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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불사(源佛寺) 원문보기 글쓴이: 단현
BUDDHA-DHAMMA FOR STUDENTS (BUDDHADASA BHIKKHU)
학생들을 위한 붓다담마
붓다다사 빅쿠 법문
Fellow Dhamma-followers: 담마를 따르는 친구들에게
Today’s talk is entitled, “Dhamma Principles for Students”. 오늘의 법문 제목은 ‘대학생들을 위한 담마원리’입니다. I WISH TO MAKE it clear to you that today’s talk will deal only with fundamentals and basic principles, and so is especially intended for students, that is to say, for intelligent people. I shall discuss these broad principles of Dhamma (Natural Truth) using the question-and-answer format, first putting a question to you, and then supplying the answer. Having heard the question first, you will find the answer easier to understand and remember. This, I feel, is the most appropriate method of presentation for you who are students or intelligent people. It is said that at the time of the Buddha, intelligent people never asked about anything but basic points and fundamental principles. They never wanted long-winded explanations. This has the virtue of saving time, among other things. 오늘 법문에서는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원리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대)학생 여러분을 위하여 특별히 그렇게 생각한 법문입니다. 이 광대한 담마(자연적 진리)의 원리를, 처음에 여러분에게 질문을 제시하고 다음에 답변을 주는 문답형식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처음에 질문을 들으면 답변을 훨씬 이해하기 쉽고 기억하기 쉽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이러한 검토는 (대)학생 여러분에게 가장 적절한 강연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붓다시대에 지성인들은 기본 요점과 근본 원리 이외에는 결코 질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붓다시대의 지성인들은 결코 말이 긴 설명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장점 중에서 시간을 절약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So that is how I shall do it today: pose a question as our topic, and then answer it in terms of basic principles. In this way you will get the essentials of a large number of topics, facts that will serve you as a good general foundation. Having this foundation knowledge will bear good fruit in the future; it will be of assistance to you in studying and in understanding other speakers. 오늘 법문은 그런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질문을 화제로 제시한 다음, 기본 원리에 관한 말로 답하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으로 여러분은 많은 화제의 정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는 내용은 유익한 일반 기초지식이 될 것입니다. 이 기초지식을 지니면 장래에 훌륭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이 기초지식은 다른 사람들의 법문을 공부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One more point. The form of my talk is designed to prepare you students for those occasions when you will be asked questions by people from other countries and other religions. It will enable you to answer their questions, and answer them correctly, without giving rise to any misunderstanding concerning the Teaching.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 법문은 여러분이 외국인이나 다른 종교인으로부터 불교에 대해 질문 받은 경우에 대답할 수 있도록 고려한 형태입니다. 이 법문은 그 질문에 대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어떤 오해도 일으키지 않고 바르게 대답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Bear well in mind those points which constitute the essence or real kernel of the subject. If you manage to remember that much, it will be a very good thing, and, I believe, a very great benefit to you all. Now I shall discuss the topics in turn. 주제의 정수 또는 진정한 핵심을 이루는 점을 마음에 잘 새겨 두십시오. 그 정도만 기억하고 있으면 매우 유익하고 여러분 모두에게 대단히 큰 이득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하나씩 시작하겠습니다.
1) Suppose we are asked, “What subject did the Buddha teach?” 1) 다음 질문을 받았다고 합시다. “붓다께서 가르치신 주제는 무엇입니까?” THE BEST WAY of answering this is to quote the Buddha himself, “Know this, O Monks: Now, as formerly, I teach of only dukkha (suffering, unsatisfactoriness) and the elimination of dukkha.” 이 질문에 답하는 최선책은 붓다께서 직접 하신 다음 말씀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알라. 예전이나 지금이나 따타가따(붓다)는 둑카(고, 불만족)와 둑카의 소멸만을 가르친다.” Whether or not this answer agrees with what you had thought, please take good note of it. There are many other ways we may answer, but this one saying of the Buddha sums up his teaching very succinctly. 이 대답이 여러분이 생각했던 것인지 아닌지, 진지하게 주목해 보십시오. 다양한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 하신 이 말씀이 전체 가르침을 매우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The Buddha taught only dukkha and the quenching of it. This renders irrelevant any questions without a direct bearing on the elimination of dukkha. Don’t consider such questions as “Is there rebirth after death?” or “How does rebirth take place?” These can be considered later. 붓다께서는 오직 둑카(고)와 그 소멸만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둑카(고)의 소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은 어떠한 질문도 부적절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납니까?” 또는 “재탄생이 어떻게 일어납니까?”와 같은 질문을 고려하지 마십시오. 이 질문들은 추후에(둑카의 소멸후에)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So, if a Westerner asks us this question, we shall answer it by saying, “The Buddha taught nothing other than dukkha and the elimination of it.” 그러므로 서양인이 붓다께서는 무슨 주제를 가르치셨는지 묻는다면 “붓다께서는 둑카(고)와 그 소멸만을 가르치셨다”고 대답하십시오.
2) Following on this we may be asked, “What did he teach in particular” 2) 이어서 다음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특별히 무엇을 가르치셨습니까?” A) AS YOU CAN see, this is a big subject which can be answered from many different points of view. If asked this, we can say first of all that he taught us to tread the Middle Way, to be neither too strict nor too slack, to go to neither the one extreme nor the other. On the one hand, we are to avoid the very harsh self-mortification practised in certain yoga schools, which simply creates difficulties and trouble. On the other hand, we must keep away from that way of practice which allows us sensual pleasures, which amounts to saying, “Eat, drink, and be merry, for tomorrow we die!” This is an extremely cynical expression! appropriate for people interested only in sensual pleasures. A) 알 수 있듯이 이 질문은 여러 다른 관점에서 대답할 수 있는 큰 테마에 속합니다. 이 질문을 받는다면 붓다께서는 우리에게 중도(中道)로 걸어가도록 가르치셨다고 우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중도는 너무 엄격하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으며, 한쪽 극단으로 가거나 다른 쪽 극단으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어떤 요가수련원에서 행하는 바와 같은, 곤경과 고통만 야기하는 극단적 자기학대를 피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훗날 우리는 죽을 것이므로 먹고 마시고 즐기라”고 말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는, 감각적 즐거움에 빠지게 하는 길을 피해야 합니다. 이런 말은 감각적 즐거움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극단적으로 냉소적인 표현입니다. By contrast, the Middle Way consists, on one hand, in not creating hardships for yourself and, on the other hand, not indulging to your heart’s content in sensual pleasures. Walking the Middle Way brings about conditions which are in every way conducive to study and practice, and to success in putting an end to dukkha (suffering). The expression! “Middle Way” can be applied generally in many varied situations. It can’t lead you astray. The Middle Way consists in striking the golden mean. Knowing causes, knowing effects, knowing oneself, knowing how much is enough, knowing the proper time, knowing individuals, knowing groups of people: these Seven Noble Virtues constitute walking the Middle Way. This is one way of answering the question, 반면에, 중도(中道)는 한편으로는 스스로 고초를 만들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감각적 즐거움에 만족하는 마음에 빠지지 않는 데 있습니다. 중도로 걸어가면, 모든 면에서 공부와 실천에 도움을 주는 조건이 생기고 둑카(고)가 끝나는 성취에 이릅니다. 중도(中道)란 표현은 일반적으로 다양한 상황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중도는 사람을 타락시키지 않습니다. 중도는 중용에 이르는 데 있습니다. 원인을 알고, 결과를 알고, 자기 자신을 알고, 적당한 양을 알고, 적당한 시기를 알고, 개인을 알고, 사람의 집단을 아는 것, 이 7가지 고귀한 덕이 중도를 걸어가는 구성요소가 됩니다. 이 중도가 질문에 답하는 한 가지입니다. B) WE COULD ANSWER it equally well by saying that he taught self-help. You all understand what self-help is; you hardly will want it explained. To put it briefly, we are not to rely on fortune and fate. We are not to rely on celestial beings, nor even, finally, on what is called “God”. We must help ourselves. To quote the Buddha, “Self is the refuge of self.” Even in theistic religions it is said that God helps only those who help themselves. In other religions this matter of self-help may be stated more or less definitely, but in Buddhism it is all important. When one is miserable and, deluded, suffering pain and anguish, then one must turn to the way of self-help. The Buddha said, “Buddhas merely point out the way. Making the effort is something that each individual must do for himself.” In other words, Buddhism teaches self-help. Let us bear this in mind. B) 그리고 붓다께서는 자조(自助, 스스로 도움)를 가르치셨다는 말로 질문에 또한 잘 대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자조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으므로 거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자조(自助)는 우연이나 운명에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천상의 존재, 최종적으로 ‘신’이라고 하는 존재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힘을 구해야 합니다. 붓다의 말씀을 인용하면, “자신은 자신의 의지처”입니다. 유신론적 종교 내에서 조차도 ‘신은 스스로 돕는 자만 돕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타종교에서는 이 자조(自助)의 문제를 다소 한정적으로 말하고 있으나, 불교에서 이 자조(自助)의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비참하고 미혹되고 고통과 고뇌를 겪을 때 자조(自助)의 길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붓다께서는 “붓다들은 길을 알려줄 뿐이다. 노력은 각자가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말로 ‘불교는 자조(自助)를 가르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가르침을 마음에 새깁시다. C) ANOTHER WAY OF answering is to say the Buddha taught that everything is caused and conditioned. Everything happens in consequence of causes and conditions, and in accordance with law. This statement is like the answer received by Sariputta when, prior to his entering the Order, he questioned a bhikkhu (monk) and was told, “The Buddha teaches thus: Each thing arises from a cause. We must know the cause of that thing and the ceasing of the cause of that thing.” This principle of Dhamma is scientific in nature, and we can say that the principles of Buddhism agree with the principles of science. The Buddha did not use individuals or subjective things as criteria; that is to say, Buddhism is a religion of reason. C) 질문에 대한 다른 대답으로, 붓다께서는 ‘모든 것에는 그것의 원인과 조건이 있다’는 점을 가르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의 결과로, 그리고 법에 따라 일어납니다. 이 가르침은 사리뿟따 존자가 출가 전에 수행승(앗싸지 존자)에게 붓다께서 무엇을 가르치는지 물어서 얻은 대답과 같습니다. 앗싸지 존자는 우빠띳싸(사리뿟따 존자의 출가 전 이름)에게 “붓다께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각 사물은 어떤 원인에서 일어나므로 그 원인과 원인의 그침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담마의 이 원리는 본질상 과학적입니다. 불교의 원리는 과학의 원리와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개체(개인)나 주체(주관적 개인)를 기준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즉 불교는 이성의 종교입니다. D) TO ANSWER YET another way, as a rule of practice, the Buddha taught, “Avoid evil, do good, purify the mind.” Those three together are called the “Ovāda pātimokkha”, meaning the “summary of all exhortations”. Avoid evil, do good, purify the mind. Avoiding evil and doing good need no explaining, but making the mind pure isn’t as obvious. If one goes about grasping and clinging, even to goodness, the mind develops impurities: fear of not receiving good, fear of being deprived of existing good, anxiety, worry, and attaching to this and that as “mine”. All of these produce suffering. Even though we may have successfully avoided evil and done good, we still must know how to render the mind free. Do not grasp at or cling to anything as being a self or as belonging to a self. Otherwise it will be misery, it will be a heavy burden and it will be suffering (dukkha). In other words, grasping and clinging, like carrying something along with one all the time, is a heavy weight and a burden of suffering. Even a load of precious gems carried on the shoulders or head is just as heavy as a load of rocks. So don’t carry rocks or gems (dukkha). Put them aside. Don’t let there be any weight on your head (which here means the mind). This is what is meant by “purify the mind”. So then, to purify the mind is the third thing. The first thing is to avoid evil, the second is to do good, and the third is to make the mind pure. This is what he taught. D) 질문에 대해 아직 다르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실천 규칙으로서, 붓다께서는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마음을 청정히 하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세 가지는 함께 ‘모든 훈계의 요약’을 의미하는 오와다 빠띠목카(Ovāda pātimokkha)라 부릅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마음을 청정히 하십시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청정히 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명료하지 않습니다. 선이라고 해도 움켜쥐고 집착한다면 마음은 오염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선을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고 받은 선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며 근심 걱정하고, 이것저것을 나의 것이라고 간주하고 애착합니다. 이 모든 것이 괴로움(둑카)을 일으킵니다. 비록 성공적으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게 되었다하더라도 아직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어떠한 것도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으로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비참하게 되고 무거운 짐이 되고, 둑카(고, 괴로움)가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움켜쥠과 집착은 항상 어떤 것을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이 고통(괴로움)을 일으키는 무거운 부담과 짐이 됩니다. 어깨에 메거나 머리에 이고 다니는 진귀한 보석조차도 바위와 같이 무겁습니다. 그러므로 바위나 보석(둑카)을 가지고 다니지 마십시오. 그것을 내려놓으십시오. 머리(여기서는 마음을 의미함)에 어떠한 짐도 가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마음을 청정히 하라”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이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악을 피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선을 행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붓다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E) HERE IS ANOTHER important teaching, a worthwhile reminder. He taught, “All compounded things (all things and all beings in this world) are perpetually flowing, forever breaking up (they are impermanent). Let all be well-equipped with heedfulness!” Please listen very carefully to these words: everything in this world is perpetually flowing, forever breaking up, that is, all is impermanent. So we have to equip ourselves well with heedfulness. Don’t go playing with these things! They will bite you. They will slap your face. They will bind and hold you fast. You will be made to sit and weep, or perhaps even to commit suicide. E) 여기 새겨야 할 또 다른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모든 형성된 것(세상의 모든 사물과 존재)은 끊임없이 흐르고 반드시 부서진다(영원하지 않다). 모두 방일하지 말고 깨어 있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주의 깊게 들으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흐르고 반드시 부서집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방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들(형성된 것)을 즐기지 마십시오. 이것들은 여러분을 물게 될 것입니다. 이것들은 여러분의 얼굴을 때릴 것입니다. 이것들은 여러분을 단단히 묶고 잡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앉아 울게 하고, 심지어 자살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Now let us bring together these various ways of answering this one question. If asked just what the Buddha taught, answer with one of the following: He taught us to walk the Middle Way; He taught self-help; He taught us to be familiar with the law of causality and to adjust the causes appropriately for the desired results to follow; He taught as the principle of practice “Avoid evil, do good, purify the mind” And he reminded us that all compounded things are impermanent and perpetually flowing, and that we must be well-equipped with heedfulness. There are several different ways of answering this question. If asked what the Buddha taught, then answer in any one of these ways. 이제 이 하나의 질문에 대한 이 다양한 대답을 정리해 봅시다. 붓다께서 직접 가르치신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다음 대답 중의 하나로 답하십시오. 붓다께서는 우리들에게 중도(中道)로 걸어가라고 가르치셨다. 붓다께서는 자조(自助, 스스로 도움)를 가르치셨다. 붓다께서는 우리들에게 인과법에 익숙하고, 바람직한 결과가 따르도록 원인을 적절히 조정하라고 가르치셨다. 붓다께서는 실천 원리로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마음을 청정히 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리고, 붓다께서는 우리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므로 항상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이 질문에는 다양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붓다께서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물으면, 이 다섯 가지 중의 하나로 대답하십시오.
