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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 믿기와 그리스도인 되기의 차이>의 줄거리:
이런 말은 처음 들어봅니다. 예수 믿기와 그리스도인 되기의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요? 가감 없이 전제 없이 사도행전의 기록을 따라가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믿어도, 그래서 선물로 임하신 성령의 역사가 크게 있어도 아직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에는 자격 미달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기와 그리스도인 되기의 차이
(사도행전 11장 19절~30절)
19.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 믿기와 그리스도인 되기의 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 믿기와 그리스도인 되기의 차이’
26절의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는 말씀은 읽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아래 교회의 역사가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예루살렘이 아닌 이방 땅 안디옥에서 주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 믿기와 그리스도인 되기는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러한 표현에 대한 차이를 지목하는 것은 저도 처음이고 여러분도 처음 접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자의적으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도행전을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교회를 이끄시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본문 21절에서도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안디옥에서 일어난 전도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였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를 주권적으로 이끄시는 기점으로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로 시작된 박해로부터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까지 가서 예수를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를 기록하고 있는 7장부터 본문이 기록된 11장까지를 보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이로부터 이미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분명한 과정이 존재함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는 말씀에서 제자란 예수님의 열두 제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로부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안디옥에서의 전도 이전까지는 이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으로 불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기까지는 반드시 겪어야 할 과정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의 내용을 가감 없이 따라가며 제시되고 있는 내용들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단지 예수를 믿어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것이 아니라 편견이 제거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들 전체입니다. 다만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들 전체로서의 교회를 한 번 더 구원하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교회를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로 바꾸어나가셨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박해로 예루살렘 교회는 흩어지게 되었고 이방인들에 대한 전도가 활성화됨과 함께 안디옥 교회가 중심이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했던 일은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이 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13절에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구원을 이루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우리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구원을 이룬 상태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차원에서 구원을 이루는 차원으로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을 이루는 자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받은 구원을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막힘없이 나타내실 수 있는 상태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고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를 좀 더 이해하기 쉽게 구원 받기와 구원 이루기를 나누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하버드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부모님은 자녀의 하버드 대학 입학을 기뻐하며 잔치를 벌일 것입니다. 그러나 입학은 끝이 아닌 시작입니다. 이제 하버드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졸업을 해야만 합니다. 만약 낙제를 해서 졸업을 못한다면 입학도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을 받는 것과 이루는 것의 차이도 이와 같습니다.
다만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천국을 온전히 누리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구원을 이루는 자가 되는 일에는 우리의 노력은 거의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노력이 아닌 인식입니다.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없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없기에 우리가 전하고 듣는 복음은 이상한 형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구원을 이루는 삶이 얼마나 쉽고 재미있는지를 전혀 모른 채 구원을 이루라는 말에 부담을 느낍니다.
분명 사도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두렵고 떨릴 정도로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과 떨림이란 구원을 받고 이루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떨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이루는 일 자체는 결코 두렵고 떨 일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을 이루는 것은 재미있고 축복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이루는 것처럼 기쁘고 행복하고 보람된 일은 달리 없습니다. 구원을 받았는데도 그 좋은 구원을 이루는 삶, 그 재미있는 구원을 이루는 삶, 그 기쁜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없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구원을 이룰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 불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단계까지 가기 위하여 꼭 필요한 일은 편견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에 다소 어처구니없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안디옥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고넬료 집안의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이방인들에게도 허락하셨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또 11장 상반부에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 복음을 전한 사건에 대해서 유대인 할례자들에게 정죄와 비난을 당하였으나 결국은 이들도 이방인에 대한 전도가 성령의 역사임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베드로가 보았던 환상은 이방인 선교의 예고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환상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유대교에서 부정하다 여겨지는 짐승들을 잡아먹으라 하시고 베드로가 못하겠다며 항변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환상이 세 번이나 있고서야 베드로는 이방인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다만 여기서 베드로의 태도는 보수적이다 못해 답답하기까지 합니다. 교회의 수장으로서 성령의 큰 역사까지 일으켰던 베드로의 생각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란 “예, 주님 알겠습니다.”라는 대답뿐입니다. 유대인들의 편견을 염두에 두더라도 “제가 부정한 짐승을 먹어본 적이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따르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했어야 합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항변하였고 이에 하나님께서는 9절에서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시기까지 합니다. 환상으로부터 시작된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의 사건은 우리가 가진 편견이 이토록 강력하다는 것을 제시합니다. 편견은 하나님이 직접 제시하시는 일조차 거부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편견은 고정관념, 선입견, 습관적인 가치기준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편견이 어찌나 무서운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데도 “예”라는 한마디를 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 항변하게 합니다. 다시 빌립보서 2장 13절을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편견이 깨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러한 상태였다면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보여주신 부정하다 여겨지는 짐승들을 잡아먹으라는 명령을 하시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뜻이 소원이 되어서 “저 짐승들을 다 잡아먹고 싶다.”라고 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그렇게 하시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은 베드로의 마음에서 편견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처럼 성령이 크게 역사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이 편견을 뿌리 뽑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관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쳐내고자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지만 아직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에게 엄청난 궁금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이나 그리고 기존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이게 했던 습관적인 가치기준을 갖는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도들이나 초대교회 교인들조차 편견을 버리기 어려워했다면 대체 우리 같은 사람들이 편견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서도 성령의 역사가 어떻게 활발히 일어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인정할 때에 세상에 대한 탈출로서의 별세는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설령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마술사 시몬 계통의 가짜 교인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빌립 집사님에게 물었던 성경 구절은 메시아 수난에 대한 내용으로 예수님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빌립 집사님은 그 내용을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제시함으로써 풀어주었고 에디오피아 내시는 세상을 떠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요청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세상을 떠나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내가 함께 죽었다고 인정할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마음도 부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승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신 인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확신하며 하나님을 소원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상태는 끝이 아닙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상태에서도 여전히 우리의 몸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이 땅에 남아서 세상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로부터 일어나는 일들이 바로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로부터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누구보다도 강하고 큰 편견을 가지고 있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편견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만남을 통해 철저히 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은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이어져 내려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에 올라가 인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소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이 세상을 접할 때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길이 있습니다. 