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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5 심재호
‘아~, 출발시간 20분 전이다!’
헐레벌떡 사무실에서 달려 나와 SRT 수서역 입구를 통과했다. 8분 후면 기차는 떠난다. 에구~, 그 와중에 화장실도 다녀 와야 했다. 오늘은 전북 익산의 한 거래처를 방문하기 위해 고속전철을 이용하는 날이다.
2017년 8월말, 한 할아버지 운전자의 사거리 불법 유턴으로 인한 교통사고 휴유증으로 11개월째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 몸을 관리 하는 방법을 한의사와 치료 중의 대화를 통해 몇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사고 후의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지금의 허리 상태로 장거리 운전을 할 수도 없거니와 혼자 가는 당일 출장이라 고속철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출발 5분전에 기차에 올랐다. 내려 가는 동안 읽을 요량으로 가져온 책을 꺼내고, 선반 위에 가방을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니나리찌 핸드백을 든 할머니 한 분이 바로 내 옆에 멈춰 서더니, 좌석 번호를 확인하느라 썬글라스 벗는 순간 나와 눈길이 마주쳤다.
“아! 여기 앉으시나요?”
무릎을 살짝 드러낸 닥스체크무늬 스커트를 입고, 단을 매만지며 “네에!”라고 답한다.
나는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통로를 내드렸다. 그런데 창 쪽 좌석으로 중간 크기의 여행용 캐리어를 질질 끌고 들어간다. 나는 ‘입구 쪽에 짐칸이 있다’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발 앞에 가방을 두시면 힘드실 텐데요……”
“뭐! 한 시간만 가면 돼요!”라며,
두 발을 바짝 당기고선 여행용 가방을 본인의 발 앞에 놓았다. 옆에서 불편한 자세로 앉아있는 할머니를 보는 것 만으로도 내 마음이 불편해 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에어컨 바람이 차가운지 윗옷 자켓으로 무릎을 덮고 계속 이리저리 데적 거리고 있다. 비좁게 앉아 있는 것 보다 자켓을 계속 만지작대고 있으니, 더 이상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었다.
“저~, 혹시 추우세요?”
옆으로 고개를 살짝 놀리며,
“아니요.”라며 밝은 표정을 짓는다.
나는 할머니 발 앞의 가방을 두 사람 사이의 팔걸이 앞으로 끌어 당기면서,
“가방을 여기에 이렇게 두세요.”
“아니 괜찮은데……”라며 빙그레 웃는다.
“어디까지 가세요?”
“익산까지 가요~.”
“그 쪽은 어디까지 가요?”
“저도 익산까지 갑니다.”
“익산 살아요?”
“아닙니다. 구리시에 사는데, 직장이 수서역 근처에 있어, 오늘은 기차로 익산에 있는 거래처를 방문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해요?”
“화학 제품에 들어가는 원료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연세 지긋한 할머니가 트렁크까지 챙겼기에,
“익산에 오래 머무르실 거예요?”
“글세요~, 내려가 봐야 아는데 한 두 달 있을 것 같아요.”
말투로 봐선 그 지역 할머니가 아닌 듯하여,
“익산은 무슨 일로 가세요?”
“화곡동에 살던 딸이 일 년 전에 내려가서 살고 있어요. 딸래 집에 가는 길이예요.”
“그럼 손자손녀를 봐주러 가시는 거예요?”라며 얼른 물어 보았다.
“아니 예요, 손녀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한겨울 아침 시골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처럼 이야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서울에서 갑자기 지방으로 내려가기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럼, 사위가 공무원이예요?”
“아니예요. PC방을 운영하고 있어요. 딸과 만난 지 한 일년 되었어요.”
“아~유, 그럼 아직 신혼이네요! 하~하~, 그럼 딸래 집에 오래 계시면 사위 눈치 뵈겠어요?”
할머니께 농담처럼 한 말인데…… 할머니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에이 그럴 일 없어요. 우리 딸이 인터넷에서 물건을 파는데, 한 달에 이천 만원씩 벌어요.”
“이야~, 대단하네요. 그러니 손녀를 미국으로 유학 보낼 수 있죠.”
“우리 딸이 오래 전에 이혼을 했는데, 이제야 한 남자를 만났어요. 딸은 오십, 그 남자는 40인데…… 혼인은 하지 않고 단둘이 함께 살고 있어요.”
“아…… 네~, 행복하게 잘 살면 좋겠습니다.”
“오십이 넘은 딸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고, 저들 행복하게 잘살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러다 안되면 어쩔 수 없구요.” 그러면서 할머니는 짧은 숨을 밖으로 내 뱉었다.
