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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심판하시리라는 것이 포도원의 노래의 주제이다. - 하나님의 기대와 이를 저버린 이스라엘: 1-2절 포도원의 노래
3-6 포도원 주인의 심판
7 포도원 비유의 의미
: 미슈파트와 미스파흐(포학, 살육), 츠다카와 츠아카(울부짖음)
체덱과 미슈파트: 체덱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령,사 53:11)라면, 미슈파트는 하나님이 주신 법도에 따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à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것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맺은 것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죄악: 많은 부분들이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범죄한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떠한 삶을 보였는지를 발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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à 중점적으로 살펴볼 본문은 이사야 1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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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3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부르신 채 하나님께서 유다를 고소하심.
4 예언자의 말: 범죄한 이스라엘을 부름
5-9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한 비유적 표현과 실제적 상황
-- 1장1절의 “이상”: 근본적으로 예언자의 선포는 그가 본 것이다. 예언자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설명하는 데에 관심이 없다. 그에게 보여진 유다의 모습은 그래서 비유적인 언어들과 상징적인 표현들로 가득하다. 그의 표현에는 과장법이 사용되고 있으며 부분적인 사실에 근거한 전체적인 판단이 도처에 나타난다. 이러한 예언자의 선포를 들으면서 그 선포들의 과학적 타당성을 따진다면 우리는 전혀 예언자의 선포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예언자를 통해 선포되는 메시지에 담긴 바 그 정서와 열정을 이해하자.
-- “딸 시온”: 시온 혹은 예루살렘을 의인화한 표현이며 이런 식으로 도시를 부르는 경우들은 흔히 볼 수 있다. 시온이 처하게 된 고립 상황과 연관하여 “딸” 표현은 독자들로 하여금 시온의 상황을 보다 애처럽게 느끼게 한다; 이스라엘의 거역으로 인해 땅이 황무하였고, 겨우 조금 남겨졌다. 8절의 표현은 남은 부분에 대한 어떤 기대라기보다는 전면적인 심판쪽에 보다 무게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칠십인역은 “남겨졌다”는 어구를 “버려졌다”로 옮기면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9절은 이상하게 들린다. 9절이 8절의 말씀에 대한 백성들의 응답일 수 있다. 백성들은 교묘하게 예언자에 의해 선포된 심판에 쓰인 단어를 다시금 말하면서(hrtwn à wnl rytwh), 자신들의 상황을 소돔과 고모라로부터 분리시킨다. 심판의 말씀을 듣는 청중들이 그에 대해 헛된 기대를 품는 경우는 30:15-17에서도 볼 수 있다. 헛된 기대를 품은 이들은 언제나 은혜를 말하며 의지한다고 한다. 정작 그들에게 요구되는 회개는 하지 않은채, 현재의 참상속에서 “은혜”를 찾아낸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10-15 언뜻 9절의 언급은 유다와 소돔을 분리시키는 것처럼 들리지만, 10절은 곧바로 유다를 소돔과 동일시하고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예언자의 이러한 언급은 백성들의 헛된 기대를 산산히 부수어버린다.
10 소돔과 고모라는 유다 사회 전체의 표상이다. 그들이 들어야할 것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은 여호와의 말씀 우리 하나님의 토라이다. 하나님께서 듣기를 요구하시는 것은 어떤 다른 별도의 가르침이 아니라 바로 이제껏 이스라엘이 들어온 말씀들 그것이다. 이제껏 유다가 간직한 토라가 다시금 쟁점이 되어 있다.
11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번제를 가리키는 단어가 이어서 등장한다는 점에서 “제물”은 화목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기름”과 “피”는 모든 제사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부분이다. ‘배부르다’를 의미하는 동사와 ‘기뻐하지않다’가 앞과 뒤에 쓰여서 키아즘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이러한 제물과 제사를 충분히 받았으나 하나님은 이를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는 선언이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은 그러한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시 40:6; 51:16).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아무 쓸모가 없다. 제사를 절차대로 드린 이스라엘은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그에 맞는 사죄의 은혜의 선포를 기대하였겠지만, 그들이 들은 것은 하나님의 거절이었다. 문제가 된 것은 절차가 아니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의 마음도 문제가 아니고, 제물의 흠도 아니며, 제사의 불법함도 아니었다.
