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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입춘 무렵
김 광 욱
1
세태 풍속이 변했다. 엠피스리의 등장으로 음반업계가 사양길로 접어들고, 일반 대중과 음악 애호가들이 즐겨 찾던 레코드 점포, 매장들이 줄줄이 폐업했다.
거리에서 레코드점의 간판을 볼 수 없게 되고 가수들의 얼굴이 그려진 멋진 신보 재킷을 쇼윈도에서 볼 수 없으며 장윤정의 독집 테이프를 구하기도 어렵다. 독집 음반(테이프도 포함된다)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독집 신보는 팔리지 않아서 생산이 중단된 지 오래이고, 새 유행가를 들으려면 노점상 수레판이나 시내 몇 군데 있는 음반 가게에서 파는 불법 복제 시디나 여러 가수의 노래가 혼합된 종합앨범이란 걸 신곡으로 구해 들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테이프도 머지않게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지금 팔리는 정품 시디나 테이프도 오래전에 생산된 재고품들이고 그 희소가치 때문에 값이 만만하지 않다.
음반 시장의 퇴조는 오디오 생산업체의 폐업, 도산과 직결되고 한때 황금기였던 최고의 오디오 시대를 몰락하게 만들었다. 그 주범은 반도체 산업의 대명사인 컴퓨터이고 그 컴퓨터의 소산물인 엠피스리와 스마트폰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필수품처럼 들고 다니는 엠피스리와 스마트폰으로는 어떤 음악이든지 들을 수 있지만, 그 음악에는 소리만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소리의 실체가 없다. 빛과 전기의 무형적 느낌일 뿐이다.
레코드판에 대해 향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레코드라고 하는 눈에 보이는 물체가 있기 때문에 레코드판이 턴테이블에서 돌아갈 때 만들어내는 신비한 음악을 듣고 그 소유감에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을 할 때 상대방을 쓰다듬고 어루만져야 소유의 쾌감을 느끼듯, 인간의 속성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느낌을 통해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확인하는 게 아닌가 한다.
오디오업계의 터줏대감이라고 자처했던 구영필 씨도 레코드에 미쳐 전축을 만지작거리다가 전축 시장이란 걸 알게 되었고, 오디오 기기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해서도 꽤 많은 지식을 쌓게 되었다.
생김새는 투박스럽고 잔정도 없는 사람이지만 어디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면 그 음악이 유행가가 됐건 가곡이 됐건 판소리가 됐건 몸을 흔들고 따라 흥얼거릴 만큼 낭만적인 사나이였다. 돈도 벌 만큼 벌었고 세계 안 가 본 나라 없이 두루 여행도 다녔지만 그에겐 꼭 있어야 할 것, 꼭 필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사랑도 못해 본 사람이 있다면 곧이듣지 않겠지만 구 사장은 나이 칠십이 가깝도록 결혼을 해 보지 않았다. 슬하에 자녀가 없을 건 당연하다.
그는 마흔 살 전후 해서 한 여자와 몇 달 간 동거생활 비슷한 걸 한 적이 있지만 여자의 변심으로 파경을 맞고 다시는 그 어떤 여자와도 사귀지 않았다. 여자를 보면 옛날의 그 여자가 생각나서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했다.
나이먹어서 슬하에 자녀가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심신이 고단하고 몸이 아플 때, 이럴 때 옆에 있을 자식 하나라도 만들어 놓을 걸 그랬다고 인생이 후회스러웠다. 마음만 먹으면 자식을 만들 기회는 있었다.
그가 돈이 많다는 걸 알고 주위에서 꼬리치는 여자들이 있었다. 레코드 생산이 중단되고 시디(콤팩트디스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올 때, 구 사장은 시디음반회사를 차려 대기업과 경쟁하려다가 평생 모은 돈을 다 날렸다. 그 사업은 계산 착오였다. 시디의 유행 수명은 테이프의 수명보다 더 짧았다. 유에스비(이동식디스크)란 것이 나와서 모든 음악과 기록물을 자그만 칩 하나에 저장하고 시디는 점점 그 효용 가치가 떨어졌다.
시디 생산을 중단하고 유에스비로 생산업종을 바꾸기엔 시기가 너무 늦어 있었다. 사면팔방에 유에스비 생산업체들이 즐비해서 유에스비 단가가 뚝 떨어졌다. 삼만원하던 1기가베이스 유에스비 한 개의 값이 만원도 하지 않았다.
