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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19) - 2024 .01. 25(목) |
이번 순례지는, 서울대교구 순례인 11차(23.08.18)와 14차(23.10.31)에서 순례하지 못하고 남겨 두었던 네 곳, 곧 용산 성심신학교,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터. 절두산 순교성지, 노고산 성지이다.
날을 잡다가 보니 공교롭게도 일기 예보가 전국적으로 한파 주의보를 며칠 째 발령하고 있는 때이다. 보통 연중 가장 추운 시기라고 하는 소한 무렵인 지난 1월 11일 순례 때는 정작 그리 춥지 않았는데 이번 대한 무렵에는 ‘대한(大寒)’이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것 같다. 그때는 ‘대한이 소한 집에 와서 얼어 죽었다’는 속언을 입에 올렸는데 그 말이 대한의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엄청난 한파를 몰아와 전국을 떨게 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가는 서울지역은 영하 10도를 넘는 추위가 며칠째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매사는 마음먹기에 달린 것, 출발하면서 웬만해서는 안 입던 내복도 꺼내 입고, 두꺼운 면마스크를 끼고 동장군에 대비한 완전 무장을 했다.
서울 순례 때는 늘 하던 대로 승용차는 경주역(신경주역)에 주차하고 KTX를 이용한다. 06 : 00 성당 출발. 예정대로 09: 05. 서울역에 도착하여 안내자인 친구 모세를 만났다.
용산 성심신학교 - 내국인 사제 양성의 전통을 이어오다 |
용산 성심 신학교의 유래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청도 배론에 세워진 성 요셉 신학당과 같은 해 경기도 여주 강천면 부엉골의 예수성심 신학교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노력은 1830년대부터 시작되어 당시 모방 신부는 정하상에게 신학 교육을 시킨 바 있고 1836년에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마카오에 보내어 신학교육을 받게 했다. 그리고 베론 신학교가 설립되기 5년 전인 1850년, 베티에 다블뤼 주교에 의해 세워진 소신학교가 몇 년간 운영되었는데 이것이 최초라는 주장도 있다.
1855년에 세워진 배론 신학교는 1866년 병인박해로 10여년 만에 폐교되었다. 그리고 부엉골(범골)의 예수성심 신학교는 세워진 2년 후인 1887년 서울 용산 원효로 4가의 현 위치로 이전하여 1892년에는 현재의 신학교 건물을 신축했다. 학교 건물을 완공한 10년 후인 1902년에 신학교 부속 성당도 세웠다.
그 후 1914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27년에는 함경남도 덕원 신학교 등 여러 군데 지방 신학교가 생겨났고 이어서 서울, 광주, 부산, 수원, 대전 교구에 이어 1996년에는 인천교구에서도 가톨릭 대학이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1960년 용산 성심 신학교는 혜화동(현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는 예수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성심여자고등학교로 바뀌었다. 다만 당시 신학교 건물은 지금은 성심기념관이라는 이름으로 예수성심수녀회 관구 사무실과 역사전시실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당시 성심 신학교 부속성당은 예수성심성당으로 지금도 살아 있다. 지금 용산 성심신학교 성지라 함은 바로 이 두 건물, 성심기념관과 예수성심성당이 핵심이다.
용산 성심신학교 하면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성직자와 순교자의 유해 보존과 관련이 있다. 성직자의 유해와 더불어 어렵게 찾게 된 순교자의 유해는 대부분 용산 신학교 성당에 안치했다가 다시 모실 곳을 찾아 이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2대 교구장 성 앵베르 주교, 3대 페레올 주교, 4대 성 베르뇌 주교, 5대 성 다블뤼 주교, 6대 리델 주교, 7대 블랑 주교, 8대 교구장이자 이 성당 봉헌식을 집전한 뮈텔 주교에 이르기까지 8명의 역대 조선 교구장 주교들의 유해가 모두 이 성당에 안치되었었고, 기해박해 순교자인 성 모방, 성 샤스탕 신부를 비롯해 배론 신학당을 세우고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 오메트르 신부, 성 위앵, 성 브르트니에르, 성 도리, 성 볼리외 신부 등의 유해도 이 성당을 거쳤다. 이곳에 안치되었던 순교자들의 유해는 그 후 혜화동 신학교 성당을 비롯해 명동 주교좌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등지로 옮겨 모셨고, 역대 교구장들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 안장했다.
