물에 빠지는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기에, 속은 타고 걱정과 근심이 생기고 우울해지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이러한 상태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이 무인도에 들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연락선도 들어오지 못하는 무인도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듯이 사람도 끊어지고 사건도 끊어지고 사물도 끊어지는 마음상태가 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세상과의 연결을 끊는 것이 기도를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세상과 끊어져야만 되기 때문에 섬에 들어가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신영균 장로님에 대해서 들어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신성일 씨와 함께 대한민국 영화계를 이끄셨던 배우이십니다. 언젠가 신영균 장로님 댁에서 식사를 대접받게 되었습니다. 구의동에 집이 있었는데 사모님을 통해 그 집을 짓게 된 이유를 듣게 되었습니다.
구의동에 동서울종합터미널이 지어지기 전에는 그 지역 일대가 논과 밭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논과 밭 한 가운데 섬처럼 숲이 있었는데 신영균 장로님의 어머님께서는 그 숲에서 늘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당시의 주부들은 어떠한 편의시설도 없었기에 정말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실 때가 되면 모든 일을 중단하고 숲에 가셔서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자라온 신영균 장로님이 나중에 이 숲을 사서 그 곳에 집을 지으셨답니다. 어머니의 기도의 섬을 사서 집을 지은 셈입니다.
신영균 장로님의 어머님이 어떤 내용의 기도를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삶과 단절된 섬 같은 숲에 들어가셔서 기도를 하셨다는 점이 신앙적인 교훈을 줍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었기에 숲에 들어와 있을 때는 세상과의 단절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세상으로부터 단절이 일어나야만 합니다. 사람, 사건, 사물들을 마음의 첫 번째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연결되어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긴 상태입니다. 이처럼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끊어야만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 기도로 나타나게 됩니다. 무조건 무릎 꿇고 말씀을 들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지금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자각함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세상과 연결된 상태가 끊어져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 기도의 섬으로 찾아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만의 무인도를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가 중요해집니다. 직장에서 5분, 10분이라도 시간을 내고, 여유가 있다면 긴 시간을 내서 나만의 무인도인 기도의 섬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하주차장에 있는 자동차 안에서, 회사 옥상에 올라가서라도 잠시나마 일을 끊고 사람을 끊고 핸드폰을 끊고 하나님을 향하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반드시 하나님과 연결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없는 기도는 무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세상과 연결을 이루고 하나님과의 연결을 끊게 하는 연결단절의 귀신을 너무나 친근하게 여겨왔습니다. 세상일과 마음이 혼연일체로 붙어있는 상태를 자연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돈이 문제로 느껴질 때에 마음은 돈 문제와 혼연일체가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해보지만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마음이 돈과 접촉하는 동안 하나님과의 연결은 이미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들으시지 않는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설령 돈 문제가 해결됐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응답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6절에서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골방은 세상과의 접촉이 끊어지는 곳입니다. 사람도 끊고 일도 끊고 사건도 끊고 사물도 끊고 하나님과의 연결만을 이루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섬과 같은 상황을 만드시며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을 보면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무인도로 들어가신 셈입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깨워서 같이 기도하시며 새벽기도의 습관을 가르쳐주셨으면 더 좋았으리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은 자도록 내버려두시고 홀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온전히 연결되시고자 늘 함께하던 제자들과의 연관성조차도 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제자들과 만나시고 전도여행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많은 사건들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 하셨던 일은 하나님과 연결을 이루는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이 엄청난 사건 뒤에 모든 제자들의 마음은 들뜨게 되었고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추종하는 모든 사람들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셔서 기도하시기를 선택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을 이루고 세상과의 연결을 끊기 위해 나만의 무인도를 찾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항상 하나님과의 연결이었습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동일하게 많은 사람과 사건을 마주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때마다 사람이나 사건들에 마음을 연결시키지 않으시고 하나님과의 연결을 이루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과 연관된 사람들과 사건들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오직 하나님과의 연결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3차에 걸친 전도여행에서 사도 바울이 했던 일은 전도가 아닙니다. 실제로 전도가 이루어졌지만 사도 바울이 하고자 했던 일은 하나님과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에 가서도 빌립보라는 환경에 마음을 연결시키지 않고 하나님과의 연결을 유지하고자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빌립보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전도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에 가서도 고린도라는 환경에 마음을 연결시키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에 갔지만 마음에서 고린도를 끊고 하나님과 연결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게 연결을 이루자 고린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하나님과 연결을 이루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워 무찌를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도발하자 사울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이스라엘 군인들이 골리앗을 마음의 첫 번째 관심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귀신들린 소년이 새파랗게 질렸듯이 이들의 마음은 이미 골리앗에게 새파랗게 질려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마음에서 골리앗을 끊고 하나님과 연결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 연결이 유지되는 중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용하셔서 골리앗을 무찌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 나가서 해야 할 일은 단지 직장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이라는 환경에 대해서 마음을 끊고 하나님과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직장이라는 무대는 하나님께서 활동해 나가십니다. 