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부 지도 강사와 “이터에 새얼을”
교번 5663 이현수
1974년 11월로 기억된다. 31기들이 화랑제 끝나고 과외활동을 접으면서 3학년 간사생도가 과외활동을 이끌어 가던 때였다. 1학년 2학기부터 줄곧 서도부에서 활동해 왔고 3학년 때 서도부 간사를 맡고 있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차기 서도부장 생도가 될 예정이었다.
당시에는 과외활동에 고정적으로 지도 강사를 두는 경우가 없었다. 서도부는 처음 들어온 생도들에게 4학년 서도부장 생도가 기초만 가르쳐 주고 그 후에는 혼자 글씨 쓰는 연습을 해야 했다. 가끔 유명한 서예가를 모셔 와서 글씨 쓰는 장면을 보여주는 기회가 있었는데 서예가 김창환 선생님이 오셔서 “龍” 자를 멋있게 써보이셨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나는 차기 서도부장 생도로서 지도강사를 모시고 싶은 열망이 컸다. 당시 생도대 참모부에는 과외활동과장이 있었는데(변 홍 소령으로 기억됨), 어느 날 과외활동과장님을 찾아가서 서도부에 지도강사를 모실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과외활동 과장님은 예산이 없어서 강사료를 드릴 수 없다고 하셨다. 그래서 강사료는 생도들이 알아서 할 테니 허락만 해달라고 졸랐다. 과외활동과장님은 만약 지도강사를 모셔온다면 찝차로 모셔오고 모셔다드릴 수는 있다고 허락해 주셨다.
마침 인척 중에 이화여대 다니는 학생이 있었는데 서예써클에서 활동하고 있다길래 지도해 주시는 분에 대해 물어봤더니 아주 열성적으로 지도해주신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 분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분이 종로5가 시장 근처에서 서실(書室)을 운영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12월 어느 토요일 무턱대고 지하철 종로5가역에서 시장 쪽으로 걸어가면서 서실을 찾아 나섰다. 물어물어 찾아서 드디어 2층에 있는 한 서실을 발견하였다. 계단을 올라가서 서실 입구에 걸려있는 액자를 보고는 입이 딱 벌어졌다. ‘德’이라는 글자 한 자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힘이 넘치는 모습으로 걸려 있었다. ‘아! 내가 찾는 선생님이 여기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노크를 하였더니 머리가 벗겨진 어른이 나오시며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선생님이 이화여대에서 서예를 지도하시는 분이시냐고 되물었다. 그렇다고 하시길래 육사 서도부장 생도인데 뵙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말씀드렸다. 그분은 나에게 1층 다방에 가 있으면 바로 내려가겠다고 하시고는 서실로 들어가셨다. 문이 열렸을 때 안에서 여러 명의 여학생들이 글씨 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방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5분도 안되어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선생님이 앉으시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렸다. 육사 서도부에 50여명의 생도들이 붓글씨를 배우고 싶어 하는데 지금까지 가르쳐주실 분이 없었다. 선생님께서 매주 수요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지도해 주실 수 있으신가? 만약 와주신다면 육사에서 찝차로 모셔오고 모셔다드리겠다. 대강 이런 내용으로 말씀드렸더니 그분은 즉석에서 다음 주부터 가면 되느냐고 물으셨다. 강사료를 드리지 못한다는 말씀을 차마 못 드렸는데 그분은 강사료 얘기를 꺼내지도 않으시고, 지금까지 여학생들만 가르쳐왔는데 육사 생도들을 가르치게 되어 기쁘다고 하셨다. 그 분은 이화여대 말고도 덕성여대에서도 서예를 지도하고 계셨다. 그분이 바로 동주(東洲) 이병호(李炳虎) 선생님이셨다.
이렇게 하여 3학년 말부터 매주 수요일 과외활동 시간에 그분을 지도강사로 모시게 되었는데 과외활동에 지도강사를 모신 것은 서도부가 처음이었다. 그 후 내가 육사 교수로 근무하게 되었을 때에는 과외활동 강사료가 예산에 반영되어 여러 부서에서 학기별로 강사를 모시고 있었다.
나는 수요일 과외활동 시간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토요일 오후에 외박을 나가면 바로 그 선생님의 서실에 가서 연습을 하였다. 서실에 있던 학생들이 모두 집에 가고 나 혼자 남아서 연습하는 날이 많았다. 선생님은 아예 열쇠 한 개를 더 만들어서 나에게 주셨다. 나는 일요일 아침 일찍 또다시 서실을 찾았다. 아무도 나와 있지 않은 서실에 들어가 난로에 연탄불을 피우고 연습하고 있으면 선생님이 나오시고 다른 학생들도 나왔다.