12 이스라엘이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전으로 나아온다. 그들은 단지 제사만을 드리는 이들이 아니라 제사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규정된 제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뜻을 듣기를 원하였으나, 예언자의 선포는 이 일이 그저 하나님이 계신 곳의 마당만 밝고 갈 뿐이라고 전한다. 그들이 드린 것은 제사와 예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백성들의 당황스러움?: 하나님의 요구-빈손으로 하나님께 보이지 말라(출
13 “분향”은 성소안에서 항상 피워져야 하는 것이다(레
14 “정한 절기”로 번역된 말은 이스라엘의 순례 절기를 가리킨다(가령 레 23:2이하 "여호와의 절기”). 그러나 이러한 절기역시 이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되었다. 신
15 ‘손을 뻗는 것’은 기도의 자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의 자세를 보지 않겠다고 하시며, 그들의 많은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다고 선포하신다. 후반절은 앞에 나온 내용들과 다소 동떨어진 느낌을 주지만 이어지는 16절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복수로 쓰인 “피”는 거의 항상 폭력적으로 흘려진 피를 가리킨다(아벨의 피-창
16-17 피묻은 손에 대한 언급에 뒤이어 16절부터 등장하는 명령은 자연스럽게 피묻은 손을 씻는 것부터 시작된다. “씻다”라는 표현은 제의와 연관된 표현이지만(가령 출 29:4,17; 특히 30:20),[3] 여기에서 그러한 또 다른 제의가 염두에 두어진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제사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우리 손을 씻는 제사 혹은 예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본문의 기자는 앞에 나온 피와 연관해서 자연스럽게 제의적 관심사에서 삶의 관심사로 옮겨가고 있다.
16 처음 쓰인 두 단어는 사실상 동일한 의미이며 15절을 다음에 이어질 명령형들과 연결시키고 있다. 씻는다는 것의 실제적인 의미는 다음에 이어질 내용에서 보다 규명될 것이다. ‘내 눈앞에서 너희들의 못된 행실의 악을 치워라’는 명령은 씻는다는 것의 의미를 달리 표현하고 있다. 씻는다는 것의 의미가 제의적인 것이 아님이 이러한 명령에 의해 확인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제시될 것이다.
- 악을 멈추어라 선을 배워라: 선을 행하는 일은 어린아이처럼 배워야 하는 일이다. 마
- 공의를 구하라(jpvm wvrd): “공의”와 “구하다”가 함께 쓰이는 또 다른 예는 사
-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라(#Amx' WrV.a;): 개역의 번역은 마소라본문을 비평란의 제안대로 읽은 것이다(#Wmx'). 많은 영역성서들도 이러한 길을 따르며, 이것은 칠십인역과 아퀼라등에서 채택한 번역이기도 하다. 마소라본문을 그대로 받을 경우, 이 어구는 “억압하는 이를 바르게 하라”로 이해된다. 시 72:4에서도 억압받는 자와 억압하는 자가 함께 언급되며 두 경우가 공평과 정의의 행사와 연관된다. 참고: 사
“고아를 재판하며, 과부를 변론하라”(hn"m'l.a; WbyrI ~Aty" Wjp.vi): 고아와 과부는 외국인과 더불어 고대근동의 사회내에서 가장 곤경에 처한 사람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줄 성인남성이 없으므로, 그들은 착취당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고, 그들을 보호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보호자로 자처하신다(신
à 그리고 이 구절에서 나오듯, 샤파트 동사의 목적어로 고아가 나올 때, 그리고 리브 동사의 목적어로 과부가 나올 때, 그 의미는 중립적인 재판이나 소송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그런 점에서 ‘고아를 위해 재판하며 과부를 위해 변론하라’가 보다 적절한 번역일 것이다.
