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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삶의 변수들에 대한 예수님의 역발상>의 줄거리:
안정감은 안정적인 삶의 상태에서 나온다고 믿고 모든 사람은 끊임없이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려 합니다. 하지만 참으로 지긋지긋할 정도로 안정감을 깨뜨리는 변수들이 끝도 없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수 없는 삶이 위험 천만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 삶에 대해 가지는 안정감을 깨는 변수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역발상을 하십니다.
삶의 변수들에 대한 예수님의 역발상
(요한복음 9:1~12)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삶의 변수들에 대한 예수님의 역발상>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삶의 변수들에 대한 예수님의 역발상”
역발상(逆發想)은 일반적이거나 상식적인 것과는 반대가 되는 생각입니다. 특히 이 반대되는 생각이 아주 유효하고 적절한 경우에 역발상이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는 안정을 깨뜨리는 많은 변수가 발생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삶의 안정감을 깨뜨리는 변수에 대한 역발상을 보여주십니다.
6~7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고치신 사건과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비유적이고 상징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통한 구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본문의 시각장애인과 같은 일이 그대로 일어나야만 합니다.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르신 것이 뜻하신 바가 무엇일까요? 티끌로 만들어진 진흙은 이 세상을 가리킵니다. 의식과 마음의 눈에 진흙이 발려진 상태가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의식과 마음에 세상이라는 진흙이 덮이는 바람에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우리의 의식이 하나님의 있음을 전혀 보고 있지 못하며 또한 마음이 그 하나님의 좋음을 전혀 보고 있지 못하는 상태임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언제나 존재감을 의식합니다. 있음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의식이 하나님에 대해 맹인이 된 상태로 살아갑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은 좋음과 싫음을 느끼는 처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좋음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 맹인이 된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모습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이때 서로에 대해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부부간에 대화를 하느라 하나님의 있음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맹인이 된 것입니다. 직장에서 사장님을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의식이 사장님께 집중되어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의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경우 또한 사장님에 대해서는 깨어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맹인이 된 상태입니다. 아내나 사장님이 의식의 눈에 발려진 진흙의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든 문제를 만나든 다급한 상황에 처하든 세상의 모든 것들은 진흙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를 의식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할 수 없고 하나님의 존재감은 뒤로 밀쳐지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문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서는 공백을 채우기 위한 목마름이 발생합니다. 마음은 이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 언제나 좋음을 확인하고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 것들의 좋음을 보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좋음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진흙이 눈에 발려진 상태입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좀 더 벌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갖고 싶다는 바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돈이 진흙이 되어서 마음의 눈에 발려진 것입니다.
의식은 있음을 느끼는 처소이고 마음은 좋음과 싫음을 느끼는 처소입니다. 의식으로 세상을 보고 마음에서 세상의 좋음을 보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해서는 볼 수 없습니다. 천국이 있고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에 발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본래 세상을 의식하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면 나의 삶은 하나님이 의식하시는 대로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함으로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의식 또한 등지게 됩니다. 내가 삶을 의식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대해 갖고 계신 의식 또한 뭉개져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실로암 연못으로 비유하십니다. 7절을 보면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라는 설명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장에서 베데스다 연못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실로암 연못은 베데스다 연못과 함께 이스라엘의 양대 연못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 실로암 연못은 예루살렘성 밖에 있는 기혼 샘의 물을 530미터의 S자 형의 수로를 통해 예루살렘성 안으로 흘러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기혼 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물들이 모인 곳이기에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의 실로암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이 시작부터 지금까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반복하고 있는 내용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맹인에게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는 세상 진흙이 의식의 눈을 덮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천국을 의식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극복되어 의식으로 천국을 보고 마음으로 천국에 계신 하나님의 유일하게 좋음을 보기 위해서는 보냄을 받은 자에게로 가야합니다. 