이렇게 수요일 과외활동 시간과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까지 붓글씨 연습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4학년이 되었다. 나는 더 큰 욕심이 생겼다. 평일 자유시간에도 글씨를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외활동과장님께 또 건의를 드렸다. 생도대에 서도실을 마련해 주시면 서도부 생도는 물론 서도부가 아닌 생도들도 자유시간이나 주말에 이용하여 정서함양과 인격도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씀드렸더니 과외활동과장님은 웃으시면서 뭐가 필요하냐고 하셨다. 나는 생도식당에서 버리려고 내놓은 식탁 4개와 그 위에 깔아놓을 폐 모포 8장만 있으면 된다고 하였다. 장소는 6중대 지하에 생도대 광장 쪽으로 큰 방이 하나 비어있는 것을 알고 그곳으로 하겠다고 말씀드려서 허락을 받았다. 그날 바로 빈 방을 청소하고 식탁을 날라와서 모포를 덮으니 서도실이 만들어졌다.
나는 4학년 생도들에게 서도부가 아니더라도 자유시간에 서도실에 와서 글씨를 쓸 수 있다고 홍보하였다. 그리고 강사이신 동주 선생님께도 그 사실을 말씀드렸다. 동주 선생님은 잘 되었다고 하시며 필요하면 선생님이 서도실에 나오셔서 지도해 주시겠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사실 과외활동 시간에 지도해주시는 것도 무료로 해주시고 계셨다. 한 달에 한 번씩 서도부 생도들이 약간의 돈을 모아서 드리곤 했는데 강사료라고 하기엔 너무 적은 금액이었다. 선생님은 생도들이 무슨 돈이 있겠느냐고 하시며 한사코 거절하시다가 마지못해 받아 가셨다. 이런 상황이었는데 평일 저녁에 육사까지 오셔서 지도해 주시겠다고 하시니 감격스러울 뿐이었다.
평일 서도실 운영은 4학년 생도들에게 인기가 많아서 저녁 먹고 빨리 가지 않으면 자리가 없어서 돌아가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생도 일과를 보면 월요일엔 하기식과 구보가 있고 금요일엔 영화관람과 검열점호가 있어서 평일 자유시간에 서도실에 올 수 있는 날은 화, 수 목요일뿐이었다. 동주 선생님은 거의 빠지지 않고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에 생도대 서도실에 오셨다.
한편 서도부장이었던 나는 수요일 과외활동 시간은 물론,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 자유시간,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까지, 월요일과 금요일만 빼고 일주일 내내 동주 선생님한테 붓글씨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동주 선생님한테 글을 받으면 매일 그 글씨만 반복해서 연습했다. 선생님은 붓을 쥐고 있는 내 손을 뒤에서 잡으시고 획을 쓸 때의 속도와 힘주기, 먹의 농도 등을 아주 자상하게 알려주셨다. 처음에는 신문지에 연습하다가 어느 정도 글씨 모양이 잡혀가면 선생님은 이제 화선지에 써보라고 하셨다. 화선지 수 십장을 쓰고 있을 때 선생님이 그 중 한 장을 보시고 이걸로 표구해도 되겠다고 말씀하시면, 그 서실에서 멀지 않은 표구사로 달려가 표구를 맡겼다. 그 표구사는 동주 선생님의 장남이 운영하고 있어서 특별히 싼 가격으로 표구를 해 주셨다. 이렇게 일주일이나 2주일이면 작품이 하나씩 만들어졌다. 표구를 맡기면서 그전에 표구 맡겼던 작품을 찾아 들고 귀영버스 타려고 청량리로 향할 때의 기분은 나만의 행복이었다.
졸업이 얼마 안 남았을 때인데 졸업앨범을 만들고 있었던 앨범부장 이보웅 생도는 나와 같은 중대이고 같은 중국어 전공이었다. 어느날 이보웅 생도는 앨범을 편집하다보니 한 페이지가 공백으로 남게 되는데 거기에 우리 동기생들의 슬로건이 된 ‘이터에 새얼을’을 붓글씨로 써서 넣으면 좋겠다면서 서도부장인 내가 써주길 원했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하고 서도실에 가서 몇 번을 써보았다. 그러나 내가 쓴 글씨는 내가 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주 토요일 나는 동주 선생님의 서실에 가서 선생님께 부탁드렸다. 선생님은 나에게 먹을 갈라고 하시고는 화선지 한 장을 꼬깃꼬깃 뭉치시더니 다시 펴놓으시고는 곧바로 ‘이터에 새얼’이라고 쓰셨다. 내가 ‘을’자가 빠졌다고 하자 선생님은 ‘얼’자 옆에 조그맣게 ‘을’이라고 쓰셨다. 그걸 받아서 앨범부장에게 전해주었는데 우리 졸업앨범에 있는 ‘이터에 새얼을’은 이렇게 해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원본을 받아서 표구해 두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앨범을 만든 뒤에 버려졌을 것을 생각하니 두고두고 아쉽기만 하다.
