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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양식
본문<요4:27~34>
(지난 2주에 걸쳐) 예수님과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라 여인과의 대화를 살펴보았는데요. 오늘 살펴볼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부분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마친 후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둔 채 마을로 돌아가 마을 사람들을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내용이고, 둘째 부분은 먹을 양식을 사러 마을로 갔다가 돌아온 제자들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 내용입니다.
물을 얻기 위해 우물에 왔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후 물동이를 버려둔 채 마을로 돌아가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마을에서 음식을 갖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단원: 27-30절/ 물동이를 버려 두고
27절, 이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음식을 구하러 마을로 갔던 제자들이 음식을 갖고 돌아옵니다. 이때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상히 여깁니다. 그들이 이를 이상히 여긴 이유는 유대인 남자는 길에서 낯선 여인과 대화를 하지 않는 유대인의 전통 때문이었지요. 심지어 길에서는 자기 아내와도 이야기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과 은밀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제자들에게 매우 이상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 누구도 이에 대해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어요. 그 이유는 제자들이 지금까지 예수님과 함께 생활해왔었고 예수님이 전통이나 관습에 매여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불러 자신과 함께 동고동락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을 자기 곁에 두어 자신의 삶을 그들에게 100% 노출시킨 것은 예수 자신이 어떤 사고방식과 어떤 가치관으로 살고 있는가를 하나도 가리는 것이 없이 다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이 제자들과 같이 예수와 함께 지내면서 예수의 일상생활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3년간 예수와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던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남긴 생생한 기록이 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 기록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기에 우리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알아야 할 모든 지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부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제자들보다 우리가 훨씬 더 주님의 온전한 뜻을 잘 파악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여건에 있습니다. 솔직히 당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속뜻을 모르고 서로 ‘누가 더 크냐’라는 경쟁구도 속에서 육신의 영달을 꿈꾸며 예수를 쫓았던 순 엉터리들 이었습니다. 나중에 십자가 사건 후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를 깨닫게 되었으니까요.
이런 것은 축구나 야구 같은 경기를 볼 때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실제 경기하는 현장에 가면 잘 보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거지요. 오히려 집에서 TV로 중계하는 걸 보면 크로즈 업해서 보여주니까 선수들의 동작 하나하나까지 확실하게 더 잘 볼 수 있고, 게다가 중요한 대목은 반복해 보여주고 곁들어 해설까지 상세하게 해주니까 훨씬 잘 이해하게 되듯이, 과거 멋모르고 따라 다녔던 제자들에 비하면 지금은 성경 전체가 다 있으니까 ㅎ님의 구원의 경륜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거지요. 그들은 수고 하였고 우리는 복을 누리는 겁니다.
28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이 여인이 우물에 온 것은 물 때문이었습니다. 물은 그녀에게 생명이었지요. 하루도 물 없이 지낼 수 없기에 물을 구하러 우물에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이 주시는 신기한 물을 마신 것입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물을 마신 후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일이 이 여인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녀의 목마름이 한순간에 해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그녀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돌아갔던 이유입니다.
이 여인이 긷던 물은 행복을 찾아 끝없이 헤메이는 인생의 정체성에 대한 비유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그 무엇으로 채운다 할지라도 사람에게 근본적인 행복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여섯 남편을 바꾸면서도 만족을 모르던 여인은 갈증이 해갈되지 못해서 계속 물동이를 이고 다녔던 것이지요. 사람의 만족과 행복은 오직 ㅎ님을 만나 구원이 주어질 때만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게 갈증이 해갈되는 본질입니다. ㅎ님을 만나는 것이 생수를 마시는 것이지요.
