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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견훤과 금하굴
가은읍 갈동 아차동이 견훤(아자개 4자중의 하나) 출생한 곳이라는 사화가 있다. 아차동의 한 부유한 가정에 규중처녀가 있었는데 밤이면 가만히 처녀방에 이목이 수려한 초립동이 나타나서 처녀와 같이 정담을 나누고 동침하다가 새벽이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밤이면 나타나고 하기를 무릇 수개월에 처녀가 잉태하여 배가 부르게 되니 처녀가 부모에게 사실을 실토하였다. 그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딸에게 말하기를 그 사나이가 오거든 평상시와 같이 잠을 자다가 그 사나이 모르게 옷소매에 바늘로 실을 꿰어매라고 말을 하고 밤에 가만히 엿보니 과연 이목이 수려한 초립동인지라 하회를 기다리기 위하여 그대로 방치하고 새벽에 초립동이 사라진 후 실을 따라서 찾아가 보니 금하굴로 들어간지라 굴속에 들어가 보니 커다란 지렁이 몸에 실이 감기어 있었다. 그 후로는 초립동이 나타나지 않고 10개월이 지난 후에 처녀는 옥동자를 순산하였으니 그가 견훤이라고 한다. 그러한 후부터 금하굴속에 풍악소리가 들리는데 수백년을 경과하여도 여전히 풍악소리가 들리므로 유람객이 쇄도하여 동리의 적폐가 많으므로 동민이 금하굴을 메워 버렸다는 바 그 후부터 풍악소리가 끊어졌다 한다. 그러나 부락운이 다 함인지 불상사가 속출하므로써 부락이 퇴폐하여 갔다고 하는데 해방후 동민이 매몰한 금하굴을 원형대로 파냈으나 풍악소리는 들리지 않고 옛날부터 전하여 오는 사화만이 후세인의 입에 구전되고 있다.
농암면 궁기 입구에 층암절벽이 임립되어 있는 용추변에 마암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견훤이 이곳 마암에서 용마를 얻었다고 하여 마암이라 부르고 있다. 견훤이 후백제왕이 되기 전 궁기에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용추변 마암을 소요하고 있는데 갑자기 오색무운이 자욱하면서 마암쪽에서 말 우는 소리가 들린다. 견훤은 이상히 여기고 마암위로 올라가니 표할하게 생긴 용마가 주인을 맞이하는 듯 반가워 하므로 한손으로 말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나는 장차 후백제왕국을 세울 몸인데 하늘이 왕업을 돕기 위해 용마를 보내셨구나 하면서 말에게 말하듯 훈계하니 용마는 힝힝거리며 좋아하는 기색이다.
견훤은 표연히 말등에 올라 채찍을 가하니 말은 주홍같은 입을 벌리면서 질주한다. 견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용마의 걸음이 빠른가 화살이 빠른가 시험해 보자 하면서 적지산으로 화살을 쏘고 말을 몰아 적지산에 이르니 화살은 어디에 떨어졌는지 알 수 없다. 견훤은 대노하여 이것이 무슨 용마냐고 하면서 칼로 용마의 목을 베어 버리자 삐웅하는 소리가 나며 화살이 땅에 떨어진다. 이에 화살은 시불이혜(時不利兮)여 장차내하(將次奈何)오 하며 자신의 경솔함을 후회하고 방성대곡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3) 월방산 산신령
문경시 산양면 봉정리 마을 뒤에 월방산이란 험준한 산이 있다. 이 산 꼭대기에는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곧 넘어질 듯한 조그마한 기와집 한 채가 외로이 서 있으며, 이 방안에는 큰 호랑이를 타고 있는 백발 노인의 화상이 걸려 있으니 이것을 마을 사람들은 산신당이라 부른다. 이 산신당 주위에는 돌로 울을 쌓고 그 밖은 노송으로 둘러 싸여 있어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신성한 곳이며 그 바로 앞은 수 십m의 벼랑이다. 이 산신당의 내력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어 동민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있다. 옛날에 마을에 한 마음씨 고운 아낙네가 산에 나물 캐러 갔다가 미끄러져 몹시 상처를 입어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이 때 꿈에 이 산신당의 그림과 같은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 “이 앞의 벼랑 사이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 있으니 그것을 먹고 바르면 나을 것이다.”고 하고 사라졌다. 그래서 그 여인은 꿈속의 노인이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상처는 씻은 듯이 없어졌다. 마을에 돌아온 그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심술궂은 한 사나이가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고 산신당에 달려가서 벽에 걸린 산신 그림의 눈을 솔까지로 마구 찌르는 동시에 벼랑에서 새 나오는 우물을 마구 파헤쳐 놓고 집에 돌아와서 잠을 자려 하니 귀신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3일만에 그 사내는 죽어 버렸다고 한다. 그 후부터 우물물은 흙탕물로 변하고 밤이면 마을의 개나 돼지 등의 가축이 호랑이의 피해를 무수히 입게 되었다. 그래서 동민들이 의논한 결과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쌀을 모아 음식을 차려 제사를 드려 제액초복의 축원을 드리기로 하여 지금도 실시하고 있는데 제관은 아무리 추운 정월이라도 냉수로 목욕재계를 해야 한다고 한다.
