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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알고 싶다!
2014년 4월 16일에 진도해상에서 원인을 알지 못한채 침몰하면서 304명의 희생자를 내는 새월호 참사(사고/인재)가 발생했다. 세월호의 출항에서 사고발생, 구조 및 수습 과정, 커뮤니케이션, 지휘체계, 사후 처리과정에 있어서 수많은 의혹이 있어 왔고 4년에 지난 현재 까지도 밝혀진 내용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것이 단순사고 일 수도 있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도 있다. 또 한국 경제개발 과정에서 오랫동안 부패로 눈감아 온 연장상에서 규제자와 사업자 간의 결탁으로 인한 안전불감이 부른 인재일 수도 있다. 상식에 맞지 않는 수많은 의혹들로 인하여 고의적 예정된 사고라는 의견들도 있다.
앞으로 비슷한 사고가 재발 하지 않도록, 또 쉽게 대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사고 원인들이 최대한으로 밝혀서 타산지석의 교훈을 삶고 규제를 포함한 잘못된 것은 고쳐 나가야 할 것이다. 세월호 사건이후 당장 개선된 규정중 하나가 배의 총 중량이 기재된 서류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세월호의 객관적 문제점들 중의 하나가 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제주의 한 검사관은 "전에는 트럭의 무게를 재지 않아서 배가 싣고 가는 화물의 총중량을 알 수 없었다. 세월호가 (화물적재를 위해 배의 안정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평형수를 줄였는지도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들과 의혹들을 ‘세월호 특조위 2기’가 얼마나 더 밣혀 낼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모든과정이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며 계속 되어야 될 것이다. 세월호 특조위의 조사를 떠나서 지금까지 알려진 객관적 사실들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기 위하여 ‘NC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 모임’에서 이글을 준비 하였다. 모든 내용은4.16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재판 기록 15만 여 장과 3테라바이트 용량의 자료를 분석해 정리한 책 <세월호, 그날의 기록>과 관련기록과 인터뷰등을 통하여 언론에 밝혀진 사실을 근거로 말씀 드리고 자 한다.
먼저 세월호의 등록과 소유주 그리고 운행과정에 대한 의문 사항이다. 세월호 참사 하루전 세월호 1등 향해사 신정훈과 조기장 전영수가 입사하고, 사고 하루전 선장대신 1등항해사가 선장 역활을 해도 되도록 법이 개정되었다. 세월호가 인천항을 출항하기 전 짙은 안개로 출항 예정 여객선 10척 모두 취소되었지만 세월호만 출발 했다. 2차 청문회에서 세월호 여객부 직원 강혜성씨가 진술한 내용은 ‘움직이지 말고 현재 위치에 서 대기 하라’는 선내 방송이 선사인 “청해진 해운”의 지시에 따른 것이이었다는 것이다. 선내에서는 국정원 소유 노트북이 발견 되었고 노트북 안에는 저장된 내용중 일부에는 {선내 여객구역 작업 사항} –국정원 지적 사항- 리스트가 있었다. 여러가지 아주 상세한 일반 보수및 개선 상황 지적 및 지시 상황을 비롯하여 증-개축 지시, 도색 작업, ‘3월 휴가 계획서 작정 제출’, 3층-4층 남여 화장실 환풍기 도색 작업, 객실 채널표 (일본어 표기) 제거 작업 등등 실소유주 또는 고용주가 고용인들에게 내리는 지시 사항들이 국정원 소유 노트북에 있었다. 선박 수리도 국정원에서 하고 사고보고도 국정원에 먼저하라는 세월호 규정 (다른 모든 배는 사고시 해경에 제일 먼저 보고 해야됨)이 있고, 실제 사고시도 해경이 아닌 국정원에 먼저 보고 했고 여러가지 정황을 볼때 세월호는 청해진 명의로 된 국정원 ‘양우회 공제회’가 실소유주 일 것이라고 확신 하는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실제로 참사 이전 3년간 청해진과 국정원이 12여차례 정기 모임을 했다는 문서도 있다. 국정원은 사고 발생일 2014년 4월 16일과 17일에 청해진 기획 관리부장, 해부팀 대리, 물류 차장에게 총 7차례 전화통화를 하였고 해양 사고와 무관한 화물 담당자와도 전화를 했고, 정홍원 전 국무 총리도 ‘아침 &뉴스특보’에서 말한 내용은 국정원이 전화로 사고를 보고 받았고 그 보고는 선원이 한것으로 들었다고 했다. 2014년 10월 29일 찍은 세월호 평형수 게이지를 찍은 사진에는 평형수가 0으로 나와 있다. 물론 오래 넘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에 저절로 빠졌을수 있다고 주장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출발할때 채워져야 할 평행수가 어떤 이유에서 빠졌고 선체 상층부에 무리하게 실은 물건 때문에 쉽게 넘어 진 것이다. 2014년 김재원 당시 새누리당 의원에 의하면 1994년 6월에 일본에서 건조 된 페리 나미노우에라고 불리던 배를 2012년 10월에 일본 선박사 ‘마루에이페리’사로 부터 일본에서는 수명이 다한 배를 50~70억원 사이에 구입하고 중개상을 거치면서 127억원에 청해진 해운 명의로 구입하고 178억원에 구입한것으로 거짓 신고 하고 100억원은 외부자금으로 동원했다고 밝힌바 있다. 한국에서 이 배를 수입하여239t을 더 늘려 개조 하여 사용 하고 있었다. 원래 단원고 학생이 수학 여행으로 예약된 배는 ‘오하마나호’로 아주 튼튼한 배였는데 단원고에 동의나 통보 없이 하루 전날 ‘세월호’로 바뀌고 단원고 학생들은 배를 타기 전까지는 배가 바뀐지도 모른 상태였다.
