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 박경리
체크무늬의 옷 입고
사막에 앉아 있던 여자 뒷모습
아주 옛날 사십여 년 전
사진잡지에서 보았던지
오싹오싹 피가 어는 것 같았다
왜 그랬는지
박제 같은 모습과 사막이
왜 내 피를 얼게 했는지
이제는 알 것도 같다
사람은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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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 박경리
그리움은
가지 끝에 돋아난
사월의 새순
그리움은
여름밤 가로수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
그리움은
길가에 쭈그리고 앉은
우수의 나그네
흙 털고 일어나서
흐린 눈동자 구름 보며
터벅터벅 걸어가는
나그네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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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안 고개 / 박경리
은조사 적삼
속살 비친다고
투정하던 서문안 고개
뻐꾸기가 울었다
적삼이면 두 개요
깨끼저고리를 하자면
하나 아니냐
어머니는
땀을 닦으며 실리를 따졌고
뻐꾸기는 여전히 울었다
두 개를 취하는 어머니와
하나를 고집하던 나
늘 우리 모녀는
그런 일로 다투었다
나는 꿈으로 살려 했고
어머니는
생활에 발 묻고 사셨다
꿈을 버리면서
나는 세상과 등졌고
어머니는
철 없는 것 한탄하며
땅속으로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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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떠난다 / 박경리
속초 가서
동태장사나 하며 살아볼까
환하게 뚫린 삼거리
샛바람 마시며 서성거렸다
은행의 창구 내미는 천 원권 지폐뭉치
고액권 달라고 실랑이하다
새파랗게 질려서 강릉행 뻐스를 팄디
처음 보는 강릉거리
발 가는 대로 들어선 식당
살풍경한 난롯가에서
막국수 한 그릇 용을 쓰며 먹었다
뻐스정류장은 무성영화
낙엽 모이듯
사람들, 행선의 팻말
속초 가는 표 꾸겨 쥐고
다시 뻐스에 올랐다
동쪽이라는 것은 안다
북쪽이라는 것도 안다
어촌인지 어항인지
속초 형편 들려주던
노인네 목소리가 기억에 남아 있다
내린 곳은 설악동이었다
일금 삼천 원
관 길이 만한 민박의 방
안도의 숨 토했으나
밤은 연탄가스로 헤매었다
날이 새어
엷은 무명 자켓 깃 세우고
포켓에 두 손 찌르며
저 밑바닥
가장 깊은 곳에서
흔들려오는 오한 누르며
장엄한 해돋이 동해 앞에 선다
아아 무심한 바다여
늙은 여자가
백만 원 든 망태 하나 들고
길 잃은 강아지 모양 왔다갔다
"너 간첩이지?"
기념품 가게 여주인 눈빛 읽고
죄 없이 허둥대며 몰리는 내 꼴이라니
웃어야지
속초 가서 동태장사를 하면
가만히 내버려 두기나 할 것이든가
손주들 얼굴
쏜살같이 떠올라
허겁지겁 택시를 잡았다
대절한 택시 속의 나는 미이라
단구동 눈익은 문 앞에 내려서서
잡혀온 탈옥수같이
치악의 연봉 보며 눈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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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 박경리
원주는 추운 곳이다
겨울이 나닌 때도
춥다
어깨 부빌 거리도 없고
기대어볼 만한 언덕도 없었다
원고지 이만 장 십일만 원
안다는 사람한테 사고
다음 날 문방구에서
원고지 이만 장
육만 원에 샀을 때
진정 나는 추워서 떨었다
그러나
서울 갔다 오는 날
서원도로 들어서면
고향길 돌아온 듯
마냥 마음이 놓인다
박경리 「우리들의 시간」마로니에북스(2012), p94, 85, 82, 72~75, 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