새로운 기계를 사들여 생산라인을 바꿀 여력도 없었다. 그때 그는 적자 운영에 허덕이고 있었다. 공장을 팔아서 빚을 갚고 사원들 밀린 월급 주고 시골 부동산 팔아서 겨우겨우 은행 부채 갚고 빈털터리로 시디와 아듀했다.
게다가 구 사장에겐 속썩히는 조카아이가 하나 있었다. 조실부모하고 맡길 데가 없어 구 사장이 오디오 사장할 때부터 키운 칠촌 조카였다. 구 사장은 그 아이를 기저귀 찰 때부터 키웠다. 사실은 그 아이 때문에 옛날의 여자와 헤어졌던 것이다.
구 사장에겐 없어도 좋을, 차라리 맡지 말았어야 할 말썽꾸러기 고통껀지 자식이었다. 유일한 살붙이임엔 틀림없지만, 자식이라면 자식이고 아니라면 아닌, 타지부지 남보다도 못한 불효자가 한 명 구 사장의 주민등록표상에 가족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아이 때문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 걸핏하면 경찰서에 불려가고, 교도소에 면회를 가야 하는 서글픈 인생을 살아왔다. 그 아이만 아니라면 사업에 망하건 빈털터리 걸인이 되건 마음은 편했을 게다.
조카아이의 탈선, 비행은 구 영필 씨가 원대한 사업의 꿈을 허공으로 날린 것보다 더 가슴 아프고 인생 무일푼이 된 것보다 더 괴로웠다. 지금도 그런 심경이다.
한밤중에 찢어질 듯한 폭음을 내고 거리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폭주족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구영필 씨의 하나 있는 조카가 폭주족 우두머리였다.
2
한 손님이 고장난 오디오를 수리해 달라고 맡겨 놓고 나간 뒤, 귀익은 여자의 기침소리에 돌아보니 레코드가게 조 사장이 와 있었다. 이 전자상가 건물 내의 같은 층에서 수십 년 전부터 장사한다는 조미라 씨는, 자기보다 칠팔 세 더 먹은 구 사장을 보면 허리 굽혀 인사하는 법이 없이 눈인사만 하고 쓱쓱 지나가는 거만한 여자였다.
눈인사란 인삿말 없이 형식적으로 고개만 약간 까딱거린다는 뜻이다. 구 사장도 물론 그 여자에게 허릴 굽혀 인사하지 않았다. 구 사장이 중고품 오디오가게를 차린 뒤로 한 일 년 간 그렇게 지내 왔다.
사업의 경쟁자가 아니면서 두 상인 모두 음악 관련 사업이란 공통점이 있었다. 불경기의 타개책으로 불법으로 만든 복제음반을 판다는 점도 같았다.
“장사 재미가 짭짤하신가 봐. 사람이 와도 모르고 컴퓨터만 두들기시는 걸 보니, 그렇게 녹음 주문이 많은가요?”
구 사장은 묵묵히 컴퓨터 모니터만 주시하고 있었다. 음악 사이트에서 손님이 원하는 노래를 찾아내어 공시디에 20여 곡을 채워넣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2만원짜리 작업이었다.
데이터로 파일을 만들어 칩의 형태로 유에스비에 저장하면 수천 곡도 복제할 수 있지만, 공시디에 디브이디 음반으로 복제할 때는 20여 곡만 녹음해서 파는데, 그것은 음반의 효용가치를 살리고 시디음반의 효과를 내기 위해서이다. 손님들이 공시디 녹음을 원하는 이유는 디브이디 플레이어를 통해 정품과 똑같은 음악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미라 씨는 구 사장의 번들거리는 대머리 아래 너풀거리는 긴 뒷머리와 한쪽으로 기운 넓적한 등판을 바라보면서 “사람이 말하는데 왜 대꾸를 안하실까?”하고 혼잣말같이 쫑알거렸다.
구 사장의 가게에 자주 찾아온 것도 아니고 이 가게 개업하고서 한두 번 찾아온 숙녀에게 어느 개가 먹다 둔 찬밥처럼 대접하니 섭섭하고 멋쩍었다. 텔레비전 화면에선 반 알몸의 여자 가수들이 나와서 흔들고 비틀고 섹슈얼한 스트립쇼를 연출하고 있었다. 노래는 양념으로 흥얼거리고 섹슈얼한 율동이 본업이었다.
“음반 복제는 불법이란 거 아시죠?”
여자가 시비를 걸 듯 퉁기는 어조로 등뒤에서 말했다.
“자기도 불법 하고 있으면서 그런다.”