더욱이 이곳에 안장됐던 한국 교회의 순교 성직자 10위가 모두 지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때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으니 용산 신학교 성당은 참으로 축복 받은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 역에서 모세 형제를 만났으니 신경 쓸 일 없이 그의 안내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날씨가 추워 걸을 엄두도 못 내고 마을버스를 타고 약 30-40분을 이동하여 다시 길 찾기 앱을 이용하여 곧바로 성심 신학교(현 성심여고)를 찾아갔다. 사실은 성심 신학교는 지난 14차 서울 남부 성지를 순례할 때 왔다가 돌아선 곳이다. 당시에는 공휴일이나 방학이 아닌 평일이라서 학교라는 특성상 순례가 허용이 되지 않았기에 정문에 마련된 순례 스탬프만 찍고 돌아왔었다. 이번은 다행히 방학이라 자유롭게 들어 갈 수가 있다. 정문에 이르자 예수성심상이 팔을 벌려 환영하신다 . 순서는 먼저 성심 신학교 성당을 순례하고 그 다음 성심기념관이다. .
용산 성심신학교 성당
1892년과 1902년에 각각 건립된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와 성심신학교 성당은 서울 종현성당(현 명동 성당)과 약현 성당(현 중림동 약현 성당)과 함께 초기의 서양식 성당 건축으로 당시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었다. 특히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비롯한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 및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하면서, 사제 양성의 요람 성심 신학교는 한국 천주교회의 으뜸 되는 영광과 명성을 누렸다.
용산 성심신학교 성당은 종현 성당과 약현 성당을 설계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고 1899년에 착공해 3년 만에 완공됐다. 신학교 부속 성당으로서의 기능을 살리기 위해 이 성당은 교구의 일반 성당과는 상당히 다르게 설계됐다.
성당 내부의 천장 구성과 장식은 고딕양식에 가깝지만 성당 정면 입구에 종탑이 없고, 출입구는 제대 쪽 양쪽 측면에 나 있고, 제의실이 제대 반대쪽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제의실 위 2층에는 성가대석이 설치돼 있다.
또 이 성당은 또 언덕 경사지에 지어진 관계로, 언덕 아래 앞에서 보면 3층, 언덕 뒤에서 보면 2층이다. 그래서 작은 건물이지만 당당한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성당은 신학교 건물(현 성심기념관)와 함께 지난 1982년 국가지정 문화재인 사적 제255호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지금은 예수성심 수녀회와 성심여고의 부속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당 출입구는 성당 뒷면을 돌아간 측면에 있었다. 문 입구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마태오 11, 28)는 구절이 문 위에 걸려 있다.
성당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예상외로 무척 좁다. 신자석 장의자는 단 두 줄뿐이다. 천장은 아치형이고 제대는 오래된 성당이 다 그렇듯 후벽을 향한 트리엔트식 제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그 앞에 또 하나 지금 사용하는 제대가 있다.
제대 후벽에는 스테인드 글라스화가 조성되어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예수님과 좌우 사도들의 상이 있었으나 6. 25 전쟁 때 파손되어 이 유리화로 바뀌었다고 한다. 유리화의 제목은 “빛이 있어라”(이남규 작 1985)인데 가운데 성체의 빛이 사방으로 퍼져가는 형상이다.
제대 좌우의 벽에는 각각 팔마 가지를 손에 든 순교자 상과 여성 신자를 발가벗겨 고문을 가하는 광경을 그린 순교화가 걸려 있다. 순교자 상의 순교자는 그림 하단에 참수치명 1846년, 로마에서 시복식 1925년이라는 글자로 미루어 보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이다.
좌우의 창문과 후면에는 모두다 푸른색 스테인드 글라스로 되어 있고 십자가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성당 입구엔 성수대가 있다.
출입문 안쪽 문 위에는 독특한 삼원의 문양과 로마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속에는 많은 의미가 녹아 있다. 이는 다음과 같다.
중앙 아래부터 보면 안드레아 김대건의 머리글자인 A와 K가 보이고 그 밑에는 김대건 신부의 탄생연도와 순교연도가 로마자로 표기 되어있다.
MDCCCXXI - 1821 MDCCCILVI - 1846
좌측과 우측의 원형은 김대건 신부님의 문장(紋章)으로 그 뜻은 용감하고 강한 자세로 바른 길을 가라는 뜻이다.
FACERE ET PATI FORTIA (큰일을 당해도 용감)
RECTE ET FORTITER (바르고 강하게)
좌측 상단과 우측 상단에는 용산 신학교의 개교일과 서울교구와 대구교구가 분리된 날짜가 로마자로 표기되어있다.
