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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휘는 명웅(命雄)이요, 자는 정이(挺而)고 성은 이씨(李氏)며 선계(先系)가 종실(宗室)에서 나왔다. 우리 장헌왕(莊憲王)의 현손(玄孫) 금천군(錦川君) 이감(李瑊)이 증 의정(議政) 이성중(李誠中)을 낳고 의정이 완흥군(完興君) 이유징(李幼澄)을 낳았다. 완흥군의 부인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예문관 검열 조확(趙擴)의 딸인데 만력(萬曆) 18년 10월 5일(계유)에 공을 낳았다.
4세 되던 해에 완흥군은 세상을 떠났으나, 조 부인이 어질어 엄부(嚴父)처럼 잘 가르쳤다. 공은 강직하고 큰 절의(節義)가 있으며, 제가서(諸家書)를 널리 보기를 좋아하여,
“선비가 책을 읽고 고금(古今)의 사리를 이해하여 당세의 급무에 밝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배운들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어머니를 아주 잘 섬겼으며, 아버지의 형제분들을 아버지 섬기듯 받들었다. 만력 말엽에 폐주(廢主 광해군)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태비(太妃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幽閉)시키자 공은,
“사람의 도의가 끊어졌다.”
고 탄식했다. 일찍이 진사(進士)에 응시했으나 합격하지 못하여, 농사를 지으며 어머니를 봉양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뒤 4년 초에 벼슬하여 동궁 세마(東宮洗馬)가 되었다가 시직(侍直)에 오르고, 그해 9월에 정시(庭試)에서 을과(乙科) 제1인으로 뽑혔다. 이듬해에 정언(正言)이 되고 또 다음해에 모친 봉양을 위해 외직에 보직해 달라고 빌려 고성 현령(固城縣令)이 되었다. 3년 만에 돌아와 수찬(修撰), 지제교(知製敎),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이 되고 고성을 다스린 일로 상이 옷감을 내리고 글을 써서 포상하였다. 9년에 관서(關西)를 살펴보라는 명을 받았다. 이때 조정에서 청천강 이북을 버리자는 의논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은 것이다. 그때 가도(椵島)의 군량이 떨어져 날마다 우리에게 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아 조만간에 변란이 일어날 듯하였으므로, 공이 방편으로 이웃 읍에서 양곡 수천 섬을 빌려서 구제하고, 돌아와서 백성들의 형편과 변방에 쌓아 둔 저축과 병사들을 다스릴 계책을 아뢰어, 국토를 버리자는 의논이 멎었다.
이듬해 장묘(章廟 인조의 생부(生父)인 원종(元宗))의 추존(追尊) 문제가 일어나 공은 헌납으로 다시 옥당에 들어가 쟁론하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쫓겨났다. 1년 만에 다시 부름을 받아 수찬이 되고, 여름에는 헌납으로 이조 좌랑에 전입되고, 겨울에는 정랑에 올랐다. 12년 봄에 다시 헌납으로 부모 봉양을 청하여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되었다가 14년에 들어와 지평이 되었다. 사간(司諫) 조경(趙絅)이 대신(大臣)들의 탐욕스러운 나쁜 행동을 논하다가 하옥(下獄)되었으나, 그때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꺼려 상께 말씀드리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공이 혼자 힘써 투쟁하였고, 또 이어서 그에 대해 변론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상이 깨닫고 석방하였다.
그때 금(金) 나라 사람들이 참람되이 황제라 칭하고, 우리에게 화친을 요구하니,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어 회보하려 하자 간하는 간관들이 많았고, 공도 집의(執義)가 되어 다음과 같이 간했다.
