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고(先考) 통훈대부 행 금성현령 회양진관병마절제도위(行金城縣令淮陽鎭管兵馬節制都尉) 부군 행장
공은 휘가 일성(一星)이고 자가 덕휘(德輝)이며 성이 남씨이고 관향이 의령이다. 성을 얻은 것은 신라 때 영의공 휘 민으로부터이고, 의령을 관향으로 삼은 것은 고려 때 추밀원 직부사 휘 군보로부터였다. 영의정으로 시호가 충경공인 9대조 휘 재가 처음 우리 조선조에 벼슬하였고, 충경공의 손자 휘 지는 벼슬이 좌의정으로 시호가 충간공이니, 할아버지와 손자가 이어서 정승이 되었는바, 이 사실이 모두 국사(國史)에 기재되어 있다. 증조 휘 언순은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이고, 조고 휘 타는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이며, 선고 휘 식은 통훈대부 행 평강 현감이고, 선비 의인 연산 서씨는 참판에 추증된 서주의 따님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여 글을 배울 때에 스승을 수고롭게 하지 않았으며, 약관이 되기 전에 이미 과장(科場)에 명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번 향시에 입격하여 사람들보다 앞자리에 있었으나 대부분 회시(會試)에서 불우하였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세상일이 크게 어려워지자 벼슬에 나아갈 뜻이 없어서 비록 때로 어버이의 명령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곧바로 그만두고 응시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끝내 급제하지 못하였다. 갑신년(1644, 인조 22) 겨울에 대의인(大宜人 모친 서씨 부인 )이 병환을 앓아 위태로웠는데, 공은 밤낮으로 간호하여 손수 약을 달여 올리며 눕고 일어날 적에 부축하느라 옷을 벗지 않고 눈을 붙이지 않기를 몇 달 동안이나 하니, 친족과 고을 사람들이 감탄하며 지극한 효성을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하였다. 경인년(1650, 효종 1)에 평강 부군(平康府君)의 상을 당하였고, 복을 마칠 즈음에 또다시 대의인의 상을 당하였는데, 곡하고 가슴을 치고 슬퍼하였으며 제수와 상식을 정성으로 올려서 게을리 함이 없이 상을 잘 마쳤다. 을미년(1655) 겨울에 조정에서는 3품 이상에게 선비를 천거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참의 이유겸(李有謙)이 공이 부모의 상을 당하여 효성을 다했다고 천거하였으나 마침 삼공(三公) 중에 공을 아는 자가 없어서 도당(都堂)에서 회감(會勘)할 때 삭제되고 등용되지 못하였다. 이때 공은 결성(結城)의 시골집에 있었는데, 불초고(不肖孤)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천거된 가운데 삭제 당하였으니, ‘예상하지 못한 칭찬과 온전하기를 구하다가 받는 비방〔不虞之譽 求全之毁〕’을 옛사람이 이미 말하였다. 어찌 한탄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다른 말이 없었다. 병신년(1656) 12월에 내시 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기해년 7월에 준례에 따라 장악원 주부로 승진하였다. 이해 12월에 진천 현감(鎭川縣監)에 제수되었다. 진천 사람들이 평소 간교하다고 알려져 전에 부임했던 자들은 대체로 위엄과 형벌을 앞세웠으나 공은 한결같이 너그러움으로 다스리니, 백성들이 마침내 모두 화합하고 정사 또한 침체되지 않았다. 고을에 억울한 옥사가 있었는데 몇 명의 원을 거쳤으나 결단하지 못한 사건이 몇 건 있었다. 공이 모두 다스려 죄수들을 풀어 주자 인정과 법에 합당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임인년(1662, 현종 3) 8월에 도둑이 고을의 전패(殿牌)를 가져다가 훼손하여 길가에 버리니, 공은 즉시 책임을 지고 관찰사에게 면직을 청하였다. 