“우리 가게는 레코드점이에요. 음반 장사와 오디오 장사가 같은가요? 어디서 써금써금한 중고품들만 갖다 놓고 팔면서 월권도 유분수지……”
“자기도 중고 음반 팔면서……”
“중고는 왜 중고예요? 처음엔 새거였지만 세월이 흐르니 재고가 된 거지. 모두 새거였다고요. 수천 장의 레코드도 테이프도 시디음반도 엄연히 공장에서 막 나온 신곡, 신보를 구입해서, 서울 장안에서 제일 큰 음반가게로 소문났었다우. 음반회사들이 절반값을 주고 회수해 갈 때도 난 팔지 않았어요. 내 프라이드니까요. 비록 장사지만 어떻게 수십 년 간 견지해온 내 자존심을 팔아요. 그래서 지켰죠. 내 정조를 지키듯 레코드 장사를 계속해 왔어요. 그러다 보니 재고는 쌓이고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이 모양 이 꼴, 하류 인생으로 전락했어요.”
“내가 보기에 조 사장은 하류 인생 아니오. 부자지.”
“사람 놀리시는 거예요? 아니면 비꼬는 거예요? 그 진의가 뭐죠?”
“나도 조 사장처럼 왕년엔 한가닥 했수다. 그러나 지나간 과거가 무슨 소용이오? 한때 잘 나갔던 레코드점 사장의 프라이드는 내 인정하리다. 가게에 산더미처럼 그득 쌓인 음반의 부자란 것도 인정해요. 그런다고 남 어렵게 일어서기 하는 걸 배아파해서야 숙녀라고 할 수 있겠냐 이 말이지. 그래서 조금 비꼬아 말했으니 너무 서운히 생각 마시오.”
“이 양반이 외모보단 말씀도 잘하시네. 난 도통 말이 안 통하는 꽁생원인 줄 알았더니.”
이때 여자의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받는 조 사장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너 또 말썽 피웠구나. 갑자기 그런 거금이 어디 있어? 그러니까 내가 방구석에 가만히 처박혀 있으랬지. 그렇게 고생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려?”
“정신 차리려고 했는데 이년들이 내게 욕을 하잖아? 저쪽은 네 명이고 난 혼자야. 한 년의 머리챌 잡고 밀어뜨린단 것이 항아리 위로 넘어져 깨지고 말았어. 오백만원짜리 도자기래. 그러니 어쩌우? 난 돈이 없으니까 엄마가 좀 변상해 줘요.”
핸드폰에서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돈 없다. 남의 가게 기물을 부쉈으니 변상 못하면 콩밥을 먹어야지. 전화 끊어라.”
조 사장은 속상한 표정으로 힘없이 오디오 가게에서 나갔다. 얼마 전에 교도소에서 출소한 딸이 또 사고를 냈다. 술집에서 여자들 사이에 시비가 붙어 또 한탕 한 모양이다. 딸은 성미가 괴팍해서 누가 쳐다보면 시비를 걸었다. 괴상하고 특이한 차림새를 하고 다니니 시비거리는 늘 발생했다. 오늘도 그런 사고였다.
밖에는 비가 오는지 손님들 중에 우산을 든 사람이 있었다. 2월 늦겨울 비가 내리는가 보다. 비가 오면 마음이 울적해지고 옛날 생각이 났다. 구영필 씨의 2월은 그의 전재산을 바쳐 큰꿈을 안고 차렸던 시디음반 제작회사가 도산한 달.
이 나이에, 이런 상황에서 다시 옛날처럼 화려하지는 않겠지만 뭔가 세상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긍심만은 붙들고 살아야겠다. 그것마저 놓치면 갈 곳은 공동묘지밖에 없다. 자신의 주검을 공동묘지에 묻어 줄 사람을 생각해 본다. 말썽꾸러기 조카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얼굴이 떠오르면 얼른 지워 버렸다. 생각하면 또 괴로우니까.
보면 미웁고 안 보면 걱정되는 게 혈육의 심정일까? 아비도 아니면서 그놈을 기저귀쩍부터 애간장 다 녹고 키워서 그런지 걱정을 하게 된다. 그놈 얼굴을 보지 못한 지가 서너 달 된 것 같다. 비가 오니까 그놈 얼굴이 살며시 보고 싶어진다.
조 사장이 돌아가고 가게에 손님이 뜸할 때 한 젊은이가 군인처럼 씩씩하게 오디오가게로 향해 걸어왔다. 귀창을 찢는 오토바이 폭음소리가 들렸을 텐데 전자상가의 소음에 가려 못 들었을까? 그 청년은 구 사장을 속썩히는 말썽꾸러기 조카아이, 윤호였다.