기혼 샘에서 보내진 물이 실로암 연못에 모여 있듯이, 하늘로부터 보냄 받으신 예수님께로 가서 보혈로 의식과 마음을 씻을 때 천국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배우자와 대면하면서도 의식에서는 하나님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이 없더라도 마음의 눈으로 천국에 계신 하나님의 좋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의식이 하나님의 있음을 보고 마음에서 하나님의 좋음을 보는 동안에 이 세상의 삶 또한 하나님께서 보시고 생각하시는 대로 질서정연한 평강의 삶으로 이끌려지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러한 결론을 염두에 두고 본문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보고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2절을 보면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질문은 2000년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생길 수 있는 무척 타당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의 죗값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안고 태어나야 했던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3절에서 이어집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질문 속에는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병이나 장애가 죄의 결과라는 것은 상식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 또한 시각장애를 안고 있던 이 사람은 분명히 정상적인 신체로 태어난 사람들에 비해 지은 죄가 더 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서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대체 갓난아기가 무슨 죄를 지을 수 있기에 이러한 고통스러운 장애가 죗값으로 나타났다는 것일까요? 제자들로서는 도무지 아기가 무슨 죗값을 받았는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아기의 죗값이 아니라면 다른 누구의 죗값을 대신 받았다는 것일까요? 아마 부모의 죗값이 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 질문 속에는 죄를 많이 지으면 삶에서 그만큼 고통의 변수를 만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상식이었고 지금도 이러한 생각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삶에서 원치 않는 변수들이 등장하여 삶에서 안정감이 깨어진다면 그 이유를 죄에서 찾고자 하고 죗값을 치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상식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의 시각장애는 인생전체의 안정감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변수였습니다. 다시 말해 시각장애라는 변수가 아기를 공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원인이 이 사람의 죄나 부모의 죗값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마디로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확대하여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안정적인 균형을 깨뜨리는 부정적인 변수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안정감을 깨뜨리는 부정적 변수들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수들이 생기는 원인을 죄 때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죄 때문이 아닙니다. 고통의 이유는 죗값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주권자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면 참새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인생의 질서와 균형을 깨뜨리는 변수들이 발생하는 것도 주권자 하나님의 뜻입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예를 들어보자면 암이나 불치병에 걸린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점점 더 심각해져 가기만 하는 코로나 사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이 죄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벌어지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졌던 오해는 오늘날의 예배당 안에서도 팽배해있습니다. 꼭 질병이 아니더라도 사업이 망하거나 자녀가 세상적인 가치기준에서 형통하지 못하면 죗값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발상을 완전히 뒤집는 역발상입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말씀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사람은 시각장애라는 변수를 안고 태어났다. 그러나 시각장애뿐만이 아니다. 삶의 균형과 질서를 깨뜨리고 안정감을 완전히 내동댕이치는 변수들이 있을 수 있다. 삶에 불안감을 조성하고 두려움을 안겨주는 이러한 변수들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이러한 변수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삶의 변수들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오히려 이러한 일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개입하시지 않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역발상입니다. 삶의 안정감을 깨뜨리는 변수들은 죗값 때문이 아닙니다. 때로는 그러한 변수들이 패배자 의식이나 낙오자 의식을 갖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인격에 개입하셔서 당신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을 때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역발상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삶의 균형과 질서가 깨어지고 안정감이 깨어지는 부정적 변수들이 발생한다는 것은 죄 때문이라는 생각을 씻어 낼 수가 없습니다. 죄를 지었기에 부정적 변수가 생기고, 죄를 짓지 않으면 부정적 변수도 생기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변수들이 등장할 경우에 당장 고통과 두려움과 불안이 생겨납니다. 이것들은 좋은 것이 아니기에 무엇인가 잘못이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상식이 지배적입니다.
이 생각이 왜 틀렸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까지의 이야기에 근거를 두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전 말씀에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의 사건을 통하여 “모든 사람은 지옥행 사형수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지옥행 사형수인 이유는 의식과 마음에 있습니다. 배우자를 앞에 두고 있어도, TV를 볼 때도, 삶의 문제를 마주할 때도 의식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감이 제외됩니다. 의식이 전혀 하나님의 있음을 보지 못합니다. 의식이 하나님의 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 또한 하나님의 좋음을 보지 못합니다. 인격의 가장 깊은 곳인 마음의 공백 안으로 이 세상 것들을 좋다고 여깁니다. 이것은 마귀 아버지의 소리에 대해 입으로는 아멘, 아멘 하면서도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과 결합하는 영적인 음행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설령 세상적인 기준과 법 혹은 율법과 계명에 대하여 행위적으로는 범죄 하지 않았을지라도 의식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고 있지 못하는 단계에서 이미 지옥행 사형수인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구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빈부귀천 남녀노소 지식의 유무에 상관없이 전부 지옥행 사형수입니다. 그러나 지옥행 사형수로서의 정죄와 심판은 이미 끝났습니다. 종말에 이루어질 심판을 백보좌 심판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1절에서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라고 하였던 것에 기인합니다. 다만 이 심판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한 심판입니다.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지옥행 사형수에 걸맞는 죄악에 대한 정죄와 심판이 끝난 상태이기에 더 큰 죗값을 보태려고 해도 보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류를 내려다보시며 하시려는 일은 지옥행 사형수들을 어떻게 구원하느냐가 문제입니다. 구원의 상태는 의식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는 상태입니다.