4) 김룡사의 애기중
김룡사는 문경시 산북면 소재지에서 8㎞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물이 맑고 숲이 우거진 산중 깊숙히 자리잡은 이 절에는 창건 이래 참선하는 수도승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수도승들 중에 한 애기 중이 있었다. 하루는 주지승이 상추를 씻어 오라고 하매, 애기중은 시내로 나갔다. 맑은 물에 손을 담구어 상추를 씻고 있는 애기 중은 문득 눈 앞에 붉은 불기둥과 함께 훨훨 타고 있는 절을 보았다. 가만히 살펴본즉 김룡사에서 십여리 떨어져 있는 대승사였다. 불타고 있는 대승사의 중들은 우왕좌왕 어쩔줄을 모르고 있었다.
애기중은 놀라서 자기도 불을 꺼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정신없이 염불을 하고는 시냇물을 불길을 향해 퍼부었다. 손끝을 따라 상추잎들이 마구 불기둥을 향해 날아갔다. 한참만에 불이 꺼졌다. 그제야 제 정신으로 돌아온 애기 중은 상추그릇을 보니 상추는 몇잎 남아있지 않았다. 큰일이다 싶어 남은 상추를 씻어 급히 절로 달려갔다. 한편 주지승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상추를 씻으러 간 애기 중을 기다려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있었는데, 그제야 애기 중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디가 낮잠을 자고 오느냐고 묻던 주지승은 이번에는 몇잎 남지 않은 그릇을 들여다 보고는 그만 화가 폭발해서 무슨 장난을 했느냐고 물으며 매를 들었다. 애기중은 억울하게 되었지만 아무 말도 않고 매를 맞았다. 이야기를 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핑계를 댄다고 더 맞을 것 같아서였다. 밤이 되었다. 애기중은 말없이 누워 있었다. 마음 속으로는 이 절을 떠나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그때 옆에 누워 있던 한 중이 낮에는 어떻게 되어 매를 맞았느냐고 물었다. 애기 중은 낮에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 했지만 그 중 역시 믿어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다른 중들이 잠들기에 애기 중은 절을 떠났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중들은 애기 중이 매를 맞고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어젯밤에 이야기를 들은 중이 애기 중이 한 이야기를 모두들에게 알렸다. 이에 중들은 가타 부타 논쟁을 벌이다가 누가 직접 대승사에 가보게 되었다. 과연 절은 불타 있었고 중들이 뒷처리를 하고 있었다. 대승사 중들이 불이 일어난 이야기와 갑자기 어디에서 날아와 불을 끈 상추 이야기를 하자 김룡사 중들은 애기중의 이야기가 참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심상치 않은 애기 중을 잃은 것을 모두 퍽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5) 빈대 때문에 망한 절
상선암 뒷산을 속칭 배남산이라 한다. 이 산 기슭에 청남사란 큰 절이 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 언젠가도 모르게 빈대 때문에 절이 망했다고 전설로만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확실치는 않으나 오랜 옛적부터 보존되고 있는 산신각은 이 마을에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고 관리하고 있다. 이 산신각 둘레에는 큰 느티나무가 몇 그루 고태의연하다.
산신각 아래쪽에 논밭이 있고 밭 둘레가 마치 옛 절 돌담과 흡사하다. 옛기왓장, 불상까지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골짜기 이름도 거의가 절에 속하는 이름들이다. 절터골, 불당골, 불선바위, 애당골, 청남골 등 동명도 그렇다. 상선암, 하선암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중선암 등으로 불린다. 빈대가 얼마나 많았는지 옛날에는 돌담들에서 빈대가 나왔었다고 전해진다. 더 이상 깊이 제보해 주지 못해 아쉽다. 다만 언젠가는 어느 학자에 의해 더 깊이 밝혀져서 확실한 고증이 되기를 바란다.