이러한 명령이 오직 이들만을 위한 명령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는 당연히 사회의 힘이 있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 10절에 나오는 “관원”과 “백성”은 적어도 고아와 과부보다는 힘이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결국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올바로 재판하고 보호하는 것이 이 명령들의 요구사항인 것이다.
18-20 이 단락은 1장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스라엘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두 가지이다. 자신들의 삶을 고치고 사죄와 더불어 땅의 소산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이를 거절하고 멸망에 이를 것인가이며 18절 이하에서 1장 마지막까지는 이러한 두 가지 경우를 각각 보여주고 있다. 20절에 있는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는 양 경우의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순종하고 고친다면 그들은 용서되며 땅을 받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벌하실 것이다(
18절은 긴박하고 간절하게 무엇이 좋은 길인지, 무엇이 살 길인지를 나누기 위한 초대이다: “자 이제 우리 차근차근 따져보자 …” 이스라엘의 죄가 주홍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게 된다. 그들이 즐겨(hba, be willing) 순종한다면 땅의 소산을 먹으며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즉 멸망하리라. 이러한 사죄의 초대는 16-17절에 이어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10절에 나오듯, 이스라엘은 소돔과 고모라이다. 멸망할 백성이다. 그러나 그들의 죄가 그리 심하다고 할찌라도 “즐겨 순종하면”, 16-17절에서 촉구하는 대로 행한다면, 그들의 주홍 같은 죄가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1장의 문맥은 이러한 사죄의 은혜가 제사로 말미암는다고 제시하지 않는다. 사죄는 이스라엘의 즐겨 순종함과 연관되며, 사죄는 그래서 그들의 악한 행실의 제거와 연관되어 있다. [제사를 거절하심 – 너희 행실을 고치라(미슈파트를 행하라) – 죄가 용서된다].
21-23
21 신실하던 성읍- 창기; 미슈파트의 가득함과 체덱이 거함 – 살인자들: “신실”과 “창기(혹 행음)”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신학적 용어인데, 여기서 이들 단어들의 구체적인 의미는 미슈파트와 체덱 그리고 살인 같은 사회적 용어로 나타난다.
22절의 비유적 표현이 23절에서 구체적인 용어로 다시 설명된다. 23절은 특히 17절에 있는 명령의 정반대상황을 보여준다(~h,ylea] aAby"-al{ hn"m'l.a; byrIw> WjPov.yI al{ ~Aty").
24-31 “그러므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24절에 있는 예외적으로 긴 하나님의 이름은 이러한 심판의 확실함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명령에 불순종한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에서 하나님의 “대적”과 “원수”로 변하였다. 시온은 공평과 정의로 구속되되, 패역하고([vp), 죄인이며(ajx), 여호와를 버린 자(bz[)는 멸망을 당한다. 이러한 부류의 죄악은 1장2-4절에서 이미 언급된 것들이다. 시온은 심판 이후에 회복될 것이되, 그들의 구속은 그들의 공평과 정의에 의존한다(
(참고 하나님의 사람의 일상 생활에서의 모습에 대해 33:15에서 잘 보여준다.)
이사야에게 주신 비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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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일”: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때. 이스라엘이 그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때이며,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때이다. 본문 자체 안에서 이 어구는 현재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말일”이라는 말은 종말론적으로 너무 멀리 밀어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시대이나 현재와 연결되어 있는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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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절의 동사: 많은 백성이 올라가리라/ 그들이 말하리라/ “가자”/ “올라가자”/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시리라”/ “그의 길안에서 걷자”
- 4절: 여호와께서 열방을 판단하실 것이며-그 판단은 토라에 근거할 것이다. 전반절의 주어는 여호와이고, 후반절은 주어가 3인칭복수로 바뀌면서 열방의 행동이 제시된다. 하나님의 판단과 그로 인한 열방의 응답이다. 열방은 그들의 칼을 쳐서 쟁기로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으로 만들 것이며 서로간에 칼로 전쟁하지 않을 것이다. 평화의 근거는 토라이다.