관찰사는 고을의 간사한 백성 중에서 사람들에게 지목받는 자 몇 명을 은밀히 알아내고는 체포하여 고을에 회부해서 조사하여 이 일을 끝까지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공은 관찰사에게 첩보하기를, “이번의 변고는 현감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또다시 의심스러운 일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고문을 가한다면 온 고을 백성치고 누군들 의심스럽지 않겠습니까. 매를 때려 고문한다면 구하여 얻지 못할 것이 없으니, 설령 자신이 했다고 실토한들 어찌 이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마침내 해임하고 돌아왔다. 관찰사는 공이 고을을 다스림에 잘못이 없음을 알고는 조정에 아뢰어서 고을을 혁파하고 공을 견책하지 않았다. 9월에 서울 집으로 돌아왔는데 즉시 상평창(常平倉)의 낭청(郞廳)에 제수되니, 맡은 금과 곡식이 매우 많았다. 옛 규례에 금과 곡식을 출납하고 남는 것은 모두 사비로 충당하였으나 공은 일체 국가의 창고로 귀속시켰으며 크고 작은 것을 자세히 따져서 은밀한 것도 빠뜨림이 없으니, 교활한 아전들이 손을 거두어 털끝만큼도 감히 숨기지 못하였다. 계묘년(1663) 2월 통례원인의 겸 한성부참군(通禮院引儀兼漢城府參軍)에 임명되었으며, 또 상평창의 직임을 그대로 역임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상평창의 일이 많아서 딴 직책을 겸할 수 없다 하여 새로 제수한 관직을 체차하였다. 이해 9월 금성 현령(金城縣令)에 제수되니, 금성현은 궁벽한 산중에 있어 땅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적으며 세금과 부역이 번거롭고 무거웠다. 또 북관의 큰 길목에 위치하여 후인(候人)들이 날로 이르니,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공은 자신을 받드는 것을 간소하게 해서 절약 저축하고, 백성들과 서로 빌려 주고 꾸어 주며 남는 것을 미루어 부족한 곳에 보충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 진상하고 손님의 관사에 응접함에 부족함이 없게 하니, 1년이 못 되어 공사 간에 모두 여유가 생겨서 백성들의 힘이 크게 펴지게 되었다. 이에 학사(學舍)를 더 증축하여 향교(鄕校)의 교사(校舍)를 마련하고 제생을 가르치되 글을 외고 읽는 것을 날마다 직접 독려하여 장(章)과 구(句)를 바로잡아 주고 글 뜻을 깨우쳐 주었으며, 들어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와서는 어른에게 공경하는 도리를 간곡히 일러 주어 시종 변함없이 하니, 온 고을이 공의 뜻을 받들어서 선비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다. 또 노인들을 방문하고 공청(公廳)에 맞이하여 술을 올리고 직접 술을 따라 권하였으며, 고기와 비단과 차는 주머니를 선물하였다. 그리고 병환으로 오지 못한 분들에게는 또다시 음식을 나누어 집에 보내게 하니, 노인들이 모두 눈물을 떨어뜨리고 절하며 감사하여 예전에 일찍이 보지 못했던 일이라고 하였다. 처음 공이 5년 동안 집상(執喪)하였는데 상례를 지나치게 행하니, 몸을 손상함이 날로 심해져서 나이보다 먼저 노쇠하고 백발이 되었다. 수년 이래로 때때로 풍비(風痹) 증세가 있었는데, 을사년(1665) 봄에 옛 병이 다시 발병하여 관청의 일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3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4월에 비로소 서울 집으로 돌아왔는데, 병환이 더욱 심해져서 이달 12일에 정침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겨우 55세였다. 