교회는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으로부터 생수를 마신 자들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셨기에 인생의 행복을 찾던 물동이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자들입니다. ㅎ님의 사랑을 접한 그 행복에 겨워 감사와 기쁨이 용솟음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이고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게 하는 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물을 마신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다음 구절에서 그 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29-30절,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생수를 맛본 이 여인에게 나타난 첫 번째 변화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돌아간 것이고, 두번째 변화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예수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만나 주님이 주시는 생수를 맛본 자들의 모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교회로 모일 때 그리스도가 주시는 생수 때문에 물동이를 버려두고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자들로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의 정상적인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서) 물동이를 버렸다는 말은, 지금까지의 세상에 의미를 두고 살던 가치체계를 버리고 하늘의 가치에 방점을 두는 삶으로 Life/CYCLE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는 비록 실패자일지라도~, 혹은 병든 자라 할지라도~, 또는 각종 문제에 뒤범벅이 되어 앞이 깜깜할지라도~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자가 성도들입니다. 잠시잠깐의 고단했던 육신의 시간이 지나가면 주님과 영원히 사는 천국이 보장된 자들이니까요. 따라서 ㅎ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그저 위로가 될 뿐입니다. ㅎ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로 하여금 ㅎ님을 선택하게 하십니다. 이들이 성도요 교회입니다. ㅎ님을 만난 이 기쁨을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이러한 교회를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삼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물동이를 미련 없이 버려둘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과거의 물동이가 보여선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는 자들의 간증과 찬송만이 있는 곳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기대하시는 교회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어떻게 예수님을 소개했는지 보겠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 가운데 가장 극적인 장면은 예수님이 그녀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라고 말씀하실 때였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이 여인의 마음은 뜨끔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녀가 가장 피하고자 하는 주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내게 남편이 없다고 말함으로 이 대화를 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말씀하시며 이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이 여인이 동네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이란 다섯 남편을 갈아 치우고 지금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처음 만난 한 남자가 자신의 이러한 부끄러운 치부를 드러내어 말한 것입니다. 이때 그녀가 느꼈을 충격과 수치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의도적으로 그녀가 가장 꺼리는 주제를 끄집어내어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이 여인은, 자신의 비밀스런 치부를 드러내는 이 말에 기분이 상해 대화를 중단하고 그 자리를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이 말에 마음의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의 문이 더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농부가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기 위해 타작마당에서 키질을 하면 알곡은 점점 안으로 모여지고 가라지와 쭉정이는 키질하는 밖으로 분리되어 마침내는 땅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마치 키질당하는 것처럼 주님에 의해 죄를 지적 받으면 ㅎ님의 택한 백성은 주님께 더욱 매달리는 모습으로 다가 갑니다. 그러나 주님의 양이 아닌 자는 귀를 막고 듣기 싫어서 도망을 가지요.
성도에게 있어 죄를 지적 받는 게 복입니다. 이로써 자신이 죄로 죽은 자임을 알게 되니까요. 죄로 죽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사도 바울은 성경 곳곳에서 ‘죄로 죽은 자’라는 표현을 했는데, 진의가 무엇일까요? 이건 그냥 종교적인 용어로 한 말이 아닙니다. 죄로 죽었다는 말은 ‘ㅎ님이 원하시는 그 어떤 선과 의를 행하지 못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간은 하나도 예외 없이 구원은 고사하고 다 지옥가야 마땅한 자들이지요.
우리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못하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인본주의 신학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쓴 바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죄로 죽은 자‘라는 말을 덮어 버리고, 인간은 로봇이 아닌 자유의지가 있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구원을 이루어 내는 것이 ㅎ님의 뜻이라고 주장하지만 완전히 성경에서 벗어난 헛된 사상에 불과 합니다. 인간이 의지를 발동 할수록 ㅎ님의 의를 거부하는 불의를 더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롬3:10~18> 읽고~
이게 죄에 사로잡힌 인간의 정체성입니다. 인간의 지정의는 사단에게 사로잡혀 있다.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의지란 죄를 짓는데 있어 자유의지일 뿐 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선, 구제, 베품, 용서, 등도 다 자기를 포장하는 기만행위이지 참 선 아님을 주지해야 합니다. (욥의 선한 행위를~ ㅎ님은 전혀 인정하지 않으심: 결과->극심한 고난 허락, 자기의 선이 클수록 깨뜨려지기 어려움, 그래서 남들보다 더 큰 고난을 통해 죄를 폭로하심, 죄란 윤리 도덕적 범과가 아니다. 자기가 의롭다고 여기는 그 마음이 더 큰 죄악)
선악과 따먹은 인간의 특징은 자기확장을 꾀하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무엇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합니다. ㅎ님을 섬기는 것도 자신을 위해서 하고, 구제도 자신의 가치 챙기기를 위해서 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자기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러므로 자기부인은 성령이 임한 자에게 일어나는 것이지 인간 자기 스스로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처럼 자신이 죄로 죽어 아무 것도 못하며 그저 멸망의 존재임을 알게 될 때, 메시야 그리스도를 찾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고개를 떨구며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게 세리와 창기의 기도 아닌가요?
