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실들을 죽이는 거짓말 계열 범죄>의 줄거리 :
살인이 마음에 거슬리고 방해가 되고 충돌이 되는 사람을 죽이는 일인 것처럼, 거짓말은 마음에 거슬리고 충돌이 되고 싫은 사실들을 죽이는 일입니다. 사실(事實) 사살(射殺)인 셈입니다. 사람의 삶은 어차피 주권자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이유를, 다 알 수 없는 사실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있지 않으면 절대로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실을 다 기꺼이 수용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거짓말 계열의 범죄들이 줄지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태도를 유지하는 한 하나님의 나라도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도 내 삶으로 임할 수가 없게 됩니다.
사실들을 죽이는 거짓말 계열 범죄
(출애굽기 20:16)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오늘은 범죄 계열 중에서 거짓말 계열을 함께 살펴봅니다. 거짓말이란 사실들을 죽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짓말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허위 사실을 말할 때는 이미 마음 안에서 사실들을 죽여버립니다. 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입니다. 또한 일이 아니더라도 실제로 있었던 상황이나 현재에 있는 상황이나 처지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마음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제9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웃은 삶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삶을 공유하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성립합니다. 결국 이웃에게서 일어난 일은 이해관계를 따져보면 내게서 일어난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거짓 증거란 법정에서 허위 사실을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짓말 계열의 범죄 중에서 나와 삶을 공유하여 이해관계에 있는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를 말하는 것이 언급된 이유는 강렬한 의도성 때문입니다. 법정에서 이웃에 대해 허위 사실을 증거하는 것은 모든 거짓말 계열의 범죄를 대표할 만큼 가장 악합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은 앞서 살펴보았던 범죄와 공통점이 있습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여 하나님을 버는 일을 천직으로 삼지 못하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살인은 마음의 배를 땅에 붙이고 뱀처럼 기어다닐 때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충돌 현상에서 발생합니다. 어떤 사람의 있음이 마음에서 너무 싫고 밉고 걸리고 방해가 되기에, 그 사람의 있음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하는 모든 행위가 살인 계열의 범죄들입니다. 간음은 마음이 땅에서 뒹굴고 돌아다닐 때 나타나는 육체 숭배 현상에서 발생합니다. 육체의 오감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오감의 만족과 쾌락을 통해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는 육체 숭배 현상에서 간음 계열의 범죄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도둑질은 세상 것을 향한 소유 현상에서 나타나는 범죄 계열의 대표입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그 주권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한, 내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내 것으로 허락된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현상이 발생한다면 도둑질 계열의 범죄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거짓말 계열의 범죄들은 어떤 현상에서 비롯될까요? 우리의 삶은 엄연한 사실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삶을 채우는 모든 사실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전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간접적이라 함은 욥의 경우처럼 사탄에게 허락하시거나, 우리의 악함을 묵인하시며 허락하시는 일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지 못한 채 땅에 뒹굴고 있다면 반드시 이러한 사실들을 피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직접 이루신 일이든 간접적으로 허락하신 일이든 모든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피하려는 현상에서 거짓말 계열의 범죄들이 나타납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실들을 마음에서 거부하고 피하기에 왜곡하고 변경하고 조작하면서 허위 사실을 지어내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거짓말은 결국 사실을 죽이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살인이 사람의 육체를 죽이는 일이라면 거짓말은 사실을 죽이는 일입니다. 거짓말과 살인은 마음이 땅에 뒹굴며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을 추구하는 여정에서 생기는 충돌 현상인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살인 계열 범죄들의 원인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충돌인 반면, 거짓말 계열 범죄들은 사실들과 일어나는 충돌입니다. 내 마음이 세상에서 좋음을 추구하고 싶은데 과거의 사실들이나 현재의 사실들이 좋음을 추구함에 방해가 됩니다. 그럴 때 사실을 죽이는 방법이 거짓말입니다. 본래 사실을 감추거나 바꾸어서 허위 사실을 만들어 내는 일이 거짓말 계열의 범죄들입니다. 허위 사실은 본래 사실을 죽여야만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과거든 현재든 내 삶을 채우고 있는 사실들은 전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직접 이루어졌거나 간접적으로 허락하신 것들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마음이 기피하고, 미워하고, 싫어하고, 지긋지긋해하는 상태에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거짓말 계열의 범죄들입니다. 딱히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이러한 상태에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거짓말과 같은 DNA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정치인이 출세에 방해될 것을 염려하여 출신 지역을 속였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러한 거짓말을 한 이유는 자기 과거를 싫어한 것이고, 언제 끝날지 모르게 지속되는 지금의 형편이나 처지를 싫어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상황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는 굉장히 오래 지속됩니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한 갈등, 가난한 처지, 별 볼 일 없다고 느껴지는 배우자, 좋게 생각해도 덜떨어진 자녀들, 이러한 조건들로 이루어진 가정 상황, 나의 외모나 능력, 오랜 지병 같은 것들이 이유가 됩니다. 마음이 땅에서 뒹굴고 있다면 모든 사실들에 대해 싫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긋지긋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은 다 거짓말 계열의 범죄들입니다.