6) 아호동의 전설
우리 나라 지명에는 아름다운 고사가 많이 전해오고 있다. 일찍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고 하여 문경시이라 하였으며 시소재지인 점촌에서 승용차로 북서쪽으로 향하여 20여분 달리면 은혜를 베푼다는 가은읍에 이른다.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2㎞ 떨어진 곳에 유서깊은 아호동(鵝湖洞), 관명으로는 갈전(葛田)2리라는 아담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니, 이곳에는 옛날부터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은 조선 14대 선조 25년(1592)의 일로서 조선이 건국한지 꼭 200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큰 전쟁을 모르고 문화발전에 주력하였으므로 크게 융성하던 참이었다. 오랫동안 평화로운 생활만을 누렸으므로 전쟁에 대한 대비가 거의 없는 처지에서 임진왜란을 당하게 되어 스스로 방어를 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 난리를 맞이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병이 수없이 일어났지만 워낙 국가의 방위력이 약하였던 탓으로 부득이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두사충(杜史沖)도 명나라에서 온 원병의 일원이었다. 신라말의 명승 도선(道詵 : 827~898)이 당으로부터 수입한 풍수사상은 고려시대를 휩쓸었고, 오히려 그 기세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드높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땅의 형세를 가지고 인간의 길흉화복에 관련시킴으로써 인간의 행복이 집터나 묘터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집터나 묘터를 구하기 위하여 갖은 애를 다 썼을 뿐 아니라. 시간과 금력을 낭비하였다. 명나라 장군 이여송과 함께 도사(道士)로 조선에 온 두사충이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진을 잘못쳐서 수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게 된 일이 있었다. 그때 조정에서는 그 죄를 다스려 두사충을 죽이자는 논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약포(鄭藥圃, 諱 : 琢, 謚號 : 貞簡) 대감은 그의 도술이 뛰어남을 알고 죄를 면해 줄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정약포 대감의 은혜로 목숨을 건진 두사충은 무엇으로 은혜를 보답할까 하고 생각하다가 택지(宅地)를 정해 주는 것으로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두사충이 아호동의 집터를 정해 주면서 “이곳에 안식처를 잡으면 대감과 같은 분이 세 사람 더 나올 것입니다. ” 라는 예언을 하였다. 약포 대감이 현지를 답사하기 위하여 조령을 넘다가 주막에서 하루 저녁 쉬게 되었다. 그 때 주막집 노파에게 문경에 대한 인심을 묻자 그 노파 말이 “앞으로 문경 백성은 아호동에 한양 정약포 대감이 집을 짓기 위하여 일을 시작하면 노력 동원으로 큰 곤욕을 치를 것이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약포 대감은 집일을 시작도 하기 전에 이런 소문이 떠돈다는 것을 생각하고 집 짓는 공사를 포기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한다. 약포 문집에 보면 아호동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글이 실려 있으며 아호 동명은 두사충이 지은 것으로 터의 형세가 마치 뭇 오리가 호수에 내려 앉는 형상(群鵝投湖)이라고 하였고 또 금비녀가 땅에 떨어진 형상인 금차낙지(金차落地)라고 하여 아차(鵝차)라고 부르기도 한다. 후백제의 왕인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의 출생지였다는 금하굴이 여기에 있으므로 아자개의 이름을 따 아개동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여러 가지 전설이 얽혀있는 이 마을에는 현재 동네입구에 삼태암(三台巖)이 100여m를 거리로 하여 한 줄로 늘어서 마을의 수호신처럼 마을 사람을 지키고 있으서 3명의 정승은 마을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을 이루고 있는 이 삼태 바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며, 유전하는 동명도 아호동, 아차동, 아개동 등 세 이름은 각각 길조를 뜻하고 있는 이름으로 3이라는 숫자와 뜻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호동, 아차동, 아개동의 세 이름은 풍수지리설로 보아서는 더 없는 승지요, 복락을 누릴 수 있는 터전이라는 뜻이 담겨있는 것 같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아호동 아름다움을 일컬어 왔으며, 여러 묵객들이 절경의 여운을 찬양하여 아호팔경을 노래하였다.
1경 금굴증하(金屈蒸霞) / 2경 송전수학(松田睡鶴) / 3경 옥봉제월(玉峯霽月) / 4경 율포낙안(栗浦落雁) / 5경 취봉귀운(鷲峯歸雲) / 6경 의야초가(蟻野樵歌) / 7경 부연비폭(鳧淵飛瀑) / 8경 용강어화(龍江漁火)
이것을 풀어보면 금하굴에는 찬란한 노을이 뜨고, 솔밭 고개에는 백학이 졸고 있다. 옥녀봉 산등에는 개인 달이 밝아있고, 밤나무 갯가에는 기러기떼가 모였구나. 수리봉 꼭대기에는 구름이 돌아가고, 개미 벌판에는 초동의 노래가 은은하다. 오리뜸병 소에는 폭포가 날아내리고, 용수머리 냇가에는 고깃배의 불꽃이 밝도다. 이상의 표현으로 보아 시인 묵객들의 개인적인 감상과 과장도 있었으리라고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일찍이 도사 두사충이 잡은 이 터전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는 듯하여 더욱 향수를 솟아나게 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은 정이 든 탓도 있겠지만 마을마다 얽혀있는 이와 같은 아름다운 전설도 또한 고향을 지키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가 산업화 함에 따라 옛 정든 고향은 점점 황폐해 가고 있는 현실에 비춰 볼 때 아호동은 일찍부터 전해오는 상서로운 전설과 함께 내 고장을 지키겠다는 향토애로 가득한 사람들로 읍내에서도 선진된 모범 부락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현재 고향을 지키면서 공직에 종사하는 사람도 다른 마을에 비하여 많은 편이다.