지금 여섯 남편을 갈아치우고도 성이 안차던 창기와 같은 사마리아 여인이 이런 입장에 있다는 말입니다. 감추어진 죄를 지적 받자 그 죄를 속하기 위해 예배에 대해 질문을 하고 그리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 영의 눈이 열려져 주님이 메시야 이것을 알아본 것이지요. 이 여인의 노력이 아니라 그 여인의 마음을 여시고 깨닫게 하신 주님의 일하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ㅎ님의 소관이지 인간의 소관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저 선물로 받아 누리는 것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일하시는 ㅎ님을 언약의 ㅎ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언약은 구약과 신약을 의미합니다. 옛언약과 새언약으로 구원을 이끄시는 ㅎ님은 정말 지혜와 총명의 신이심을 절감하게 됩니다. 옛언약은 행함에 방점을 둔 것이고, 새언약은 은혜에 방점을 둔 것이지요. 이것은 율법과 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구원이~ 행함으로냐 믿음으로냐? 혹은 법으로냐 은혜으로냐를 구분 짓는 기준입니다. 둘 중의 하나이지 둘 다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정답은 은혜이고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ㅎ님의 구원에서 율법과 행함이라는 것이 필요가 없어 배제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은혜가 은혜 되고, 믿음이 믿음 되기 위해서 율법이라는 인간의 행함이 이용물로 등용되어야 하지요. 이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는 겁니다. 역설적 진리이지요. 그래서 믿음이라는 은혜가 주어지기 전에 행함이라는 율법이 먼저 오는 것 입니다. 행함을 통해 자신이 도저히 ㅎ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임을 발견하라는 의도가 깔려있습니다.
죄 없이는 은혜도 설 곳이 없습니다. 죄를 알게 하는 율법이 없이는 은혜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복음은 동전의 양닢과 같지요. 하나를 무시하고 다른 하나만 존재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율법의 일점일획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까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우리가 구원을 얻었어도 여전히 율법은 눈이 시퍼렇게 살아서 우리의 죄를 지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도가 교만에 떨어지지 않고 죄에 넘어질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기를 버리지 않으시고 같은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ㅎ님의 사랑에 감격할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처음에 죄를 깨닫게 하는 것으로 역할이 끝나는 게 아니라, 세상 끝가지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성도의 구원에 있어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또 붙어있게 하는 아주 중차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롬7장에서, 율법의 가치에 대해,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라고 높이고 있습니다. 율법이 없다면 은혜를 모르기 때문이지요.
요3장에서 주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이미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설명하셨지요. 여기서 물이 바로 물세례인 율법을 말합니다. 죄를 먼저 깨닫게 해서 죄인으로 발견되어져 심령이 가난하게 된 자에게 성령이 임하게 되는 이치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누가 예수를 믿게 된다구요? 자신이 죄로 죽은 자임을 깨닫게 된 자가 구세주 예수를 찾게 되는 것이지요. 그게 아닌 자들이 예수님 믿는 다고 설쳐대는 것은 거짓 신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죽음 없이는 살리는 부활도 없습니다. 율법에 의해 자신이 죄로 죽은 자임이 먼저 확증되지 않으면 절대로 성령이 임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생명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이 곧 자연계에서 늘상 일어나는 생명의 법칙입니다. 영적으로도 그대로 실현된다는 것이지요. 나의 옛사람이 죽어야 성령이 임해서 부활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죽음을 자기부인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 자신이 죄로 죽어 어떤 선도 행할 수 없기에 마땅히 지옥의 멸망으로 떨어져야 할 존재라는 것이 인지된 자에게 성령을 보내시사 살려 내시는 게 ㅎ님의 구원의 경륜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그 은혜를 세세토록 찬양할 게 아닙니까? 이것이 ㅎ님의 창조 목적이고 구원의 이유입니다. 성도는 ㅎ님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되었고 구원받았습니다.
만일 인간 자기의 죽음이 없이 구원되었다면 그가 100% 순전히 ㅎ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못합니다. 은연중에 자기의 행함에 가치와 의미를 챙기겠지요. 생각해 봅시다. 그렇기에 그런 구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의 죽음이 없는 부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먼저 물로 죽고 나중에 성령으로 살려내는 이치, 이게 ㅎ님의 구원입니다.
그렇기에 바리새인이 아무리 신앙이 좋아보여도 ㅎ님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 시대의 믿음이 좋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요(목사, 선교사, 장로, 권사, 집사님들..). 그런데 그 분들이 과연 율법의 정죄를 받아 자신이 죄로 죽은 자임이 확증되었나요?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은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임 낫팅!-이라는 고백을 해 보았느냐는 것이지요.
단언컨대 없습니다. 그 증거가 자기 열심이지요. 믿어지지가 않으니까 지가 행위로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수많은 종교적 행위들을 쌓기에 이마에 땀 흘리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특히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열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 합니다. 단연 세계 일등이지요. 매일 새벽예배가 있잖아요? 목사부터 여기에 목숨을 겁니다(속임수?). 거기에 수많은 예배모임, 금요 철야까지, 수십 가지의 헌금들, 게다가 철저한 십일조 강조,..