나는 졸업식 다음날 선생님을 찾아 뵈었는데 선생님은 나를 선생님 댁으로 데리고 가서 사모님께 인사드리게 하셨다. 사모님께서 주안상을 차려내 오셔서 나는 선생님이 따라주시는 졸업 축하주를 마셨다. 선생님은 육사 생도들에게 서예를 가르쳤다는 것을 큰 자부심으로 여기셨다. 나는 선생님에게 앞으로 후배들도 잘 지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전방에 가서 근무 잘하고 서울 나올 기회가 되면 다시 찾아뵙겠다고 인사하고 작별하였다.
그로부터 일년 반이 지나서 나는 육사 교수요원으로 선발되어 서울로 나오게 되었다. 서울에 오자마자 나는 선생님 댁을 방문하였다. 사모님이 나오시더니 나를 방으로 안내하셨다. 그 방에는 흰 천이 양 옆으로 늘어져 있고 가운데에 동주 선생님의 영정이 놓여 있었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정정하시던 선생님이 왜 사진으로만 날 반기시는 건가? 나는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한참을 흐느끼다가 일어났더니 사모님께서 선생님이 한 달 전에 갑자기 쓰러지셔서 그대로 운명하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위탁교육을 마치고 육사에서 교수로 근무하면서 여러 선배 교수들로부터 생도 때 붓글씨를 잘 썼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계속 붓글씨를 쓰고 있느냐는 질문도 받았다. 서도부 지도교수를 맡아 달라는 부탁도 여러 번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 후로 붓글씨를 쓰지 않았다. 글씨 쓰려고 먹을 갈고 붓을 들면 동주 선생님이 나타나신다. 선생님은 절대로 미흡한 상태로 “표구 맡겨도 되겠다”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나는 더 이상 선생님의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첫댓글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아름답습니다. 감동이고요.
아, 감격스럽습니다.
많은 동기들이 이교수님 작품으로 알고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박종풍 동기님, 박윤오 동기님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도 아련한 추억이네요
이현수 동기 덕분에 나도 토요일, 일요일, 휴가기간 1/2을
종로에 나가 열심히 붓질하곤 하였는데...
아무튼 늦었지만 스승님 명복을 빕니다.
임관 후, 붓 꺽고 살아왔는데
이제라도 구청 구민대학 서예반에라도 기웃거려야 할 모양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현수 동기의 애절한 사연과 감동의 글 잘 보았어요.
*이터에 새얼을*이라는 표구에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요. 이제 옛날일은 잊고 다시 붓을 잡아보는것도 스승을 기리는 일은 아닐까요 ?
현수동기 덕분에 선생님으로 부터
4군자를 배우게 되어
졸업시 매난국죽 치는법을
익혔습니다
엄청 감사하네요
화랑제때 육사 처음으로
4군자 작품 매화 대나무
그리고 난초와 한글전서
1점을 표구해서 전시했는데 내가 지금
생각해도 그림에 생동하는 기가 넘치고 멋있는 그림이
었습니다
그 그림중 난초는 김선근 법사님이 소유하고 있고
대나무는 형님 사장어른이
소중히 간직하다 지금은
그 손자가 잘 보유하고
뻘간 꽃이 피어있는 매화는
형님이 보유하고 있다가
조카들이 장난치다 찢어져
폐기되었읍니다 참 아쉽습니다
그리고 "명예와 신의"라는 한글 전서는 13중대 홀에
걸려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디에 가 있는지?
궁금하네요
그인연으로 산청에 내려와
3년동안 도서관에서
더 연마해서 경남도전에 제출 2번 입선했습니다 현수 동기 이병호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 하 이렇게 "이터에 새얼을"이 탄생되었군요,
이현수 회장님, 글을 읽으며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생도생활도 멋있게 하였고, 육사 교수도 멋있게 하였습니다.
'이터에 새얼을' 뜻도 깊고 글도 멋있습니다. 이회장님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되네요.
이회장님 글도 몇편 올려주시고 앞으로도 계속 서예와 함께 멋있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침마다 동기회장님 보내주신 커피잔의 ^이터에새얼을^ 을 볼때마다 가슴뭉클함을 느끼고, 또 멋진 글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현수교수님의 젊은 시절 열정과 스승님과의 애틋한 제자스승사랑을 들으니 더욱 멋지고 친구의 묵향이 느껴지는 아침이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