3
젖은 윤호의 옷에서는 짙은 향수냄새가 풍겼다. 무대의 배우처럼 알록달록한 의상을 걸치고 건장한 체격에 영화배우 장동건을 닮은 말쑥한 모습이 여느 부잣집 도령님 같았다. 조카가 원하면 뭐든 다해 주고 싶었지만 윤호의 뜻은, 그 꿈은 자꾸만 조 사장의 곁을 떠나려고만 했다.
돈이 필요해서 또 찾아왔겠지. 돈이 궁하면 찾아왔다가 받을 것만 받아 가지고 바람처럼 휭 사라지는 조카였다. 붙잡을 수 없는 다른 나라의 인간같이, 윤호는 멀고 먼 거리에서 구 사장을 불안하게 하고 슬프게 만들었다. 마음으로는 자식 그 이상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싶은데.
한번도 윤호에게 사랑다운 사랑을 주지 못했다. 사랑을 주려고 해도 싫다고 등을 돌리고 도망치려고만 했다. 구 사장과 헤어질 연구만 하는 아이였다. 헤어졌다 싶으면 또 돌아오고. 돌아와서는 속을 울거놓고 휙 떠나가고. 오늘도 아마 그럴 것이다.
“왔냐?”
삼촌(칠촌을 그렇게 부른다)이 인사해도 윤호는 멀뚱멀뚱 천장만 쳐다보고 시선을 어디다 맞추지 못하다가 구 사장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꿈에서 깬 듯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밥은 먹었어?”
구 사장이 모니터의 수많은 노래 목록에서 화살표 커서를 이리저리 움직거리면서 아들, 아니 조카에게 물었다. 커서의 움직임이 불안했다.
“밥 안 먹은 사람 있나요? 지금이 몇 신데.”
“밥 안 먹었으면 네가 좋아하는 짬뽕 시킬까 하고 그랬다. 나도 점심을 안 먹었거든. 점심때 손님들이 몰려와서……장사가 잘 된단 뜻이 아니고 돈도 안 되는 쓰잘데기없는 것들을 부탁하는 친구들이 꼭 밥때 맞춰 오거든. 수고한다고 밥 한 끼 안 사 주면서……”
조카는 구 사장의 푸념에 흥미없는 듯, 잘 닦아서 반들거리는 갈색 오디오 세트를 장갑 낀 손으로 어루만졌다. 옛날에 꼬마였을 땐 내가 켜 둔 음악을 따라 몸을 흔들고 클래식도 귀기울여 들었었지. 그 음악이 오디오에서 만들어진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오디오 기기에 친근감을 갖는 것이다.
“나 내일 완도에 가요.”
“완도엔 왜?”
“내 돈 떼어먹은 놈한테 돈 받으려고요.”
“아직도 그 돈을 못 받았냐? 동학이는 네 단짝친구고 착실한 놈인데. 그런데 왜 완도에 갔대?”
“완도로 줄행랑쳐서 그곳에서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지 뭐예요? 천금 같은 내 돈을 밑천 삼아서 고기잡이배를 한 척 사 가지고 부자가 됐대요.”
“설마 그렇기야. 뜬소문일 거다. 어려운 친구에게 크게 선심썼다 치고 그 돈 포기해라. 포기하는 게 좋아.”
“삼 년 간 목숨 걸고 한밤중에 퀵서비스 해서 모은 돈이에요. 그 돈으로 장사를 할 계획까지 세웠단 말예요. 삼촌(구 사장) 말씀대로 노점상이라도 해서 자립할 생각이었는데, 그놈한테 날렸어요.”
“날린 게 아니고 보관한 거다. 동학이가 잘 되면 널 도와 줄지 누가 알아?”
“배신자는 은혜를 몰라요. 절대로.”
조카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단 걸 잘 알면서도 구 사장은 완도에 가지 마라고 말렸다. 가서 꼭 무슨 사고를 낼 것만 같아 불안했다. 이렇게 불안하고 답답한 적이 한두 번이었던가.
윤호는 한동안 소식을 뚝 끊었다가 마음 내키면 불쑥 찾아와서 이삼만원의 조그만 용돈을 요구했다. 그리고 신변에 변화가 감지되면 구 사장을 찾아왔다. 자기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손을 써 달라고 미리 예고하는 듯한 태도였다.