3) Now, suppose you meet a person from another country who asks you, “Put as briefly as possible, what is the basic message of Buddhism?” 3) 이제, 다음 질문을 하는 외국인을 만났다고 합시다. “가능한 한 간략하게 말한다면, 불교의 기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THIS CAN BE answered in one short sentence, a saying of the Buddha himself: “Nothing whatsoever should be grasped at or clung to.” 이 질문은 붓다께서 직접 말씀하신 짧은 한 문장으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즉 “그 어떤 것도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입니다. That nothing should be grasped at or clung to is a handy maxim from the mouth of the Buddha himself. We don’t need to waste time in searching through the Tipitaka (the recorded Teaching), because this one short statement puts it all quite clearly. In all the discourses, in the entire teaching, there are as many as eighty-four thousand Dhamma topics, all of which may be summed up in the single sentence, “nothing should be grasped at.” This tells us that to grasp at things and cling to them is suffering (dukkha). When we have come to Know this, we can be said to know all the utterances of the Buddha, the entire eighty-four thousand Dhamma topics. And to have put this into practice is to have practised Dhamma completely, in its every phase and aspect. 아무 것도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붓다께서 직접 말씀하신 언제나 새겨야 할 금언입니다. 이 짧은 한마디가 모든 가르침을 아주 분명히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삼장(가르침을 기록한 경전, 즉 율장, 경장, 논장)을 통해 가르침을 찾는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8만 4천이나 되는 담마 화제가 있지만 모든 법문과 가르침은 “아무 것도 움켜쥐지 말아야 한다.”라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한마디는 그 무엇이든 움켜쥐거나 집착하면 둑카(고, 괴로움)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붓다의 모든 말씀, 즉 8만 4천 담마 화제를 모두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실천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담마를 완전히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The reason a person fails to keep to the rules of conduct is that he grasps at and clings to things. If he refrains from grasping at and clinging to anything whatever, and puts aside craving and aversion, he cannot fail to keep the rules of conduct. The reason a person’s mind is distracted and unable to concentrate is that he is grasping at and clinging to something. The reason a person lacks insight is the same. When he is finally able to practise non-grasping, then simultaneously he attains the Noble Paths, their Fruits, and ultimately nibb?na (Sanskrit, nirvana). 행위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것을 움켜쥐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도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않고 갈망(탐욕)과 반감(혐오)을 내려놓는다면, 행위 규칙에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이 산만하고 집중할 수 없는 것은 어떤 것을 움켜쥐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통찰력이 없는 것도 움켜쥐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최종적으로 ‘집착하지 않음(무집착)’을 실천할 수 있을 때, 그와 동시에 고귀한 도와, 도의 결실(과)과, 궁극의 닙바나(열반,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에 이르게 됩니다. The Buddha was a man who grasped at absolutely nothing. The Dhamma teaches the practice and the fruit of the practice of non-grasping. The Sangha (Community of Noble Disciples) consists of people who practise non-grasping, some who are in the process of practising, and some who have completed the practice. This is what the Sangha is. 붓다는 완전히 어떤 것도 움켜쥐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담마는 무집착의 실천과 그 결실(과)을 가르쳐 줍니다. 상가(고귀한 제자들의 공동체)는 무집착을 실천하는 사람과 실천과정에 있는 사람과 실천을 완성한 사람으로 구성됩니다. 이것이 상가의 의미입니다. When people asked the Buddha whether his entire teaching could be summarized in a single sentence, he answered that it could, and said, “Nothing whatsoever should be grasped at or clung to.” 붓다께 붓다 자신의 전체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지 물었을 때, 붓다께서는 요약할 수 있다고 하시고, 그 한마디는 “그 어떤 것도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4) Now suppose you are then asked, “How is this non-grasping and non-clinging to be put into practice?” 4) 이제, 다음 질문을 받았다고 합시다. “이 ‘움켜쥐지 않고 집착하지 않음’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습니까?” IF YOU MEET a person from another country who asks by what means one may practise the essence of Buddhism, you can once again answer by quoting the Buddha. We don’t have to answer with our own ideas. The Buddha explained how to practise in succinct and complete terms. When seeing a visual object, just see it. When hearing a sound with the ear, just hear it. When smelling an odour with the nose, just smell it. When tasting something by way of the tongue, just taste it. When experiencing a tactile sensation by way of the general skin and body sense, just experience that sensation. And when a mental object, such as some defiling thought, arises in the mind, just know it; know that defiling mental object. 불교의 핵심을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 외국인이 묻는다면, 붓다께서 하신 말씀을 또 다시 인용하여 대답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생각으로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붓다께서 간결하고 완벽한 용어로 실천방법을 설명하셨습니다. ‘눈을 통해 시각대상을 볼 때는 보기만 하라. 귀를 통해 소리를 들을 때는 듣기만 하라. 코를 통해 냄새를 맡을 때는 냄새 맡기만 하라. 혀를 통해 맛을 볼 때는 맛보기만 하라. 몸을 통해 촉감을 경험할 때는 촉감만 경험하라. 그리고 마음을 통해 오염된 생각과 같은 정신적 대상이 일어날 때는 그 오염된 정신적 대상을 알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Let us go over it again for those of you who have never heard this before. When seeing, just see! If at all possible, in seeing, just see. When listening, just hear; when smelling an odour, just smell the odour; in tasting, just taste; in detecting a tactile sensation by the way of skin and body, just experience that sensation; and on the arising of a mental object in the mind, just be aware of it. This means that these are not to be added to by the arising of the self-idea. The Buddha taught that if one can practise like this, the “self” will cease to exist; and the non-existence of the “self” is the cessation of suffering (dukkha). 이 말씀을 예전에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다시 검토해 봅시다. 볼 때는 보기만 하십시오! 가능한 모든 경우에 볼 때는 보기만 하십시오. 들을 때는 듣기만 하십시오. 냄새 맡을 때는 냄새 맡기만 하십시오. 맛 볼 때는 맛보기만 하십시오. 몸을 통해 촉감을 경험할 때는 촉감만 경험하십시오. 마음에 정신적 대상이 일어날 때는 단지 그것을 알기만 하십시오. 이 실천방법은 ‘자아라는 개념이 일어나 여기에 추가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붓다께서는 사람들이 이와 같이 실천할 수 있다면, ‘자아’가 소멸할 것이며, 자아의 소멸은 괴로움(둑카)의 소멸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Viewing an object by way of the eye, just see it.” This needs explaining. When objects make contact with the eye, observe and identify them; know what action has to be taken with whatever is seen. But don’t permit liking or disliking to arise. If you permit the arising of liking, you will desire; if you permit the arising of disliking, you will want to destroy. Thus it is that there are likers and haters. This is what is called “the self”. To go the way of the self is suffering and deception. If an object is seen, let there be intelligence and awareness. Don’t allow your mental defilements to compel you to grasp and cling. Cultivate enough intelligence to know which line of action is right and appropriate. And if no action is required, ignore the object. If some sort of result is wanted from this thing, then proceed, with full awareness and intelligence, not giving birth to the self-idea. In this way you get the results you wanted and no suffering arises. This is a very concise principle of practice, and it should be regarded as a most excellent one. “눈을 통해 대상을 볼 때는 보기만 하라.” 이 말씀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대상이 눈과 접촉했을 때, 잘 보고 확인하십시오. 무엇이 보이더라도 그에 따라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지 아십시오. 그러나 좋아함과 싫어함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좋아함이 일어나면 가지려고 할 것입니다. 싫어함이 일어나면 없애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좋아하는 자와 싫어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을 ‘자아’라고 부릅니다. 자아의 길로 가면 고(괴로움)와 현혹(기만)이 있습니다. 대상이 보이면, 이해하고 알아차리십시오. 정신적 오염원에 의해 움켜쥐고 집착함에 이르도록 나두지 마십시오. 어떻게 행동해야 바르고 적절한지 알도록 지혜(이해력)를 충분히 계발하십시오. 어떠한 행동도 필요하지 않으면 대상을 무시하십시오. 보이는 사물에서 어떤 종류의 결과가 기대된다면, 자아개념이 일어나게 하지 말고 충분한 알아차림과 지혜(이해력)로 진행하십시오. 이 방법으로, 기대되는 결과를 고(괴로움)의 일어남이 없이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은 아주 간결한 실천 원리입니다. 이 방법을 가장 탁월한 것으로 여기십시오. The Buddha taught: When seeing, just see. When hearing, just hear. When smelling an odour, just smell it. When tasting, just taste. When experiencing a tactile sensation, just experience it. When sensing a mental object, just sense it. Let things stop right there and insight will function automatically. Take the course that is right and fitting. Don’t give birth to “the liker” or “the hater”, and so to the desire to act in accordance with that liking or disliking, which is the arising of selfhood. Such a mind is turbulent, it is not free, it functions without any insight at all. This is what the Buddha taught. 붓다께서는, 볼 때는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고, 냄새 맡을 때는 냄새 맡기만 하고, 맛볼 때는 맛보기만 하고, 촉감을 경험할 때는 촉감을 경험하기만 하고, 정신적 대상을 지각할 때는 지각하기만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접촉하여 경험할 때 바로 거기에서 멈추면, 통찰력이 자동적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올바르고 알맞은 길을 취하십시오. 좋아하는 자와 싫어하는 자가 태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좋아함과 싫어함에 따라 행동하는 욕망에 따르면 자아가 생깁니다(태어납니다). 그 마음(자아가 생긴 마음)은 소란스러우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 마음에서는 통찰력이 전혀 작용하지 않습니다. 붓다께서는 이것을 가르치셨습니다. Why, then, didn’t we mention morality, concentration, insight, merit-making, or alms-giving in connection with the most fruitful practice? These are helpful conditions, but they are not the heart of Dhamma, not the essential matter. We make merit, give alms, observe morality, develop concentration, and gain insight in order to become stable persons. When seeing, just to see; when hearing, just to hear. Achieving this, we become stable people. We have stability, unshakeability, and equilibrium. Although objects of every kind make contact with us in every way and by every sensory route, self does not arise. Merit-making and alms-giving are means for getting rid of self. Observing morality is a process by which we gain mastery over self, as is concentration practice. Acquiring insight serves to destroy self. Here we are not speaking of several different matters; we are speaking of one urgent everyday matter. Our eyes see this and that, our ears hear this and that, our nose smells odours, and so on for all six sense channels. We have to stand on guard, keeping a constant watch at the entrances of the six channels. This single practice covers all practices. It is the very essence of Dhamma practice. If you meet a person from another country who asks how to practise, answer in this way. 그러면 왜 가장 효과적인 실천과 관련된, 계율 지키기, 집중력 기르기, 통찰력 계발하기, 공덕 짓기, 보시하기는 언급하지 않을까요? 이것들은 도움이 되는 조건들이지만, 담마의 핵심이 아니고,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안정된 사람이 되기 위해 공덕을 짓고, 보시를 하고, 계를 지키고, 집중력을 기르고, 통찰력을 계발합니다. 볼 때는 보기만 하십시오. 들을 때는 듣기만 하십시오. 이것을 이루면 안정된 사람이 됩니다. 안정되고 흔들리지 않으며 균형 잡힌 사람이 됩니다. 비록 모든 방향과 모든 감각통로를 통해 다양한 종류의 대상이 접촉되지만 자아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공덕을 짓고 보시를 하는 것은 자아를 제거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계를 지키는 것은 그것에 의해 자아를 지배하는 과정입니다. 집중력을 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찰을 익히면 자아를 부수는 것에 큰 도움이 됩니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다른 문제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절박한 일상적인 일만 말합니다. 눈은 이것저것을 보고 귀는 이것저것을 들으며 코는 여러 가지 냄새를 맡는 등 여섯 가지 감각통로를 통한 일만 말합니다. 여섯 통로의 입구를 부단히 바라보면서 경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 한 가지 실천만 하면 모든 실천을 포함합니다. 이 한 가지 실천은 담마의 가장 근본적인 실천입니다. 외국인이 담마를 실천하는 방법을 묻는다면 위와 같이 대답하십시오.