오늘날 첨단과학의 기술시대로서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이 때 위에 소개한 풍수도참설은 비과학적이고 허망된 전설이기도 하지만 아호동에 전해오는 아름다운 전설은 바쁜 사회생활 속에서도 고향을 그리는 애향심의 지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7) 구랑리의 유래
구랑리는 현재의 행정구역상 마성면 하내리로 조선조 초기의 이야기다. 교통이 발달되지 못한 첩첩 산중에 한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에 양친부모를 봉양하며 초식으로 생계를 이어 가는 한 효자가 있었다. 어느해 봄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하루는 이 총각이 산에 나무를 하러 산으로 올랐다. 큰 바위가 넓직한 곳에서 낮잠을 달게 자고 있는데 꿈에 한 백발 노인이 나타나 총각을 보고 「너의 아버지 산소를 산 너머 언덕으로 이장을 하면 자손이 삼 정승과 육 판서의 벼슬 자리에 오르게 될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 그런데, 삼 정승, 육 판서가 되는 데는 약속이 있었다. 10년간 벙어리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꿈을 깬 총각은 그 길로 집으로 내려와 어머니와 아버지의 묘 이장을 상의한 결과 거절을 하시는 어머니 몰래 이장을 하고 말았다. 그후 총각이 벙어리 생활을 하며 어느듯 세월은 흘러 10년이 마지막 가는 날 동네에 아홉처녀가 모여와서 벙어리 총각을 붙잡아 뒷산 나무에 매어달아 두들기고 놀리고 하며 웃음바탕을 이루는 중, 어느듯 시간이 흘러 10년이 꼭 차는 시간이 되어 드디어 이 총각이 입을 열었다. 「이놈들…」하고 소리치니 아홉 처녀들은 놀라 엎드려 용서를 빌며 애원했다. 용서해 준다면 총각의 소원대로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총각의 소원은 오늘 저녁 아홉 처녀 전부가 우리집에 와서 나의 아내가 되겠다는 약속을 하자고 했다. 사방이 컴컴해지자 아홉 처녀는 모였다. 그러자 총각은 모두 아내가 될 것을 약속받고, 자기 집으로 돌려 보냈다. 총각은 날이 새자 벽돌을 찍어 집을 짓기 시작했다. 방이 아홉칸 이었다.
어느듯 세월은 흘러 총각은 다시 쳐녀들을 불렀다. 방 한칸에 한 사람씩 살게 하였는데 아홉처녀는 다같이 아기를 갖게 되었다. 얼마후 아홉 처녀는 한날 밤에 전부 귀동자를 낳게 되었는데 총각이 이방 저방을 다니며 아기가 나는데로 1, 2, 3 … 번호를 숯으로 벽에 기재했다. 아홉 아들은 무럭 무럭 자랐으며 후에 첫째, 둘째, 셋째 아들은 정승을, 넷째부터 아홉째 아들까지 여섯은 판서가 되었다. 이 아홉 아들이 자랄 때 이름을 무슨랑, 무슨랑…하고 불렀기에 그후 이 마을을 구랑리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8) 당군을 물리친 뙤다리(唐橋)
당교는 문경시와 함창읍 경계에 있는 길이 10m도 채 안되는 3번 국도상의 조그만 다리이다. 지금은 이 다리를 밟는 행인들이 다리 이름조차도 잘 모르지만, 이 다리야말로 역사상 일대 드라마가 벌어졌던 다리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끼어 국운이 위태롭던 신라는 당시 세계 최강인 당나라와 손을 잡는데 성공, 당나라의 도움을 얻어 무열왕은 숙적 백제를 쳐부수게 된다. 당나라 소정방은 백제를 멸하고 나서 연합군인 신라에겐 한치의 백제 옛땅에 나눠주지 않고 독식하고 만다. 663년엔 신라의 문무왕을 계림도독으로 격하시키고 신라의 국호도 계림도독부로 고치는 실례를 범한다. 이에 격분한 신라 명장 김유신장군은 왕년엔 우군이었으나 적군으로 돌변한 당나라 소정방군과 상주 관내의 당교에 일대 격전을 벌여 당나라군을 격퇴시킨다. 당교의 개울은 적군의 피로 물들었고, 얕으막한 산은 적군의 시체로 높았었다. 당교란 순수한 우리말로 뙤다리다. 되다리가 경음화 현상의 덕분으로 뙤다리로 불러지게 됐다.