IXJUNII MDCCCXCIX 는 용산 신학교 개교일 1899. 06. 09.
XIV APRILIS MCMII 는 서울교구와 대구교구가 분리 된 1911. 4. 14.
상단 원 안에는 뮈텔 주교의 문장이 있고 아래 세 개의 별은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신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를 상징하고 태극 문양은 조선을 뜻하고 아래 둘러싸고 있는 팔마가지는 박해와 순교를 나타내며 그 아래 작은 글자는 ‘순교자들의 꽃이 만발하라’라는 뜻이다.
세 개의 원의 가운데 삼각형 부분의 별은 바다의 별로 김대건 신부님이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하는 도중 풍랑을 만나 고생하다가 성모상을 꺼내 기도하자 바다가 잠잠해졌다는 의미를 새긴 것이다.
나올 때는 다른 문으로 나왔다. 이 문도 들어올 때처럼 좁고 작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하라는 성경 구절이 생각난다. 문 위에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15,9-11)라는 성구가 들어올 때의 문에서처럼 걸렸고, 문밖에는 제의실이 있고 벽면에는 두 개의 성화가 걸렸다. 그리고 아래로 계단이 나오는데 계단을 나오니 1층이었다.
성당 밖에는 성모 동산이 있고 주위에 기이한 암석, 비석, 구청에서 세운 사색(思索)의 장(場) 등이 있다. 그리고 긴 역사를 말해주듯 고목 정원도 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길다란 자연석에는 한문 구절 聖母爲等祈禱(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가 새겨져 있고 옆면에는 세운 해인 1906년 연도가 로마자로 새겨져 있다.
용산 성심신학교 (성심 기념관)
성심 신학교 건물은 성심 신학교가 경기도 여주 부엉골에서 이전하여 1892년 두 번째 지은 교사동(校舍棟)이다. 신학교가 혜화동 현 가톨릭 대학교 성신 교정으로 옮겨간 뒤에는 성모병원 분원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성심수녀회에서 사무실과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반 지하, 지상 2층의 동서로 길다란 ‘一’자형 벽돌조 건물로 중앙에 현관과 지하층 출입구를 두고 좌우에 실내 계단을 설치하였다. 당시 영국 등에 유행했다는 조지언 양식이라고 하는데 기둥, 아치, 창 둘레, 수평 돌림띠는 회색 벽돌을, 외벽은 붉은 벽돌을 사용하였다. 현재 남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 건물로 건축사적 의의가 크다.
지금은 건물 안에 예수성심수녀회 사무실도 있고 정면 현관 앞에 걸렸듯 역사전시실인 성심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들어올 때 이미 공사 중이라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들은 뒤라 아쉬움 속에 발길을 돌렸다.
다음 목적지는 여의도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터. 버스를 타고 원효대교룰 건너 간다. 그런데 버스를 타려고 가는 길가에 목월 공원이라는 소공원이 있다. 그의 시 ‘청노루’를 새긴 시비(詩碑)도 서 있다. 청록파(靑鹿派)라는 이름이 이 시에서 나온 것이다. 원효로 4가 이 근처에 박목월이 살았던 집이 있었기에 목월 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제법 큰 나무들도 여러 그루 있는데 내년 봄에 어떤 꽃을 피울지 궁금하다. ‘사월의 노래’의 목련꽃일까? ‘보랏빛 석산’의 산도화일까? 내년 봄에 한번 와보고 싶다.
박목월을 기리는 시비나 기념비는 여러 곳에 있다. 그의 고향 경주에도 물론 있다. 황성공원, 보문, 목월생가, 동리목월 문학관 등등.
