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6장 경제와 기술로 세계 발전에 이바지하다
2. 길고 험난했던 통일교 기업 역사
통일교회의 경제활동 역사는 참으로 길고 험난했으며 그만큼 큰 성과도 거두었다. '돈'적인 성과가 아니라 '기술'적인 성과와 '평화'적인 성과이다. 1951년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남하해 토담집을 지으면서부터 사실상 경제활동이 시작되었다. 교회를 운영하고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교회를 꾸려나갔다. 신도들이 중심이 돼 시작한 브로마이드 사진 판매가 통일교 경제활동의 시초였다. 브로마이드 사진 판매는 초기에는 흑백의 인물이나 풍경사진을 받아 색칠을 하여 컬러로 바꾸어주는 것이었으나 장사가 잘 되자 직접 풍경사진을 찍어 본격적으로 제작했다.
서울로 올라온 뒤에도 경제활동은 계속되었다. 청년들의 모임인 성화청년회에서 사업팀을 구성해 경제활동을 주도했다. 1955년 크리스마스 카드 판매를 시작으로 1956년부터는 한 신도가 제안한 '우표수집 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사업으로 소인된 우표가 연간 20만 장 이상 수집되어 1등품의 경우 5환에 거래되는 등 교회 운영에 큰 도움을 주었다. 문선명의 말처럼, 도장이 찍힌 우표는 버려지는 보잘 것 없는 미물이지만 만물의 대표로 하나님께 돌려드려 만물의 소원을 풀어준다는 사명을 가지고 임했다.
1960년대의 우리나라는 산업이라 할 만한 것이 제대로 없었다. 이제 막 산업화의 발걸음을 시작한 그 시절에 문선명은 기술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리적으로는 만물복귀를 위해, 대외적으로는 대한민국과 세계의 발전을 위해 기업 활동에 뛰어들었다. 1959년 '예화 산탄공기총 제작소'를 시작으로 정밀기계공업, 자동차공업, 방위산업, 전자 및 항공산업, 중화학산업, 식품제약업, 건설업, 조선해양사업, 호텔여행업 등에 진출했다. 세간에서 통일그룹으로 불리는 그 기업들은 1998년 IMF 외환위기 때 큰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러나 문선명이 뿌린 기업의 씨앗들은 훌륭하게 자라 많은 열매를 맺었고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또 몇몇 기업은 지금도 맡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문선명은 기업 활동을 통해 돈을 벌어들이기에 앞서 기술평준화와 세계평화를 위한 도구로 쓰고자 했다. 통일중공업이 배출한 기능 인력은 2만 명이 넘었다. 그들 모두 정밀기계와 자동차산업, 방위산업에서 핵심 기술자로 일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통일산업에서 제작한 공작기계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의 유수한 자동차공장, 기계공장에 쓰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보급되었다. 문선명이 통일산업을 끝내 지키지는 못했지만 그 회사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 경제활동에 대해 문선명은 신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눈물과 피땀을 흘리며 하나님의 심정을 배웠으며 이제는 경제적인 기반을 닦아나가야 되겠습니다. 세계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경제기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공장을 경영하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정성을 들이자는 것이에요.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 버는 이상의 정성을 들이자는 것입니다. 하늘땅이 공인할 수 있고, 억천만 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그러한 기준까지 정성을 들이자는 것입니다. 그 정성으로 말미암아 천주의 재산을 모아 놓고도 남을 수 있는 정성을 들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인류의 고통과 기아문제를 해결하려면 씨를 뿌리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당장 빵 한 덩어리를 주는 것보다는 지금 당장 힘들고 빛나지 않아도 밀을 심고 거두어 빵을 만드는 기술을 알려줘야 함을 역설했다. 그래야만 근본적이고 지속적으로 가난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잘사는 사람은 좀 더 낮은 자리로 내려오고, 못사는 사람은 조금 더 높이 올려주어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함을 평생에 걸쳐 실천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