“중국은 의리상 저버릴 수 없습니다. 이제 화친하자는 사람들이 모두 오랑캐는 강하고 우리는 약하니, 화(禍)를 늦추어서 천천히 뒤에 도모하는게 낫다고 합니다. 이 말이 정말 근리합니다만, 추한 오랑캐들이 거세게 버티고 있고 서북의 잡호(雜胡)들도 아직 다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오랑캐가 우리를 오랜 형제국으로 허여하는 것도 굴욕인데, 거기다 갑자기 무례하게 쳐들어온다면 오늘의 계책을 세운 자들이 다시 무슨 계책을 세울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찍 도모하지 않고 우선 편한 데만 익숙해져서 끝내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하게 되면 저 화해하자는 자들은 만번 죽어도 그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겨울에 오랑캐가 대거 쳐들어와서 3일 만에 선봉이 벌써 서울에 가까이 오니, 상은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공은 상에게,
“급히 성 아래 쌓아 둔 군량을 수송하여 싸워 지킬 계책을 세우소서.”
라고 아뢰었다.
조정에서 화친을 주장하는 일을 행하지 않자 오랑캐들이 성을 에워쌌는데, 지키자는 측과 화친하자는 측의 의논이 더욱 팽팽하여 성안에 싸우려는 의욕이 없어졌다. 공은 화친을 주장하는 자를 베어서 장사(將士)들의 마음을 격려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상은 그 사람이 처음에 적의 형세를 늦춘 공이 있다 하여 따르지 않았다. 적은 날마다 성 밑에서 시위했으나 한번 부딪쳐 싸워 보지도 못하고 투사들만 더욱 나태해졌다. 공은 체상(體相 도체찰사(都體察使)의 별칭)의 종사(從事)인 채유후(蔡裕後)에게 이르기를,
“지금 적은 먼 길을 와서 지쳐 있으니, 이때를 이용해서 결판내지 않으면 오는 적은 더욱 많아지고, 우리는 양식이 떨어져 힘이 꺾일 것이니, 망하지 않기를 어찌 바라겠는가. 당신은 어찌 상군(相君)에게 말하지 않는가?”
하였다. 채유후가 아주 옳게 여겨, 곧 그 계획을 좇아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을 모아 싸움이 좀 유리해지자, 그제서야 성중에서 싸워 지키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강도(江都)가 패하자 결국 화의(和議)가 결정되고 말았다. 화의를 배척한 사람들을 내보내게 되었으나, 모든 간관(諫官)들은 오랑캐에게 넘겨지는 것을 모두 두려워하여 자수(自首)하려 들지 않아서, 일이 세자(世子)를 곤궁하게 만들었다. 공은 비분을 금치 못해 솔선해서 떠날 것을 청했다.
2월에 세자(世子)가 북으로 떠나자 공은 보덕(報德 세자시강원의 벼슬)으로 시종(侍從)하였는데, 고양(高陽)에 이르자, 양식이 떨어졌다. 공은 세자에게 먼저 시종관 한 사람을 미리 보내어 도중에 먹을 음식을 마련하도록 요청했으나, 적격자가 없었다. 세자가 돌아보고 아뢰기를,
“그대가 아니면 해 낼 수 없다.”
하였다. 적군이 다니는 길가에 있는 마을들이 텅 비어 있었으나, 공은 산골짜기를 드나들면서 시골 아전과 백성들을 통해 조달함으로써 요동(遼東)에 이르는 수천 리의 여비가 모자라지 않았다. 상도 교지를 내려 도중의 일을 오로지 공에게 부탁하였다. 오래도록 적지에 있게 되어, 일이 있을 때마다 경계하도록 아뢰었으므로 세자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였으며, 매우 어려운 일이 생겨도 이리저리 변통해 처리하였으므로 세자가 더욱 중히 여겼다.
여름에 상을 시종한 공을 포상하여 공은 예조 참의에 올랐으나 겨울에 돌아오니 뜬소문이 있어, 상이 궁관(宮官 동궁(東宮)에 소속된 벼슬아치)들이 적중에서 멋대로 술을 먹고 조심하지 않은 점이 많다고 진노하여, 먼저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벌써 장형(杖刑)을 가하여 유배시켰다. 그래서 공도 체포되어 옥에 갇혔으나, 조사해 보자 그런 사실이 없어서 풀려나왔다. 이듬해 여름에 바로 기용되어 공조 참의가 되었다.