여기에 은혜가 어디 있고 복음이 어디 있어요? 인간의 열심과 수고로 구원을 쟁취하겠다는 각오가 보이잖아요? 한마디로 율법신앙입니다. 정작 은혜가 뭔지 복음이 뭔지를 모르는 그야말로 ㅎ님에 대해서 문외한들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일리지를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이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무덤들아! 질타를 하신 것이지요.
작금의 기독교인들은 바리새인의 신앙 노선을 그대로 답습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행위로 치장된 곳에 십자가 은혜가 설 곳이 어데 있어요?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풀어 지는 ㅎ님의 선물인데, 유대인들처럼 자기 의로 충만해져야 ㅎ님이 복을 주신다고들 여기고 있으니 정작 한국의 기독교는 참 기독교가 아닌 거지요. 변질된 기독교, 변질된 복음, 샤머니즘화 된 무당 잡교일 뿐입니다. 율법이 뭔지 복음이 뭔지를 모르는 소경집단들입니다.
ㅎ님은 율법과 복음이라는 쌍두마차로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먼저 율법을 통해 행함으로 불가능함을 깨닫게 해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도록 안배하시는 ㅎ님의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IX를 믿는 것이 생명과를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반드시 먼저 먹고 자신의 수치를 발견하여 두려워 떠는 자에게 ㅎ님은 찾아가셔서 가죽옷을 입혀 주시는 겁니다.
자신의 수치가 발각되어 두려워 떠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이 생수를 주시는 상황이, 선악과 따먹고 두려워 떠는 아담과 하와를 찾아서 가죽옷을 입히신 그 장면과 똑같은 데칼코마니라는 것입니다. 5남편을 갈아치우고도 성이 안차서 또 다시 6째 남편과 살고 있는 여인, 욕망의 화신이 되어 온갖 세상 것을 탐하며 갈증을 해결하려는 죄인의 모습이 주님에 의해 백일하에 드러날 때가 복의 순간이지요.
세상에서는 실패자로 낙인 찍혀 살지만 이렇게 인생의 배가 파선 되어야 자신의 내면의 죄상을 깨닫게 되고, 그런 자에게 구세주 그리스도가 찾아가 만나 주시는 것이기에 이게 복있는 자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율법에 갇힌 유대인에게 말씀하시기를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ㅎ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기쁘게 하거나 즐겁게 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언제나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주시는 친절하고 자상한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수는 자기들이 상상해낸 다른 예수에 불과합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예수가 어떤 분인지 선입관을 내려놓고 예수가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보면, 언제나 퉁명스럽고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친절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친화력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교회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만나 생수를 마셨던 야곱의 우물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세상의 행복을 찾아 헤매던 자들에게 예수를 중매하는 곳이어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가 주시는 생수가 제공되지 않는 교회라면 교회라 말할 수 없습니다. 생수가 선포되지 않기 때문에 교회로 모인다 하면서 모이기만 하면 온통 세상 물 이야기만 할 뿐입니다.
교회는 생수를 맛본 예수의 증인들의 모임입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물 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마시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2단원: 31-34절/ 예수님의 양식
31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4: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 여인이 동네로 돌아간 후 제자들이 예수님께 음식을 건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음식을 갖다 드렸나”라며 의아해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육의 음식을 말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삶의 목적’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32절에서 말씀하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란 바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34절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 순간도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잊어버리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양식은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그것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모르고 있었던 예수님의 양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루하루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배불러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쁨으로 사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아들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뜻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명을 갖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요6:38-40> 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38절을 보면 예수님이 어떤 생각으로 사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들여다 볼 때 놀라게 되는 사실은 예수님은 단 한번도 자신의 뜻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에 내 뜻은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자 하나님의 지위를 포기하셨습니다.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인 종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죄의 저주로부터 영원히 해방시키셨습니다(할렐루야~)
39절을 보면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양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 아버지의 뜻이 이루는 유일한 길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죄를 자신의 몸에 전가시켜 십자가에 달려 아버지의 저주를 받고 죽는 것이었지요. 그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예수의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죄는 여전히 우리 육신에 살아서 끊임없이 용솟음치고 있습니다. 이 죄를 다스릴 힘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게 하는 능력이 믿음입니다. 교회는 이 보배로운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들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끝까지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 붙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주어진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리스도가 보이게 하고, 그리스도와 내 삶을 하나 되게 하시는 아버지의 계획을 보게 하십니다. 단 한 순간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하십니다. 믿음으로 노아를 방주와 한 몸 되게 하셨듯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한 몸 되게 하십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받은 종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게 맡겨진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 있지는 않은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각자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이러한 예수님의 양식이 우리의 양식이어야 합니다. 우리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는 배고픔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주어진 자들입니다. 이 양식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영광인지 알아야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이 기쁨과 영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의 유언과 같은 말씀을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딤후4:6-8) 4: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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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