10시 40분경, 여의도 환승센터 부근 여의도 공원에 도착. 103위 시성터는 이 안 어디엔가 있다.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 - 순교의 씨앗이 싹터 꽃피운 영광 |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방한한 교황 요한바오로 2세 집전으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와 ‘한국 순교자 103위 순교자의 시성식’이 거행되었다.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천주교회 순교복자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 및 동료 101위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전 세계 교회에서 그들을 경건히 공경해야 함을 선언하였다. 이러한 역사적인 시성 선언으로 한국 천주교회 103위 성인이 탄생하게 됨과 동시에 발전하는 한국 교회에 새로운 빛과 영광을 부여하였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한국 천주교의 성인의 탄생이 이루어졌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1839년까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일기 형식의 박해 초기의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를 프랑스 외방전교회에 보냈다. 그리고 앵베르 주교는 피신했다가 신자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자수하러 가기 전에 열심한 신자 정하상 바오로, 현석문 카롤로 등에게 계속하여 박해 현황을 기록할 것을 명했다. 그후 정하상도 순교하고 현석문이 중심이 되어 순교자의 기록을 수집하여 정리했다. 이것이 기해일기이다. 이를 토대로 병오박해까지를 포함하여 1847년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증보판 기해일기를 완성한다. 이 기록을 최양업 부제와 매스트르 신부가 라틴어로 번역하는데 이것이 기해 · 병오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다. 이 기록은 파리로 보내져 1847년 10월 교황청 예부성성에 제출된다. 이것이 시복, 시성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오랜 조사와 재판을 통해 1925년 7월, 드디어 교황청은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기적 심사 면제령과 함께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1939년 기해박해, 1946년 병오박해 때 순교한 79위를 시복한다. 나아가 교황청은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24위 또한 재판 과정을 거쳐 1968년 10월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시복했다.
이후 1978년,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진 한국 복자 103위의 시성 건이 교황청에 정식 접수됐으며 5년 뒤 198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03위의 시성 승인을 선포했다. 순교자의 기록이 교황청에 제출 접수된 지 137년만이었다.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2009년 9월 19일,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념행사 때, 과거 시성식이 거행되었던 제단자리인 여의도공원 잔디마당에 기념 표석을 세워 그분들의 모범을 따르며, 온 민족과 누리에 그들의 신앙이 이 민족의 희망의 표징이 되도록 하였다.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였던 여의도 광장은 지금은 개발이 되어 지형이 많이 변하여 찾기가 쉽지 않다. 버스를 몇 코스 타고 여의도에 갔어도 찾기가 여의치 않았는데 길찾기 앱을 통해 찾고 보니 여의도 공원 세종대왕상에서 약 50m 떨어진 잔디마당 한쪽 편에 있었다.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기념 표지석이 조그맣게 세워져 있는데 표지석 전면에는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라는 제목 아래 “이 땅에 빛을! 한국의 103위 순교자를 성인 반열에 올리노니, 세계 교회가 공경하기를 바랍니다.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시성선언문 일부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표석 후면에는 시성 선포의 역사적인 사실을 명기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1984년 5월 6일 이곳에서 103위 한국 순교복자들을 성인 반열에 올려 이를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을 기리고자 이 돌을 세웁니다. 2009년 9월 19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정진석 니콜라오”라는 문구를 한글, 프랑스어, 영어로 각각 새겨 순례자들에게 기념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다시 한강을 건너 절두산 성지로 간다. 이번에도 버스를 타고 올 때와 달리 마포대교를 건넌다
노고산 성지- 순교성인이 임시로 쉬었던 자리 |
천주교 박해가 전국적으로 자행된 1839년 9월 21일 서울 새남터 - 외국인 선교사 3명이 처형되어 그 시신은 20여일 간이나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었다. 감시가 삼엄하여 함부로 옮기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러던 중 감시의 눈이 소홀해진 틈을 타서 기회를 보던 7-8명의 교우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시신을 거두는데 성공한다. 그들은 유해를 큰 궤에 넣어 이곳 노고산(老姑山, 현 서강대학교 뒷산)에 안장하였다.
이 외국 선교사 3명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였다.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맞이한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장렬하게 순교한 후 비록 그 후 30년 만인 1831년 조선 천주교는 중국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하였지만 1835년 첫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가 입국 도중에 과로와 병으로 선종하자 조선 교회는 또다시 목자 없는 양떼 신세가 됐다.
이러던 차에 1936년에 모방 신부가, 1937년에는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 이후 한 세대가 훨씬 지나서야 목자에 대한 갈증을 풀게 된다.
이들 성직자들은 외인과 포졸들의 눈을 피해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먹을 것도 여의치 못한 채 험한 산길을 걸어 다니며 전국 각지의 신자들을 찾아 다녔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쓴 결과 이들은 입국한지 불과 1년 만에 신자가 9천여 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얻는다.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던 것이 모두 이때의 일이다.