아, 공이 지낸 관직의 전말은 이것뿐이니, 그 깊고 지극한 덕은 진실로 불초고가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우선 귀로 익숙히 듣고 눈으로 자세히 본 것을 가지고 말하겠다. 공은 효성에 있어 천성에서 우러나왔다. 불초고는 공이 조부모를 정성으로 섬기는 것을 직접 보았는데, 초상과 장례를 치르고 제사함에 이르기까지 성의의 돈독함과 예절의 구비가 한결같이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하였다. 갑진년(1664, 현종 5) 여름에 불초가 금성(金城)으로 근친을 가니, 마침 대의인(大宜人)의 기제(忌祭)를 당하여 재계하는 날 저녁이었다. 공은 불초고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렸을 때에 대의인이 손수 뜰에 오이를 심으시고는 밥 때마다 하나씩 따서 나에게 먹이셨는데, 지금까지 그 좋은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내 지금 녹봉을 받아서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는 정성을 바치고자 하나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제사를 풍성하게 올리는 것이 살아생전에 하찮은 음식으로 봉양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으니,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슬퍼하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였다. 공이 제사를 올림이 또한 여기에 그쳤으니, 어찌 기일에 반드시 슬퍼하여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한 자가 아니겠는가. 공은 아우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이 있었는데, 우애가 지극하였다. 아우 이부공(吏部公)이 어려서 불초고와 함께 공에게 배웠는데, 이부공의 문학이 날로 진전되니, 공이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였다. 그리하여 집안 식구들에게 말할 때마다 “사람이 누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는가마는 나는 홀로 아우를 매우 사랑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아우는 재주가 있고 자식은 재주가 없어서 경중의 차이를 두신 것인가, 아니면 동기간의 의리가 자기 형체를 물려받은 자식보다 더해서인가. 매씨(妹氏)는 학사 오달제(吳達濟)의 부인이 되었는데 일찍 과부가 되니, 공은 매씨와 한집에서 한솥밥을 먹고 살았다. 진천(鎭川) 고을을 맡게 되자, 매씨가 의지할 곳이 없음을 딱하게 여기고 편지를 보내어 “나의 봉양이 부모에게 미치지 못하니, 차마 나만 처자식을 대하고서 이 정식(鼎食 진수성찬 )을 누릴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누이와 함께 하루를 배불리 먹는 것이라면 비록 이 때문에 죄를 받는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 달게 여기겠다.” 하고는 누이를 맞이하여 데리고 가서 함께 1년을 마치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항상 집안사람들에게 경계하기를, “온 집안 식구가 이미 여기에서 먹고살고 있으니, 부디 조심하여 녹봉의 남는 것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어 나의 누가 되게는 하지 말라.” 하였다. 공은 친척과 친지들에 대하여 은혜로운 뜻이 매우 지극하여 주선해 줄 때에 힘닿는 대로 보살펴 주었으며, 급한 일이 있으면 그를 위하여 마음을 다하고 피하지 않았다. 기묘년(1639, 인조 17) 봄에 공의 이형(姨兄)인 필선 정뇌경(鄭雷卿)이 세자를 모시고 심양(瀋陽)에 있다가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 두 오랑캐에게 모함을 받아 죽었다. 