5) Suppose someone from another country or religion asks you, “Where can one learn, where can one study?” 5) 외국인이나 다른 종교인이 다음과 같이 묻는다고 합시다. “어디서 (담마를) 배우고 어디서 공부할 수 있습니까?” WE ANSWER THIS by quoting the Buddha once again, “In this very fathom-long body together with the perceptions and the mental activities.” Learn in the human body together with perception and mental activity. This fathom-long body, being alive, is accompanied by perceptions and mental activities, all of which make up “the person”. The presence of consciousness implies the presence of perceptions, and the presence of mental activities that of knowledge and thought. 붓다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인용하여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지각과 정신활동을 함께 하는 바로 이 한 길(6피트) 길이의 몸에서.” 지각하고 정신활동을 함께 하는 사람의 몸에서 배우십시오. 살아있는 이 한 길 길이의 몸은 지각과 정신활동을 함께 하며, 이 모두가 ‘사람’을 구성합니다. 의식이 있으면, 지각이 있고, 생각하고 아는 정신활동이 있습니다. In this fathom-long body together with perceptions and mental activities the Tathāgata (the Buddha) made known the world, the origin of the world, the complete extinction of the world, and the way to practise in order to achieve the complete extinction of the world. When he spoke of the origin of the world, the complete extinction of the world, and the way of practice leading to complete extinction of the world, he meant that the whole Dhamma is to be found within the body and the mind. Learn here. Don’t learn in a school, in a cave, in a forest, on a mountain, or in a monastery. Those places are outside us. Build a school inside, build a university within the body. Then examine, study, investigate, research, scout around, find out the truth about how the world arises, how it comes to be a source of suffering, how there may be complete extinction of the world (that is, extinction of suffering), and how to work towards attaining that complete extinction. That is, rediscover the Four Noble Truths yourself. The Enlightened One sometimes used the word “world” and sometimes the word “suffering” (dukkha). The nature of the world, of suffering; the nature of its arising, its origin and source; the nature of its complete extinction, the cessation of suffering and the turbulent world; and the nature of the practice which leads to dukkha’s end: these can be searched for and found in this body and nowhere else. If one appears to have found it elsewhere, it can only be as an account in some book, hearsay, just words, and not the Truth itself. However, when it is looked for and found in this fathom-long body, together with this mind, then it will be the Truth. 지각과 정신활동을 함께 하는 이 한 길 길이의 몸에서 따타가따(붓다)께서는 세상과, 세상의 근원과, 세상의 완전한 소멸과, 세상의 완전한 소멸을 이루기 위한 실천방법을 아셨습니다. 붓다께서 세상의 근원과, 세상의 완전한 소멸과, 세상의 완전한 소멸에 이르는 실천방법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모든 담마는 몸과 마음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뜻하였습니다. 여기(이 몸과 마음)에서 배우십시오. 학교나 동굴이나 숲이나 산이나 수도원에서 배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곳은 우리 외부에 있습니다. 내부에 학교를 세우십시오. 몸 내부에 (대)학교를 세우십시오. 그리고, 시험하고 검토하고 조사하고 탐구하고 두루 정찰하여, 어떻게 세상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그것이 고의 근원이 되는지, 어떻게 세상의 완전한 소멸(즉, 고의 소멸)이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세상의 완전한 소멸을 향해 실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진리를 찾아내십시오. 즉,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를 자신이 다시 발견하십시오. 붓다께서는 때로는 ‘세상’이라는 말을 사용하시고 때로는 고(둑카, 괴로움)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세상(고)의 성품, 세상(고)의 일어남(기원, 근원)의 성품, 세상(고, 소란스런 세상)의 완전한 소멸(그침)의 성품, 세상(고)의 끝으로 이끄는 실천의 성품, 이것들은 이 몸 안에서 탐색하여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이것들을 다른 곳에서 발견한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단지 책에서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소문이며 단지 말일 뿐이며, 진리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과 함께 이 한 길 길이의 몸에서 찾고 발견될 때에는 그것은 진리일 것입니다. So if asked where to learn, say, “We learn in this fathom-long body, together with perception and the mental activities.” 그러므로 어디에서 (담마를) 배울 수 있는지 물으면, “지각과 정신활동을 함께 하는 이 한 길(6피트) 길이의 몸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십시오.
6) Now we may be asked next, for the sake of better understanding of the Dhamma, “To what may the Dhamma be compared?” 6) 이제 담마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다음 질문을 받았다고 합시다. “담마는 무엇에 비유할 수 있습니까?” THE BUDDHA SAID, “The Dhamma may be compared to a raft.” He used the word “raft” because in those days rafts were commonly used for crossing rivers, and this explanation of the Dharnma as a raft could be readily understood. This has a very important meaning. One should not become so attached to the Dhamma that one forgets oneself, that one becomes proud of being a teacher, a scholar, or a man of learning. If one forgets that the Dhamma is just a raft, this danger will arise. The Dhamma is a raft, a vehicle that will carry us across to the other bank. Having reached the further shore and gone up on land, we should not be so foolish as to carry the raft along with us. 붓다께서는, “담마는 뗏목에 비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강을 건너기 위해 보통 뗏목이 사용되었고 담마를 뗏목에 비유하여 설명을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붓다께서는 ‘뗏목’이란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비유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담마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자신(또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거나 교사나 학자나 ‘배운 자’가 된 것을 뽐내지 말아야 합니다. 담마는 단지 뗏목이라는 것을 잊는다면 이러한 위험이 일어날 것입니다. 담마는 강 건너편으로 운반해주는 뗏목이며 수송수단입니다. 강 건너 둑에 닿아 땅에 내려서서도 뗏목을 짊어지고 가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This is meant to teach us to recognize and use the Dhamma as merely a means to an end, not to grasp at and cling to it to the point of forgetting ourselves. If we don’t recognize the true function of this raft, we may find ourselves keeping it for show or as something to quarrel over. Sometimes it is regarded as a race to be run, which is wasteful and useless. It should be used as intended, for crossing over, for crossing the stream. Knowledge of Dhamma should be used to cross over beyond suffering. It should not be retained for detrimental purposes, for fighting with that sharp-edged weapon the tongue, for arguing, or as an object of ceremonial obeisance. Finally, don’t grasp at and cling to it so that, even after having reached the shore, having landed, you are not willing to leave the raft behind, but want to carry it along with you. 이것이 우리들에게 보고 알도록 가르치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잊을 정도로 담마를 움켜쥐거나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담마를 단지 목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뗏목의 본래 기능을 보고 알지 못하면, 보이기 위한 것이나 논쟁하기 위한 어떤 것으로 간직할 지도 모릅니다. 어떤 때는 헛되고 쓸모없는 달리기 경주용으로 간주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본래 기능에 따라 강을 건너는 수단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담마에 관한 지식은 고해(고의 바다)를 건너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날카로운 무기라 할 수 있는 혀로 말싸움을 하거나 논쟁하거나 의례 의식상의 복종과 같은 이롭지 못한 목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최종적으로 강 건너 둑에 닿아 땅에 내려섰을 때조차도 뗏목을 뒤에 나두지 못하고 짊어지고 가지 않도록,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마십시오.
