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총회가 개최된 원당교회는 1905년에 강경교회의 지교회로 세워진 유서 깊은 교회다. 이 교회는 스테드만 선교사에 의해 서양식으로 이름을 바꾼 최미리암 여사가 원당리 정성교(鄭成敎) 씨와 같이 개척했다. 그리고 남편 최원여(崔元汝) 씨를 전도하여 교회의 주동역할을 하게 했다. 스테드만 선교사로부터 침례를 받았던 고내수(高乃秀) 씨는 양화면 초왕리에서 교회를 개척했지만, 스테드만 선교사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하여 군산(群山)에 주재하고 있는 남장로교 선교사를 방문한 뒤 의논 끝에 장로교단으로 떠났다. 함께 침례를 받았던 김치화(金致化) 씨도 원당리 1구에 장로교회를 세우고 수년간 이끌어갔다. 그러다가 몇 년 뒤에 김치화 씨는 깊이 뉘우치고 원당교회로 돌아와 1927년까지 목회를 했다. 당시 소리꾼은 멸시의 대상이었는데, 김치화 씨는 소리꾼 출신이었다.
1927년경부터는 윤효중(尹孝重) 씨가 12년 동안 목회하고, 1938년부터는 윤석면(尹錫冕) 통장이 사역을 8년간 담당했다. 특히 윤석면 통장은 신유의 은사를 받은 분이어서, 환자가 생기면 기도로 병을 고쳐 주었다. 우리 가정이 기독교 가정이 된 때는 윤통장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윤통장이 별세하면서, 자기의 후계자를 지명하기 위해 교회의 전 제직을 모아놓고 나의 아버지를 지목했다. 그만큼 아버지는 교회 일에 열심이셨다. 그러자 어찌된 영문인지 나의 부친도 윤통장이 행하던 신유의 은사와 똑같은 방법으로 사역을 하게 되었다. 어떤 병자에게라도 손을 얹고 기도하면 곧 치유되었다. 그 때문에 나의 부친은 더욱 열심히 심방과 전도에 임했고, 교인 가정에 환자가 생기면 밤낮 없이 찾아가셨다. 때로는 정신병과 같은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 보름 이상 집에 들어오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 시절 원당교회를 거쳐갔던 목회자들 가운데 몇 분이 내게는 중요한 영향을 끼친 목회자들이었다. 우선 1946년에 경북 예천 출신의 박기양(朴基陽) 목사가 52세의 나이로 초빙되었다. 박목사는 성직 생활 29년의 경험을 가진 목사로 체구가 당당하고 키가 커서 보기만 해도 든든했다. 그의 경상도 사투리는 남에게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박목사는 친정 부모와 같이 포근한 대인관계와 풍부한 성경 지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평생 남에게 듣기 싫은 언사를 쓰지 않은 분이었다. 그래서 인지 때로는 매사에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다소 우유부단하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는가를 배웠다.
1947년에는 경상도 태생의 노재천(盧載天) 목사가 63세의 나이로 원당교회에 부임했다. 노목사는 용모가 단정하고 외유내강의 성품을 지닌 분이었다. 일찍이 한학을 수학한 분으로, 성직 43년의 풍부한 경험과 함께 대단히 예의 바른 삶을 살았던 분이다. 그는 필요한 말 외에는 말을 삼갔고, 농담도 잘 하지 않았다. 그의 생활은 예의가 있었고, 규칙적이었으며 남에게 헛점을 보인 일이 없었다. 심방을 할 때도 시간만 있으면 성경을 보았고, 그의 성별된 삶은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은 값진 재산이며 목숨보다 더 귀하다는 진리를 배웠다.
1948년은 김용해 목사가 42세의 나이로 본 교회에 부임한 해였다. 김목사는 14년의 교역 경력을 가진 분으로,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대인관계에서는 사교심이 천부적이었고, 유머도 풍부해 어느 곳에서나 좋은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의 설교는 항상 힘찼고 웅변적이었다. 그런 그에게서 나는 지혜와 성별된 생활 태도를 배웠다. 나는 이 세 분을 통해서 목회자의 귀감을 보았다. 그분들은 이후 내가 직접 목회할 때 여러 가지 방면에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고, 정신적으로도 많은 위안과 격려를 주었던 분들이다.
친정 부모와 같이 포근한 대인관계와 풍부한 성경 지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박기양 목사
용모가 단정하고 외유내강의 성품을 지닌 노재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