이 사건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 공은 포의(布衣)로서 상소하여 계책을 자세히 올려서 그의 죽음을 구원하고자 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공의 말을 옳게 여겼으나 청나라와의 약속을 두려워하여 그 계책을 쓰지 못하였다. 공은 평소 자제들을 가르칠 때에 엄격하면서도 올바른 방법이 있었으나 불초고가 게으르고 놀기를 좋아하여 학문을 이루지 못해서 오늘날에 이르러 선인의 교훈을 밝힐 만한 것이 없으니, 불효한 죄를 어찌 이루 다 측량할 수 있겠는가. 처음 불초고가 과거에 급제하자, 공은 말하기를, “우리 집안이 현달하지 못한 지가 여러 대인데 몽매한 네가 일찍 조정의 문적에 올랐으니, 비록 기쁜 일이기는 하나 또한 매우 두렵다. 사람들이 벼슬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기 때문이니, 만약 간사하게 탐하고 교만 방자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과 꾸짖음을 받는다면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악이 더욱 전파되게 마련이다. 고관대작이 되어 길을 벽제(辟除)하는 영광을 남들이 침 뱉고 꾸짖는 욕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니, 어찌 귀하게 되는 근본을 잃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사를 잘하는 재주와 법조문을 잘 적용하는 능력은 따로 재주가 있으니, 배워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줄 수가 없다.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다만 네가 귀하게 되는 그 근본을 잃지 않는 데에 있을 뿐이다.” 하였다. 공은 백성을 다스릴 때에 항상 말하기를, “백성들이 나를 두려워하기를 바란다면 내 몸을 바로잡을 뿐이니 어찌 무거운 형벌을 쓸 필요가 있겠으며, 백성들이 나를 사랑하기를 바란다면 내 정사를 잘할 뿐이니 어찌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 것이 있겠으며, 재정이 궁핍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나의 씀씀이를 절약할 뿐이니 어찌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거둘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관직에 있을 때에 다만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려고 노력하였고 일찍이 혁혁한 명성을 구한 적이 없었으며, 또한 사소한 은혜를 가지고 아랫사람들에게 은덕을 베푸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일을 신속히 처리하는 재주를 가지고 유능하다는 명성을 윗사람에게 사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소요시키지 않았으며 너그럽게 대하고 급하게 몰아붙이지 않았으니 묵묵히 백성들에게 베푼 것이 실로 많았다. 진천에 있을 적에 흉년이 거듭 들자 조정에서는 관원의 녹봉을 거의 절반으로 줄이라고 명하였다. 공은 이에 그 나머지로 날마다 굶주린 백성 수백 명을 구휼하여 수입은 적고 지출은 많았으나 관청의 저축은 오히려 줄어들지 않았다. 금성에 부임했을 때에는 채 2년을 채우지 못하였으나 그 사이에 낡은 것을 보수하고 폐지된 것을 일으켜서 경비가 백방으로 들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에 창고와 노적이 모두 가득하니, 공은 이것을 가지고 고을 백성들이 1년 동안 바칠 세금에 충당하게 하였다. 그런데도 쓰고 남은 것이 오히려 많았다. 공이 해임하고 돌아온 뒤에 관찰사가 마침 순행하다가 금성현에 이르니, 이때 초여름으로 보릿고개를 당하였으나 묵은 곡식이 누적된 노적이 마을에 넘쳤다. 