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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교회 다니지 말고 교회 하나씩 세우자>의 줄거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18장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맥락 중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로마서 16장에서 로마 성도들에게 문안 인사를 하는 중에 가정교회가 언급됩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교회 성립의 여건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가정교회 형태 뿐이겠습니까? '두세 사람 교회'도 있지요.
교회 다니지 말고 교회 하나씩 세우자
(로마서 16:1~16)
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5.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교회 다니지 말고 교회 하나씩 세우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교회 다니지 말고 교회 하나씩 세우자”
오늘 본문은 로마서의 마지막 장입니다. 척 보아도 문안 인사가 주된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16절 전체를 다 합치면 27명의 이름이 거론됩니다. 첫 번째는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라는 여성입니다. 겐그레아는 고린도에서 남동쪽으로 11km 떨어진 곳에 있는 항구도시였습니다. 이곳은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에 서원한 것을 수행하기 위하여 머리를 깎았던 곳입니다. 겐그레아 교회는 고린도 교회를 통하여 주변에 복음이 확산될 때 세워진 교회 중 하나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썼는데 뵈뵈는 이 편지를 들고 로마에 방문한 장본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교인들이 뵈뵈를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잘 대접해주기를 당부합니다. 그런데 이 당부에 담긴 표현이 독특합니다. 2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보호자로 번역된 단어의 원문을 보면 프로스타티스(προστατις)로서 공동체나 단체의 합법적 대표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남성에게만 쓸 수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또 당시에는 지역 내에서 시민권이 없거나 경제적으로 취약한 이방인을 보호하기 위한 직책을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보호자라는 헬라어 단어가 여성에게 적용된 경우는 이 부분이 유일합니다.
사도 바울이 뵈뵈를 자기의 보호자라고 언급한 것은 사도 바울의 행적을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중심으로 한 아가야 지역은 사도 바울에게 낯선 땅이었습니다. 의식주를 비롯해서 모든 일들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뵈뵈라는 여성이 사도 바울의 삶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충당하는 보호자를 자처하여 도움을 주었습니다.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의 삶을 위해 필요한 조건을 제공한 사람이 뵈뵈라는 여성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도 이와 비슷한 일을 한 자주장사 루디아가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서는 루디아가 보호자의 역할을 했다면 고린도 교회가 있는 아가야 지역에서는 겐그레아 교회의 뵈뵈가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여 사도 바울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뵈뵈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 편지를 고린도 교회와 겐그레아 교회가 있는 아가야 지역에서 로마 교회에 전달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이어지는 3~4절을 보면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언급됩니다. 이들은 로마 교회 성도들 중에 첫 번째로 언급되는 사람들입니다. 브리스가는 사도행전에서 언급된 브리스길라와 동일인물입니다. 브리스가의 애칭이 브리스길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을 동역자로 언급합니다. 이들은 유대인이면서도 로마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AD.50년에 클라우디오 황제에 의해 로마에 내려진 유대인 추방령에 의해 고린도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2차 전도여행을 진행하고 있던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이들이 사도 바울에게 전도를 받았는지 혹은 로마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이들은 사도 바울을 만난 이후에 복음 사역에 동참하여 천막 깁는 일을 같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4절을 보면 이러한 브리스가와 아굴라에 대해 소개하며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목까지도 내놓았나니”라는 부분을 직역하면 “도끼 아래에 목을 들이밀었다”라는 뜻입니다. 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어떤 사건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했는가에 대해서 추측하는데 에베소에서 있었던 유대인들의 핍박이 유력하다고 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 있을 때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들의 조합장이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에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사도 바울의 목숨을 구했으리라 여겨집니다. 또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하였는데 이방인의 모든 교회들이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 감사한 이유는 이들이 사도 바울의 목숨을 지킴으로써 이방세계로 십자가 복음이 전파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겨난 이방인의 모든 교회들이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 감사하였다는 것입니다.