7) This Dhamma, which is said to resemble a raft, is just as applicable for lay people as it is for bhikkhus (monks). Suppose, then, that we are asked, “What should a lay person study?” 7) 뗏목과 같은 이 담마는 출가자(승려)을 위한 것과 마찬가지로 재가자(일반인)에게도 바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음 질문을 받았다고 해 봅시다. “재가자는 무엇을 공부해야 합니까?” WE SHOULD NOT waste time thinking out our own answer. If anyone wants to have his own ideas, well and good, there is nothing to stop him. But if we are to answer in accordance with what the Buddha taught, then we must say, “Lay people should study all the suttantas, that is, the discourses of the Tathāgata about suññatā (emptiness).”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할 말을 생각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 자기 자신의 견해를 훌륭하고 건전하게 하기 원한다면 그것을 그만두게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 가르치신 것에 따라 대답하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재가자는 빔(空)에 대해 따타가따(붓다)께서 설하진 법문을 담고 있는 모든 숫딴따(핵심경전, Suttanta)를 배워야 합니다.” These suttantas are a well-organized exposition of the teaching. They constitute a good system forming the pithy substance or heart of the teaching. This is why they are called suttanta. A sutta is a “discourse” and anta means “end”. Hence, a suttanta is a discourse that is well set out, well ordered, and the sound kernel of the subject. It is like the word vedanta. Veda is “knowledge” vedanta is knowledge; that is the pure substance of the matter, well set out and systematically arranged. 이 숫딴따(핵심경전, Suttanta)는 붓다의 가르침을 잘 정리하여 설명한 경전입니다. 숫딴따(핵심경전)는 가르침의 본체 또는 핵심을 이루는 훌륭한 경전체계를 구성합니다. 숫딴따(Suttanta)라고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숫따(sutta)는 ‘법문’을 의미하고, 안따(anta)는 ‘끝(또는 결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숫딴따(Suttanta)는 주제가 잘 설해지고 잘 정리된 견고한 핵심입니다. 그것은 웨단따(Vedanta)란 말과 같습니다. 웨다(veda)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웨단따(Vedanta)는 고찰대상이 잘 설해지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청정한 본체입니다. Remember this word suttanta. All the suttantas are utterances of the Tathāgata. They are what the Buddha taught and they all refer to suññatā (emptiness). In this connection, lay people ask how they are to practise Dhamma in order to achieve the most enduring benefits and happiness. The Buddha said, “The suttantas are utterances of the Tathāgata, are of great profundity, have deep significance, are the means of transcending the world, and refer to suññatā.” 이 숫딴따(Suttanta)란 말을 기억하십시오. 모든 숫딴따(Suttanta)는 따타가따(붓다)께서 하신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숫딴따(Suttanta)는 붓다께서 가르치신 것이고 모두 빔(空, sunnata)에 관련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재가자(일반인)는 가장 오래 지속되는 이익과 행복을 얻기 위해 담마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붓다께서는, “따타가따(붓다)가 설한 숫딴따(Suttanta)는 매우 심오하고,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고, 세상을 초월하는 수단이며, 빔(空, sunnata)에 관련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This word suññatā may seem strange to you, but don’t lose heart just yet, because it happens to be the most important word in Buddhism. Please listen carefully. The word suññatā may be translated as “emptiness”. But the word “empty” has several usages and meanings. The suññatā of the Buddha does not mean physical emptiness, it is not a physical vacuum devoid of material substance. No! Here it is a case of emptiness in the sense of essential nature, because all sorts of things are still present. There can be as many objects as would fill up the whole world, but the Buddha taught that they are empty, or have the property of emptiness, because there is nothing in any of them that either is a self or belongs to a self. The aim of this is, once again, non-clinging to any thing at all. Lay people should study in particular those sayings of the Buddha that deal with suññatā. Generally, this subject has been misunderstood as too lofty for lay people. The reason for this is simply that too few people wish to practise according to these sayings of the Buddha. So please keep clearly in mind that even a lay person must study about, practise, and then discover suññatā. It is not only for bhikkhus. 이 순냐따(빔, 空)라는 말은 여러분에게 생소하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아직 바로 낙담하지는 마십시오. 순냐따(빔)는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말로 자주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를 기울여 들어 보십시오. ‘순냐따’라는 말은 ‘빔(空)’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빔(空)이란 말에는 여러 가지 용법과 의미가 있습니다. 붓다께서 언급하신 빔(空)은 ‘물리적인 빔’을 의미하지 않으며, 물질이 없는 텅 빈 ‘물리적인 진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모든 종류의 사물이 여전히 나타나기 때문에 근본성품의 의미에서 빔(空)을 말하는 경우입니다.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많은 대상이 있지만 붓다께서는 그 대상들이 ‘비었다’ 또는 ‘빔의 성품을 가졌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자아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가르침의 목표를 다시 한 번 말하면, 어떤 것에도 전혀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재가자(일반인)는 특히 순냐따(빔)와 관련된 붓다의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주제는 재가자에게는 너무 고차원적인 것이라고 오해되어 왔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극소수의 사람만이 붓다의 이 말씀에 따라 실천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재가자라 하더라도 빔(空)을 공부해야 하고 실천해야 하며 그리고 순냐따(빔, 空)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마음속에 새기기 바랍니다. 빔(空)은 출가자(승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I hope, then, that you lay people will no longer be afraid of the word “suññatā” or of the subject of suññatā. Take steps to increase your knowledge and understanding of it. Suññatā is a subject requiring intricate and delicate explanation; it takes a long time. For the reason, we have discussed only the actual core of the matter, just the real essence of it and that is enough, namely, emptiness of the idea of being a self or belonging to a self. If the mind realizes that there is nothing that is a self and that there is nothing that belongs to a self, the mind is “empty” and free. “This world is empty” means just this. 재가자 여러분은 더 이상 순냐따(빔) 또는 순냐따의 주제를 두려워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것을 더 잘 알고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발걸음을 내디디십시오. 순냐따(빔)는 매우 복잡하고 자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주제이며, 그 설명에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때문에 문제의 실제적 핵심인 참된 본질만을 언급했으며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즉, 자아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 있다는 견해를 비우는 것이 그 핵심입니다. 마음이 자아는 없고 자아에 속하는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마음은 비고 자유롭습니다. “이 세상은 비었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8) Now suppose we are asked about the supreme word in Buddhism, “What is the amatadhamma?” 8) 이제 불교에서 궁극적인 지고한 말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고 해 봅시다. “아마따담마(amatadhamma)가 무엇입니까?” AMATA MEANS “DEATHLESS” the amatadhamma is the dhamma (thing or state) that does not die. And what is that? The Buddha once said, “The cessation of greed, hatred, and delusion is the amatadhamma. “The amatadhamma is the immortal state, or the immortalizing state. Wherever there is greed, hatred, and delusion, that is called the mortal state. 아마따(amata)는 ‘불멸(죽음없음)’을 의미합니다. 아마따담마(amatadhamma)는 죽지 않는 담마(사물 또는 상태)입니다. 그것(죽지 않는 담마)이 무엇일까요? 붓다께서는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이 없는 상태가 ‘아마따담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따담마’는 불멸의 상태 또는 불멸하게 하는 상태입니다.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이 있는 곳을 ‘죽음이 있는 상태’로 부릅니다. One experiences suffering. One has the self-idea, which causes one to be subject to birth, aging, disease, and death. When greed, hatred, and delusion cease (the ceasing of delusion being the ceasing of ignorance and misunderstanding), then there no longer arises the false concept of selfhood, then there is no more self to die. So if one is searching for the deathless state, the amatadhamma, one must search for the state or condition that is free of greed, hatred, and delusion. This is what the Buddha taught. The amatadhamma, as we have so frequently heard, is the ultimate, the highest teaching of Buddhism. The “undying” taught by other teachers is a different amata. But in Buddhism it is, as I have just explained, the cessation of greed, hatred, and delusion. 사람들은 고(괴로움)을 겪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게 하는 원인이 되는 자아개념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이 그칠 때(미혹의 그침은 무지와 오해의 그침임), 더 이상 잘못된 자아개념이 일어나지 않으며, 죽어야 할 자아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멸의 상태, 즉 ‘아마따담마’를 구하려고 하면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에서 해방된 상태(또는 조건)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붓다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게 자주 들은 바와 같이 ‘아마따담마(불멸의 담마)’는 불교에서 궁극적이고 최상의 가르침입니다. 다른 스승들에 의해 가르쳐진 ‘죽지 않음’은 다른 종류의 아마따(amata)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그것은, 방금 설명한 바와 같이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의 그침입니다.
9) The things which are linked with the highest and most profound Dhamma (Truth) are known by various names. Suppose someone raises the question: “What is the Dhamma that is highest and most profound, that transcends the world and death in all their forms?” 9) 가장 높고 가장 심원한 담마(진리)와 관련된 것은 다양한 명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누군가 다음 질문을 한다고 해봅시다. “모든 면에서 세상과 죽음을 초월하는, 가장 높고 가장 심원한 담마는 무엇입니까?” THE BUDDHA CALLED it suññatāppatisamyuttā which means “Dhamma that treats of suññatā”, or even “suññatā” itself. Dhamma that treats of suññatā is Dhamma at its highest and most profound. It transcends the world, transcends death, and is none other than the amatadhamma (the immortal dhamma). 붓다께서는 가장 높고 가장 심원한 담마를, “빔(空)을 나타내는 담마” 또는 바로 “빔(空)” 그 자체를 의미하는 순냐땁빠띠쌍윳따(suññatāppatisamyuttā)라 불렀습니다. 빔(공)을 나타내는 담마가 가장 높고 가장 심원한 담마입니다. 이 담마는 세상을 초월하고 죽음을 초월하는 담마이며, 바로 아마따담마(불멸의 담마)입니다. Now, the newer, later versions of Dhamma — what are they like? The Buddha said, “A discourse of any kind, of any class; though produced by a poet or a learned man; though versified, poetical, splendid, and melodious in sound and syllable; is not in keeping with the teaching if it is not connected with suññatā.” Please remember the important words “not connected with suññatā”. Therefore, if a discourse is not concerned with suññatā, it must be an utterance of a later disciple, an innovation, new Dhamma, not an utterance of the Accomplished One, and as such inferior. If it is a saying of a disciple and does not treat of suññatāa, it is outside the Teaching. 요사이, 새로운 후대의 담마 해석은 무엇과 같을까요? 붓다께서는, “시인이나 배운 사람에 의해 잘 지어지고 시적이고 훌륭하며 소리와 음절이 음악적이더라도 빔(空)과 연관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종류나 부류의 법문도 따타가따(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빔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이라는 중요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가르침이 빔(空)과 연관되어 있지 않으면, 그 가르침은 후대의 제자, 혁신자 또는 새로운 담마의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가르침은 빔(空)을 성취한 자의 말씀이 아니며, 하급자(완전히 깨닫지 못한 자)의 말입니다. 그 가르침이 제자들의 말이고 빔(空)과 관련되어 있지 않으면, (붓다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If we wish to find out Dhamma which is true to the original highest teaching of the Buddha, there is no possible way other than through those accounts that refer to suññatā (emptiness). 붓다의 원래 최상의 가르침에 맞는 담마인지 알고 싶으면, 순냐따(빔)에 관련된 설명을 보고 아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10) Now suppose you are asked by a person from another country, “Which aspect of the teaching, as recorded in the Pali Texts, did the Buddha stress most of all?” 10) 이제 외국인으로부터 다음 질문을 받았다고 해 봅시다. “팔리 경전에 기록된 가르침 중에 붓다께서 가장 강조하신 부문은 어느 것입니까?” ANSWER ONCE AGAIN by quoting the Buddha. “The five khandhas are impermanent and not-self (anattā).” These five khandhas are the five aggregates into which an “individual” is divisible. The body aggregate is called rupa; the aggregate of feeling, both pleasurable and painful, is called vedanā.; memory and perception is called saññā; active thinking is called sankhāra; and the consciousness that can know this or that object by way of the six senses is viññāna. Rūpa, vedanā, saññnā, sankhāra, viññāna: these five are called the five aggregates or khandhas. These five aggregates are impermanent and devoid of selfhood. This is the aspect of the doctrine that the Buddha stressed most of all. These five aggregates are impermanent, continually flowing, and continually changing. They are devoid of selfhood; because they are perpetually flowing, no one can consider them to be “me” or “mine”. 다시 한 번 붓다의 다음 말씀을 인용하여 질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오온은 영원하지 않고(무상) 자아가 아니다(무아).” 이 오온은 한 개인을 다섯 가지의 무더기(몸, 느낌, 인식, 활동적 생각, 의식)로 분리한 것을 나타냅니다. 몸 무더기는 루빠(rupa)라 부릅니다. 즐겁고 괴로운 것은 모두 느낌 무더기이며 웨다나(vedana)라 부릅니다. 기억과 인식은 산냐(sanna)라 부릅니다. 활동적 생각은 상카라(sankhara)라 부릅니다. 여섯 가지 감각을 통해 이런저런 대상을 알 수 있는 의식은 윈냐나(vinnana)라 부릅니다. ‘루빠, 웨다나, 산냐, 상카라, 윈냐나’라고 하는 이 다섯 가지 무더기를 ‘오온’이라 부릅니다. 이 오온은 영원하지 않고, 이 오온에는 자아가 없습니다. 이 가르침이 붓다께서 가장 강조하신 부문입니다. 이 오온은 무상합니다. 끊임없이 흐르고, 끊임없이 변합니다. 오온에 자아는 없습니다. 오온은 끊임없이 흐르므로 아무도 그것들을 ‘나’나 ‘내 것’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I shall summarize it once again. Keep this brief statement in mind. The Buddha stressed more than any other the teaching that all things are impermanent and that nothing can be considered to be “me” or “mine”. 다시 한 번 요약하겠습니다. 마음속에 이 간단한 말을 간직하십시오. 붓다께서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나’나 ‘내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가르침을 그 어떤 것보다 더 강조하셨습니다.