9) 영신들의 유래
문경시 점촌동 구 문경경찰서(영강문화회관) 뒤에 옛날 고가가 간혹 눈에 뜨이는 ‘미지니’라는 마을이 있으니 여기서 2㎞ 가량 가면 끝이 가물거리는 영신들이 눈 앞에 전개된다. 이 영신들이 생기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신비한 이야기가 있다. 연대는 확실치 못하나 옛날에 이 미지니 마을에 최씨라는 아주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영신이라는 머슴이 있었으니, 그는 얼굴이 못생기고 무식했지만 성실하고 힘 세기로 이웃 상주까지 소문이 났다고 한다.
그가 어느 여름 밤, 곤히 잠을 자고 있을 때 절세미인이 앞에 나타나 공손히 인사를 한 후에 자기의 청을 들어주면 자기도 영신 총각의 소원을 풀어주겠다고 하기에 덮어놓고 좋다고 쾌락하였다. 그랬더니 그 미인이 말하기를 “소저는 사람이 아니고 송정쏘(깊이 약 7m) 또는 용진못에 사는 암룡인데 숫룡과 내내 사이좋게 지내오던 중 갑자기 다른 못의 암룡과 즐기고 소저를 싫어하니, 그 암룡을 죽여 주시되 내일 새벽 뒷산(지금의 돈달산)에 내려와서 놀고 있을 때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처치하여 주시오.”하고 칼과 잿봉지를 놓고 사라졌다.
영신 총각이 깜짝놀라 꿈을 깨어보니 머리맡에 칼과 잿봉지가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고 곧 칼과 잿봉지를 들고 뒷산에 올라가서 새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두 마리의 용이 내려와서 놀고 있는 것을 본 그는 어느 것이 암룡인지 구별치 못하고 덮어놓고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한 마리를 죽였다. 그날 밤이었다. 어젯밤 그 여인이 머리를 풀고 울면서 나타나서 하는 말이 “총각이 죽인 것은 암룡이 아니고 숫룡이니 이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이요” 한숨을 쉬면서 그러나 약속은 지켜야 하지요”하고 총각에게 소원을 물으니 그는 최부자보다 더 큰 부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 여인은 영신에게 이르기를 문종지와 지릅대(삼을 베긴 대궁)로 많은 깃발을 만들어 영신을 써서 비가 그칠 때까지 뒷산에 올라가서 기다리다가 새들판이 생기거든 깃발을 꽂아 표시를 하세요하고 사라졌다. 그날부터 줄곧 보름동안이나 큰 비가 내려 온 천지는 물바다로 변하는 동시에 점촌에서 함창으로 흐르던 물줄기가 영신 앞으로 흐르면서 높던 뒷산이 깎여 돈짝만큼 작아졌으므로 돈달산이라고 일컫게 되었고 그로 인한 흙으로 땀봉이란 절벽이 생겼으며 황폐한 들판을 묻어서 지금의 옥토인 영신평야를 이룩하였다. 영신이는 비가 그치자 내려와서 자기 땅을 만들었으므로 이로부터 영신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영신의 후손이 이곳에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 보설(補說) : 홍수전 영신도령이 머슴살이하던 최부자댁은 광대한 큰들(영신들)이 모두 최부자네 땅으로, 아주 큰 광농을 했다고 하는데, 최부자네 서당이 있던 서당터(문경시의회 뒷숲), 자리를 짜던 빈지모터(영신들의 일부), 침을 놓던 동침마(점촌 영신동), 용이 싸웠다는 용진못가, 턱걸이를 하던 턱걸이바위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둘레를 따지면 십리가 훨씬 넘는다. 지금도 강가엔 갠(영순면 포내리)이란 최씨 동족부락이 있다. 전설속의 최부자와의 관계는 알 수 없다. 이밖에도 강엔 까치쏘, 송진쏘의 이무기(이시미) 전설이 있는데, 오늘날도 송진쏘엔 악룡이 장난(?)인지 익사자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
10) 유곡의 개 서낭당
남쪽 삼천포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혜산진에 이른다는 3번국도를 따라 점촌버스터미널에서 4㎞ 북쪽으로 달리면 사백여호나 되는 큰 마을이 있으니 바로 유곡이란 동네다. 점촌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점촌시 대성동에서 문경시 점촌4동으로 바뀌었지만 유곡이란 동명이 이곳 토박이들에게는 한결 정다운 이름이다. 유곡은 옛날부터 영남의 주요역으로 찰방이 배치되어 인근의 여러 역을 관할했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조용한 느낌을 주는 유곡이라는 마을이름과는 달리 항상 번화한 마을이었다. 대개 서낭당은 호젓한 오솔길 옆이나 외진 곳에 있기 마련인데 유곡 서낭당만은 국도변에 있는게 특징이다. 유곡 서낭당 말믜고개에서 현재의 장소로 옮겨진 것은 1908년이라고 한다. 말믜고개 서낭당 큰 느티나무는 손가락 굵기의 가는 나무를 옮겨 심은 것이 지금은 둘레가 두 아름 반이나 되는 거목이 되었다. 약 20년 전에 서낭당에 불이 나서 반소(半燒)되어 외관이 초라했으나 그나마도 1986년 7월 25일에 완전히 철거하고 서낭당 신위(城隍堂 神位)라고 새긴 비석을 당집 대신 세워 놓았다. 사람은 조반석죽으로 겨우 연명하던 시절이라 개는 하루 두 끼 얻어먹기가 힘들었다. 사람들이 하루 세 끼 식사를 하는 요사이도 개의 점심은 없을 때가 많다. 사람을 잘 따르는 개는 주인을 따라 바깥 나들이를 곧잘 했다. 주인이 자기집 개라 따라오는 것을 꾸짖거나 때리면 일시 집으로 돌아가는 척하지만 개는 얼마간 거리를 두고 주인을 배행할 줄 알았다.