앵베르 주교는 지방을 돌아다니던 중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이 알려져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자 수원 어느 교우집에 몸을 숨겼고, 다른 두 신부에게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당부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대로 조선에 남게 된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로 인해 이들의 거처가 알려지고 포졸들이 들이닥친다. 앵베르 주교는 피해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잡힌 몸이 되는 동시에 동료 신부들에게도 스스로 자수해 순교할 것을 권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씀을 실천한 것이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빛나는 활동을 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입국한 지 겨우 2-3년 만에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 것이다.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순교자 세 분을 노고산에 모시기는 했하지만 여기도 안전한 곳은 되지 못했다. 누구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보존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당시 새남터에서 노고산으로 시신을 훔쳐 이장한 교우들 중의 한 사람인 박 바오로는 사람이 많이 다니는, 도성과 가까운 이곳을 피해 좀더 한적한 곳인 자기 가문의 선산이었던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신림동)으로 다시 옮겼다. 노고산에 이장한 지 4년만인 1943년이었다. 박 바오로는 그러면서 자신도 천주교도로 알려진 존재여서 언제 잡혀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 사실을 자신의 어린 아들 순집(베드로)에게 일러주었다. 실제 그는 1866년 병인박해 중에 잡혀서 절두산에서 순교했다.
박해의 격랑이 잠잠해진 1900년대에 들어서 제7대 조선 교구장 블랑 주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였고, 박순집은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들은 바대로 교구장에게 증언하였다.
교황청에서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 수속이 진행되던 1901년, 조선 교구에서는 박순집의 도움으로 노고산에 4년간 매장되었다가 삼성산으로 옮겨 모신 앵베르 주교와 모방 · 샤스탕 신부의 유해를 발굴하여 10월 21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옮겼다가 같은 해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묘지에 안장하였다.
그리고 한국교회 첫 시복(1925)을 앞둔 1924년 명동 성당 지하묘지가 개봉되어 유해 일부가 로마와 파리 외방전교회 등으로 분배되었고, 1967년 절두산에 순교 기념성당이 건립되면서 명동 성당에 안장되었던 순교 복자들의 유해 대부분이 절두산 성당 지하 유해실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박순집의 공적은 세 분 순교자의 묘지 증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부친의 고귀한 뜻과 용감한 행동을 이어가기로 결심했고 실제 부친 이상으로 순교자의 행적과 묘소 지키기에 산명을 바쳤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 볼리외 · 도리 · 프티니콜라 · 푸르티에 신부, 우세영(알렉시오)의 시신을 박순지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다시 노고산 인근의 왜고개로 옮겨 모셨다. 그리고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남종삼(요한)과 최방제 신학생의 형인 최형(베드로)의 시신 또한 찾아내어 왜고개에 안장하였다.
그리고는 이런 활동 사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기록을 남겼으니 바로 박순집 증언록으로 총 3권에 153명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자신이 부친과 함께 지내면서 보고 들은 것과 순교작의 유해가 묻힌 곳 그리고 자기 집안에서 순교한 부친 · 형제 · 삼촌 · 고모 · 형수 · 조카 · 장모 ·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 집안 16명의 가족들이 치명한 박순집 순교 가족의 행적이 들어 있다.
지금 노고산 성지에는 세 선교사뿐만 아니라 1866년 3월 9일(음력 1월 23일) 최형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그 날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한 전장운(全長雲, 요한), 같은 해 3월 10일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 날 제자 우세영과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정의배(丁義培, 마르코)도 안장했다고 전한다. 정의배 마르코의 시신은 처형된 지 며칠 후 부인들이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거두어 노고산에 안장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전 1835년 한강변에서 누나 이 아가타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한 후 1838년 11월 24일 형조 옥에서 병사한 이호영(베드로)의 시신도 노고산에 묻혔다가 현재는 절두산 성해실에 모셔져 있다. 또한 1839년 9월 12일 포도청 옥에서 숨을 거둔 최경환(프란치스코)의 시신도 둘째 아들 최의정 등이 수습해 노고산 근처에 가매장했다가 수리산으로 이장했고, 복자품에 오른 뒤인 1930년 5월에는 명동 성당 지하묘지로, 1967년에는 다시 절두산 순교성지 성해실로 옮겨 안장되었다.