11) Now the next thing we shall examine is this: “Whom did the Buddha teach that we should believe?” 11) 이제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는 다음 질문입니다. “붓다께서는 우리가 누구를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까?” IF YOU ARE asked this, then answer with the Buddha’s advice from the Kālāma Sutta. We are to believe what we clearly see for ourselves to be the case. Now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what is meant by the expression! “seeing clearly”. It means seeing clearly without needing to use reasoning, without needing to speculate, without needing to make assumptions. We should see, as clearly as we see in the case of a present physical object, that, taking this and doing this, this effect is produced. This is the meaning of “seeing clearly”. There is no need to rely on reasoning or supposition. In Buddhism, we are taught not to believe anyone, not to believe anything, without having seen clearly for ourselves that the truth in question is so. 이 질문을 받았다면, 칼라마경에 기록된 붓다의 말씀으로 대답하십시오. 우리는 자신이 명확히 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명확히 본다’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명확히 본다는 것’은 추론할 필요가 없고 사색할 필요도 없으며 가설을 세울 필요도 없이 분명히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취하고 이것을 행하면 이런 결과가 생긴다’는 것을 현재 물리적 대상의 사실에서 보는 것과 같이 명확히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명확히 본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추론이나 가설에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제기된 진리가 그렇다는 것을 자신이 명확히 보지 않았다면, 어떤 누구도 믿지 말고 어떤 것도 믿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We can see what is meant here from the following questions. Why are we warned not to believe the Tipitaka (the Buddhist Canon)? not to believe a teacher? not to believe what is reported or rumoured? not to believe what has been reasoned out? not to believe what has been arrived at by means of logic? The principles are a help towards right understanding, because all blind credulity is foolishness. Suppose we were to open the Tipitaka and read some passage and then believe it without thinking, without testing it, without any critical examination. This would be foolish belief in the Tipitaka, which the Buddha condemned. Believing what a teacher says without having used our eyes and ears, without criticizing, and without having seen for ourselves that what he says is really so, this is what is meant here by “believing a teacher”. It is the same with believing any report or rumour that happens to arise. “Believing in what has been arrived at by way of logic” means that, having learn how to reason correctly and being experienced in reasoning we come to the conclusion that a certain proposition must be logically so. But this is still not good enough; we are not to put our trust in this sort of reasoning. 다음 질문에서 이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왜 경전(불교 경전)을 믿지 말라고 경고할까요? 왜 스승을 믿지 말라고 할까요? 왜 전해지는 말이나 소문을 믿지 말라고 할까요? 왜 추론된 것을 믿지 말라고 할까요? 왜 논리로 도달된 결론을 믿지 말라고 할까요? 모든 맹목적 믿음은 어리석은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바른 이해를 돕기 위함입니다. 경전을 펴서 어떤 구절을 읽은 후, 생각해 보지도 않고 시험해 보지도 않고 진지하게 검토해 보지도 않고 그 구절을 바로 믿는다고 해봅시다. 경전에서 믿지 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러한 맹목적 믿음을 붓다께서는 나무라신 것입니다. 눈과 귀를 사용하지 않고 비판도 없고 자신이 직접 보고 이해함도 없이, 스승의 말이기에 정말로 그렇다고 믿는 것이 여기서(깔라마 경) 의미하는 ‘스승을 믿는 것’입니다. 전해지는 말과 소문을 믿는다는 것도 이와 같은 의미입니다. ‘논리로 도달된 결론을 믿는다’는 것은, 바르게 추론하는 방법을 배우고, 바르게 추론하여, 제기된 문제가 논리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임에 틀림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논리적 결론을 믿는 것도 아직 충분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종류의 추론도 믿지 말아야 합니다. But here we must be careful and take good note that this discourse does not forbid us to read the Tipitaka. Nor does it forbid us to consult a teacher, to listen to reports and rumours, or to use logical reasoning. Rather it means that although we may have read, listened, and heard, we should not simply accept what is offered in these ways unless we have first thought it over, considered it carefully, fathomed it out, examined fully, and seen clearly for ourselves that it really is so. 그러나 여기서 이 가르침은 경전을 보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주의해야 합니다. 스승에게 조언을 구하지도 말고, 말이나 소문을 듣지도 말며, 논리적 추론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경전을 보고 조언을 듣고 말을 듣더라도 단순히 바로 받아들이지 말고, 면밀히 조사하고 주의 깊게 고찰하고 통찰하고 완전히 검토하여 자신이 직접 정말로 그렇다는 것을 분명히 보고 안 다음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For instance, the Buddha taught that greed, anger, and delusion are the causes that give rise to suffering. If we ourselves are not yet acquainted with greed, anger, and delusion, then there is no way that we can believe this, there is no need to believe it, and to believe it would, in such a case, be foolish. But when we know ourselves what greed is like, what anger is like, and what delusion is like; and that whenever they arise in the mind, they produce suffering as if they were fires burning us; then we can believe on the basis of our own experience. 예를 들면, 붓다께서는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이 고(괴로움)를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아직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을 잘 알지 못한다면 이 말씀을 믿을 수 있는 방법이 없고, 믿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이 말씀을 믿는 것은 바보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갈망이 무엇과 같고 미워함이 무엇과 같고 미혹이 무엇과 같은지 자신을 잘 알고, 마음에 그것들이 일어날 때마다 마치 그것들이 자신을 불태우는 것과 같다는 것을 잘 알 때에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하여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So what the Buddha taught in this connection appears in the Tipitaka as follows. Having read or having heard something, we must investigate until we have seen clearly the fact being taught. If still we don’t see it clearly, we must fall back on reasoning and then leave it for a while. So to start with, we shall believe and practise no more than we have seen clearly to be the case. Then gradually, we shall come to believe and see more and more clearly. This is a very popular teaching of the Buddha. If someone from another country asks you about it, do explain it properly. If you explain it wrongly, you may misrepresent the Buddha’s teaching. Not believing the Tipitaka, not believing the teacher, not believing reports and rumours, not believing reasoning by way of logic - these have a hidden meaning. We must search for it. To believe straight away is foolishness. The Buddha condemned this firmly and definitely. He told us not to believe until we have put it to the test and have come to see it clearly. Then we may believe. 그와 같이 이 점에 관해서 붓다께서 가르치신 것이 경전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것을 읽거나 들으면, 가르쳐진 그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을 때까지 조사해야 한다. 아직 그것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이성에 의지하여 당분간 놓아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선 사실을 분명히 보고 알 경우에만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점차적으로 점점 더 분명히 믿고 보게 됩니다. 이것은 붓다께서 일반인들에게 매우 널리 가르치신 것입니다. 외국인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묻는다면 올바르게 설명하십시오. 그릇되게 설명하면 붓다의 가르침을 잘못 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경전을 믿지 말고, 스승을 믿지 말고, 말이나 소문을 믿지 말고, 논리적 추론을 믿지 말라는 것에는 감추어진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곧바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믿음(맹신)입니다. 붓다께서는 맹신을 단호하고 분명하게 나무랐습니다. 붓다께서는 가르침을 시험해 보고 명확히 알게 될 때까지 믿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명확히 안 다음에는 믿어도 좋습니다. To believe straight away is foolishness; to believe after having seen clearly is good sense. That is the Buddhist policy on belief: not to believe stupidly, not relying only on people, text-books, conjecture, reasoning, or whatever the majority believes, but rather to believe what we see clearly for ourselves to be the case. This is how it is in Buddhism. We Buddhists make it our policy. 곧바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믿음입니다. 명확히 보고 안 다음에 믿는 것이 현명합니다. 이것이 불교인의 믿음에 대한 자세입니다. 즉 바보같이 믿지 말고, 사람, 책(경전), 추측, 추론 또는 다수 견해(믿음)에 의지하지 말고, 사실을 자신이 직접 명확히 보고 안 다음에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태도입니다. 불교인이 불교의 방책(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12) Next the question, “How do the minds of an ordinary lay person and a true Buddhist differ?” 12) 다음 질문입니다. “일반 재가자의 마음과 진정한 불교인의 마음은 어떻게 다릅니까?” NOW WE SHALL look at a point which will give some idea of the difference in level between the mind of an ordinary lay person and the mind of a true Buddhist. “Ordinary lay person” means one who has never been a proper Buddhist and knows nothing of real and genuine Buddhism. An ordinary lay person is a Buddhist at most by name, only according to the records and according to the register, through having been born of parents who were Buddhists. This means he is still an ordinary lay person. Now, to be a “true Buddhist”, to be an ariyan (one well advanced in practice, a noble one) a person must meet the requirement of having right understanding about the various things around him to a far higher degree than the ordinary lay person has. 이제 ‘일반 재가자의 마음’과 ‘진정한 불교인의 마음’ 사이에 그 수준이 어떻게 다른지 파악할 수 있는 점을 살펴봅시다. ‘일반 재가자’는 결코 올바른 불교인이 아니었으며 진실하고 진정한 불교를 모르는 자를 의미합니다. ‘일반 재가자’는 불교 집안에 태어나서 불교인 명부에 기록되고 등재되어 있기만 한 이름뿐인 불교인입니다. 이름뿐인 불교인은 아직 ‘일반 재가자’입니다. 진정한 불교인, 즉 아리얀(성자, 높은 실천행을 하는 고귀한 자)이 되기 위해서는 ‘일반 재가자’보다 훨씬 더 높은 정도로 주위에 있는 다양한 사물을 바르게 이해하는 요건이 채워져야 합니다. The Buddha said humorously, “Between the view of the ariyan and the view of ordinary lay people there is an enormous difference.” Thus, in the view of the ariyans, in the ariyan discipline, singing songs is the same thing as weeping; dancing is the antics of madmen; and hearty laughing is the behaviour of immature children. The ordinary lay person sings, laughs, and enjoys himself without noticing when he is weary. In the discipline of the ariyans, singing is looked upon as being the same as weeping. If we observe a man who sings and shouts at the top of his voice, it not only looks the same as weeping, but, furthermore, it stems from the same emotional conditions as does weeping. As for dancing, this is the behaviour of madmen! If we are just a little observant, we will realize as we are getting up to dance, that we must surely be at least ten percent crazy or else we couldn’t do it. But because it is universally considered something pleasant, we don’t see it as the behaviour of lunatics. Some people like to laugh; laughter is something enjoyable. people laugh a lot, even when it is not reasonable or appropriate. But laughing is regarded by the ariyan, and in their discipline, as the behaviour of immature children. So if we could laugh less, it would be a good thing, and not to laugh at all would be even better. 붓다께서는 유머러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리얀(성자)의 관점과 일반 재가자의 관점 사이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그런 까닭에 아리얀(성자) 또는 아리얀 수행자가 보면, 노래 부르는 것은 우는 것과 같습니다. 춤추는 것은 정신 나간 사람의 기괴한 행동과 같습니다. 마음껏 웃는 것은 미숙한 아이의 행위와 같습니다. 일반 재가자는 따분할 때 예고 없이 노래하고 웃고 즐깁니다. 아리얀 수행자에게는 노래하는 것은 우는 것과 같이 보입니다. 