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찬고지(百年鑽故紙)
백년동안 종이를 뚫어봐도 별볼일 없다.
백장산 백장선사(百丈禪師) 법좌(法座)에 신찬(神贊)이란 스님이 방부를 들이고 열심히 밤낮도 없이 정진을 하였다. 원래 신찬(神贊)스님은 대강백(大講伯)인 계현(戒賢)스님 제자였다. 스승 계현강백은 신찬제자가 경율론 삼장을 다 섭렵하고 대를 이어서 훌륭한 강백이 되기를 바랬다. 그런데 신찬스님은 부처님 경전을 몇 해를 연찬하여 스승을 능가하는 경안을 가졌으나 마음은 항상 허전하고 참선을 하는데 마음이 갔다. 그래서 계현강백스님께 선방에 가서 참선을 하겠다고 하였으나 허락을 하지 않았다. 계현 스승이 허락하지를 않자 몰래 계현 스승을 떠나서 백장선사 회상에 가서 방부를 드리고 밤낮 없이 3년을 열심히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다가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였다. 깨달음을 얻고 나니, 경학을 가르쳐 주던 계현 스승이 생각이 나서 스승이 주석하시는 고령산 절로 돌아와 인사를 올렸다. 계현스님이 인사를 받고 물었다. 너는 나를 버리고 여러해 동안 소식도 없이 돌아다니다가 그동안 무슨 소득이 있었느냐? 그동안 소식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제자를 힐문한 꾸짖음이다. 신찬스님은 공손히 예를 갖추고 아무것도 얻는 바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얻는 바가 없다는 신찬의 말을 듣고 계현 스님은 허송세월을 보낸 것에 노발대발 꾸짖고 절 허드렛일이나 하라고 쫓았다. 어느 날 계현 강백이 신찬제자에게 목욕물을 데우게 하고 등의 떼를, 밀어달라고 하였다. 신찬이 스승이 시키는 대로 등의 떼를, 밀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법당은 좋은데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 (好好法堂 佛無靈驗) 계현스님이 뒤에서 등 떼를 밀면서 자신에게 한 말 같아서 뒤를 돌아봤다. 돌아본 계현스님을 보고 신찬이 중얼거렸다. 부처는 비록 영험치는 못하나 방광은 할 줄 아는구나!(佛雖不靈 也能放光) 계현스님은 몸집 틀 허구 대는 훌륭한데 깨닫지 못한 것을 비유로 찌른 말이다. 거침없이 내 쏟는 제자의 말에 스승인 계현 강백은 더 묻지 않았다. 그러다가 일상처럼 계현스님은 경상을 펴고 부처님 경전을 읽고 있었다. 신찬스님이 인사차 계현스님 방에 들어와 보니, 독경 삼매에 젖어 제자가 들어 온것도 모르시고 경을 읽고 계셨다. 그런데 벌 한 마리가 들어와서 밖으로 나가려고 경을 읽고 있는 계현스승 앞 창문 창호지에 머리를 부딪치고 다시 날아 부딪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신찬스님이 아~ 어리석고 어리석은 벌이여! 활짝 열어놓은 저 문으로는 어이하여 나가지 않고 굳게 닫힌 창호지 문만 두드리느냐? 백년을 쉬지 않고 옛 종이 뚫는다고 한들 어느날에야 나갈수가 있겠느냐?(空門不肯出 投窓也大癡 百年鑽古紙 何日出頭期) 신찬이 창문에 부딪치는 벌을 보고 풍자한 말이지만 계현스님이 말 내용으로 보면 낙은 종이 위에 쓰여진 경전이나 읽고 있는 자신을 꾸짖는 말 같아서 보던 경전을 덮고 신찬을 묵묵히 보면서 물었다.
나는 네가 나가서 허송 세월을 보낸줄 알았는데 오늘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동안 누구에게 가서 어떤 법을 배웠느냐? 신찬이 공손히 예를 갖추고 말했다. 스승님께 무례한 말을 하여 죄송합니다. 실은 소승은 백장선사 법좌에가서 정진을 하다가 불법요지(佛法要旨)를 깨닫고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보니 스승님께서는 아직도 예와 같이 언어문자에 골몰하신 것을 보고 민망하게 버릇없이 이렇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신찬의 말을 듣고 계현스님은 오! 기특한 일이다. 네가 비록 내 상좌(上佐)이나 공부 수행은 나의 스승이다. 지금부터 백장선사를 대신하여 나에게 불법요지(佛法要旨)를 설하여 다오. 계현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신찬 상좌에게 삼배로 법을 청하였다. 신찬은 청법을 받고 법좌에 올라 계현 스승과 대중을 위해서 설법을 하였다. 백장선사께서 수시하기를 영광이 홀로 빛나서 근진(根塵)을 형탈하며 체로친상하여 문자에 걸림이 없도다. 심성은 물듦이 없어서 본래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졌으니, 다못 망연만 여이면 곧 여여불이니라(靈光獨露 逈脫根塵 體露眞常 不拘文字 眞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제자 신찬의 법문을 듣고 계현스님은 개안(開眼)이 되었다는 선화(禪話)이다. 조사선문(祖師禪門)에서는 이렇게 스승과 제자 사이지만 깨달음 앞에는 스승도 깨달은 제자에게는 스승의 예를 갖추고 청법(請法)을 하는 아름다운 선례이다. 이 선화에서 등장하는 문 창호지에 머리를 박고 밖으로만 나가려고 애를 쓰고 머리를 박아대는 벌 한 마리가 수행의 소재가 되어 문자에 얽매여서 평생을 허송세월을, 보내는 스승을 오도(悟道)의 길로 이끄는 제자의 모습이 아름답지 아니한가? 수행은 법랍이나 밥그릇 햇수가 많은 것이 중요하지 않다. 수행의 중요한 것은 깨달음에 있다. 깨닫지 못하면 천년을 살아도 중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