5절로부터 15절까지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의 이름이 계속 거명되며 문안 인사는 이어집니다. 그러다가 1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하며 인사가 마쳐집니다. 이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보자면 “하나의 그리스도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문안 인사를 마무리 지으며 왜 교회를 언급한 것일까요? 이것이 오늘 “교회 다니지 말고 교회 하나씩 세우자”라는 제목과 연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문안 인사의 마지막에서 교회를 언급하는 이유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 대한 소개로부터 잘 드러납니다. 5절을 보면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의 집 주변의 성도들이 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집이 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이러한 형태의 교회를 가정교회라 부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러한 가정교회가 계속해서 언급됩니다. 10절을 보면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권속이란 한 가정에서 모이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또 11절을 보면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고 하였는데 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14절과 15절에서도 가정교회를 염두에 둔 문안 인사가 이어집니다. 이로부터 16절의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런데 로마에만 교회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가정교회가 다수 존재했습니다. 문안 인사 속에 등장하지 않은 가정교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문안 인사가 기록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묵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돌출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의 문안 인사에서는 교회가 성립될 수 있는 조건이 드러납니다. 그 조건을 따져보면 우리가 교회와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를 언급하였습니다. 다만 다른 서신들을 보면 사도 바울이 교회를 언급할 때에는 보통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굳이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교회의 본질을 언급하고자 한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루신 연쇄과정은 모든 성도의 마음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이 땅에서 교회를 이룹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의 몸이 모인 모든 곳을 “그리스도의 교회”라 부르고 있습니다.
큰 덩어리의 로마 교회라고 말하지 않아도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였습니다. 이 가정교회는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예배당 중심의 기독교 종교생활과 비교됩니다. 가정교회에는 기독교 종교생활의 하드웨어 부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드웨어 부분이란 예배당과 그에 따른 조직, 생활습관, 수많은 프로그램, 형식적 예배, 다양한 예식, 각종 절기의 행사, 각종 다양한 직책, 부흥의 이데올로기, 재정적 압박감을 포함합니다. 우리의 종교생활을 보면 이러한 내용이 9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언급되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 이러한 내용이 완전히 제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로 성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 당시 가정교회에는 성경조차 없었습니다. 이방인 교회에서 구약성경을 접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이방 지역에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어깨너머로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 뿐 제대로 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신약성경도 지금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에 대한 기록 또한 파편화되어 조각조각 흩어져 전해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이방인 교인들이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기록된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시절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르셨다는 이야기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구약성경의 인용이라든지 생활에 접목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적용의 문제로 가르쳐주었을 뿐입니다. 그 외에는 실제로 가르침을 얻을만한 성경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은 진짜였습니다.
가정교회에서 진짜 믿음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은 애초에 복음을 종교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종교로 받아들였습니다. 기독교 종교 안으로 받아지려면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복음이란 예수님 안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종교에 받아들여져서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만이 기독교 종교인이 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이 전달될 때에는 예배당이나 종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을 하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다는 사건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가정생활에서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가져야 하고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에서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가져야 합니다. 실제로 복음은 동네에서 살아야 하고 가정에서 살아야 하고 직장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독교 종교로 사람을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조건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가정교회의 모습과는 반대입니다. 당시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리는 예배당이 아닌 가정이고 직장이고 동네이고 시장이고 학교이고 군대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문안 인사를 하며 거명하는 이름들을 보면 노예 출신도 있고 황제 가문의 사람도 있으며 귀족 출신도 있고 여성도 있습니다. 각양각색 계층의 사람들이 전부 자기의 처지에서 삶을 사는 동안에 십자가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종교의 흔적이 없습니다. 