거짓말 계열 범죄들의 공통점은 과거나 현재의 사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혹은 현실 부정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마음이 땅에서 뒹굴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이러한 현실 부정 현상에서 하는 말과 행동은 모두 거짓말 계열의 범죄들입니다. 마음이 땅에 뒹굴 때 주어진 실제 상황이 싫습니다. 벌어지고 있는 문제가 지긋지긋합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 거짓말 계열의 범죄들이 발생합니다.
이 상태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찾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기 현실을 부인하고, 자기 삶의 사실들을 부인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인해야 할 대상은 나입니다. 나를 부인하기 위해서는 나를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아 죽여야 할 만큼 미운 이유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처럼 나도 죽어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언할 정도로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고 혐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실 때의 관점입니다.
거울을 보면 대단히 잘나진 않았지만 그렇게까지 미워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에서 비참하고 처참하게 처형당할 정도로 나를 미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싫어하고 혐오해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면 자기 부인도 일어나지 않고 십자가 생활화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나를 괜찮게 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렇게까지 죽어야 될 사람은 아니지.’라는 생각을 갖기 때문에 십자가를 붙잡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나는 진짜 나쁜 놈이다. 죽어도 그냥 죽어서는 안 된다. 나는 십자가에서 손발이 못 박히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온몸의 살이 다 찢기도록 채찍을 맞고, 허리에 창을 찔리고, 더 이상 아플 수 없을 정도로 아프게 하고 죽어야 마땅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며 십자가를 붙잡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자녀이기에 우리의 존재 자체가 거짓말 덩어리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세상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본래 세상 것은 좋음이 아닙니다. 세상 것이 좋다고 우기고 세상 것에 취해서 세상 것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렇게 존재 자체가 거짓말 덩어리인 나의 삶을 채우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들이 싫게 느껴지면 사실들을 거부하고 부인하게 됩니다. 사실에 대한 부인은 존재 자체가 거짓말 덩어리인 나를 인정함이고 나를 기준으로 삼음입니다.
거짓말 덩어리는 나를 참된 기준으로 여기고 사실들을 거부합니다. 내 삶에서 과거에 일어났고 지금 일어나는 사실들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 출신 배경이나 내 현재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엄연한 사실들을 거짓말로 여겨서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부인과 반대되는 사실 부인입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 제가 10년이 넘도록 가난합니다. 이 가난을 극복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이 기도에 담긴 마음을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10년이 넘도록 저를 가난하게 하신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내게는 이러한 가난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저에게 맞지 않는 사실들을 만들어 내고 계십니다. 도대체 왜 내게 어울리지 않는 거짓말 같은 사실들을 만드시는 것입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내 삶을 채우고 있는 사실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땅에서 뒹굴고 있음을 얼른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마귀의 자식인 나는 존재 자체가 거짓말 덩어리입니다. 사실을 거부함이란 이러한 내가 십자가에서 죽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다면 나를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있지 않고 땅에 뒹굴고 있다는 것은 세상이 좋다는 마귀의 거짓말에 인격이 통째로 정복된 결과입니다. 존재 자체가 거짓말 덩어리가 되었기에 이 땅에서 어떤 사실들은 좋고 어떤 사실들은 싫은 것입니다. 이로부터 사실들을 죽여버리는 거짓말 계열에 속한 범죄들이 말과 행동으로 나옵니다.
이럴 때는 거짓 덩어리인 나를 십자가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내가 거짓 덩어리가 아니라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사실도 마음에서 거부감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도 돌로 치는 사람들을 향해 원망하지 않았고, 돌에 맞아 죽어가는 상황 자체를 기피하고 거부하거나 싫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간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신비한 일입니다. 이 땅에서 내 삶을 채우는 사실들이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좋든 나쁘든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실들이 되어버립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 가지는 일을 은퇴 없는 천직으로 삼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 가지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면 땅에서 육체로 살고 있는 삶을 채우는 사실들은 좋다 나쁘다 평가할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23~28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실들을 고백합니다.“…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인 사도 바울에게 왜 이런 일을 당하게 하셨을까요? 사도 바울이 당한 이러한 고난의 이유를 지금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육체의 사실들을 당하면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신비한 일입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많이 가지는 것을 은퇴 없는 천직으로 삼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크게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키워가는 일에 몰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상하게도 삶의 현장에서 어떤 사실들이 벌어지든지 세상 기준으로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 기준으로 좋은 사실이라고 해서 마음에서 끌어당기지 않고, 세상 기준으로 나쁜 사실이라고 해서 마음에서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에서도 이러한 조건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내 삶의 모든 관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도 임할 수 있고, 내게 어떤 상황이 사실들로 주어지더라도 기피하고 거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내 마음이 땅에 머물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 있어야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인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면 거짓말은 사실을 죽이는 일입니다. 마음이 땅에 머물러 있을 때는 주어진 사실에 대해 좋거나 싫다는 딱지를 붙이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마음껏 이끌어 가실 수가 없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좋거나 싫다는 딱지를 붙이고, 그중에서 싫다고 여겨지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본래의 사실을 죽이고 허위 사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서 좋아하는 세상 것과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돌진해 나갑니다. 이 세상에서 내 삶을 채우는 사실들을 싫어한다는 것은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자녀로서 거짓 덩어리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에 대한 부정은 마음이 이 세상에 완전히 빠져있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래 세상은 좋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거짓 덩어리인 내 마음을 기준으로 세워놓고 세상에 취해있을 뿐입니다. 마음에 사실에 대한 좋고 싫음이 생기자, 하나님께서 꼭 필요해서 허락하신 사실들을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여기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해야 할 대상은 땅에 뒹굴며 세상에서 좋음을 추구하는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땅에 뒹구는 나의 모습이 괴물이고 마귀의 자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를 기준으로 세우고 거짓 덩어리인 나로부터 좋고 나쁨을 발산합니다. 그 판단대로 주어진 사실들을 싫어하는 것은 최악의 범죄입니다. 아무것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염소 털로 손과 목을 감싸고 아버지께 가서 에서라고 속이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장면에서 아버지 이삭은 야곱을 만지며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자 야곱은 끝까지 에서임을 고집하며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이 속임은 자기가 야곱이 아니라는 자기 부인입니다. 사실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부인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실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했던 것입니다.