백성들은 관찰사의 길을 막고 말하기를, “이는 모두 전 현령이 남겨 주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중년 이후로 술을 매우 좋아하니, 자제와 친지들이 모두 걱정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함께 탐닉하는 것은 명리와 화려함과 음악과 여색과 완호물이다. 나는 이런 것들을 모두 좋아하지 아니하여 내 마음에 걸릴 것이 없고 오직 이 술만은 버리지 못하니 이는 또한 나의 병통이다. 그러나 나는 이른바 세상에 어울리지 못하고 사람들과 뜻이 합하지 않는 자이니, 이 술이 아니면 누구와 함께 내 근심을 풀고 내 즐거움을 온전히 하겠는가.” 하였다. 이 때문에 공은 대대로 서울에 살았으나 사람들과 교유하여 왕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문을 닫고 깨끗이 청소하고는 종일토록 담담히 지냈다. 서책에 마음을 붙이고 경영하는 생각을 끊어 눈으로는 요직에 있는 이의 얼굴을 보지 않고 귀로는 유속(流俗)의 말을 듣지 않았다. 비록 술을 좋아하였으나 또한 술잔을 들어 스스로 즐길 뿐이었고, 친구들을 부르거나 어울려 다니며 놀고 즐긴 적이 없었다. 공이 금성에서 돌아오자 병환이 비록 심하였으나 웃고 말하는 것이 평상시와 다름없이 온화하여 고통이 있는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집안 식구들이 공의 병을 치료할 수 없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서울로 모시고 오려 할 적에 불초고가 책상 위의 서책을 수습하였는데, 그중에 고을 향교의 서책인 《가례(家禮)》 한 질이 있었다. 불초고가 반환하려 하자, 공은 말하기를, “내 예절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상고하려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했으니, 우선 행장 속에 넣어 두었다가 서울에 가서 반환하도록 하라.” 하였다. 서울에 들어오자, 이부공에게 이르기를, “내가 내 병을 헤아려 보건대 거의 집에 돌아가지 못할 듯하였다. 그리하여 도중에 갑자기 죽어서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장례하는 데에 두서가 없게 할까 염려되었다. 이 때문에 《가례》를 가지고 왔는데 지금 다행히 서울에 이르러서 내 집으로 돌아왔으니, 내가 또다시 무엇을 한하겠는가.” 하였다. 병환이 위독하자, 집안사람들이 시립하여 눈물을 흘리며 경황없이 울부짖으니, 공은 눈을 떠 보고는 손을 저어 만류하였다. 숨이 이미 가늘어졌으나 정신은 더욱 또렷하여 태연히 천명에 맡기고 얼굴빛을 조금도 변치 않았으며, 사사로운 일을 언급하지 않고 마음에 연연하는 바가 없이 조용히 임종하여 죽음을 보기를 낮과 밤이 앞에서 바뀌는 것과 같이 여겼다. 아, 죽고 사는 즈음은 사람의 큰 변고이다. 만일 그 실제의 수양 공부가 없다면 거짓으로 꾸밀 수 없는 것이니, 여기에서 보면 공이 평소 깊이 수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공은 젊었을 때에 얼굴이 백옥처럼 희었으며 눈썹과 수염이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음성과 안색을 함부로 나타내지 않아서 행동거지가 한가롭고 고상하여 매우 볼 만하였다. 천성이 평탄하고 화락하여 겉으로 드러냄을 일삼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들과 담화할 때에 속마음을 다 드러내 보여 속에 쌓아 둔 것이 없었으며, 발언하고 견해를 주장할 적에 근거함이 정밀하고 합당하여 흔들리거나 바뀌지 않았다. 문장을 지을 때에는 미사여구로 수식하는 것을 버리고 오로지 논리가 정연하고 말이 통달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으며, 모든 사물의 실정과 이치 중에 형상할 수 없어 입으로 말하기 어려운 것들을 문장에 나타내되 명백하지 않음이 없어서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는 듯이 하였다. 