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하든 의식은 하나님의 있음을 먼저 보고 느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침을 흘리고 추구하고 가졌다고 좋아하더라도 나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의 있음을 의식할 수 있을 때 마음은 하나님을 유일한 좋음으로 열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원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 문제들의 진흙이 의식의 눈에 발려서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배우자라는 진흙, 돈 문제라는 진흙, 건강 문제라는 진흙이 의식의 눈에 발려서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한 첫 번째 단계로 하시는 일이 삶에 변수들을 발생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마음으로 갈망하지 못하는 지옥행 사형수의 상태는 독특한 성향을 띕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합니다. 탈 없이, 일없이, 조용하고, 고요하게, 편안함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보험, 연금, 저축과 같은 시스템을 생각합니다. 지옥행 사형수들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성향은 바로 안정지향성입니다. 세상에 대한 안정지향성은 의식과 마음이 세상에 붙어있음에 기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는 지옥행 사형수의 신분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안정지향성에 반대되는 일을 주권적으로 해나가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삶에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변수들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변수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만큼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돈을 잘 버는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저런 변수로 인해 돈을 벌지 못합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이 잘 풀렸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님의 역발상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돈이 잘 벌려서 의식과 마음이 이 세상에 밀착된 상태가 유지된다면 그만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계획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코 죄 때문에 돈을 못 버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이 나쁘면 죄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지옥행 사형수로서 죄는 똑같습니다. 그런데 남보다 몸이 아프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옥행 사형수에서 벗어나게 하시고자 부정적 변수들을 허락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부정적 변수들을 통해서 세상 이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됩니다.
의식과 마음이 세상에 밀착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안정지향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을 흔드는 변수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의식과 마음이 천국이라는 세계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좋음에 대해서 눈이 열릴 가능성도 주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 생기는 부정적 변수들은 틈새입니다. 이 틈새를 통해서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보아야 할 예수님은 종교적 예수님이 아니라 동선상의 예수님입니다.
세상에서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몸이 아픕니다. 돈도 못 법니다. 사회적으로도 별 볼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객관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일부러 비안정적인 삶을 사시다가 아무 미련도 없이 쏜살같이 세상을 빠져나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안정지향성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전에는 예수님을 붙잡더라도 지옥행 사형수로서 안정지향성을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믿는 예수님은 종교의 예수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삶의 변수들이 발생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객관적 모습을 소개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세상으로 보내지셨고 세상에서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의도 하나 없이 세상을 쏜살같이 빠져나가셔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변수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틈새입니다. 끊임없이 변수에 공격당함으로써 안정적 시스템을 구축할 수 없게 된 마음은 예수님을 붙잡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붙잡으면 의식과 마음의 눈이 떠집니다. 의식으로 천국을 보게 되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게 됩니다.
실로암이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러한 일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우리의 삶에 변수들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의식으로 하나님을 첫 번째 존재감으로 느끼고 천국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믿을 때에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을 보면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신 이유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천국의 있음과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본문 9장 5절에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와 상통합니다. 세상에 계신 동안이란 공생애 기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의식 속에 예수님이 담겨있는 동안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을 의식할 때에 하나님의 일이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 예수님이 담겨 있으면 예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하나님의 좋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보고 하나님의 좋음을 보는 동안에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져 갈 수 있습니다.
안정적 삶에 제동을 거는 어려운 변수들이 발생했다면 주님의 역발상으로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죄가 더 많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나타나게 하시기 위하여 변수들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여러분의 의식과 마음에 개입하시고 또한 삶에도 개입하시기 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지옥행 사형수일 수밖에 없는 나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는 현장으로 삼고자 변수들을 주고 계십니다. 그러한 변수가 없어서 세상에 대한 안정지향성에 제동이 걸리지 않고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개입하셔서 하고 싶으신 일이 전혀 없으시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의 의식의 눈과 마음의 눈이 천국 보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변수로 둘러싸인 삶이라면 그 정도의 깊이와 부담만큼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변수에 대한 올바른 대응법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원치 않는 여러 가지 안정을 깨뜨리는 변수를 허락해주심을 주님의 역발상을 통해 배우며 감사합니다. 이 어렵게 치러지는 변수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의식과 마음의 눈을 뜨는 계기가 되게 하여 주시고,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일이 속속들이 나타나는 발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