굴뚝에서 피어 오르는 이야기 연기가 어느덧 넓게 골짜기까지 퍼져 버린 것 같아 화제를 할머니께로 돌려야 했다.
“그럼 할머니께서는 서울에서 혼자 사시는 거예요?”
“아니예요, 송파구의 한 아파트, 아들 집에서 살고 있어요.”
“아드님이 참 훌륭하시네요, 어머니 모시고 함께 살기가 만만치 않은 세상인데……”
아들 집에서 함께 살기가 답답했던지, 함께 살기 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대문 수입상가에서 옷을 오랫동안 판매를 했어요. 옷은 직접 홍콩에서 사와 팔았는데, 나중엔 주로 모피 류를 판매했어요. 그런데 모두 정리하고 자기집으로 들어오라는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가게와 혼자 살던 집을 정리하고 아들 집으로 들어갔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활동을 하시다가 집에 계시면 답답하실 텐데요?”
“맞아요. 집에 있으니 답답해요. 그래서 딸이 자꾸만 나더러 익산에 다녀 가라고 해서 이렇게 내려가는 길이예요.”
“그럼 취미 활동이나 운동을 하시는 것 있으세요?”
“아뇨, 없어요! 그런데 아픈데 없이 참 건강해요. 어렸을 때 수영을 했거든요.”
얼핏 봐도 70대 중반 이상으로 보이는데, 수영을 했다 기에 “친정 부모님께서 잘 사셨나 보네요?”
“어버지께서 영도에서 양복점을 했어요. 고만고만 먹고 살만은 했어요. 학교도 영도여고를 다녔어요.” 고만고만이라는 말에 나도 몰래
“에이~ 할머닌! 그 시절에 여고를 다니고, 부모님이 양복점을 하셨으면…… 아~주 부자였죠!”
그 시절 여고를 졸업했다는 할머니의 말에 울 엄마 생각이나,
“할머니처럼 저희 엄마도 공부를 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저희 외할아버진 아주 부자였대요. 사촌 조카의 미국 유학 비용도 대주고, 어휴~! 그런데 우리 엄만 국민학교 입학 시켰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학교 가는 길에 학교 진학을 못한 친구들이 산에서 놀고 있으면, 책가방 내팽개치고 하루 종일 어울려 놀다가 학교 끝나는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 왔대요. 그래서 학교를 졸업하지도 못했어요. 그리고 시집오기 전날까지 본인 씻는 일 외에는 손에 물을 묻혀 본적이 없었대요. 그 때부터 9남매 형제에 조카들이 바글대는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대요. 막상 시집을 와 보니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고생을 많이 했대요. 그래서 친정부모님이 딸을 잘 못 키웠다며, 부모 원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엄마가 낳은 딸은 어릴 때부터 온갖 허드렛일을 시키면서 모질게 키웠다고 합니다. 제 누이는 “내는 울 옴마가 계몬 줄 알았다 아이가!”라며 가끔 넋두리를 합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할머니는
“저는 쉰 살 때, 남편과 사별했어요.”
“할머니 참, 고생 많으셨겠네요!”라고 말하자,
한숨 섞인 말로 “에이 고생은요, 그래도 아들녀석은 연세대 치과, 딸은 이대를 졸업했어요.”
“야~, 할머니 대단하시네요.”
“그런데 그 쪽은 어디까지 가세요?”
“…… 아, 네! 익산에 있는, 회사 거래처 방문 가는 길입니다.”
할머니는 아들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들이 양평역 앞 큰 건물 3층에서 치과를 하고 있어요. 집에서 양평까지 출근하는데 한 시간이 걸려요. 퇴근 시간엔 좀 더 걸릴 수도 있고, 그래서 나더러 양평으로 오면 집을 마련해 주겠대요. 아들이 술을 마시거나, 피곤하면 그 곳에서 잠도 자며, 가끔 함께 생활 하겠다면서…… 식사 수발 그만둔 지 한참 지났는데, 이 나이에 다시 그걸 시작하겠어요? 그래서 싫다고 했어요.”
“잘 하셨어요. 건강하시니 아들 내외와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시면서 수영이나, 아쿠아로빅 같은 취미 활동 하시면서 산책도 많이 하시고 편히 지내세요.”
“하~하~ 그래야 할까 봐요. 아직 아픈데도 없으니.”
할머니의 건강한 모습에 시골에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엄마 생각이 났다.