이것을 위해 직장 안에서 나만의 무인도를 찾아야만 합니다. 여유가 없다는 변명을 하지마시고 무조건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택배하시는 분을 보면 땀을 뻘뻘 흘리며 얼마나 바쁘게 일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바쁜 와중에라도 오 분, 십 분이라도 시간을 내서 트럭의 운전석을 기도의 섬으로 만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과 연결을 포기할 변명은 없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연결되기를 싫어하고 포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을 위해 반드시 기도의 섬을 만드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기도의 내용보다 기도를 하기 위한 조건에 대해 주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일찍이 주기도문을 통해 심도 있게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주기도문도 하나님과의 연결을 위한 기도입니다. 연결단절을 꾀하는 귀신을 물리치기 위해서 필요한 기도는 “귀신아 물러가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연결될 때에 귀신은 물러가게 됩니다. 내가 동조하지 않는 한 귀신의 역사는 나타날 수 없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동조했기 때문에 연결단절의 귀신의 역사는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인도를 찾아감으로써 하나님과의 연결을 회복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귀신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이 됩니다. 내 안에 있는 귀신을 쫓아낼 때에 이웃의 귀신도 쫓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무인도를 찾아서 드리는 기도는 마음의 점검입니다. 지금 마음이 첫 번째 현실로 생각하여 혼연일체를 이루게 된 세상의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그것이 돈 문제라면 돈 문제와 혼연일체가 된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28절을 보면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29절에서 대답하시기를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뒤에 마가는 곧바로 예수님의 두 번째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예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제자들과 동일한 기도의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제의 해답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점검하면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세상과 혼연일체가 되어버린 마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인정해나가는 것이 기도의 주된 내용이 됩니다.
돈 문제와 혼연일체가 되었음을 발견하였다면 십자가를 바라보라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기 위해 세상과 사람과 사건이 끊어진 무인도로 들어갑니다. 그곳은 지하주차장일수도 있고, 트럭의 운전석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화장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디든지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돈과 혼연일체가 된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돈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부모라면 자녀의 문제와 혼연일체가 되어버린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기도를 위해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디에서든 나만의 무인도를 만들어 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영균 장로님의 어머니가 논 한 가운데 섬처럼 있던 숲에 들어가서 삶의 모든 일을 끊고 기도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그 기도의 섬은 아들이 살아갈 집이 되었습니다. 그 관계성이 놀랍습니다. 우리가 기도의 섬을 찾아가서 기도할 때에 삶의 현장에는 사람들이 나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또한 하나님이 역사하실 여건이 조성되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사실들이 존재합니다. 그 중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도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관계하는 첫 번째 대상으로 삼을 때에 삶 전체는 하나님의 주권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때로는 걱정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잠시나마 세상을 잊고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동안 관계된 일들이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일이 잘못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마음이 세상에 붙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끊어내면 세상은 본래 자리인 하나님의 주권의 손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내가 끊어낸다고 나와 관련된 일들이 공해상에 표류하는 것처럼 버려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끊어낼 때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시게 됩니다. 오히려 그동안 내가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은 방해받아 왔습니다.
마음 놓고 나만의 무인도를 찾아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사용할 수 있는 무인도든 상황에 따라 바뀌는 무인도든 상관없습니다. 나만의 무인도를 만들고 그 곳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세상과의 끊어짐을 시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세상과 혼연일체가 되어있는 항목마다 짚어가며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면서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직장에서 사장님의 꾸중이 걱정되는 순간에도 화장실에 들어가서 잠시나마 무인도를 만들고 기도하실 수 있습니다. 회사일과 혼연일체가 되어버린 마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의 죽음이 마음에 임하여 하나님과의 연결은 이루어지고 회사 일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연결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을 추구할 때에 소통을 단절시키는 귀신은 떠나가게 됩니다. 또한 십자가 복음을 통한 연결의 역사와 능력을 전도함으로써 이웃에게서도 소통단절의 귀신을 쫓아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허락해주셔서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길을 터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좌 우편에 오르신 주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하나님과 연결은 이루어집니다. 이 연결을 소망하며 나만의 무인도를 찾아서 세상과 혼연일체가 되어버린 나를 죽이며 세상과의 단절을 꾀하는 기도를 날마다 지속해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