이들은 십자가 복음을 종교가 아닌 생활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를 다닌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 연쇄과정을 거쳐서 하늘에 올라가신 예수님 안에 마음이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마음이 육체의 몸에 붙어있지 않고 삶의 현장을 떠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올라간 상태의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를 언급합니다. 이 모든 교회는 가정교회를 포함하지만 가정교회만이 교회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교회를 직접 언급하십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회중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와 같이 교파의 이름이 붙는 경우가 있고 오늘 본문에서 살펴본 것처럼 가정교회도 존재합니다. 저는 이렇게 다양한 방식의 교회 이름 중에 “두세 사람 교회”라는 이름도 일반 명사로 끼워 넣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두세 사람이면 가정교회보다 더 작은 단위입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둘만 모여도 그곳은 교회입니다. 예배당도 필요 없고 종교조직에 대한 헌신과 봉사와 희생도 필요 없지만 교회는 성립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뵈뵈를 보호자로 칭했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가 목을 내놓고 자신을 지켰음을 언급합니다. 이들은 모두 사도 바울을 보존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나 로마서에서 드러나듯이 사도 바울은 오직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을 보존했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보존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조건이 됩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보존하는 곳에 교회는 세워집니다. 그 외에 다른 조건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저는 조직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조직신학이란 기독교의 신앙체계 전체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조직신학적으로 말하면 교회의 성립에는 말씀과 성찬과 세례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말씀과 성찬과 세례는 사실은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말씀은 십자가 복음을 의미하며,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며, 세례도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조직신학적으로 따로 분리할 필요가 없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할 수 있으면 됩니다. 이것이 교회 성립의 요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들에서 교회를 언급할 때에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굳이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를 언급합니다. 이에 앞서 그리스도 교회의 핵심적 복음의 내용을 전달하는 자신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음을 밝혔고 가정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당시의 가정교회는 지금의 기독교 종교형태와 비교해 볼 때 상당히 차이점이 있습니다. 가정교회는 우리가 힘들이고 에너지를 쏟아붓는 대부분의 것들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음에도 교회로 성립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로 일컬어지는 이방인의 모든 교회에서도 지금과 같이 하드웨어가 중시되지는 않았습니다. 예배당을 중심으로 한 조직체를 만들어놓고 교회라고 부르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문안 인사에서는 교회의 윤곽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이 교회에 관한 메시지를 듣고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교회는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을 다닐 수 없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 있는 모든 사람이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는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가 있는 중에 이 땅에서 몸으로 모이는 모든 모임이 포함됩니다. 이 모든 교회에는 가정교회도 있으며 더 작게는 두세 사람 교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두세 사람의 교회, 서너 사람의 교회, 대여섯 사람의 교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두세 사람 교회”를 일반 명사처럼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릉에 방문하시는 분들을 보면 두세 분이 같이 오실 때가 있습니다. 두 분이 오셨다면 그 두 분은 이미 교회를 이루신 것이고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교회가 차를 타고 저에게 오신 것입니다. 마음이 이 땅을 떠나 주님과 함께 하늘로 가고, 주님 안에서 하늘에 있는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 둘만 모여도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됩니다. 가정에서 모이면 가정교회가 됩니다. 열댓 사람이 모이면 열댓 사람 교회가 됩니다.
그러므로 종교생활을 할 때 “교회를 다닌다.”라는 고정관념을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의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역사를 따라 복음을 전했다면 교회는 세워진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도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늘에 머물 수 있는 교회에 속한 사람이 되게 하였다면 그분과의 만남에서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는 다니는 곳이 아니라 세우는 것입니다. 두세 사람의 교회로부터 교회는 세워질 수 있습니다.
교회 성립의 요건은 단 하나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이루신 연쇄과정 속으로 마음과 의식을 들여보내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에 들어감으로써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여 사위일체의 단위를 구성해야 합니다. 사위일체를 이룬 사람이 둘 이상 모인 상태가 교회입니다. 각자가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 뿐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예배당 중심으로 많은 일들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의 일들이 실제 교회 성립을 위해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가는 영생과 인생의 삶에 절대적인 방해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저 자신이 그런 기독교 종교의 앞잡이였던 시절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교회에 대한 객관적이고 영적인 실체임을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는 대신에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온전히 홀로 예배드릴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심으로 삼위일체 되심에 참여하여 사위일체를 이루는 자가 됨으로써 두세 사람의 교회로부터 우리 스스로가 교회를 세워나가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