목청껏 소리 높여 노래하고 외치는 사람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우는 것과 같이 보일 뿐만 아니라 우는 것과 같은 감정 상태에서 그런 행위가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춤추는 것은 정신 나간 사람의 행위입니다! 조금만 주의 깊게 관찰해 보면 사람들은 일어나서 춤추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확실히 적어도 10% 정도는 미쳐야 춤출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춤추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즐거운 것이라고 보편적으로 간주하므로 정신 나간 행동으로 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웃기를 좋아하고 웃음을 유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많이 웃고, 심지어 온당하지 않고 적절하지 않은 때에도 많이 웃습니다. 그러나 아리얀(성자)이나 아리얀 수행자에게는 웃는 것은 미숙한 어린이의 행위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적게 웃을 수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전혀 웃지 않는다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These are illustrations of the way in which the ariyan discipline differs from the traditions of ordinary lay people. According to the traditions of ordinary people, singing, dancing, and laughing are of no consequence and are normal events, while in the ariyan discipline they are looked upon as pathetic and eval!uated accordingly. Such is the view of one whose mind is highly developed. 이것들이 아리얀 수행자가 ‘일반 재가자’의 생활방식과 다른 점입니다. 일반인의 관점에 따르면 노래하고 춤추고 웃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 정상적인 행동인 반면, 아리얀 수행자에게는 그것은 연민을 자아내는 애처로운 행동으로 보여 집니다. 이러한 것이 높게 계발된 마음이 있는 자의 관점입니다. The Buddha is not saying, do not do such things when we want to, but only wants us to know that there are higher and lower ways to behave, and that we need not do unnecessary things. When we are not yet ariyans, we may want to try out such lower forms of behaviour. If we do give them a try, we will realize that they are sometimes amusing, but in the end we’ll get tired of them. Then we can raise ourselves to the level and discipline of the ariyans. 붓다께서는 우리가 그런 행동(노래하고 춤추고 웃는 것 등 )을 원할 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단지 ‘더 높고 더 낮은 행위 방식이 있으며 불필요한 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생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아직 아리얀(성자)이 아닐 때에는 그러한 낮은 형태의 행위를 하려고 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행동하면 그것이 즐겁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들이 싫증날 것입니다. 그러면 아리얀(성자)의 행위 방식(규율)으로 자신의 수준을 높일 수 있습니다. Some people don’t like to hear about “discipline”. They worry that restraining themselves might lead to dukkha. However, trying to control oneself in order not to follow one’s moods is an important principle in Buddhism. To hold down the body and mind so that they don’t follow such moods is not dukkha. Rather, this is the way to defeat dukkha. We must find means to avoid falling under the oppression of selfish feelings or defilements. We should set our minds to not allowing the defilements to incite and master us. Take a look at dancing and see how much the defilements goad us and master us and have us in their control. Is this freedom? 어떤 사람은 ‘규율’에 대해 듣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규제하는 것이 둑카(고)로 이끌지 모른다고 염려합니다. 그러나 기분에 따라 행동하지 않도록 자신을 규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불교에서 중요한 원칙입니다. 자신의 기분에 따르지 않도록 몸과 마음을 제지하는 것은 둑카(고)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둑카(고)를 이기는 길입니다. 자기본위적(이기적) 느낌 또는 오염원의 압박을 받지 않는 수단을 찾아야 합니다. 오염원이 부추기고 지배하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굳혀야 합니다. 춤추는 것을 보십시오. 오염원이 얼마나 많이 꼬드기고 지배하여 그에 따르게 하는지 보십시오. 이것이 자유로움일까요? It then occurs to us that we ought to improve our status somewhat. Don’t be an ordinary lay person forever! Apply for admission into the society of the Buddha, that is, have knowledge, intelligence, awareness, and understanding, so that suffering may be diminished. Avoid making things unnecessarily hard and fruitless for yourself. This is the reward you will reap; you will rise from the level of the ordinary lay person to become a true Buddhist, an ariyan dwelling in the ariyan discipline. The Buddha hoped there would come to be many ariyans, many who would not remain ordinary worldlings forever. 그러면 자신의 상태를 어느 정도 개선시켜야 하다는 생각이 떠오를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일반 재가자’로 살아가지는 마십시오. 붓다의 계층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원해 보십시오. 즉, 고(괴로움)를 줄이도록 지식과 지혜와 알아차림과 이해를 갖도록 해 보십시오. 불필요하게 성가시고 무익한 일을 스스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일반 재가자’의 수준에서 ‘아리얀 규율’에 머무는 아리얀(성자), 즉 ‘진정한 불교인’으로 향상될 것입니다. (자신을 규제하기 위해 노력하면) 여러분이 받을 보답은 이것입니다. 붓다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일반 재가자로 남지 않고 아리얀(성자)들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13) Now I am going to talk about the Path. Suppose you are asked, “Which way of practice constitutes walking the ordinary path and which the shortest and quickest path?” 13) 이제 (고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다음 질문을 받았다고 해봅시다. “어떤 실천을 하는 길이 ‘보통길’이고 어떤 길이 ‘지름길’입니까?” WE MIGHT ANSWER “The Noble Eightfold Path” — of which you have already heard — namely, right understanding, right aim, right speech, right action, right livelihood, right effort, right mindfulness, and right concentration. This is called the Noble Eightfold Path. It has a most orderly arrangement which can be grouped under the aspects of morality, concentration, and insight. It forms a great system of practice, which we refer to as walking the ordinary path. It is for people who cannot take the quicker path. It is not a wrong path, it is the right path; however, it is on the ordinary level and takes a long time. 여러분은, 바른 이해, 바른 목표(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및 바른 집중을 이미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고귀한 여덟 가지 길’, 즉 팔정도라고 부릅니다. 이 팔정도는 계를 지키고, 고요함을 계발하고, 지혜를 계발하는 세가지, 즉 계,정,혜의 부문으로 그룹화하여 가장 잘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계정혜는 ‘보통길’이라고 부르는 실천(수행)의 탁월한 체계를 이루며, 더 빠른 길을 걸을 수 없는 사람을 위한 길입니다. 이 길은 그릇된 길이 아니라 바른 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수준이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길입니다. The Buddha has taught a short cut as well. He said that when we do not grasp at the six sense organs (āyatanas) and the things associated with them as being self-entities, then the Noble Eightfold Path will simultaneously arise of its own accord in all of its eight aspects. This is a most important and fundamental principle of Dhamma. 붓다께서는 또한 지름길도 가르치셨습니다. 붓다께서는, 여섯 감각기관과 이와 관련된 것을 ‘자아 실체’가 있는 것으로 움켜쥐지 않는다면, 팔정도가 그 여덟가지 모든 면에서 저절로 동시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담마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First of all, we must recall that the six sense organs (āyatanas) are the eye, ear, nose, tongue, body, and mind. Each of these six organs has five aspects. In the case of the eye, the first aspect is the eye itself; the second is the visual object that makes contact with the eye; the third is the consciousness (viññāna) that comes to know that visual object making contact with the eye; the fourth is the action of contact (phassa) effected between consciousness, eye, and visual object; and the fifth is the pleasurable or painful mental feeling (vedanā) that may arise as a result of the contact. There are five aspects. The eye has these five aspects. The ear has five also, the nose has five, and so on. Each one of these plays a part in causing us to become unmindful and to grasp at something as being self. Thus we grasp at the consciousnessness that comes to know and see via the eye. Because we can be aware of it, we jump to the conclusion that it must be a self. In this way we grasp at and cling to eye-consciousness as being the self, or grasp at eye-contact (fourth aspect) as self, or cling to eye-contact-feeling (fifth aspect), whether pleasant or unpleasant, as self. Sometimes it happens that a melodious sound comes to the ear, and we grasp at the awareness of the melody as being a self. Sometimes a tasty flavour comes to the tongue, and we may grasp at the awareness of tastiness as being a self. 우선, 여섯 감각기관은 눈, 귀, 코, 혀, 몸 및 마음이라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 여섯 감각기관 각각에는 다섯 가지 면이 있습니다. 눈의 경우에, 첫 번째는 눈 그 자체이고, 두 번째는 눈에 접촉하는 ‘시각대상’이며, 세 번째는 시각대상이 눈에 접촉하는 것을 아는 의식(윈냐나)이고, 네 번째는 의식과 눈과 시각대상 사이에 일어나는 접촉작용(팟사)이며, 다섯 번째는 접촉작용의 결과로 일어나는 즐겁거나 즐겁지 않은 정신적 느낌(웨다나)입니다. 눈에는 이 다섯 가지 면이 있습니다. 귀에도 다섯 가지 면이 있으며, 코 등에도 각각 다섯 가지 면이 있습니다. 이것들의 각각은 사람을 부주의하게 하는 부분으로 작용하여 어떤 것을 자아로 움켜쥐게 합니다. 그런 까닭에 눈을 통해 알게 되고 보는 의식을 움켜쥡니다. 그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자아임에 틀림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런 식으로 ‘눈의 의식(안식)’를 자아로 움켜쥐고 집착하거나, ‘눈의 접촉(네 번째 면)’을 자아로 움켜쥐거나, 즐겁든 즐겁지 않든 ‘눈의 접촉에 의한 느낌(다섯 번째 면)’을 자아로 집착합니다. 때때로 선율이 아름다운 소리가 귀에 들어오면 ‘그 소리를 아는 것’을 자아로 움켜쥡니다. 간혹 혀로 좋은 맛을 느끼면 ‘그 맛을 아는 것’을 자아로 움켜쥐기도 합니다. Each of the six sense organs has five aspects, making altogether thirty aspects. Any of these can be grasped at as being a self, clung to with the greatest ease many times over in a single day. As soon as we grasp and cling, suffering results. We have erred and have enmeshed ourselves in a mass of suffering. This is not walking the Path. The Buddha, however, taught us not to grasp at the six sense organs and the things connected with them. By keeping constant watch, we shall come to see that none of them is a self, and the Noble Eightfold Path will exist in us at that very same moment. At that moment there will exist right understanding, right aim, right speech, right action, right livelihood, right effort, right mindfulness, and right concentration. To practise non-grasping at the six sense organs is to cause the entire Eightfold Path to arise immediately. The Buddha considered this a short cut. 여섯 감각기관은 각각 다섯 면이 있으므로, 모두 30가지 면이 있습니다. 이것들 중의 어떤 것이라도 자아로 움켜쥘 수 있으며, 하루에도 수없이 쉽게 움켜쥐고 집착합니다. 자아로 움켜쥐고 집착하자마자 둑카(고)가 따라옵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고(괴로움)에 헤매고 말려들어 빠집니다. 이런 생활은 (고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아닙니다. 붓다께서는 여섯 감각기관과 그것에 관련된 것을 움켜쥐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지속적으로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그것들의 어떤 것도 자아가 아님을 알게 되고, 바로 그 순간에 팔정도가 현존하게 됩니다. 즉, 그 순간에 바른 이해, 바른 목표(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및 바른 집중이 있게 됩니다. 여섯 감각기관을 움켜쥐지 않는 실천(수행)은 팔정도가 즉시 생기게 합니다. 붓다께서는 이것을 ‘지름길’이라고 간주하셨습니다. In one of his discourses the Buddha taught the quickest short cut — emptiness. Not to hold that there is selfhood regarding eye, ear, nose, tongue, body, or mind causes the arising of the entire Noble Eightfold Path in a single moment. If we do not decide to take the short cut, then we study the Noble Eightfold Path of morality, concentration, and wisdom (insight). To practise it from the very beginning, going gradually and by slow degrees, uses up much time. So we find that in Buddhism there is an ordinary way and there is a short cut. 법문 중의 하나를 보면, 붓다께서는 가장 빠른 지름길, 즉 빔(空)을 가르치셨습니다. 눈, 귀, 코, 혀, 몸 및 마음에 관련된 것에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지 않으면, 바로 그 순간에 완전한 팔정도가 생깁니다. 지름길로 가려고 하지 않으면, 계를 지키고 고요함을 계발하고 지혜를 계발하는 계정혜의 팔정도를 공부하면서 걸어 갈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점차적으로 느리게 걸어가면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보통길’과 ‘지름길’이 있습니다.