처음에 왕명을 받들어 사신 간 사람들이 구금되어 오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가, 돌아오자 세자가 떠나게 되니, 모든 종관(從官)들이 상을 뵙고 다 말하기를,
“저들은 적정에 익숙하니 함께 가게 하소서.”
하였다. 공은 사사로이 필선(弼善) 민응협(閔應協)에게 이르기를,
“당신도 이런 말을 한 사람인가? 뒤에 반드시 후회할 걸세.”
하였다. 공은 힘을 다해 깊이 생각하고 남들과 진심으로 사귀었으므로 난리중에 분주히 다닐 때에도 재난이 그에게 미치지 않았다.
가을에 승지 겸 경연참찬관으로 전임하였다. 그때 큰 흉년이 들어 공은 상에게 여쭈어서 직첩(職牒)을 널리 발급하여 부자들의 곡식을 구해서 구제하였다. 겨울에는 상이 남한산성에 온조(溫祚)의 사당을 세우게 하고, 공신(功臣) 이서(李曙)가 성(城)을 쌓은 공이 많다 하여 같은 방에 배향(配享)하게 하자, 공이,
“이서로 말하자면 온조왕이 비록 다른 왕조의 임금이기는 하지만, 신하가 왕과 같은 방에서 제사를 받는다면 예가 아닙니다.”
하고 아뢰니, 상이 따랐다. 이듬해 봄에 대사간에서 부제학으로 전임되었는데, 소(疏)를 올려 사양하니 얼마 후에 영남 관찰사로 내보냈다. 또 어머니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활과 화살을 내리시어 격려하였다.
처음에 안동(安東)의 사인(士人) 김시추(金是樞)라는 사람이 소를 올려 산성(山城)의 일을 말하였는데, 어류성(禦留城)이 영남(嶺南) 경계에 있어 가장 험지를 의지하고 있다고 하였다. 공이 영남 관찰사로 나가게 되자 상이 이 일을 공에게 부탁하므로, 공은 경계에 이르러 곧 형세(形勢)대로 갖추어 여쭈었다. 대신들은 지세(地勢)의 이점(利點)을 잘 가려서 남방(南方)의 보장(保障)을 삼자고 요청했다. 공은 다니면서 모든 이름 있는 성이나 관문, 그리고 요충지를 살펴보았으나, 가산(架山) 만한 데가 없었으므로 그해 9월에 성을 쌓기 위해 크게 군대를 풀고, 민가의 일 없는 장정들을 동원하니, 대체로 10여만 명이었다. 다음해 4월에 성이 완성되자, 이웃 몇 개 군(郡)의 땅을 떼어 읍(邑)을 설치하고 영(營)을 옮겨 백성을 안정시키자고 요청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고 다만 성주현(星州縣) 하나를 떼어서 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를 두었다. 그때 여러 고을이 해이해지고 문란해져서 기율이 없으므로 공이 그들을 모두 바로잡으면서 전부터 교분이 있는 대관(大官)이라도 사정을 보지 않고 명령을 잘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내쫓았다. 이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임기가 끝나자 대신들은 성을 쌓는 일이 중대하다고 생각하여 교체하지 말 것을 청했으나, 그를 미워하던 사람들은 부역하는 백성들이 원망을 많이 한다고 탄핵하였다. 공도 소를 올려 자신에게 허물을 돌리고 자책하였다.
7월에 다시 승정원에 들어갔는데, 전날 경사로 인하여 도형(徒刑)과 유배(流配) 이하를 크게 사면할 적에 나만갑(羅萬甲)을 쉽게 용서한 일로 조정에 들어가 사죄하지 못하고 파직되었다. 공은 균전법과 대동법 두 가지를 의논하여 대신들과 어전에서 논란한 일이 있었는데, 상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공은 대동법을 먼저 영남에 시행하도록 청했으나, 공이 떠나자 결국 시행되지 않았다. 그해 12월에 다시 예조 참의가 되었으나, 어머니가 연로하여 소를 올려 군(郡)으로 보내 주도록 빌었다. 이듬해 봄에 홍주 목사(洪州牧使)가 되었는데, 1년 만에 고을이 크게 다스려졌다. 참혹한 전쟁을 겪은 뒤라 당시의 일이 이미 어쩔 수 없음을 한탄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세신(世臣)이므로 버리고 갈 수는 없다. 이미 직책을 가졌으니, 그 직책을 다해야 한다.”