다음은 세월호 선원 전화 통화와 행동, 해경의 행동에 대한 의문이다. 또한 123호에 탄 해경들은 승객을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왜 선체 조타실 등에 들어가 선장과 선원들만 찾으로 다녔을까? 상식적으로는 조난당한 여객선에서 승객을 구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선장과 선원들을 찾아야 하는게 맞긴하다. 복잡한 내부 구조와 승객들의 상황을 잘 알 수 없는 해경이 다짜고짜 승객부터 구하겠다고 나서는 것보다는 가능한 한 선장과 선원들의 협조를 받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침내 승객들을 구조하는 단계로 나갈 조건이 마련된 순간, 123정 정장 김경일은 태도를 바꿨다. 세월호로부터 500m 떨어져 바라보기만 하면서 구명보트로 구해오는 승객을 받기만 한것이다. 어딘가에서 지시를 받은 선실에서는 승객등에게 “꼼짝 말고 가만 있어라”라는 방송만 하고 그동안 선원들은 캔 맥주를 마시며 (즐기려고 마신게 아니라 뭔가 힘들기 때문에 마셨다고 볼 수도 있음) 전화로 통신 하면서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승무원 복을 벗고 민간인 복장을 한 다음 승객들에겐 안내방송 없이 자신들만 구명쪼끼를 입고 소형 경비정이 오기로 한 시간에 맞게 3층으로 올라와 승객을 버리고 탈출했다. 그렇다고 모든 선원들이 전부 탈출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탈출할 때 만난 배가 기울리면서 피흘리며 쓰러져 있었던 조리원등도 외면 한채 그들만 나온 것이다. 또한 선사 여직원이었던 박지영(27)씨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않고 선객들을 가장 먼저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다가 참변을 당하기도 했다. 그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박지영씨 한분만이 의롭게 행동했다고 보지 않는다. 많은 승무원들이 선객들의 안전을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본다. 근데 왜 선장과 탈출 승무원들은 그렇게 해야 했을까? 그들이 행한 행동과 양심도 질책의 대상이긴 하지만 그들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있었는지도 알아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선장과 승무원들이 정상적인 매뉴얼로 대처 했다면 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게 상식인 통념인 것이다.
세번째는 의문은 주변에서 제공하려는 구조의 도움을 왜 거절 하였지이다.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서서히 침몰하고 있던 그 시각, 인근 공해상에 공교롭게도 당시 이른바 쌍용훈련을 마치고 모항인 일본 사세보 항으로 귀환 중이던 미 해군 7함대 소속 본험 리처드함이 있었다. 4만 톤이 넘는 이 막강한 상륙강습함에는 수송용 대형 헬기인 '시 나이트(CH-46, Sea Knight)' 42대를 비롯해 해상 수색 능력이 뛰어난 대잠헬기(MH-60R) 6대를 탑재하고 있었다. 이때 함장인 타인츠 사령관이 즉각 비상(alert)을 발령하고 긴급 구조에 나섰지만, 결론적으로 세월호 구조를 위해 가장 먼저 사고 해역으로 급파한 MH-60 헬기 두 대는 한국 정부의 사고 해역 진입 불허 방침으로 세월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회항하고 말았다. 한국 지휘관이 우리힘으로 할 수 있으니 도와 줄 필요 없이 돌아 가라고 했던 것이다. 또한 우리 해군 함정 통영함이 세월호참사 당일 출동하여 구조 작업을 하려고 했다. 황기철 전 해군 참모 총장이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윗선에서 출동을 금지 시켰다. 과연 해군 참모총장을 명령할수 있는 윗선의 실제적 인물은 누구인지 아직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 밝혀져야 할 진실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렇지만 황 총장은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 출동 명령을 내렸지만 결국 아직 밝혀지지 않은 윗선의 제지로 출동은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황총장은 그해 말 통영함 납품 비리를 엮어서 군복을 벗겼다. 이후에 1, 2심 모두에서 무죄 판결을 받긴 했지만 그 분도 세월호 희생자와 함께 수장 된것과 마찬 가지가 되었다. 또한 50여척의 민간 어선이 구조를 도와 주겠다며 10시 30분경까지 현장에 도착해 대기하고 있었지만 거절 당했다. 바다에 떠 있는 승객을 충분히 구조할 수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3대의 헬기와 항공기 703호는 표류하는 승객을 추적할 수 있었다. 