이렇듯 노고산은 천주교 박해 때 여러 처형장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유로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성지이다. 현재 노고산 일대에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서강대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순교자들의 땅 위에 학교 부지를 마련한 서강대학교는 2009년 6월 15일 기해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노고산에 4년 동안 매장되었던 앵베르 주교와 모방 · 샤스탕 신부를 기리기 위해 정문에서 가까운 가브리엘관 앞 소나무밭에 세 성인의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3개의 순교현양비는 조각가 이춘만(크리스티나)가 제작했는데 각각 가로 1m, 세로 1.5-2m의 규모로, 앞면에 각 성인의 얼굴 동판과 약력이 기록되어 있다. 현양비 건립 기금 일체는 환주복지재단 이관진(베드로) 이사장이 기탁했으며, 비문은 김남조(마리아 막달레나) 시인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강의 ‘ㅅ’과 ‘ㄱ’이 형상화되어 끝없이 뻗어가는 서강인의 기맥을 상징하는 이 탑에는 진리에 순종하고, 영광과 감사를 모교에 돌리며, 그 품속에 들어와 안식을 찾음으로써 다시 도약하려는 서강인의 애교심이 담겨 있다. 이에 이 상징물을 가장 높이, 가장 멀리, 가장 힘차게 비상하면서 회귀본능이 강한 거대한 바다새 ‘알바트로스’라 부른다. 바다새 알바트로스는 장자에 나오는 대붕(大鵬)과 같은 새이다.
순교자 표지석 내용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현양비
이곳은 축성된 터전이니
주님의 빛의 사제 프랑스 사람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조선교회 초기의 피바람 속에 입국하여 영원한 생명의 참 진리를 밝히다가 기해박해 때 순교하여 여기 노고산 자락에 묻혔었다. 그 숭고한 정신을 받들고자 이 부지에 서강대학교가 설립되어 인재를 배출해 오고 있으며 이 세 분은 1984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진리의 전파와 인류의 구원이라는 대학의 소명을 서강대학교는 숙연히 지켜갈 것이며 새 분 성인은 길이 우리를 비추고 가호하리라.
제작 2009.6.15.
김남조 (마리아 막달레나)
봉헌자 (이진관 베드로)
3시가 되지 않아 오늘 계획된 일정은 마쳤다. 그래서 여기서 가까운 의정부 교구의 행주성당을 가기로 했다. 교통은 버스를 이용. 행주산성이라는 이정표 안내판에서 갈라져 정류장에 내리니 성당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어 역시 휴대폰 길찾기를 해도 에러가 난다. 모세 형제는 한번 와 본 곳이지만 전에 갔을 때는 택시를 이용했기에 그 위치가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다들 휴대폰을 검색하는 도중에 하는 수 없이 길옆 한 업소에 들어가서 대강의 위치를 물어 그 길을 올라 성당에 도착하니 정문이 아니고 후문 영역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 벌써 하오 4시가 가까운 시간이다.
행주 성당- 1899년 행주 포구에서 시작된 신앙공동체의 자취 |
주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외동 194 (도로명 주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산성로 144번길 50)
행주 성당의 유래
행주 성당의 유래는 18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9년 이 지역을 관할했던 약현 본당의 주임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는 이 지역에 포구가 있어 한강을 통한 수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거주 인구와 인구의 이동이 많은 지역임을 고려하여 행주 공소를 설립했다. 예상대로 공소 설립 이후에 신자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러자 조선대목구의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1909년 5월 21일 행주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고 김원영(金元永) 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종현 성당, 약현 성당에 이어 서울에서 세 번째 세워진 성당이었다. 서울대목구에서 8번째, 전국 28번째였으니 퍽 이른 시기였다.
김원영 신부는 이듬해 1910년 8월 17일, 성모승천 대축일 직후에 뮈텔 주교를 모시고 고양군 주도면 행주외리 197번지에 마련한 성당의 봉헌식을 거행하고 주보를 성모 승천으로 정하였다. 1922년에는 성당을 증축하면서 사제관도 신축하였다.
그리하여 교세가 더욱 성장되고 약현 본당 관할이었던 경기도 서부지역, 곧 김포군 · 통진군 · 고양군 · 양천군 · 양주군 · 파주군 등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공소들을 관할했다.
굴곡의 역사, 그 발전 과정
그 후 행주 본당은 일제 말기에 선교사 추방 등 교회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질 무렵인 1942년 1월, 8대 주임이었던 김유룡(金裕龍) 필립보 신부가 대전 목동 본당으로 전임된 후 신부가 파견되지 않음으로써 한때 공소로 격하되기도 하였다. 광복이 된 후에야 1947년 성당이 부활되고 이듬해 2월에 9대 주임으로 김성환(金成煥) 빅토리노 신부를 맞이했다.
본당으로 부활된 후 공동체는 활기를 되찾았으나, 얼마 못 가 서울의 도시화 현상으로 이농 현상이 심하여 신자수가 1,000명으로 감소했다. 이에 10대 주임으로 부임한 임충신(林忠信) 마티아 신부는 그 보완책으로 1957년에 수색동 205번지로 성당을 이전하고, 본당 이름을 ‘수색동 본당’(현 수색 본당)으로 바꾸면서 행주 본당은 다시 수색 성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 그후 수색 본당의 관할구역이 너무 넓어 1981년 능곡 성당이 설립되자 이번에는 능곡 성당의 관할로 들어갔다.