하며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익히면서 하루도 북쪽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20년(1642, 인조20) 정월 26일 재직 중에 53세로 세상을 마쳤다. 상은 부음(訃音)을 듣자,
“왕사(王事)로 노심초사하다가 순직하였도다.”
하면서 여러 신하들을 대하여 한탄하였다. 그해 3월에 파평(坡平)에 장사 지냈다.
공은 굳세고 엄격하며 일을 관찰하는 데에 밝아서 계획을 잘 세우고 잘 성공시켰다. 남의 과실을 바로잡기 좋아하나 남을 대해 그의 과실을 말한 적이 없다. 붕당(朋黨)들이 서로 반목(反目)하던 세상이었지만, 한 번도 겉과 속을 달리하여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았다. 어진 사람이건 어리석은 사람이건 모두 그의 성실한 마음을 알았다. 부장(副將), 장교(將校)들에게는 모두 재주를 감안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각 그 능력을 다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세상을 떠나자 원근(遠近)에서 와 우는 사람들이 친척을 슬퍼하듯 하였다. 21년에 영남 관찰사 임담(林墰)이 그가 만든 영루(營壘)를 두루 살펴보고, 기이한 재주를 지녔으면서도 도리어 참소와 비방을 당한 것을 한탄하고, 성을 쌓은 지난날의 계획이 아주 뛰어났음을 갖추어 올리면서, 작위와 상을 추서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가상하게 여겨 공에게 이조 판서를 추증하고 완양군(完陽君)에 추봉하였다. 정부인(貞夫人) 유씨(柳氏)는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아버지는 청도 군수(淸道郡守)로 휘는 이적(李𥡦)인데, 정직하기로 널리 알려졌으며, 부인도 부덕(婦德)으로 온 집안에서 현숙하다고 칭송하였다. 공보다 23년 뒤인 갑진년(1664, 현종5) 12월 27일에 73세로 돌아가자 파평에 합장했다. 3녀 1남에 사위 3인은 현령 송유제(宋孺悌), 판서 목내선(睦來善), 응교 조위봉(趙威鳳)이고, 아들은 이진규(李震奎)인데 빙고 별검(氷庫別檢)이다. 또 측실(側室) 소생이 남녀 6인인데, 아들은 이진겸(李震謙), 이진급(李震及)이고, 사위 3인은 정기(鄭基), 박수부(朴秀阜), 신석항(愼碩恒)이며, 딸 하나는 병마절도사 정후량(鄭后亮)의 첩이다. 손자 이진규는 아들 6인을 두었는데, 이팽령(李彭齡), 이귀령(李龜齡), 이용령(李龍齡) 이학령(李鶴齡), 이홍령(李鴻齡), 이익령(李翼齡)이고, 외손은 송유제는 딸이 셋인데, 사위는 권구(權覯), 목천화(睦天和), 심희도(沈羲圖)이고, 아들 둘은 송세재(宋世載), 송세헌(宋世憲)이며, 조위봉(趙威鳳)은 딸 하나인데, 사위는 이윤적(李允迪)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알면서도 사양하니 / 兼而能讓
사람들이 우러르고 / 人之望也
엄하면서 용서하니 / 威而能恕
사람들이 기리네 / 人之譽也
[주-D001] 일찍이 …… 못하여 : 저본에는 진사시에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1613년(광해군4)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이 《계축【만력41년】증광사마방목(癸丑【萬曆四十一年】增廣司馬榜目)》에 보인다.[주-D002] 가도(椵島)의 …… 요구하였으나 : 1622년(광해군14)에 명 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이 후금(後金)에게 빼앗긴 요동 지방을 회복하려고 가도(椵島)에 진(鎭)을 설치하고, 조선과 합세하여 후금을 치자고 조선에게 군량과 무기를 강요했던 일을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