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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5일 주일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37
설교 제목: 바벨론에 있는 교회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베드로전서 5:13
설교를 위한 묵상: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고루 비를 내리시고 햇빛을 비추시는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포용과 관용의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어떤 대결이나 대조를 발견한다. 그것은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무엇이 있다는 의미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벨리알은 결코 조화될 수 없다고 말했다(고후 6:15).
나는 이번 설교에서 그 두 가지 서로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가인으로부터 시작하여 바벨탑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바벨론으로 완성되는 악의 무리가 그 하나라고 하겠다. 벨리알은 무가치한 사람(worthless men)이라는 의미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스르고 배척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다. 신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삶을 싫어하시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 삶이 생명을 해치기 때문이다. 가인처럼 말이다. 반대로 생명을 살리는 삶도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이다. 이 두 길이 성경 전반에 걸쳐서 대조를 이루면서 우리에게 제시된다. 우리는 그 기준과 특징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망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설교 개요:
1.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
2. 성경이 그려주는 바벨론
3. 아브라함과 히스기야
4. 바벨론 강가에서
5. 바벨론에 있는 교회
***
1.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음을 늘 기억합니다. 특별히 금년에 우리 교회가 표어로 고백하는 인사말은 이것을 더욱 명확하게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우리는 기도를 시작할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루를 시작할 때 이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주님 앞에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연습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큰 위로를 받을 때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음을 깨닫는 그 순간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느낄 때, 우리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고백을 하면서 용기를 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연습을 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모든 만민을 사랑하십니다. 최근에 우리는 편협한 민족주의자였던 예언자 요나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깨닫게 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요나가 미워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사람들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만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연습을 하면서 깨닫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깨닫는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악한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십니다(요한일서 1:5).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무엘과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의 아들들과 아합왕 등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일은 선하고 어떤 일은 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서는 체험을 할 때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하여 새로운 깨우침을 얻습니다. 야곱은 꿈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가 있는 곳이 하나님의 집, 곧 벧엘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있는 데가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계 2:13). 사도 베드로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베드로전서 5:13
사도 베드로가 말하는 바벨론에 있는 교회라는 말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2. 성경이 그려주는 바벨론
베드로는 교회가 바벨론에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바벨론은 무엇이며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바벨론은 고대의 왕국입니다. 성경에서 바벨론은 유다 나라를 멸망시키고 예루살렘을 정복한 강대국입니다. 느부갓네살왕은 바벨론을 대표하는 통치자입니다. 고대 세계의 강대국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혔던 바벨론은 주전 539년에 페르시아의 왕이 될 고레스에게 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땅에 조선이 600년 전에 있었고 그 이전에 고조선이 2000년 전에 있었던 것처럼, 바벨론도 느부갓네살이 통치하던 시대보다 1,200년 전에도 옛 바벨론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바벨론이라는 나라는 성경의 고대 역사와 함께합니다. 성경은 바벨론을 바벨탑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바벨론은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의 후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벨탑이 무엇입니까? 바벨탑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쌓은 교만의 탑입니다. 그 사람들은 가인의 후예입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자기 동생을 죽인 사람입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지만 자기 손으로 도시들을 건설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떠나서 인간중심의 도시를 건설한 가인처럼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온 세상에 흩어져 모든 만물에게 복이 되라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려는 듯, 거대한 탑을 쌓으면서 흩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이름을 내면 그만이라는 삶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려고 큰 소리를 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셨습니다. 시편 2편은 이런 장면을 잘 묘사했습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시편 2:1~4
인간이 아무리 큰 탑을 쌓으며 거대한 도시를 건설한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크고 위대하겠습니까? 바벨탑은 하늘에 닿을 정도로 위대하게 계획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하늘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셨습니다. 하늘에서 비행기를 타고 땅을 내려다보면 인간이 지은 것들이 얼마나 작은가를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오만한 인간은 자신들이 위대한 도시를 건설하고 놀라운 국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비웃으시며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고 결국 그들을 흩어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바벨탑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헛된 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그 후에도 계속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는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세워졌고 그 후에 일어난 나라들 가운데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는 나라를 가리켜 성경은 바벨론이라고 부릅니다. 사도 베드로가 사역을 하던 시절에 온 세상을 호령하던 강대국은 로마제국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모든 나라를 짓밟으면서 그들에게 평화를 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세상 모든 나라로 가서 그들의 재물을 강탈해서 로마의 창고를 가득 채웠습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바벨론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교회가 바벨론에 있다고 은어로 표현했습니다.