생각이 시작되면 으레 움직이는 길이 있고 감정도 의지도 움직이는 길이 있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고, 감정이 있다는 것은 감정의 상황이 지금 활동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때 평생을 살면서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방식이 우리의 인격 속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을 따라서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좋음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소원하는 중에도 육체는 세상을 대면하게 됩니다. 이때 의식은 습관적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처럼 예수님보다 편견이 더 가까운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평생을 살면서 반복해온 생각의 방식이 편견이 되고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기준이 되어서 나타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현실이 아닌 환상 속에서조차 이러한 편견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에 대해 편견으로 반론을 제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의 받은 구원을 이루는 일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소원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소원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런 이의나 반론이나 반발이 없어야만 합니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하나님과의 사이에 편견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소원으로 나타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소원할 수 있는 것이 받은 구원을 이룬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아먹으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대답은 “좋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을 이룬 상태였다면 이러한 대답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직 세상의 편견에 사로잡혀있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반론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베드로의 마음이 아직 밀착되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베드로 사이에 세상의 편견이 끼어있었던 것입니다. 이 상태의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지만 아직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도들과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기까지 동일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고넬료 사건을 통해 편견이 깨어지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대로 이방인에게도 말씀을 전하며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나 교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셔서 많은 기적들이 일어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하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은 나의 주체성이 비어지고 하나님의 주체성이 들어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이 소원의 형태로 나타나면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릇의 삶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에 뿌리를 둔 편견을 짜장면 그릇으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라는 그릇을 사용하시고자 할 때 유대인의 선민의식이라는 짜장면이 담겨있는 상태입니다. 베드로에게 담겨있는 편견이 유대인의 선민의식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나타내실 수 있는 역사 또한 예루살렘과 유대 경계 안에 한정된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짜장면을 담았던 그릇에 짜장면을 추가해서 먹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베드로나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인들을 통해 성령의 역사는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짜장면 그릇에 다른 음식을 담으려고 한다면 이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편견의 그릇에 남은 짜장면이 다른 음식의 맛을 망치게 됩니다. 짜장면이 남아있는 그릇에 짜장면을 추가할 수는 있어도 짬뽕이나 탕수육을 담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당시 사도들이나 교인들에게서 일어난 일도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에 관한 하나님의 뜻과 역사는 담을 수 있었으나 편견으로 인해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역사는 담길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넬료 집안의 성령강림 사건은 짜장면 그릇을 닦아내는 설거지와 같았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에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짜장면 그릇에 짬뽕을 담으려고 하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짜장면 이외에 다른 음식을 담아본 적이 없습니다. 짬뽕을 담으려고 하지 마세요.”라는 심정으로 항변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스스로를 짜장면만을 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릇이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가진 편견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 번이나 환상을 보여주시며 이 그릇을 씻어내셨고 짬뽕도 담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편견의 설거지는 베드로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넬료 집안의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다른 모든 사도들과 교인들의 마음에서도 편견을 씻어내는 설거지는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들의 마음에서는 그동안 법보다 주먹이 빠르듯 예수님보다 편견이 더 빨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강권적으로 이방인이라는 짬뽕도 담으라고 요청하셨고 그동안 갖고 있던 짜장면이라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편견을 다 씻어버릴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정죄하고자 했던 교인들 또한 이것이 성령의 역사임을 듣게 됨으로써 이들의 마음도 이방인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씻기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겪은 후에 비로소 안디옥 교회를 통해 이방인들에 대한 전도가 본격화되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은 무척 중요한 내용이기에 십자가온라인교회 모임을 통하여 더 심화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릇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편견은 반드시 깨어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러한 내용을 등한시 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죽음을 적용함에 있어서도 그 대상은 주로 외부에 있었습니다.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자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상황들, 세상의 가치들에 대해서 죽는 것을 우선시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님보다 편견이 더 가까운 인격의 내부적 상황에도 십자가 죽음이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본문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큰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끄시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비로소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안디옥 사람들은 박해를 받아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며 안디옥에 자리 잡고 사는 사람보다 큰 평강과 기쁨 가운데 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대한 편견이 깨진 시점에서야 등장할 수 있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편견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강권적 과정이 없었더라면 구원을 이루는 단계에는 이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과 교인들이 편견에 사로잡힌 채로 살아가도록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편견을 깨뜨리는 과정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를 믿어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자들은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다만 구원은 자동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반드시 편견을 깨뜨리시는 과정을 겪게 하십니다. 그럼으로써 구원을 받은 자에서 구원을 이루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땅에 남아있는 몸과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은 세상에 살아있을 동안에만 유효한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소원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소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밀착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 끼어있는 세상의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가치기준의 방해받음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과 선입견과 습관적인 가치기준들을 깨뜨리시기를 바라십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이 주어진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이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심으로써 편견을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뜻을 소원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며 모든 영적인 재미와 축복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의 이름만을 부르던 우리를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 예수님을 날마다 따라가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이끄신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큰 평강 가운데 막힘없이 이루어지는 주인공들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