14) Now I shall say something on kamma in Buddhism, by asking, “What role does kamma play in Buddhism?” 14) 이제 다음 물음을 통해 불교에서 말하는 업(깜마)에 대해 언급해 보겠습니다. “불교에서 업(깜마)은 무슨 역할을 합니까?“ MANY WESTERNERS HAVE written books on Buddhism, and they seem to be most proud of the chapters dealing with kamma (Sanskrit, karma) and rebirth. But their explanations are wrong, quite wrong every time. Those Westerners set out to explain kamma, but all they really say is that good kamma is good and evil kamma is evil. “Do good, receive good; do evil, receive evil”, and nothing more, is exactly the same doctrine as is found in every religion. This is not kamma as it is taught in Buddhism. 많은 서양인들이 불교에 관한 책을 쓰면서 업(깜마, 산스크리트어로 까르마)과 재탄생을 다루는 장을 가장 즐기고 만족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서양인들의 설명은 잘못되었으며, 매번 아주 잘못되고 있습니다. 업(깜마)을 설명하는 시도가 있으나, 그들이 사실 말하는 모든 것은 ‘선업은 좋고 악업은 나쁘다’는 설명입니다. “선을 행하면 선을 받고, 악을 행하면 악을 받는다”는 것은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것과 똑 같은 교의(가르침)이며, 그 이상은 어떤 설명도 없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가르치는 업(깜마)이 아닙니다. With rebirth it is the same. They make their assertions just as if they had seen with their own eyes the very same individuals being reborn. This misrepresents the Buddha’s main message, which teaches the non-existence of “the individual”, of “the self”. Even though “I” am sitting here now, yet there is no individual to be found. When there is no individual, what is there to die? What is there to be reborn? The Buddha taught the non-existence of “the individual”, of “the person”. Thus, birth and death are matters of relative truth. The writers of books entitled “Buddhism” generally explain kamma and rebirth quite wrongly. 재탄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눈으로 똑같은 개체가 태어난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재탄생을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붓다께서 가르치고자 하는 주된 메시지, 즉 ‘개체나 자아가 없다’는 가르침을 잘못 전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라고 하는 것이 지금 여기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지금 여기에서 발견되는 어떠한 개인(개체)도 없습니다. 개인(개체)이 없을 때, 무엇이 죽을 수 있을까요? 무엇이 재탄생할 수 있을까요? 붓다께서는 ‘개인’이나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탄생과 죽음은 상대적 진리의 문제입니다. ‘불교’에 관련된 책의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업과 재탄생을 아주 잘못되게 설명합니다. Do pay close attention to this matter of kamma. To be the Buddhist account it must deal with the cessation of kamma, not just with kamma itself and its effects - as found in all religions. To be the Buddha’s teaching it must deal with the cessation of kamma. 이 업(깜마)의 문제를 주의깊게 보십시오. 불교의 설명이라면 그것은 모든 종교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한 업과 과보로서가 아니라 업의 소멸을 다루어야 합니다. 붓다의 가르침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업의 소멸을 취급해야 합니다. A sabbakammakkhayam-patto is one who has attained the cessation of all kamma. The Buddha taught that kamma ceases with the ceasing of lust, hatred, and delusion (rāga, dosa, and moha). This is easy to remember. Kamma ceases when lust, hatred, and delusion cease, that is, when the mental defilements cease. If lust, hatred, and delusion do not cease, kamma does not cease. When lust, hatred, and delusion do cease, old kamma ceases, no present kamma is produced, and no new future kamma is produced — thus kamma past, present, and future ceases. When a person puts an end to lust, hatred, and delusion, kamma ceases. This is how it must be explained. Only such an account of kamma can be called the Buddhist account. 삽바깜막카얌-빳또(sabbakammakkhayam-patto)는 모든 업의 소멸을 달성한 자를 말합니다. 붓다께서는 업은 갈망(라가)과 미워함(도사)과 미혹(모하)이 그치면 사라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기억하기 쉽습니다.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이 그치면, 즉 정신적 오염원이 그치면 업(깜마)은 그칩니다.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이 그치지 않으면 업은 그치지 않습니다.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이 그칠 때, 과거업이 그치고 현재업이 생성되지 않으며 새로운 미래업이 생성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과거업과 현재업과 미래업이 그칩니다. 사람이 갈망과 성냄과 미혹을 그칠 때, 업(깜마)이 그칩니다. 이것을 설명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업(깜마)을 설명할 때만이 ‘불교적 설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So we find there is a third kind of kamma. Most people know of only the first and second kinds of kamma, good and evil kamma. They don’t know yet what the third kind of kamma is. The Buddha called the first kind of kamma black or evil kamma, and the second kind white or good kamma. The kind of kamma that can be called neither-black-nor-white is that which puts an end to both black kamma and white kamma. This third kind of kamma is a tool for putting a complete stop to both black and white kamma. The Buddha used these terms “black kamma”, “white kamma”, and “kamma neither-black-nor-white”. This third type of kamma is kamma in the Buddhist sense, kamma according to Buddhist principles. As has been said, to put an end to lust, hatred, and delusion is to put an end to kamma. Thus, the third kind of kamma is the ending of lust, hatred, and delusion; in other words, it is the Noble Eightfold Path. Whenever we behave and practise in accordance with the Noble Eightfold Path, that is the third type of kamma. It is neither black nor white; rather it brings to an end black kamma and white kamma. It is world-transcending (lokuttara), above good and above evil. 그러므로 세 번째 부류의 업(깜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업과 선업이라는 첫 번째 부류의 업과 두 번째 부류의 업만 알고 있고, 아직 세 번째 부류의 업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붓다께서는 첫 번째 부류의 업을 ‘검은 업’ 또는 ‘악업’이라고 하셨고, 두 번째 부류의 업을 ‘흰 업’ 또는 ‘선업’이라고 하셨습니다. ‘검지도 희지도 않은 업’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류의 업은 ‘검은 업’과 흰 업‘을 모두 그치게 하는 업입니다. 이 세 번째 부류의 업은 ’검은 업‘과 ’흰 업‘을 모두 완전히 멈추게 하는 도구입니다. 붓다께서는 ’검은 업‘, ’흰 업‘ 및 ’검지도 희지도 않은 업‘이란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세 번째 부류의 업이 불교적 의미의 업이고, 불교의 원리에 따른 업입니다. 말한 바와 같이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을 그치는 것이 업을 그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 번째 부류의 업은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의 그침‘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팔정도‘입니다. ’팔정도‘에 따라 행동하고 실천할 때, 그것이 세 번째 부류의 업입니다. 그것은 검지도 희지도 않은 업이며, 더구나 ’검은 업‘과 ’흰 업‘을 그치게 하는 업입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넘어선 초세속(로꿋따라)입니다. This third type of kamma is never discussed by Westerners in their chapters on “Kamma and Rebirth”. They get it all wrong; what they expound is not Buddhism at all. To be Buddhist, they should deal with the third type of kamma, the kamma that is capable of bringing to an end lust, hatred, and delusion. Then the whole lot of old kamma — black kamma and white kamma — ends as well. 세 번째 부류의 업은 서양인들의 책에 있는 ‘업과 재탄생’이라는 장에서 결코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업을 완전히 모릅니다. 그들이 설명하는 업은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인이라면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을 그치게 할 수 있는 세 번째 부류의 업을 다루어야 합니다. 세 번째 업을 실천할 때, 과거의 모든 업, 즉 ‘검은 업(악업)’과 ‘흰 업(선업)’도 또한 끝납니다. Now let us say something more about this third kind of kamma. In this connection the Buddha said, “I came to a clear realization of this through my own sublime wisdom.” This teaching of the distinctly different, third type of kamma was not taken over by the Awakened One from any existing creed or religion. It is something he came to know with his own insight and then taught to all. So we ought to keep in mind that the teaching of this third type of kamma is the real Buddhist teaching on kamma. Any manual on kamma in Buddhism, any book entitled “Kamma and Rebirth”, ought to be written on these lines. Do study closely and take an interest in the Buddhist explanation of kamma. That account of good and bad kamma is found in all religions. Buddhism has it too. It tells us that doing good is good and doing evil is evil. They all teach the same thing. But the Buddha said that merely producing good kamma does not extinguish mental suffering completely and absolutely, because one goes right on being infatuated by and grasping at good kamma. In other words, good kamma still causes one to go round in the cycle of birth and death, albeit in good states of existence. It is not complete quenching, coolness, nibbāana. 그럼 세 번째 부류의 업에 대해 좀 더 말해 봅시다. 이 세 번째 부류의 업과 관련하여 붓다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 자신의 지고한 지혜를 통해 나에게 이것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일어났다.” 독특하게 다른 이 가르침, 즉 세 번빼 부류의 업은 당시의 어떤 교의나 종교의 깨달은 자에게서도 전수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붓다 자신의 통찰을 통해 아셨고,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번째 부류의 업에 대한 가르침은 업에 대한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임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불교에서 업에 대한 어떠한 ‘매뉴얼’도, 즉 '업과 재탄생‘을 다루는 어떠한 책도 이 세 번째 부류의 업을 언급해야 합니다. 업에 대한 불교의 설명을 가깝게 접하여 공부하고 흥미를 가지십시오. 선업과 악업에 대한 설명은 모든 종교에 있습니다. 불교에도 있습니다. 이것은 ’선한 행위는 좋고 악한 행위는 나쁘다‘는 것으로서, 모든 종교에서 동일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단순히 선업을 생성하는 것은 선업에 매혹되고 선업을 움켜쥐는 길로 가기 때문에 정신적 고통(둑카)을 완전하고 남김없이 소멸시키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선업은 나은 상태로 존재하게 하지만, 아직 탄생과 죽음의 사이클을 돌게 합니다. 이것은 완전한 식음과 서늘함, 즉 열반(닙바나)이 아닙니다. So there is a kamma taught exclusively by the Buddha, a third type that does away with all kamma and makes an end of lust, hatred, and delusion. It is through this third type of kamma that one attains nibbāna. 그러므로 붓다께서만 가르치신, 모든 업을 소멸시키고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을 그치게 하는 세 번째 부류의 업이 있습니다. 이 세 번째 부류의 업을 통해서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15) I wish now to direct your attention to a matter in which I feel you should be particularly interested. I shall put the question, “Would a person necessarily have to have heard the Buddha-Dhamma from the Buddha himself in order to be able to put an end to suffering?” 15) 여러분이 특히 흥미를 가질 문제로 주의를 돌려 보겠습니다. 다음 질문이 있습니다. “괴로움(둑카)의 그침에 이를 수 있으려면 반드시 붓다 자신으로부터 ‘붓다담마(붓다의 가르침)’를 들어야 합니까?”
THERE HAVE BEEN some who have argued vehemently that we should have heard the Dhamma from the Buddha himself, that only then could we really understand. But the Buddha himself said that there were some who, though they had not heard the Dhamma directly from him, would still be able to walk the right path. There were some who, not having heard it from the Buddha, would nevertheless, through continuous reflection, consideration, and study, through constant observation and practice, be able to walk the right path. 붓다 자신으로부터 담마를 들어야만 정말로 이해할 수 있다고 격렬하게 논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자신으로부터 직접 담마를 듣지 않았지만, 바른 길을 여전히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붓다로부터 담마를 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반성하고 숙고하고 공부하면서 부단히 관찰하고 실천하여,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So we ought to raise our hands in homage and immerse ourselves in the sincerity of the Buddha that he did not make the Dhamma his own monopoly, that he did not set himself up as indispensable. 그러므로 우리는 그 자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세우지도 않고 담마를 자신의 독점물로 하지 않은 붓다의 진실에, 손을 올려 경의를 표하고 몰두해야 합니다.
16) Here is a question which asks, “If doubt arises as to whether a certain teaching is the Buddha’s or not, how can we settle the matter?” 16) 여기에 다음 질문이 있습니다. "어떤 가르침(담마)이 붓다의 가르침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심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THE BUDDHA LAID down a principle for testing: examine and measure against the Suttas (discourses), compare with the Vinaya (discipline). This principle is based on not believing anything second hand and not taking anyone else as an authority. If doubt arises concerning a certain statement of some person who claims to have heard it from the Buddha or from a learned group of elders, which he says leads to the cessation of suffering, the Buddha said that it must be tested in two ways: (1) Examine and measure it against the suttas. The suttas are a setting out of the various discourses which constitute a distinct line. If an utterance will not fit to this line, it must be discarded. (2) Compare it with the Vinaya. The Vinaya is an exemplary model, a standard, a fixed system. If the utterance in question will not fit to the system, if it does not conform with the Vinaya, then discard it. 붓다께서는 검사하는 다음 원칙을 제정하셨습니다. '경장(숫따)에 비추어 검토하고 평가하고, 율장(위나야)에 견주어 보라.' 이 원칙은 어떤 매개물도 믿지말고 어떤 다른 사람도 권위자로 취하지 말라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붓다나 학식있는 장로그룹으로부터 들었다고 하면서 고의 소멸로 이끈다고 하는 어떤 말에 의심이 생기면, 다음 두가지 방법으로 검사해 보아야 한다고 붓다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1) '경장(숫따)에 비추어 검토하고 비교하라' 경장에는 다양한 법문이 분류되어 실려 있습니다. 가르침이 이 경장의 법문에 맞지 않으면 버려야 합니다. (2) '율장(위나야)에 견주어 보라' 율장은 모범적인 모델이고, 기준이며, 확정된 규율입니다. 질문에서 가르침이 규율에 맞지 않을 것이면, 즉, 율장(위나야)에 맞지 않으면 그것을 버리십시오.