3. 아브라함과 히스기야
가인과 그 후예가 도시를 세우고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한 바벨탑을 건설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그들의 헛된 노력을 흩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이 아브람은 나이가 많지만 자식이 없는 유목민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도시를 세울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큰 민족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공동체를 아브라함을 통하여 만드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 도시와 나라는 시날 평지에 모여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세운 나라와는 다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우실 나라는 새로운 나라이며,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게 모델이 되는 공동체이며, 대안공동체이며, 축복공동체, 그리고 생명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만들어질 새로운 공동체는 하나님의 법도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을 통해서 세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고 그 도우심을 힘입은 이 새로운 공동체는 당시의 제국인 애굽을 초토화시키고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났으며 가나안의 강력한 성읍을 무너뜨리고 약속의 땅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윗을 통해서 한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향하여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고 자기의 뜻을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세상에 복이 될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실 것이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삼상 13:14, 사도행전 13:22).
그런데 솔로몬 왕 이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하던 아브라함과 다윗의 전통에 균열이 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솔로몬은 자기 나라의 안보와 번영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웃 나라들과 결혼정책을 폈습니다. 특히 히스기야 왕은 죽을 병에 걸렸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건짐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그만 믿음을 저버리는 일을 했습니다.
그때 바벨론 왕이 보낸 사절단을 보고 히스기야는 너무 기뻤습니다(열왕기하 20장). 사실 히스기야의 이스라엘은 사방으로 강대국에 둘러쌓여 있었습니다. 남쪽에는 이집트가 있고, 북쪽에는 시리아 즉, 아람나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북동쪽에는 바벨론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벨론으로부터 외교사절단이 왔을 때 히스기야는 그들을 환대하면서 왕궁의 모든 창고를 열어 보물을 보여주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왜 바벨론의 사절단에게 나라의 보물을 보여주었겠습니까? 히스기야는 이번 기회에 바벨론과 외교관계를 돈독하게 하면 북쪽의 아람나라와 남쪽의 이집트를 방어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절단이 돌아가고 나서 하나님의 예언자 이사야가 찾아왔습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을 책망하면서 앞으로 바벨론 왕이 군대를 보내서 왕국의 모든 보물을 다 빼앗아서 바벨론으로 가져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왕하 20:17).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지 못하면 결국 강한 사람을 의지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본분도 사명도 잃게 됩니다. 결국 히스기야의 후손들은 바벨론에게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4. 바벨론 강가에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택하시고 그에게 한 나라가 되게 하시며 그들을 통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그 민족이 지금 가인의 후예인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 세운 나라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없고 오로지 자기 능력과 자기 이름을 믿고 사는 사람들만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갈 때 그들은 조롱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런 처량한 사정을 노래한 것이 시편 137편입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시편 137:1~6
이것이 바빌론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느끼는 심정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 있는 교회를 가리켜 바벨론에 있는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본래 바벨론에 있는 교회는 시편 137편처럼 화려하고 세속적인 바벨론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꿋꿋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벨론의 문화에 동화되었다면 그 원수들은 그들에게 시온의 노래를 불러보라고 조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언약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가인의 후예들과 바벨탑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좇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그들이 무명한 자 같고 죽은 자 같고 징계를 받는 자 같고 근심하고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고후 6:8~10). 그들은 바벨탑을 헐어 버리시려고 재앙을 내리신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백성을 건지시려고 애굽에 치명적인 벌을 내리신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삼키며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비록 한 사람의 잘못으로 나라를 잃고 먼 나라에 포로로 끌려와서 이렇게 살고 있지만 바벨론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차라리 굶을지언정 나는 예루살렘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벨론에 있는 교회의 다짐이었습니다. 그런 다짐을 한 사람들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며, 왕궁에서 일하던 느헤미야 같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에스더와 모르드개 같은 사람들도 바벨론에 있는 교회의 선구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눈물어린 기도를 들으시고 때가 차매 강대국 바벨론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렇게 막강할 것만 같던 바벨론이 페르시아의 왕이 될 고레스 왕에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벨탑이 무너진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그들을 통해서 하실 일을 기대할 것입니다.