-- “전쟁을 배우지 않는다”: 전쟁은 할수록 배우며 할수록 잔인해지고 교묘해지며 더 큰 피해를 불러온다.
- 시온으로 모이는 백성 ß 이것은 이스라엘 중심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아오는 백성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말씀과 율법”이 중심이 되는 세상 그리고 그위에서 걷는 세상; 온 세상의 중재자로서의 하나님(하나님의 판단에 귀기울이는 백성, 세상 권력과 이익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는 보습과 낫의 나라이다; 그것이야말로 "빛가운데서 걸어감(hw"hy> rAaB. hk'l.nEw> Wkl. bqo[]y: tyBe)"이다.[4] 특히, “여호와의 말씀”과 “토라”가 대칭되어 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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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단순히 출생때의 일이라기보다는 대관식때에 보다 잘 어울린다.
-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 왕하
- 완료형들의 사용: 보다, 비취다, 창성케 하다, 더하게 하다, 즐거워하다, 꺽다, 났다, 메었다, 불렸다à 믿음으로 선취하는 하나님 나라.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는 왕/평강의 왕/평화의 왕국(-
* 다윗의 위에서 날 사람에 의한 평화의 세상은 11장으로 이어진다. 9장에서와 마찬가지로 11장에서도 멀지 않은 미래의 일에 대해 선포된다. 예언자는 이것이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를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시 85:9를 보면, 여호와의 구원은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가깝다. 이 거리는 믿음의 간격이지, 물리적인 간격이 아니다. 그의 구원은 더딜찌라도 지체치 아니한다(합
11장 이새의 줄기에서 난 싹.
-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rjx)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rcn)가 나서 결실할 것” à 줄기와 뿌리에서 무언가가 자라난다는 것은 이 나무가 뭉텅 베어졌다는 것을 전제한다. 다윗의 줄기가 아니라 이새의 줄기가 언급된다는 점은 다윗왕가의 붕괴를 암시한다. 그러나 이러한 붕괴가 다윗왕가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무효케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선택이 그에 합당한 바른 삶을 사는 것을 면제하지 않지만, 동시에, “어떤 개별적 인간이 실패했다는 이유로 한 왕조가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무효화할 수는 없다”. “이새의 줄기”는 심판받고 무너진 다윗왕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이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반영되어 있다.
- 2절이 다윗의 후예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영이라면, 3절이하는 그러한 영을 부여받은 왕의 직임에 대해 보여준다. 하나님의 선물인 카리스마들은 이러한 직임 수행과 연관된다.
- 3-5절 왕의 직임: 재판 – 외모나 들리는 것으로 하지 않음; 체덱으로 가난한 자(ld)를 심판하며, 정직(rwvym, ‘공평’: 시 99:4)으로 세상의 곤궁한 자(yn[)를 판단;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고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임; 공의(체덱)와 성실(에무나)이 그 행동에 수반함. – “가난한자”와 “곤궁한자”는 대체로 사회경제적 개념이다. 왕의 직임에는 가난한 자에 대한 공의로운 재판과 더불어 악인에 대한 징벌도 포함된다. 이에 대해 시 72:1-4를 참고하라.
- 6-10절: 정당한 왕이 통치할 때, 세상의 바른 질서가 회복된다. 여호와의 신이 그 위에 임한 왕의 통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사람, 야생동물, 초식동물의 평화로운 공존이다. 이 부분이 알레고리적으로 해석된다면 “어린 아이”는 등장할 필요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시대와 연관지어 그가 기대하고 바란 미래로 보는 것이 옳다. 평화의 나라(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거함- 약육강식이 사라짐).ß 이것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온전히 고백하고 알게 될 때에 이러한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 11절: 그 날에 이새의 뿌리가 열방을 향한 기호가 될 것이며, 열방이 그를 찾으리라. “기호”는 깃발을 의미한다. 깃발을 중심으로 모이듯이, 이새의 뿌리가 그 모이는 푯대가 될 것이다. 앞에 등장한 내용에 의하면, 이새의 뿌리는 메시야적인 평화의 왕국을 이룰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화의 왕국이 이루어질 때, 열방이 그에게로 나아오게 된다.