행주 공소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91년 안동교구장에서 퇴임한 두봉 주교가 찾아오면서부터다. 두봉 주교는 행주공소에 와서 조립식 사제관을 짓고 14년 동안 머물면서 공소를 새롭게 단장하고 피정 지도를 하는 등 공소 발전을 지원하였다. 이후 서울대교구에서 경기도 북부지역이 분할돼 의정부교구가 출범하게 되자, 두봉 주교는 직접 나서서 교구를 적극적으로 설득해 2004년 11월 행주공소를 다시 성당으로 승격시켰다. 행주 본당은 2007년 5월 27일 ‘100주년 기념사업 선포식’을 열고 ‘행주 공소 설정 110주년 ·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우리 민족이 자랑인 행주대첩의 고장이며 교회사적으로 100년이 넘는 고양 지역 신앙 공동체의 중심인 본당의 위상을 새롭게 하기 위한 기념사업에 들어갔다. 그 일환으로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부식돼 가고 있는 성당을 복원하고, 신자 재교육을 위한 피정센터를 건립하는 한편 학술대회, 100년사 편찬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2008년 5월 25일 본당 설정 100주년 기념 역사자료 전시관 개관식을 가졌는데, 전시관에는 주요 연보 및 사진 자료 등을 보기 쉽게 전시해 행주 공동체의 역사를 꼼꼼히 챙겨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성당 마당에 조성한 십자가의 길 축복식도 가졌다.
이런 준비과정을 거쳐 2009년 5월 31일 이한택 주교의 주례로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성당 옆 마당에서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관(성모의 집) 기공식을 가졌다. 이날 첫 삽을 뜬 100주년 기념관은 재정적 어려움 속에 3년여의 공사를 통해 완공되어 100년이 넘는 본당 역사를 몸소 느끼고 싶은 이들이 쉬어갈 수 있는 쉼터와 유물전시실, 교구사제 숙소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1910년에 건립된 성전이 1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건물도 낡고 지붕이나 벽도 예전 모습과는 달리 많이 변형되었다. 이에 행주 성당의 역사적 · 문화재적 가치를 보존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2013년부터 고양시의 지원의 받아 복원사업을 추진했다. 복원작업은 문화재 전문가들의 역사적 고증과 자문을 거쳐 진행되었고, 성당 해체 과정에서 나온 부재 중 사용 가능한 부재들을 재사용하고 낡은 곳은 구조를 보강해 최대한 문화재의 역사적 의미를 보존하고자 했다. 모든 공사를 마치고 2015년 12월 2일 행주 성당 복원 감사미사를 봉헌했다.
성모승천을 주보로 모신 행주 성당은 2016년 1월 25일 로마의 4대 성당 중의 하나인 성모 마리아 대성전과 특별한 영적 유대를 맺고 교황청 지정 특별 전대사 순례지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이를 기념해 같은 해 10월 26일 대구대교구 성모당을 모델로 프랑스 루르드의 성모동굴과 같은 모양의 성모당을 건립해 축복식을 가졌다.
정문에는 문기둥에 행주성당이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걸려있고 안쪽에는 커다란 건물 측면 벽에 로마교황청 지정 성모순례지 행주성당이라는 특성화된 성당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목책 울타리에는 환영 문구와 함께 행주 성당과 행주본당 공동체 안내판이 두 개가 붙어 있다. 그리고 벽에는 옛날 행주 나루터와 나루터 언덕에 들어선 한옥 성당 건물이 벽화로 그려져 있어 깊은 인상을 준다.
정문 안쪽에 처음 나타난 건물은 2012년도에 완공된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관(성모의 집)이다. 그리고 바로 옆에 성모당이 있는데 이는 2016년 교황청 특별 전대사 순례지로 선정 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성모 동굴로 대구대교구청 내의 성모당을 모델로 건립한 것이다.
안내판에 있듯이 대사(大赦)의 통상적 조건(고해성사, 영성체,교황의 지향에 따른 기도)을 이행할 경우, 전대사를 얻을 수 있는 날은 다음과 같다.