서책에 있어서는 보지 않은 것이 없어서 비록 말이 기이하고 뜻이 심오하여 사람들이 구두를 떼지 못하는 것이라도 모두 조목조목 분석하여 그 귀취(歸趣)를 통달하였다. 한묵(翰墨)의 기예에 있어서는 즐겨 하지 않았으나 점획(點劃)과 결구(結構)가 자연 단정하고 후중하여 법도가 있었다. 공이 처음 황사(黌舍 성균관 )에서 공부할 때에 의표가 빼어나서 좌우에 찬란하게 비치니,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고 더불어 사귀며 머지않아 반드시 옥당(玉堂)에 올라서 크게 베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마침내 연달아 불운하여 오랫동안 과거에 낙방하였고, 중간에는 난리를 만났으며 또 부모상을 연달아 당하여 재주가 운명과 어긋나고 뜻이 세상과 맞지 않았다. 말년에 녹사(祿仕)에 취임하여 작은 고을에 머물렀는데, 하늘이 또다시 수명을 아껴 일찍 별세하게 하니, 아, 애통하다. 공은 가선대부 행 강릉 부사(行江陵府使) 권공 업(權公曗)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바로 불초 구만이며 장녀는 홍문관 교리 박세당(朴世堂)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유학(幼學) 이관성(李觀成)과 진사 이한익(李漢翼)에게 출가하였다. 구만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학명(鶴鳴)이고 딸은 모두 어리다. 박세당은 2남을 두었는데 장남 박태유(朴泰維)는 진사이고 차남은 박태보(朴泰輔)이며, 이관성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고, 이한익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다. 공은 만력(萬曆) 신해년(1611, 광해군 3) 10월 1일에 출생하였으며, 을사년(1665, 현종 6) 8월 7일에 용인현(龍仁縣) 화동리(花洞里)에 있는 평강 부군(平康府君)의 묘소 왼쪽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산에 장례하였다. 병오년(1666) 10월 20일에 불초고 구만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짓다.
先考通訓大夫行金城縣令淮陽鎭管兵馬節制都尉府君行狀 公諱一星字德輝。姓南氏。宜寧人也。得姓自羅朝英毅公諱敏。著籍自麗朝樞密院直副使諱君甫。九代祖領議政諡忠景公諱在。始仕我朝。忠景之孫諱智。官左議政諡忠簡公。仍祖孫爲相。事俱載國史。曾祖諱彥純。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祖諱柁。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考諱烒。通訓大夫行平康縣監。妣宜人連山徐氏。贈參判澍之女。公生而穎異。學不 勞師。年未弱冠。已有聲於場屋。屢占發解居人先。而率不遇於會闈。丙子以後時事艱虞。無意於進取。雖時以親命赴擧。非所好也。旋又廢不赴。是以竟不第。甲申冬大宜人患疾幾殆。公晝夜執湯藥扶臥起。不解帶不交目者累月。宗族鄕黨歎息以爲不可及。庚寅遭平康府君喪。服將闋。又遭大宜人喪。哭踊之戚。饋獻之誠。不懈不怠以終喪。乙未冬朝家命三品以上薦士。李參議有謙薦公居喪盡孝。適三公無知公者。都堂會勘時削不用。時公在結城鄕舍。寄書不肖孤曰薦中被削。不虞之譽。求全之毀。古人已言之矣。 何足歎也。餘無他語。丙申十二月。拜內侍敎官。己亥七月。例陞掌樂院主簿。是年十二月。除鎭川縣監。鎭人素稱黠。前莅者率先以威刑。公一易以寬。民乃咸和。事亦不廢。邑有冤獄。經數官未斷者數案。公皆疏理決出。當於情法。吏民咸服。壬寅八月。有盜取縣殿牌。毀棄道上。公卽引咎請免于觀察使。觀察使微知邑中姦民爲衆所指者數人。收付縣案問。使之窮竟其事。公牒于觀察使曰今玆之變。由縣監不職。又以疑似加人以拷掠。則一邑之民。誰非可疑者。捶楚之下。無求不得。雖使吐款。可必信乎。遂解印歸。觀察 使知公治理無虧。轉達朝廷。革縣而不譴公。九月還京第。卽授常平郞廳。所司金穀甚多。舊例凡其出納之剩。皆充私費。而公一切歸之公庾。鉤校巨細。靡密無漏。猾胥斂手。毫釐不敢有所欺隱。癸卯二月拜通禮院引儀兼漢城府參軍。且仍常平之任。俄以常平務緊。不可兼他職。遞新除。是歲九月。除金城縣令。縣居窮峽。地瘠民少。而貢賦煩重。又直北關孔道。候人日至。民不堪命。公簡以自奉。節縮儲偫。與民相假貸。推贏補缺。於以輸上供應賓館。