“할머니께선 건강하시니 정말 좋으시겠어요. 저희 엄만 2000년에 심장 판막수술, 그리고 2010년엔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작년 설날 저녁에 뇌졸중이 왔는데,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급히 처치를 받아 다행스럽게 십일만에 마비 증세 없이 퇴원했어요. 후유증으로 오른쪽 팔다리가 힘이 약간 덜하긴 한데, 지금은 매일 게이트볼을 하며 지내세요.”
“고향이 어디요?”
“경남 하동요. 그 곳에서 두 분이 살고 계세요.”
“아버지 연세가……?”
“아버지는 여든두 살, 엄만 세 살 아래 일흔 아홉입니다.”
할머니는 활짝 웃으면서, “나도 여든 두 살인데~.”
“할머니 소띠세요?”
“그래요! 아버지와 동갑이네!”
할머니는 마치 친구를 만난 듯이 좋아라 하신다.
수서에서 익산까지는 1시간 25분 거리다. 부산스레 얘기하다 보니 기차는 어느덧 공주역에 도착했다. 바로 다음 역이 목적지 익산이다. 오늘처럼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얘기를 나누면서 대개교회에는 나가는지 물어 본다.
“할머니 교회엔 나가세요?”
“난 집 근처에 있는 교회로 가고 아들 가족은 소망교회로 나가요. 아들네와 같은 교회를 나가기엔 멀어서…… 나간 지 한 5년되었어요.”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가요?”
“…… 네, 익산에 있는 한 회사를 방문하는 길입니다.”
‘아이고, 할머니 기억력이 좀……’
익산역이 거의 다가왔는지 기차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안내 방송이 나왔다.
“이 번 정차할 역은 익산~ 익산역입니다. 익산에서 내리실 승객께서는……”
할머니는 벌써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기고 있었다. 나도 선반에 올려둔 가방을 내려 앞좌석 등받이에 붙어 있는 테이블 위에 꺼내 두었던 책과 핸드폰을 정리하는데, 또 할머니의 여행용 가방이 또 눈에 밟힌다.
“할머니, 제가 교통사고로 허리를 다쳐 치료 중이라 저기 문 앞까지만 밀어다 드릴께요.” 문을 지나 승강계단 앞까지 밀고 나갔다. 그리고 할머니께 건네드리려는 순간!
“조~옴, 내려만 주면 안될까요?”
“네, 알겠습니다.”
내 마음과는 달리 허리가 좀 부담 될 것 같긴 했지만, 계단 바로 앞까지 끌고가 허리를 고추세우고 후다닥 플랫폼에 가방을 내려 드렸다. 그리고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는 순간, 바로 앞에서 얼굴 살이 약간 두꺼워 보이는 아주머니가 고맙다며 내게 인사를 건넨다. 1년전에 익산에 내려와 산다는 딸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참 훌륭한 어머니를 두셨네요. 할머니 안녕히 가세요!”
역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거래처를 방문 해야 하므로 시간이 넉넉지 않아 간단히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두 사람을 뒤로하고 먼저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할머니가 혹시 치매 초기증상은 아닌지 진단을 받아 보는 것이 좋겠다고 딸에게 언질을 줘야 하나?’ 잠깐 고민을 했지만, 아들이 의사이므로 할머니의 상태를 잘 알고 있거나, 알 수 있으라는 생각에 또 하나의 기쁨을 만들어갈 모녀를 뒤로한 채 역을 빠져 나왔다.
첫댓글 우리 엄만 애인과 잘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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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우리 아부지 말이어라^^
심재호 집사님! 안녕하세요.
회사 업무로 익산 출장중에 할머니 친구 한 분을 사귀셨어요?
조근조근 대화 잘 이끄시는 집사님에
할머니는 심심하지 않게 정겨운 이야기 시간이었네요.
그 지난 주 6층에 올라갔더니
안 계신던데,
들렀다가, 2시 되기 전에 갔어요..
글쓰기 휴강이어서^^
집사님 대화가 정말 재미있어요. 그런데 그 할머니 침해면 어쩌죠?
하긴 70의 중반인 나도 때때로 노인짓이 넘칠때가 많은데,
이런 출장에 이런 동행이 자주이면 재미있을까요 피곤할까요?
아무튼 수고하셨어요.재미있게 잘 읽었읍니다. 감사합니다
가끔은 괜찮겠죠?
전도도 하면서~
전도하시려고 쉬지도 못하셨네요.
잠깐의 시간이라도 쉬고 싶으셨을터인데 주거니 받거니 좋은일 하셨습니다.
대신, 올라 올 때엔
보고 싶은 책 봤어요~’
다행히 교회 출석하시는 할머니라,
편안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