아직 큰 사고는 없었고 남을 헤치거나 남에게 손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경찰의 추적을 받는 우범자의 리스트에 오르지는 않은 것 같았다. 구 사장이 마음 조이듯 그렇게 못된 놈은 아니었다.
윤호가 심야에 패거리들과 오토바이로 거리를 질주하여 소음과 교통 방해죄로 교도소에 간 것은 딱 두 번이었다. 재판을 받고 형사처벌 받은 것은 경찰서 출입 회수보다 많은 회수가 아니다. 그들은 몇 개월 복역하고 금방 풀려났다. 조 사장이 손을 쓰지도 않았다. 두 사건 모두 윤호가 교도소에 간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이번 완도행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윤호가 꼭 무슨 사단을 낼 것만 같이 불안하다. 그럴 땐 희망이 절망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렇다고 가지 마라고 붙잡을 권리도 없었다. 윤호의 고집이 그 누구의 충고도 접수하지 않을 뿐더러 삼촌도 그 아이의 행동을 막을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구 사장이 키보드 위에 엎드려 소리없이 눈물을 짜고 있을 때 구둣발소리가 귓결에서 멀어지고 실내엔 정적이 흘렀다. 내가 너에게 용돈 주는 걸 잊었구나 하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윤호가 가게에서 떠나고 없었다. 정말 바람 같은 아이였다.
눈앞에 신문지에 싼 물체가 있어 펼쳐보니 새파란 만원권 신권이 한 다발 들어 있지 않은가! 아무렇게나 갈겨 쓴 쪽지도 들어 있었다.
<제가 심부름센터에서 번 돈이니 맛있는 것 사 잡수세요.>라고.
4
오백만원짜라 항아리를 깨뜨린 죄로 혜선은 술집 안에 감금되어 있었다. 몸을 결박하고 감금한 게 아니고 밤 열 두 시 폐점 시간까지 항아리 값을 변상하라고 주인이 혜선을 놓아 주지 않았다. 혜선은 술에 만취해 있었다.
배신한 애인을 칼로 찌르고 살인미수죄로 삼 년 간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출소한 지 한 달 만에 또 사고를 냈다. 과거의 잘못을 씻고 인간답게 살고 싶어도 그 남자에 대한 미련이 혜선을 놓아주지 않았다. 술로 마음을 달랬다. 술은 술을 부르고 술에서 깨면 허무한 공허가 혜선을 나락으로 밀어냈다.
혜선이 혼자 독한 위스키를 두 병째 마시고 있을 때 네 여자가 맞은편 좌석에서 혜선의 드러난 팬티를 보고 흉을 보았다. 혜선은 가려워서 그곳을 자꾸 긁었다. 소변이 마려워서 화장실을 찾는데 네 여자 중 두 여자가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혜선을 보고 낄낄 웃어댔다.
여자들이 옆으로 지나갈 때 한 여자가 일부러 혜선의 어깨를 부딪쳤다. 혜선이 욕을 하자 여자가 혜선의 머리채를 잡고 뺨을 찰싹 갈겼다. 혜선도 지지 않고 그 여자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세 여자가 말렸지만 그녀들은 친구의 편이었다.
싸움은 사 대 일로 커졌고 술집 안은 격투기장으로 변했다. 술에 취했지만 격투기를 배운 혜선의 실력은 네 여자를 능가했다. 혜선은 네 여자를 녹다운시켰지만 깨뜨린 항아리 값을 물어줘야 했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대신 혜선이 항아리 값을 변상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이었다.
혜선은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고 주인은 벽시계를 쳐다보고 있었다. 실내엔 혜선과 늙은 손님 한 분이 남아 있었는데 그 남자도 취해 있었다. 조미라 씨한테선 아무 연락도 없었다. 주인은 열 두 시가 지나도 혜선의 가족이 오지 않으면 그녀를 경찰에 넘길 생각이었다. 열 두 시, 십 분 전이었다.
남자 손님이 코트와 머플러를 집어들고 술값을 계산하려고 일어섰다.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는 혜선을 보더니 파란색 머플러를 목에 걸치며 빙그레 웃었다. 코트를 단정히 입고 카운터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항아리 값이 오백만원이라고 했소?”
“예, 작년에 이태리에서 들여온 겁니다.”
“절반값만 물어주면 되겠군. 고의성이 없었으니까. 장사하면 그 정도의 손해는 감수해야지 않겠소?”