- 이사야서에서 열방의 회복은 항상 메시야적인 통치와 연관된다. 2장에서도 열방이 예루살렘으로 모여온다. 토라가 그들에게 선포될 때, 칼이 보습으로 바뀌는 평화의 세상이 이루어지며, 11장은 이러한 상황에서 메시야의 역할을 특별히 담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 결과는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살아가는 평화의 세상이다.
à 다윗의 왕권은 공평과 정의의 통치로 규정된다. 이것이 구현되지 않으면 다윗 왕가라 할지라도 무너진다. “이새의 줄기” 혹은 “이새의 뿌리”는 이것을 암시한다. 결국, 공평과 정의는 다윗의 통치, 다윗의 가지, 이새의 줄기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단순히 혈통과 연관된 표면적 계승이 중요하다기보다는 그 내용적 계승이 중요하다. 다윗의 후손이라도 공평과 정의의 통치가 없다면 그것은 다윗의 후손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돌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마
이스라엘의 왕은 미슈파트와 츠다카를 행하는 것이 그 핵심적인 존재의 의미이며 이유이다. 삼하
2. 예레미야, 바벨론 포로 이후 유다땅의 개혁
* 바벨론의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은 왕실을 쓸어버리고 유다의 모든 귀인을 죽이고 성중에남은 백성과 항복한 자와 남은 백성을 바벨론으로 옮기되, 빈민을 유다땅에 남겨두었다. 이들은 “아무 소유가 없는 가난한 백성중의 일부”이었다. 아무 소유가 없던 그들에게 “포도원과 밭”이 주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꾸지 않은 포도원을 받은 것이다(신 6:11). 아무 것도 없던 이들이 포도원을 경작하며 땅을 가는 농부가 되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모두에게 비극적인 사실은 아닐 수도 있다. 예루살렘에서 권세를 누리며 죄악을 행하던 이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날이었겠지만, 그 땅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예루살렘에서 살지도 못했던 이들에게는 어엿한 자유인이 되고 포도원을 경작하는 이가 된 날이었다. 물론 바벨론 식민정책의 일환일 수도 있겠지만, 여하간 그들에게는 오히려 반가운 날이었지 않을까? 이들에게 나라는 무엇이며, 이들에게 다윗의 영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윗의 의로운 통치가 구현되지 않는다면, 이들에게 다윗왕가는 말 그대로 무의미하다.
이러한 포로됨과 죽음의 세월중에서도 예레미야를 죽음의 구덩이에서 건져내기에 힘쓴 구스인 에벳멜렉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듣게 된다. 이 심판과 멸망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구원은 그 받을 사람을 향하여 베풀어진다. 까닭없는 심판은 없고 억울한 진멸은 없다. 구스인이었으며 왕의 측근에 있으나 예레미야가 옳은 줄 알고 그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인 줄 알고 있었다(39:18).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유다와 대비되는 또 한 명의 인물이다. 믿었기에 행동한 이 인물은 예레미야서에 가득 등장하는 유력한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 높아 보이지 않은 직책의 외국인이었다.