5. 바벨론에 있는 교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바벨론에 있는 교회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게 그들이 있는 곳은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주님은 우리들에게 우리 교회가 있는 곳은 바벨론임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2,000년 전에 교회에게 바벨론은 세계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던 바로 그 로마제국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은 모든 세상 나라들의 특산물이 모이는 곳으로서 그곳은 세계의 중심이었으며 그곳에는 온갖 금은 보화와 가장 값비싼 비단이 거래되는 곳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은 바벨론처럼 힘으로 약한 나라들을 점령하고 그들의 곳간을 털어 보물을 쓸어갔습니다. 그래서 제국의 수도는 부유하지만 변두리의 백성들은 가난과 노동에 허덕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보기에 로마 제국은 바벨론이 틀림없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사회적으로 배제한다는 점에서 교회는 옛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 강가에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던 그 백성들과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가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여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존경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습니까? 우리가 사는 도시에서는 기업이나 관청, 그리고 학교나 가정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더 정의롭고 더 따뜻하며 더 너그러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더 많은 자본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마음대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합니까? 우리가 사는 도시 서울은 로마처럼 온 세상의 과일을 맛볼 수 있으며 옛날 조선시대의 임금님도 먹을 수 없었을 음식을 식당에서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풍요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이나 공직자들이 나라를 위해 봉사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더 큰 문제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의리나 신념도 쉽게 바꾸어 버리는 사람들이 정계와 공직사회에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더 나은 사회와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노력과 국민들의 지지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우는 나라는 바벨론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큰 민족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시고 그를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리라는 계획을 선언하셨을 때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세운 나라와는 다른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리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서 그 뜻을 다 이루겠다고 말씀하시고 세우시는 나라도 바벨론 같은 나라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 나라는 군사력이 강하고 경제가 튼튼하면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우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다릅니다. 그래서 그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이사야 65:18, 25
사도 베드로가 자기 시대의 신자들에게 바벨론에 있는 교회라고 말했다면 오늘 우리도 바벨론에 있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셨습니다. 그때 땅에 사는 사람들은 언어가 하나였으며 하늘에 닿을 탑을 쌓을 생각으로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그 탑이 점점 올라갈 때마다 사람들의 자부심도 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고 언어가 나뉘었으며 사방으로 흩어져 그들의 프로젝트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벨탑의 운명이며 바벨론의 운명도 이와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바벨론에 대하여 하나님의 예언이 다음과 같이 선포되었습니다: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18:10
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요한계시록 18:21
교우 여러분, 크고 강력하고 가장 풍요롭고 화려하다고 자랑하던 바벨론이 심판을 받아 한 시간에 무너지고 망하게 된다고 예언자는 말했습니다. 이것은 가인의 후예들이 당할 운명이며, 바벨탑 건축자들이 당할 심판이며, 바벨론을 세우는 사람들이 걸어갈 멸망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이 끝나면 하늘로부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내려와 이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던 그 언약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것이며,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 뜻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장차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들, 바벨론에 있는 교회의 임무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신앙의 선배들이 걸었던 것처럼 바벨론에서 나와 하나님을 순전한 마음으로 경외하고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바벨탑을 쌓으려는 사람들의 길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공동체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그곳에서는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으며 누구든지 치료받고 회복되며 모든 사람이 더불어 기뻐하고 함께 힘을 모아 선한 뜻을 펼치는 곳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살아갈 때 그 교회는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등불이 되고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를 미리 보여주는 표지판과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두번째 편지에서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때 이 세상에 심판이 임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녹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볼 새 소망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을 따라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13, 표준새번역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