주인을 따라 잔치집에 가서 요기를 한 경험이 있는 개는 주인이 갓만 써도 주인의 뒤를 따라 준비를 했다. 옛날 유곡에 어떤 늙은이가 살았다. 노인은 집에서 개를 한 마리 길렀다. 어느집 개처럼 이 개도 주인을 잘 따랐고 주인의 웃고 성내는 것을 가릴 만큼 영리했다. 유곡의 인근 부락인 불정마을 어떤 집에 회갑잔치가 있었다. 노인은 이른아침부터 잔칫집을 찾았다. 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배행했음은 물론이다. 잔칫집에 가는 것은 경사를 축하해 주는 뜻도 있었지만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노인은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쉬지 않고 먹고 마셨다. 해가 지자 날씨는 추워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던 노인은 너무 취하여 엎어졌다가 일어나고, 일어났다가는 엎어지곤 하다가 말믜고개에 이르러 넘어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추운 겨울바람이 술로 상기된 얼굴을 때려도 노인은 코만 드르렁드르렁 골았다. 얼어 죽게될 지경에 이르렀다. 영리한 개는 주인이 바깥에서 자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았다. 개는 주인의 옷을 물고 피사적으로 흔들어댔지만 주인은 죽은 듯이 움직일 줄 몰랐다. 혀로 얼굴을 핥고, 꼬리로 코를 간질러도 주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개는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이르니 마침 마당에 큰 아들이 서 있었다. 개는 막무가내로 주인아들의 바지가랑이를 물고 밖으로 끌고 갔다. 드디어 노인이 쓰러진 곳까지 주인 아들을 끌어오는데 성공했다. 한참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던 주인아들은 개의 영리한 행동에 탄복하고 언 땅에 쓰러져 체온이 식어가는 아버지를 부리나케 업고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노인을 아랫목에 눕혔을 때 아들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랫목에 한참 누워 있던 노인은 비로소 눈을 뜨고 여기가 도대체 어디냐고 물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이 동사를 면한 것도 개의 기지로 말미암은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 뒤 개는 주인식구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지냈음은 쉬이 짐작이 갈 것이다. 나이가 많아 개가 죽자 주인집에선 마치 가족 중 한 사람이 죽은 것처럼 슬퍼했고 개 무덤까지 만들었다. 무덤뿐만 아니라, 유곡의 의구(義狗)라는 부락의 수호신인 서낭신으로 승화되어 기림을 받게 되었다. 의구를 서낭신으로 한 서낭당은 유곡에서 얼마 안되는 말믜고개에 세워졌다. 지금도 유곡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에 의구를 서낭신으로 한 서낭당에 온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치성을 드리며 음력 정월부터 사월까지는 의구를 기리는 마음으로 보신탕을 먹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 유곡 동민들은 의구를 생각하여 진작부터 일정한 기간동안이나마 보신탕을 먹지 않은 문화인의 효시가 되었다고나 할까. 유곡에 의구 서낭당을 옮겨 세우고 나서부터는 마을에 도둑이 일체 들지 않아 개서낭의 영험에 주민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의구 서낭당에 제사의 치성을 극진하게 드리고 있다. 지금은 문경자동차 학원이 이곳으로 옮겨왔다.