* 바벨론으로 끌려가던 도중에 바벨론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의 호의로 풀려난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가기보다 다시 유다로 돌아가서 그 땅에 남겨진 백성과 함께 거하고자 한다. 그가 찾아간 곳은 그다랴가 머무르는 미스바였다. 다윗가문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이지만, 그다랴에게는 미스바가 그 중심지였다. 미스바는 왕정이 등장하기 전 시대의 중요한 제의 중심지로, 사무엘과 연관이 있던 곳이었다(삿 20:1-3; 21:1-8; 삼상 7; 10:17).[5] 흥미롭게도, 다윗왕국의 멸망이후 다윗 이전 시기의 제의 중심지가 새로이 부각된 셈이다. 바벨론에 끌려간 이들 가운데는 다니엘과 같은 인물도 전하여지고, 아마도 제2이사야 같은 이도 활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땅에 남겨진 자들에 대해서는 아무 내용도 전하여진 것이 없다. 오직 그들과 함께 있기 위해 그 땅에 남은 예레미야를 통해서만 전해질 뿐이다. 바벨론은 그다랴 벤 아히감을 그 땅의 ‘파키드’로 세웠고, 그에게 끌려가지 않고 남은 남녀와 아이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맡겼다. 그다랴는 예레미야의 선포를 따르고 지지했던 아히감의 후손이며, 거슬러 올라가면 요시야개혁의 핵심인물인 사반의 후손이기도 하다(왕하 22:3).
바벨론은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들에게 포도원과 밭을 분배하였다(39:10). 아마도 이 땅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고위층들의 소유였을 것이다. 이 소식이 퍼지자, 인근 주변 국가의 지역으로 도망치거나 도망쳐야했던 유다인들이 죄다 그다랴에게로 다시 돌아왔고, 각자 그들이 이르른 땅에서 포도주와 여름 실과를 풍성히 거두며 살게 되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속에 그 땅에서 밀려났던 이들에게 이제 바벨론이 허락해 준 지역 내에서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쫓겨난 자에게 임하는 평화와 풍성함이 있었다. 여기에서 보이는 모습은 열왕기서등에서 전하는 대로 바벨론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끌려갔다는 인상과는 다르다. 그리고 전쟁직후의 참상과 황폐함도 보이지 않는다. “포도주와 여름실과와 기름”은 이 시기가 전쟁으로부터 시간이 상당히 흐른 뒤를 짐작케한다. 바야흐로 그다랴의 시대는 새로운 시대요, 안정과 풍성함의 시기로 진전하고 있었다.[6] 30-31장에 표현된 장래에 대한 희망 혹은 제2이사야에서 쉽게 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들이 성취되는 것처럼 보인다.[7] 바벨론에 의해 그리고 그다랴를 통해 이루어진 토지재분배와 새로운 시작은 어찌 보면 각각의 기업의 회복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상류층에 집중되었던 토지가 예루살렘의 함락과 바벨론의 진주를 통해 뜻밖에 재분배되고 회복되는 일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대한 성경의 또 다른 부분들은 전혀 다른 그림을 전해준다.[8] 애가서 5장은 땅을 외인에게 빼앗겨버린 이들의 탄식이 나온다. 그에 따르면 비참한 생활과 가족의 유린등이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탄식한다. 아마도 실제의 현실은 이러한 양극단의 중간쯤에 있었을까?[9] 아니면 애가의 보도는 보다 이후 시기를 반영한 것일까?
하여간 이러한 평화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다랴 공동체에 귀의한 이들 가운데는유력한 군대 지휘자들도 있었는데,[10]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이들이 이스마엘 벤 느다냐와 요하난 벤 가레아였다. 요하난은 모든 일마다 그가 나서서 말하는 것을 볼 때, 아마도 이들 가운데 대표자로 행세하였던 듯 하다. 그는 이스마엘 벤 느다냐의 그다랴 암살 모의를 전한다. 아마도 차기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이였을 요하난으로서는 미리 이스마엘을 암살해서라도 모처럼의 이 평화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했겠으나, 그다랴는 이러한 이스마엘 암살을 허락지 않는다. 그는 다른 이들을 믿었고, 암살이라는 방법을 통해 일을 해결하는 것을 인정치 않았다.[11] 결국, 왕의 종친 즉 다윗왕실의 한 사람인 이스마엘 벤 느다냐는(41:1) 그다랴를 초대한 자리에서 그를 죽이고 그와 함께 한 유다인들도 죽이고 그들가운데 거하던 갈대아 군사들도 죽여버린다. 그다랴를 초대하여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볼 때, 이스마엘도 이 새로운 공동체에서 일정한 위상을 지닌 이였을 것이다.[12] 당연히 다윗의 후손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했을 것이로되, 이 공동체에서 다윗의 후손이라는 위상은 불필요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윗왕가의 후예가 아닌 사람에 의해 지탱되고 그에게 다른 유다인들이 모여드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리라. 예루살렘이 중심이 아니라 미스바가 중심이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심각한 이탈로 보인 것일까? 다윗왕가의 회복이라는 이상과 민족주의의 교묘한 결합이 이스마엘에게서 보인다. 그는 그다랴를 죽인 다음에 그에게 붙여진 모든 사람을 이끌어 가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도, 그의 행동은 그다랴를 대체한 새로운 권력, 즉 리더십의 문제가 핵심임을 알 수 있다. 다시금 다윗왕가의 통치는 그 땅의 아무 것도 없는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쫓겨난 자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볼 수 있으며 다윗왕가는 오히려 이들에게 평화를 깨며 죽음을 초래하며 고통을 가져다 줄 뿐이다. 다윗의 의로운 통치가 아니라면 다윗왕가의 존재의미는 전혀 없다.