특히 헬기 511호와 512호, 항공기 703호는 구명뗏목도 갖추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사고 해역의 수온은 영상 12.6도였다.(<세월호, 그날의 기록>177쪽). 최악의 경우 승객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서 최대 6시간까지 버틸 수 있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기록팀은 승객들을 구조할 시간과 세력이 충분했다고 보았다. 가령 첫 번째 탈출 시점인 8시 50분경을 기준으로 선장의 퇴선 명령에 기초한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면 전체 승선원 476명이 전원 해상으로 탈출하는 데 5분 5초가 걸렸다고 한다. 두 번째 탈출 시점인 9시 24분(기울기 약 52도)경에는 9분 28초가 소요되었다. 기록팀이 낱낱이 복원한 '101'분을 살펴보면 세월호 구조 활동의 난맥상이 구조 계획과 책임자의 부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경 지휘부는 실패를 감추기 위해 거짓 기자회견을 하고 핵심 교신 기록을 숨겼다. "지휘하지 않는 지휘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상황실, 현장에 가지 않은 현장 책임자"(638쪽) 들이 구조를 가로 막았다. 기록팀은 사고 현장에서의 구조 활동을 "'뒤흔든' 손"(638쪽)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그 '손'의 주인공은 청와대였다. 청와대는 "대통령 보고서에 한 줄을 더 채우기 위해서"(316쪽) 해경 본청에 실시간 보고를 집요할 정도로 요구했다. 세월호가 뱃머리만 남기고 침몰하던 10시 30분까지 청와대-해경 핫라인이 평균 3분 간격으로 울려댔다고 한다. 끊임없이 정확한 구조 인원 파악을 종용하고 영상 시스템 확보를 지시하면서 구조 활동을 실질적으로 '방해'했다는 얘기다. 최근 밝혀진 황당한 사실로는 박 전대통령이 일부로 전화를 받지 않고 침실에 들어가 잠을 잤고, 최순실이 들어와서 결정 하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세월호 침몰이 단순 일반 해상 교통 사고라고 결론을 내릴지라도 왜 평행수가 부족했는지, 왜 무리하게 적재량 2배 이상 싣고도 출발 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하였는지, 상부 적재 물품을 정확히 고정 시키지 않으면 출항을 금지 하는 법을 지키지 않았는지, 출항 불가한 짙은 안개에도 출항을 통제하지 않았는지, 일본에서는 수명이 끝난 여객선을 왜 한국에서는 불법 증-개축 까지 눈감아 주며 등록시켜서 인재를 키웠는지 등은 앞으로 이런일이 생기지 않도록 과거의 실수를 거울삼기 위해서라고 과학적으로 조사하고 밝혀서 재발 하지 않도록 하는 manual을 만들어 안전관리법을 강화 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 마져도 이전 정부에서는 조사를 못하게 하고, 조사단을 방해하고, 사실을 은폐하고, 심지어 희생자 보상금이 얼마인데 아직도 떼쓰고 있다고 희생자 가족들을 모독해 왔다. 세월호 인양도 말로만 거짓약속하고 최후까지 인양하지 않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루어 오다가 결국 박근혜 구속되면서 쉽게 인양 되었다.
하지만 단순 해상 사고로 보기에는 위에 열거한 일부 사실들만 보더라도 의심쩍은 점이 너무 많은 것이다. 승객들을 100% 살릴 수 있었던 길은 위에 열거한 내용만 해도 너무 많다. 1. 가장 먼저 해경이 할 수 있었다. 2. 승무원들이 할수 있었다. 3. 모여든 민간 어선들이 할 수 있었다. 4. 리처드 함이 할 수 있었다. 5. 통영함이 할 수 있었다. 6. MBC나 YTN의 전원 구조라는 오보 또는 거짓 보도만 아니었더라도 더 많은 주위 선박들과 잠수사들이 출동하여 도와 줄 수 있었다. 7. 재난 컨드롤 타워가 제대로 작동하여 인명구조 최 우선 (선조치 후보고등) 지침만 내려도 가능했다. 8. 어떤 세력이 계속해서 전화 대화로 승무원들을 통제 하지 않았어도 인명 피해는없었다.
프랑스 <르몽드> 창간인 위베르 뵈브메리가 "바보 같은 진실은 바보같이 말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진실은 마음에 들지 않게 말하고, 슬픈 진실은 슬프게 말하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철학자 강신주선생님의 ‘철학 VS 철학’의 내용에 의하면"타인에게 진실을 전달할 때,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진실을 감당할 만큼 성숙하지 않거나 용기가 없을 경우도 있다’는 점도 강조 했다. 우리가 진실을 말 하므로서 나에게 불이익을 될지라도 살기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면 과감히 진실을 말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수 있으면 좋겠다.
< NC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