無闕乏。不期歲。公私咸裕。民力大舒。於是增修學舍。置庠舍。敎諸生。日親 課誦讀。正其章句。曉以旨義。諄諄於入孝出悌之道。始終如一日。闔縣承風。章甫滿席。且訪問高年。迎觴于公堂。親勸酬加。贈以肉帛佩囊。其病未來者。又命分饋于家。皆垂泣拜謝。以爲前所未見也。始公居憂五載。執禮過制。羸削日甚。衰白先於年。自數歲以來。時有風痺之患。乙巳春。舊疾發動。不能治官事。三月以病辭遞。四月始還京第。疾寖加。是月十二日。考終于寢。享年僅五十五。嗚呼。公之官次始終。只此而已。其德之深至者。固非不肖孤所敢知。然且以其耳熟目習者言之。公於孝。蓋出於天者也。不肖孤逮見公 之事王父母。以及於喪葬祭祀。其誠意之篤。禮節之備。無一不可爲則於後者。甲辰夏。不肖孤覲于金城。値大宜人忌齋之夕。公謂不肖孤曰余幼時。大宜人手種瓜於庭。每飯摘其一以食余。至今未嘗忘其味之甘也。今余得祿。欲效反哺之誠。其何及也。祭而豐。不如養之薄。此之謂也。因涕泣不自勝。公之將祀。亦止於此矣。豈非忌必哀而終身慕者耶。公有一弟一妹。友愛極摰。弟吏部公。少與不肖孤同學於公。吏部公詞學日進。公奇愛之。每語家人曰人孰不愛子。我獨愛弟甚。豈才不才有重輕耶。抑同氣之義。踰於禪 形耶。妹氏吳學士達濟夫人早寡。公與之同室共爨。及出宰鎭川。閔其無依。寄書曰吾養不及父母。吾不忍獨對妻孥。享此鼎食。若與妹同一日之飽。雖以此得罪。於吾心甘焉。迎之以去。與之終一年以歸。雖然常戒家人曰闔家旣食於此矣。愼毋以俸祿之餘。遺之子女。以爲我累。公於親黨知舊。恩意甚厚。所以周恤惟力是視。至有緩急。爲之盡心不避。己卯春。公姨兄鄭弼善雷卿陪世子在瀋中。爲龍馬兩胡所陷殺。方事之初發。公以布衣上疏。指陳計策。欲救其死。朝廷韙其言。而畏約不能用。公平日誨子弟。嚴而有 方。而不肖孤荒嬉無成。以至今日。無可以明先人之訓者。不孝之罪。其何可量。始不肖孤之忝科第也。公曰吾家不顯數世矣。汝以蒙騃。早登朝籍。雖可喜。亦甚可懼。凡人之貴仕宦。爲其顯名於世。若奸貪驕敖。爲世所詆詬。則其位愈顯而其惡愈播。傳呼之寵。不足以易唾罵之辱。豈不失其所以貴之者哉。政事之才。文法之能。自有資材。非可學也。吾無以敎汝矣。吾所以望汝者。只在汝不失其所以貴之者耳。公之臨民。常曰欲民之畏我。正吾身而已。何重刑爲。欲民之愛我。善吾政而已。何私惠爲。欲財無乏。節吾用而已。 何加斂於民爲。是以其居官也。唯欲無愧於心。未嘗求赫赫之聲。不以呴濡之恩。示德色於下。不以趣辦之才。沽能名於上。然安之而不擾。寬之而不急。其爲默施於民實多。其在鎭川歲荐荒。朝廷命減官祿幾半。乃以其餘。日贍飢民數百人。入少出多。而官儲猶不絀。其莅金城未滿再周。於其間補敉起廢。需用百端。然其歸也。倉積皆盈。公命發之以充縣民一歲之貢賦。其餘存者。猶且果然。公旣歸。觀察使適巡到縣。時當夏初。而舊穀之積。溢於村閭。民遮道曰此皆前縣令之所賜也。公中年以後。頗業於酒。子姓親知咸 以爲憂。公曰世人之所共耽者。名利芬華聲色玩好。而吾皆泊然無足以嬰吾心者。惟是物不能去。是亦吾之病也夫。雖然吾所謂不適於世而無偶於人者也。非是物。孰與釋吾憂而全吾樂乎。是以公雖世居京師。不肯與人交遊往還。閉門却掃。終日澹如。游心於典籍。絶意於經營。目不見要人之面。耳不聞俗流之言。雖愛酒。亦引觴自適而已。未嘗有徵逐詡詡之歡。公之自金城歸。疾雖甚。言笑不異於常。怡怡然不覺其有苦。故家人不意其不可治。將行。不肖孤收拾案上書冊。其中有縣校家禮一部。不肖孤欲還之。公 曰余有所疑。將有考而未及。且置行中。及京而還之。逮入京。謂吏部公曰我度我病殆不能復還。慮溘然中道。使家人顚倒於送終。爲是故齎家禮以來。今幸及京。返于吾廬。吾又何恨乎。及其疾革。家人侍立涕泣。蒼黃呼號。公開目視之。爲之揮止。氣息已微。神識愈明。浩然委命。顏色不動。言無及私。意無所戀。從容就化。視若晝夜之易於前。嗚呼。死生之際。人之大變也。苟無其實。不能容僞。觀於此。可以知公之素養矣。公少時面白如玉。鬚眉秀麗。不妄聲色。動容周旋。閒雅甚可觀。天性樂易。不事表襮。與人談。洞見肝膽。無 所蓄。發言持論。根據精當。不可移易。爲文章。刊落藻飾。專以理勝辭達爲主。凡事情物理之不可名狀而難於口說者。形之於文。無不曉然明白。如指諸掌。於書無不觀。雖奇辭奧義人不能句者。亦皆條分縷析。達其歸趣。至如翰墨之藝。不屑爲也。而點畫構結。自然端重有榘度。公之始遊於黌舍也。風標挺拔。輝映左右。人皆慕與之交。謂朝夕必盛之玉堂。以大厥施。顧乃蹇連侘傺。久困於公車。中經喪亂。又荐之以巨創。才與命舛。志與時違。晩就祿仕。棲遲縣符。而天又嗇其壽。嗚呼痛哉。公娶嘉善大夫行江陵府使權公 曗之女。生一男三女。男卽不肖九萬。女長適弘文館校理朴世堂。次適幼學李觀成。次適進士李漢翼。九萬有一男三女。男曰鶴鳴。女皆幼。朴世堂有二男。長泰維進士。次泰輔。李觀成有一女幼。李漢翼有一男幼。公生于萬曆辛亥十月初一日。乙巳八月初七日葬于龍仁縣花洞里平康府君墓之左兆子坐午向之原。丙午十月二十日。不肖孤九萬泣血謹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