* 참고: 예레미야서에서의 다윗의 통치에 대한 이상: 22:15; 23:5; 33:15 – 다윗에게서 나올 한 의로운 가지가 왕이 되어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 정리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기본적인 원칙이며, 당연히 오실 왕이 다스리실 원칙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공평과 정의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의 삶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실행되기를 구하신다.[13]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다윗 왕가는 무의미하다(렘 21:12; 22:30).
“그다랴와 함께 동이 튼 미래, 포로들의 귀환과 수확물을 추수하는 일들은 왕실의 후예에 의해 무너져 버렸다”.[14] 그다랴의 통치가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이에 대해 알베르츠는 예레미야 52:30에 나오는 바, 느부갓네살 23년(주전 582년)의 포로에 대해 주목한다.[15] 예루살렘이 이미 멸망하고 다수의 사람이 포로로 끌려갔는데, 새삼 그로부터 5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포로를 끌고간 상황을 생각할 때, 아마도 바벨론이 세운 총독인 그다랴의 암살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만하다는 것이다.[16] 이스마엘 벤 느다냐는 이후에 그다랴에게 있던 유다 사람들을 데리고 암몬 진영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기브온에서 요하난 벤 가레아등에 의해 저지되고, 자신과 몇 사람만 겨우 빠져 나간다. 요하난은 바벨론에 대한 두려움으로 예레미야와 바룩을 데리고 애굽으로 결국 내려가기로 결정하며 이동하여 베들레헴 근처 게롯김함이라는 곳에 머무른다. 공동체의 앞날과 애굽행을 위해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하지만,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응답은 그들이 기대하는 것의 반대였고, 기도부탁 이전에 이미 애굽행을 결정한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바룩과 결탁한 친바벨론적 조작으로 여기고 애굽으로 가기를 강행하여 마침내 다바네스에 이르른다. 그다랴의 죽음이후의 심리적 공황상태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은 일관된다. 그 땅 유다에 남아 있으라는 것이다. 그 땅은 비록 갈대아인에 대한 두려움은 있으나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이지만, 요하난이 이끄는 무리는 눈앞의 칼을 피할 수 있는 좀 더 안전하고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을 가고 싶어한다. 하나님의 칼은 어디든 이를 수 있으되, 이들은 지리적으로 멀어지면 좀 더 안전하리라 여긴 것이다. 칼을 피해 살아가면 언제나 칼이 쫓아온다(42:14-16). 칼을 두려워않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 땅에 살 때, 칼이 피해간다. 약속의 땅은 조건이 좋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땅이며 약속이 있는 땅인 것이다. 심판 이전에는 그 땅에 그저 거하려는 이들의 태도가 문제였으나, 이제는 위험으로 가득차 보이는 그 땅을 자꾸 떠나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요하난의 부탁대로 기도한 예레미야는 그 땅에 거하면 세우고 심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고 전한다(42:10). 이 동사들의 사용은 예레미야의 소명가운데 있는 일이며, 하나님의 새로운 경륜안에 있는 일이었음을 보여준다.그러나 현재의 불안함으로 인해 그들은 당장 전쟁과 칼이 없는 곳으로 가기 원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약속의 땅의 위험이 아니라 안전한 땅이었던 것이다. 결국 요하난의 무리들은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했지만, 자신들의 판단을 위한 정당화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들이 버린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고, 그들이 취한 것은 가시적인 평화와 안녕이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자가 중심이 된 삶은 그래서 쉽지 않은 삶이다.