‘실제의 나’는 세상을 좋아하는 거짓 덩어리입니다. 이 ‘실제의 나’는 육체가 버젓이 살아있는 한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의 나’를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의 나’가 없어지지 않았는데도 속이듯이 내가 죽었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허구의 나’를 주장함이 아니라 ‘믿음의 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사실들이 느껴질 때 ‘사실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된 것이다.’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주어진 사실이 잘못되었다는 판단은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에게 배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이루어지고 허락된 사실은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있어야 될 것들이 있게 되는 것이고, 일어나야 할 일들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원수들이 나를 대적하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 사실이나 상황은 하나님의 주권이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욥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의 생명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빼앗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러한 상황을 다 수용했습니다. 욥기 1장 21~22절을 보면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욥의 마음이 땅에 뒹굴고 있었다면 주어진 사실들을 결코 수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거짓말 덩어리인 ‘실제의 나’는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실제의 나’를 부인하여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한 죽은 나를 ‘믿음의 나’로 붙잡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믿음의 나’를 붙잡고 있는 동안만 ‘실제의 나’는 활성화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자마자 거짓말 덩어리이고 세상을 좋아하는 ‘실제의 나’는 곧바로 활성화됩니다. 한번 십자가를 붙잡았다고 해서 ‘실제의 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믿음의 나’를 활성화할 때만 ‘실제의 나’의 스위치는 꺼집니다.
이처럼 ‘실제의 나’가 계속 있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고백은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인 사건을 복음으로 성경에 기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거짓 덩어리인 나는 십자가에서 부인되어야 합니다. 거짓 덩어리인 나는 실제 사실입니다. 이러한 나를 부인함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사실들로 삶을 채우시든지 그 모든 사실들을 아무 저항감 없이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은 나의 악함을 수정하시려고 동원하시는 사실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부인함으로써 ‘믿음의 나’를 활성화한다면 삶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자발적으로 이루시는 창조적인 역사를 위해 허락하시는 사실들로 채워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스스로 놀랐을 것입니다. ‘일주야를 바다에 빠져서 지내는 중에도 마음이 평강할 수 있구나. 도대체 하나님의 좋음은 어느 정도로 강렬한 것일까?’라고 여기며 바다에 빠져서도 자기가 부흥회를 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하나님 좋음에 대한 경험과 그 좋은 하나님께로 내 마음을 끌고 가시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에 대한 경험들이 신약 성경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을 채우고 있는 사실들은 세상 기준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세상 기준을 갖고 있기에 주어진 사실을 부인하게 됩니다. 거짓말쟁이인 마귀의 자녀의 입장에 있기에 세상 기준을 붙잡고 주어진 사실들을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인해야 할 것은 사실이 아닌 나입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실제의 나’, 마귀의 자녀인 ‘실제의 나’, 거짓말 덩어리인 ‘실제의 나’는 부인되어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믿음의 나’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마음에 걸리는 사실들을 대할 때마다 그 사실을 피하거나 거부하거나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실들을 감사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거짓 덩어리인 나를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마땅하다.’라는 신앙을 고백함을 통해 ‘실제의 나’를 비활성화하고 ‘믿음의 나’를 활성화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의 창조적인 계획이 나를 통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하늘로 올라간 내 마음은 천직을 따라 하나님을 점점 더 많이 가지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내 몸이 있는 땅에서 무슨 사실들이 일어나든지 변하지 않는 절대 평강과 절대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거짓말 덩어리인 것을 모르고 ‘실제의 나’를 기준으로 내 삶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허락된 모든 사실들을 기피하고 부인하고 싫어하며 살았습니다. 이제는 사실들을 부인하여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인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본래 이루어졌어야 할 하나님과의 동행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