우리나라 8대 명산 묘터 중 하나라고 하며, 정약포 대감이 명지관인 두사충으로 하여금 자신의 묘자리를 구하던 중, 이곳 문경시 동로면 적성1리에 이르러 명산임을 발견하고 구리로 만든 술잔 일곱 개와 은 삼백냥을 묻고, 표시를 하고도 미처 자손에게 유언치 못하고 죽게 되니 아들이 자기 아버지와 같이 왔던 청지기를 데리고 이곳에 이르러 갈전동과 도화동 입구에 있는 제일 바위 소나무 아래서 잠시 쉬며 묘터가 어디쯤 있느냐고 묻자, 청지기가 엉뚱하게 저기라고 말하자 타고 온 말이 갑자기 노하여 청지기를 물어 뜯어 살해하여 연주패옥은 찾지 못하고 화가 난 주인은 말의 목을 베고, 제일 바위 소나무 밑에 청지기를 묻고, 말은 그 밑에 매장하였다고 하며 지금까지 연주패옥의 명산을 찾았다는 사람은 없고 다만 청지기와 말의 무덤만 전하고 있으며 주위의 산들 중에서는 옥녀봉, 경대봉, 빗접봉 등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12) 백명암(白明庵)의 유래(由來)
농암면 소재지인 장터에서 남쪽으로 계곡을 따라 험한 산길을 10리쯤 가면 칠봉산 기슭에 30여호의 초라한 초가집이 바위틈을 비집고 옹기종기 모여 한 부락을 이루고 있었다. 동네 이름은 갈동(葛洞)으로 이 동네의 제일 큰 기와집 입구에는 서투른 글씨로 “白明庵”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제법 절 모양으로 불상도 모셔 놓고 염불과 목탁소리가 끊어지질 않는다. 그 바로 옆방에는 나무판에다가 백지를 붙여서 만든 18주의 위폐가 나란히 사이좋게 안치되어 있다. 동네 사람들은 무슨 일만 생겨도 이 백명암에 모여서 논의하고 명절에도 여기 모여 남녀노소 같이 즐기기도 한다. 마치 동네의 공회당과도 같은 이 백명암이 언제부터 생겼으며 어떤 유래로 출현했는지 지금은 인근 동리 사람들도 거의 기억에서 사라졌으나 아득한 꿈과 같으면서도 아직도 동리 과부들의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애닮은 유래가 있다.
때는 1950년 6월 25일 즉 6.25 사변 때의 이야기로 이 동네의 청장년들 거의가 죽었다. 왜 죽었으며 누가 죽였는지? 아무도 잘 모른다. 죽은 이의 어머니, 아내, 누이동생들은 이들을 찾고, 남편을 부르고, 오빠를 부르면서 지서로 몰려갔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군경은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하였고 장터는 텅빈 채로 오고가는 사람의 기색은 살벌했다. 어쩔줄을 몰라 울며 불며 돌아오는 길목에서 그들은 이장인 장씨 부자를 만났다. 이제 되었다고 이장에게 대어들어 “내 남편은 어디갔나? 내 아들은 어디갔나?” 하며 찾아내라 졸랐다. 이장인들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청년들을 장터로 데려간 것은 분명히 이장이었으니 아낙네들은 악을 쓰며 자식과 내 남편을 내놓으라고 야단치며 달려들었다. 그때 그 싸움이 한창일 무렵 인민군 두 놈이 동리에 왔다가 그 광경을 보고는 이장 부자를 무조건 쏘아 죽였다. 이쯤 일이 되고 보니 이장 부자를 죽인 것이 동네 아낙네들에게도 책임이 돌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 때 이장 부자는 피난을 가는 길에 그들에게 붙들려 죽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식하고 법률을 알 까닭이 없는 그들은 그저 자기들의 아들, 남편, 오빠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음을 슬퍼하며 대성통곡 하면서 그날 그날을 보냈고 워낙 산골짜기 부락이라 인민군이 어찌 되었으며 전쟁이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면서 그 해를 넘겼다. 대한민국 군경이 문경에 다시 돌아와 북상하는 인민군을 매일 같이 붙잡고 질서가 제법 회복된 1951년 2월 어느날 저녁 형사들이 어디서 정보를 들었는지 이 갈동의 과부들을 “장이장 살해 방조”라는 어마어마한 죄명 아래 한 트럭 싣고 본서(本署)에 끌고 왔다. 시골냄새가 흐르는 18세의 청상과부로부터 50이 넘는 노파까지 섞인 여인들만의 행렬이었으니 그 중에도 아이를 안고 있는 여자, 하나는 안고 하나는 업고, 또 하나는 끌고 품에는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자 등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들은 동서남북을 살피며 트럭에서 내렸는데 소위 피의자는 17명인데 따라오고 업고 안고 온 아이까지 합쳐 무려 30여명에 달했다. 그들은 성난 표정도 없이 생전 처음 보는 경찰서이니까 거기서 뭘 하는 곳인줄도 모르며 그들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왜 트럭을 타고 가자는 것인지도 알리 없이 그냥 낯설은 사람이 억지로 가자느대로 끌려왔을 뿐이었다. 이때 최석채 경찰서장은 이들 피의자의 연행 보고를 듣고 실로 난처해졌다. 애써 잡아온 부하들의 노력도 있고 법도 있지만 그 여자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매우 딱하였다. 그게 살인방조가 될리는 없으나 인민군에 대한 부역임에는 틀림없는 일이다. 더구나 이장 부자가 살해당한 간접 동기는 뚜렷하니 검찰청에 송치한다면 그 당시의 법률로는 몇 년씩 감옥살이 하기에는 안성마춤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잃어 버린 자식을 찾고 사랑하는 남편을 찾고자 이장에게 졸랐던 것이 크게 죄 될 것이 무엇이랴! 운수 사납게 인민군이 덤벼들었기에 탈이지 사람 치고 안 그럴 사람이 어디 있으랴!