애굽에서 그들의 생활은 꽤 긴 시간 이어졌을 것이다. 애굽에 이른 유대인들의 최후가 예견되었지만, 먼 이후의 일로 여겨지며, 다만 다가올 심판에 대한 징조로 애굽의 바로의 패배가 예견되어 있다(44:30).
아마도 애가 5장에 나오는 비참한 생활상은 그다랴 암살 이후 유다땅의 처참함을 표현한 것일 수 있다.[17] 그리고 이러한 비참함은 느헤미야1장에도 비슷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그럴 듯하다고 보인다. 이와 더불어, 애가의 탄식들은 예루살렘에 여전히 남아 있는 거주민들을 전하고 있고, 예레미야 41:5에 나오는 바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가는 무리들에 대한 보도는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이 제사처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18]
[1] 이러한 올바른 해석의 노력은 예수의 율법에 대한 해석(마
[2] GKC, §124 n.
[3] 이 단어는 레위기에만 26회 가량 쓰이고 있는데 모두 제의와 연관하여 제물을 씻고 제사장을 씻는 것에 사용된다. 출애굽기에서도 비슷한 제의적 용도를 위해 10회가량 사용된다.
[4] 이사야와 미가는 동일한 본문에 조금 다른 마무리를 더하고 있다. 이사야는 빛 가운데 걸어가는 삶을 통해 토라를 따르는 삶으로 결론짓고 있는데 비해, 미가의 경우 각자 자기 포도나무 아래에서 사는 삶, 자신의 유업과 더불어 사는 삶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5] 헤이즈, 밀러, 『고대 이스라엘 역사』, 533-4. 렘
[6] Carroll, Jeremiah 26-52, 705.
[7] 같은 곳.
[8] 알베르츠, 『포로시대의 이스라엘』(크리스찬댜이제스트, 2006), 132. 에스겔 33:23-29 역시 그 땅에 남은 자들의 토지재분배와 권리 주장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H.H.Ben-Sasson, A History of Jewish People, 161.
[9] 알베르츠, 133.
[10] 아마도 이들은 바벨론의 포위공격 혹은 함락 이후의 공격시에 흩어진 무리들일 것이다. 52:8은 그 흔적을 보여준다.
[11] Carroll, 707.
[12] 아마도 이 공동체의 다른 이들에게도 다윗왕가의 인물이라는 점은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13] 이러한 공평과 정의에 의한 다윗의 통치는 이사야서에서도 나타난다: 사 32:1; 미래의 비젼:
[14] Carroll, 708. 캐롤은 발처(K.Baltzer)가 이사야 53장이 얼마나 그다랴와 비슷한지 설명하는 것을 주목한다. 그다랴라는 인물이 지닌 미덕들-그의 순전함과 선함, 남은 공동체의 삶을 제대로 중재하고 대변했던 그의 활동-은 다시금 민족주의와 전쟁의 야만속에 희생되어 버렸다. Carroll, 708.
[15] 알베르츠, 134.
[16] 요세푸스, Ant. 10.18-182, 는 느부갓네살 23년에 그가 다시 팔레스타인에 진군해서 모압 및 암몬과 싸웠으며 포로를 끌고 갔다고 전한다. 그다랴를 죽인 이스마엘이 암몬의 충동을 받았다고 전하는 예레미야서의 내용과(렘 40:14; 41:10) 연관된다. 헤이즈∙밀러, 535-6.
[17] 알베르츠, 135.
[18] Bustenay Ode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