늙은 남자는 지갑에서 오십만원짜리 수표 다섯 장을 꺼내어 주인 앞에 내밀었다. 남자 주인은 안 된다고 하고 여자 주인은 그거라도 받으라고 남편을 힐책했다. 결국 계산, 거래 다 끝났다. 혜선의 술값도 남자가 냈다.
혜선은 잠에서 깨어 있었다. 너무도 고맙고 감격스러워서 아버지 같은 남자를 끌어안고 키스라도 해 주고 싶었다. 아니 그리 비쌀 것도 없는 육체라도 바치려고 남자의 팔을 붙잡고 해해거리며 따라가려고 했다.
남자는 혜선의 육체에는 관심이 없는 듯 이 손님을 택시에 태워 보내 드리라고 택시비까지 주인에게 주었다. 혜선은 그 택시비를 가로채어 그 남자의 호주머니에 다시 넣어 주고는 남자와 함께 술집에서 나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늙은 남자가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고 혜선을 승차시키려 하자 혜선은 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택시는 가 버리고 비 오는 거리에 늙은 남자와 혜선만 남았다.
빗줄기가 세어졌다. 남자는 자기 코트를 벗어 혜선의 머리에 둘러 주었다. 그리고 멋쩍게 웃었다. 모텔의 휘황한 네온사인들이 사면팔방에서 남녀를 유혹하고 있었다. 모텔 유흥가였다.
사랑한 그 남자와 헤어졌던 곳. 상대방이 다르면 어떤가? 남자는 다 똑같은 것을. 늙고 젊음이 사랑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혜선은 늙은 취객과 한몸 되어 바로 눈앞의 모텔로 비틀비틀 걸어가면서 빗물처럼 흐느껴울고 있었다. 늙은 남자가 속도 모르고 울지 마라고 위로했다.
어둠을 찢는 폭음과 함께 십여 대의 오토바이가 어둠속에서 나타나 두 남녀를 에워쌌다. 폭주족의 우두머리는 윤호였다. 폭주족들은 오토바이를 길가에 멈춰 놓고 두 연인 아닌 연인에게 포위망을 좁혀 왔다. 주위에 경찰도 시민도 없고 아무도 폭주족의 행동을 막을 자가 없었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지 따져 볼 겨를도 없이 폭주족들의 긴 그림자만 불빛 속에 너울거리며 두 사람을 향해 유령처럼 접근해 오고 있었다. 늙은 남자의 입에서 짙은 술냄새와 함께 끄응 하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택시 한 대가 달려왔다. 늙은 남자는 여자를 남겨두고 택시를 향해 달려갔다. 폭주족들은 그 남자를 붙잡지 않았다. 늙은 남자를 태운 택시는 네온사인이 명멸하는 빗줄기 속으로 미련없이 사라졌다.
혜선의 머리 위엔 그 남자의 검은 코트가 걸쳐져 있었다. 윤호는 시니컬하게 씩 웃고 그 코트를 홱 젖히고는 혜선의 턱을 잡고 불빛으로 향해 쳐들었다.
“인물값을 해야지, 여자가. 그렇게 남자에 굶주렸어? 진짜 남자 맛을 보여 줄까?”
“귀쌈에 피도 안 마른 게 누나를 몰라보고!”
혜선은 남자의 뺨을 힘껏 갈겼다. 사내들이 놀랄 만큼 그 소리가 크게 들렸다. 윤호는 아프지 않는지 허허 웃으며 반대편 뺨도 때리라고 대밀었다. 혜선은 또 한 대 갈겼다. 윤호는 꺼떡도 하지 않았다.
“여자에게 맞아 보긴 처음이다. 나도 맞고만 있을 순 없지.”
윤호는 여자를 자신이 때리지 않고 패거리들에게 인계했다. 두 사내가 혜선을 보도 위에 눕히고 벌거벗겼다. 그것은 구타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두 사내가 옷을 벗기고 혜선은 반항하고. 폭주족들은 옷을 하나씩 벗길 때마다 박수를 치며 웃어댔다. 브래지어와 팬티만 남았다.
“안 돼!”
한 여인이 외치며 어둠속에서 달려나왔다. 조미라 씨였다. 처절한 외침에 폭주족들은 멈칫했다. 윤호는 조미라 씨를 보고 외면했고 다른 친구들은 조미라 씨를 폭행하려고 했다.
“놔둬라. 내가 아는 분의 따님이셨군.”
윤호의 한마디에 폭주족들은 모두 오토바이로 돌아갔고, 그들은 폭음을 내지르며 썰물처럼 네온사인 속으로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