1. 교황 직할 성모 대성전 주보 축일인 8월 5일
2. 행주 본당의 주보 성모승천 대축일 (8월 15일)
3.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대축일 전례 거행일(1월 1일, 3월 25일, 8월 15일, 12월 8일)
4. 신자 각자가 1년 중에 한 번 자유로이 선택한 날
5. 신심의 이유로 행주 성당에 단체적으로 성지순례를 할 때마다
성전은 성모당 바로 아래 좀 낮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1910년 소박한 한옥 형태로 지어진 행주 성당은 1928년 인근의 현 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상량 목부재를 포함한 기존 기초 부재를 대부분 재활용했고, 1949년에 증축하면서 기록한 묵서 자료 등 변천 과정의 기록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건물의 뼈대를 구성하는 목조가구의 경우 최초 건립 부분과 증축 부분이 잘 남아 있어 성공회 강화 성당(사적 제424호)과 함께 대표적 한옥 목조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행주 성당은 2010년 2월 19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5호로 지정되었다. 등록문화재란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에서 건설, 제작, 형성된 후 50년 이상이 지난 것으로서 보존과 활용을 위한 조치가 특별히 필요하다고 등록한 문화재이다.
성전 바깥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 출입문 밖에 성모님 모자상이 서 계시고 문 안에는 봉헌대 겸 주보대가 있다. 여기서도 ‘100주년을 이어온 행주 성당’이라고 하여 유서 깊은 성당에 대한 자부심이 드러나 있고 이를 지키기 위한 의지도 보여주고 있다.
성전 내부는 한옥 건물의 속성상 그리 넓지는 않지만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 목제 열주가 두 줄로 서 있다. 일반적으로 열주는 당시 유교관습에 의한 남녀의 좌석 구분용기능도 한다. 그리고 서까래가 드러난 복잡한 천정 목재 부재가 100년 전통을 말해주며 고유한 목조 건물의 은은한 향기를 뿜어낸다. 제대 역시 건립 당시 고상과 성 요셉상, 그리고 성모상을 모신 트리엔트식 제대가 지금도 그대로 있고 그 앞에 현재 사용 중인 제대가 별도로 있다. 그리고 왼쪽 벽면에는 자비의 예수님 상이 걸렸고 제대의 오른쪽에 독서대가 있다.
다시 바깥으로 나오니 뜰에 성모님이 서 계시고 나무 제대가 놓여 있다.
행주 성당이 소재하는 고양시는 서울 근교로 지금도 도시화가 진행 중이었다. 높은 언덕 위에서 성모님의 가호 속에 지역 신앙을 굳게 지키고 있는 행주 성당의 늠름한 모습에 마음 든든하다.
더구나 행주 성당은 또한 근현대 순교자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인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에 포함된 하느님의 종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와 윤의병 바오로 신부가 주임신부로 사목하던 본당으로 순교자들의 손길과 땀이 배어 있는 순례지이다. 두 분 신부는 황해도에서 사목하다가 6.25가 터지자 끝까지 성당을 지키려다가 공산당에 의해 끌려가서 행방을 알 수 없으나 순교로 추정된다. 특히 윤의병 신부는 신앙 소설 은화(隱花)의 작가이다. 두 분 모두 머잖아 시복이 되어 행주 성당이 복자를 모시는 성당이 되기를 기도한다.
행주 하면 행주산성이 떠오르듯 사적지 행주산성이 가까이 있다. 오고 가는 길에 행주산성 표지판을 볼 수 있었다. 임진왜란 시 이름 없는 민초들까지 합심하여 성을 지킨 호국의 자취도 충분이 감동을 받는다. 행주산성을 소개하면서 순례기를 마친다.
행주산성(사적 제56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토축 산성이다. 1593년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대첩을 이룬 싸움터다. 당시 권율 장군은 해발 124m의 덕양산 중턱에 이중의 튼튼한 목책을 설치하였다.
전투 준비가 끝난 1593년 2월 12일 새벽 6시경 왜군 총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3만 명에 이르는 7개 부대를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대한 정면 공격을 개시하였다. 치열한 12시간의 공방전이 있은 후 오후 6시경 결국 적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갔다. 전과는 사상자가 1만여 명에 이르렀고 노획한 전리품 또한 대단하였다.
이 대첩의 승리로 왜란의 전황을 돌리는 계기가 된 동시에 권율 장군은 도원수로 승진하였다. 바로 이 행주 대첩이 충무공의 진주 대첩,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역사에 길이 빛나는 임란 3대 대첩이다. 이 대첩에는 고양의 부녀자까지도 전투에 참여하여 치마폭에 돌을 담아 날라 석전을 전개하였는데 그 치마를 행주치마라고 한다. (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