서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망설이는 동안 벌써 밤이 깊어 그들을 경찰서 숙직실과 인근 여관방에 하룻밤을 투숙케 하고는 서장은 블록 건물인 임시 청사의 건물에서 책상에 기대어 서글픈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며 그 운명의 장난에 우롱 당하는 과부부대의 슬픔과 전정(前程)을 추측하니 어느새 눈물이 쏟아지며 대구에 남겨두고 온 그의 어머니와 병든 처, 어린 자식들에 마음이 미치니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서장은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입은 옷 그 자세로 책상에 기대어 그냥 선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에 백설의 산마루 위에서 그 눈보다도 더 흰 관세음보살이 출현하여 서장의 머리맡에 서더니 온화한 미소를 띄우면서 공중으로 높이 높이 보살은 안개 사라지듯 승천해 버렸다. 깜짝 놀라 잠을 깨인 서장은 무릎을 치면서 해몽했다.
서장은 어머니가 불신도임에서 받은 감화로 어릴 때부터의 신비감이 꿈으로 나타난 모양이다. 이튿날 서장은 무엇을 결심했는지 초인종을 눌러 윤용문 사찰주임을 불러 그 귀에다가 어떤 지시를 내렸다. 몇 시간 후 갈동 여인부대는 서장실로 불려 들어와 이발사에 의해 하나 하나 염불을 외면서 삭발하곤 비구니가 되었다. 서장이 윤 사찰주임에게 지시한 내용은 이렇다. “법은 엄정하니 그냥 용서할 수 없고 여인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우선 어린아이 처리부터 먼저 생각해야 하며 범죄의식이 전혀 없는 것이니 살려주는 방법을 연구하자는 것이요, 자고로 삭발돈세(削髮돈世)하면 국법도 미치지 않는다” 하였다. 이 세상에 그러한 신화적인 말은 통하지 않지마는 전쟁이란 와중에서 불쌍한 동포를 하나라도 구해야 할 의무감에서 법의 책임은 서장이 질터이니 정책상 그 여인이 대표해서 속죄하는 의미에서 중이 되게 하여 죽은 동리 청년들과 함께 이장 부자의 영도 평생을 두고 공양할 수 없느냐는 취지였다. 이 취지를 여인들에게 전하자 울음바다가 된 좌중에서 서로 나서서 “내가 중이 되겠다”고 다투어 말했다는 것이다. 한 사람만 골라서 삭발할 수 없게 되자 성미가 급한 윤주임은 “그럼 머리를 깎고 싶은 사람들은 마음대로 하오” 하고 그대로 서장실로 안내해 왔고 급기야 아무리 말려도 서로가 “내 머리를, 내 머리를” 하는 바람에 전원이 삭발비구니가 된 것이다. 그 여인들이 절을 만들겠다고 하여 서장은 하얀 관세음보살의 영감에 의해서 또 순박한 백의민족의 백지로 돌아가라는 뜻에서 “白”과 그럼으로써 이제 슬픈 기억을 씻고 맑고 밝은 민족의 광명을 찾자는 “明”을 따서 “白明庵”이라 이름 지어 주었다. 이들 비구니의 성심에 감동된 그 동리 제일가는 부자가 그도 자식을 잃었으므로 자기의 제실(齊室)을 백명암으로 제공하고 자진해서 논 5두락을 암자 유지비용으로 했다. 마침 강원도에서 피난 온 한 승려가 그 지도를 맡았다. 법을 왜곡하면서까지 그 여인들을 용서한 그는 최석채 경찰서장으로써 월권인지도 모르나 인도상 그 길이 옳았다는 그의 신념은 지금도 변치 않을 것며 후회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