Don’t trust any bhikkhu, nor any section of Sangha, nor any group of elders, nor any group of learned and practised individuals who claim to have heard such and such from the Buddha. The Buddha always asked that we, before all else, raise a doubt and investigate. Then measure it against the Suttas, does it fit? Compare with the Vinaya, does it conform? 붓다로부터 여차 여차한 말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어떤 빅쿠(승려)도, 수행공동체(승려공동체)의 어떤 종파도, 어떤 장로 그룹도, 유식하고 실천에 능숙한 어떠한 개인의 그룹도 믿지 마십시오. 붓다께서는 (가르침을) 항상 무엇보다 우선 의혹의 대상으로 상정하여 조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경장(숫따)에 비추어 그것이 맞는가? 율장(위나야)과 비교해 그것이 합당한가?' 하고 검토해 보십시오.
This is a means of ensuring that, though Buddhism lasts two thousand years, three thousand years, five thousand years, however many thousands or tens of thousands of years, if this principle remains in use, the religion or Dhamma-Vinaya cannot in any way become distorted or confused. So it is an extremely useful prin-ciple. It is called the Great Standard. It is a teaching of the Buddha laying down the use of testing things against the Suttas and the Vinaya. He did not mention the Abhidhamma (the last “basket” of the Pali Canon). 이것이, 불교가 2천년, 3천년, 5천년, 수천년 또는 수만년이나 아무리 오래 지속된다고 해도 이 원칙이 사용되어 유지된다면, 종교 또는 '담마-위나야'가 여하튼 왜곡되거나 혼란될 수 없음을 보장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극히 유용한 원칙이며, '대 기준'이라 부릅니다. 경장(숫따)과 율장(위나야)에 비추어 의심되는 것들을 검사하도록 제정한 것은 붓다께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논장(아비담마, 팔리 경전의 마지막 꾸러미)을 언급하지는 않으셨습니다.
17) Now we are going to talk about people. We are going to have a closer look at ourselves. "What did the Buddha say people would be like in succeeding ages?" 17) 이제 (다음 질문을 통해) 사람들에 대해 말해 봅시다. 우리 자신들을 더 자세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붓다께서 후대의 사람들이 무엇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THERE IS A discourse in which the Buddha reproves "us people now", meaning each new generation from the time of the Buddha until now, who "rejoice in unrighteous pleasures, are too much given to covetousness, and are leaning towards false doctrines." They find great delight in pleasurable excitement of an unrighteous kind, that is to say, they are far too self-centred. They completely lack awareness, and thus their greed has become intense and excessive. They fall into false doctrines, because they have fallen completely under the power of the mental defilements. 붓다께서 당시부터 지금까지의 각 '새 세대'를 가리키며 '현재 우리들'에게 훈계한 법문이 있습니다. 그 법문에서 후대의 사람들, 즉 '현재 우리들'은 그릇된 즐거움에 기뻐하며, 너무나 많은 탐욕에 물들어 있고, 그릇된 가르침에 기울어져 있다고 하셨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릇된 종류의 즐거운 자극에 크게 기뻐합니다. 다시 말하면 너무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입니다. 또한 알아차림이 완전히 결여되어 탐욕이 강렬하고 과도하게 되었으며, 정신적 오염원의 지배하에 완전히 빠졌기 때문에 그릇된 가르침에 흠뻑 젖어 있습니다.
The Buddha made this statement more than two thousand years ago, yet he uses the term "people of later ages", which extends from when the Master made the observation until the present day. Here we have a duty to look at ourselves in this present age. Aren't people in the world today taking excessive delight in unrighteous pleasures, behaving far too selfishly, and leaning towards false doctrines? Obviously people at present are very different from people at the time of the Buddha. However, if they are to live correctly according to the pattern set by the Buddha, then, although they may take some pleasure in colours, shapes, sounds, scents, and tastes, they will do so with constant mindfulness and right knowledge, and will not let greed become excessive. This means that they will not want the colours, shapes, sounds, scents, tastes, and tactile stimuli more than is necessary, not excessively. The single word "excess", that is to say, more than necessary, signifies the cause of all the upsets, difficulties, and troubles of the world at this time. 붓다께서는 이런 말씀을 2천년보다 훨씬 전에 하셨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이란 말을 사용하셨지만, 현 시대의 우리들에게까지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이 시대의 우리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이 세계 사람들은, 그릇된 즐거움에 과도하게 기뻐하고 있지 않은지? 너무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지 않은지? 그릇된 가르침에 기울어져 있지 않은지? 분명히 현 시대 사람들은 붓다 시대의 사람들과는 매우 다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붓다께서 가르치신 방식에 따라 바르게 산다면, 비록 형색(형상과 색상), 소리, 냄새, 맛 등에 좀 즐거워하더라도 부단한 마음챙김과 바른 앎으로 즐거워 할 것이고 과도한 탐욕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형색, 소리, 냄새, 맛 및 촉감의 자극을 바라지 않을 것임을 의미합니다. '과도'라는 이 하나의 말, 즉 '필요한 것보다 많음'은 이 시대에 세상의 모든 혼란, 곤란 및 곤경의 원인을 나타냅니다.
I have read that in Christianity a person who seeks beyond what is needed is "sinful", is a "sinner". One who merely seeks after more than is necessary is considered by Christian standards to be a sinner. Perhaps we don't yet consider ourselves sinners, because we don't care to or because we really consider ourselves not as yet excessive? Perhaps we think that there is nothing about which we are excessive? This matter can be discussed only with people who are honest with themselves. 그리스도교에서 필요 이상으로 구하는 자는 죄많고,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필요 이상의 것을 단지 구하는 자도 그리스도교의 기준에서는 죄인으로 여깁니다. 아마 우리들은 아직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의하지 않거나 아직 정말로 과도하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 사람들은 과도한 것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 문제는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아야만 알 수 있습니다.
In a very good Tibetan book of parables, all the birds assemble together. They voice their opinions and express their thoughts on the way of Dhamma practice that will bring happiness. Each variety of bird speaks its own mind. In the end, all the birds assembled resolve that, "We will not seek food in excess of what is necessary. This is the ultimate." Finally, they request the whole gathering not to seek more food than necessary. Here the story ends. 매우 유익한 티벳의 우화집을 보면, 모든 새들은 함께 모입니다. 새들은 행복을 가져오는 담마를 실천하는 길에 따라 그들의 견해와 생각을 피력합니다. 다양한 각 새들은 자신의 마음을 말합니다. 결국 모든 새들은 "우리는 필요 이상의 과도한 먹이를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입니다."라는 결론으로 모였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음식을 구하지 않는다는 전체 모임을 열기로 합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납니다.
One ought to consider that seeking more than one needs is a source of suffering and torment for oneself and a source of trouble to other people all over the world. Think it over! Leaning towards false doctrines means recognizing a thing as wrong, yet wanting that wrong thing without feeling fear or shame, because defilements preponderate and overwhelm one. A person confirm!ed in this way of thinking is badly fitted to Dhamma. He is by nature directly opposed to it. So if we want to be free of suffering, we must turn to Dhamma. 사람들은 '필요한 것 이상을 구하는 것이 괴로움의 근원이고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전 세계의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게 하는 근원'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릇된 가르침으로 기우는 것은 사물(또는 사건)을 그릇되게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그릇된 것을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없이 원합니다. 이러한 그릇됨은 오염원이 우세하여 사람을 압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롯되게 생각하는 것은 담마에 아주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연히 담마와 정반대 방향으로 걸어 갑니다.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담마의 방향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18) Now we shall say something about the Buddha. The question has been asked, “To whom did the Buddha pay homage?” 18) 이제 붓다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다음 질문이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누구에게 경의를 표하였습니까?"
THE BUDDHA’S OWN answer was that he paid homage to the Dhamma and he paid homage to a Sangha community with exemplary qualities. A Sangha community who conduct themselves well and practise properly can be said to possess exemplary qualities. So the Buddha respected the Dhamma and a Sangha community of exemplary qualities. We ought to give thought to the fact that even the Buddha himself paid homage to the Dhamma, and if all the members of a community of bhikkhus conducted themselves well and behaved properly as a group, the Buddha paid homage to them as well. 붓다께서는 담마와 모범적인 상가 공동체(수행 공동체)에 경의를 표한다고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잘 처신하고 바르게 실천(수행)하는 상가 공동체는 모범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담마와 모범적인 상가 공동체를 존경하셨습니다. 우리는 붓다께서도 담마에 경의를 표하고, 수행 공동체의 모든 사람이 잘 처신하고 그룹으로 잘 행동하면 그 공동체에도 경의를 표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This can be applied to behaviour at the present time, in our own country Thailand or anywhere in the world. This means we ought to respect the Dhamma. If even the most exalted person paid respect to the training rules and communities that practised well, surely so should we. 이것은 우리나라나 세계의 어떤 나라에서도 오늘날의 행위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담마를 존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존귀한 분조차도 수행 규칙과 잘 실천하는 공동체를 존경하셨다면, 우리도 확실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19) “Where can we find the Buddha?” 19) "붓다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까?"
THE BUDDHA SAID, “Any person who sees the Dhamma sees the Tathāgata. Any person who sees not the Dhamma sees not the Tathā.gata. One who sees not the Dhamma, though he grasp at the robe of the Tathāgata and hold it fast, cannot be said to see the Tathāgata.” “Tathāgata” is the word generally used by the Buddha to refer to himself. 붓다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담마를 보는 자는 따타가따(붓다)를 본다. 담마를 보지 못하는 자는 붓다를 보지 못한다. 담마를 보지 못하는 자는 붓다의 옷자락을 잡아 붙들고 있다 할지라도 붓다를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따타가따'는 일반적으로 붓다께서 그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하신 용어(말)입니다.
This means that the Buddha is not to be found in the outward physical body. Rather, he is to be found in that high quality in the heart of the Buddha which is called Dhamma. That is the part that must be seen before we can say that we have found the Buddha. 이 말씀은 붓다는 외부 육체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외부가 아니라, 담마라고 부르는 붓다의 내부에 있는 고귀한 성품에서 붓다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붓다를 찻았다고 말할 수 있기 전에 보아야만 하는 부분입니다.
When we prostrate ourselves before the Buddha’s image, we dwell on the image, seeing beyond it to the physical body of the Buddha, which the image represents. Then we look beyond the physical body of the Buddha to his mind, and look beyond his mind until we penetrate to the high qualities present in his mind. We see those qualities as the pure, radiant, peaceful Dhamma, devoid of grasping and clinging, perfectly free. Then we can be said to have found the Buddha. 불상 앞에 꿇어 엎드릴 때에는 붓다의 육체를 넘어서 불상이 나타내는 것을 보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붓다의 육체를 넘어서 마음을 보게 되고, 마음을 넘어서 붓다의 마음에 나타나는 고귀한 성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됩니다. 이 고귀한 성품은 순수하고 빛나고 평화로운 담마로, 움켜쥠과 집착이 없는 완전히 해방된 것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 때에 붓다를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 “Does the Buddha exist at this moment or not?” 20) "붓다는 이 순간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IF WE ARE asked this question, we can answer it with this saying of the Buddha, “O Ā.nanda, the Dhamma and the Discipline, which the Tathā.gata has taught and demonstrated, let them be your teacher when I have passed away.” 이 질문을 받았다면 붓다의 다음 말씀으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 오, 아난다여, 따타가따가 열반에 들면, 지금까지 가르치고 설명한 담마와 규율을 스승으로 삼아라."
Even now we are studying Dhamma and Discipline, practising Dhamma and Discipline, deriving the benefits of Dhamma and Discipline. Thus, the Teacher still exists. This stanza is well known because it was spoken by the Buddha as he was about to pass away. Please take special note that it tells us that the Teacher still exists. 지금도 사람들은 담마와 규율을 공부하고 실천하며, 담마와 규율에서 이득(결실)을 얻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도 스승이 있습니다. 이 문구는 붓다께서 열반에 들 때, 말씀하신 것이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스승이 지금도 존재하는지를 말해주는 문구로 간직하기 바랍니다.
21) “Did the Buddha bring about the cessation of his kamma?” 21) " 붓다께서는 자신의 업(깜마)을 소멸하셨습니까?"
IF ASKED THIS, we must be sure not to degrade the Buddha by answering carelessly or recklessly. In fact we can never really vitiate the Buddha, but our words may belittle his worth. 이 질문을 받으면, 부주의하고 무분별하게 대답하여 붓다를 깎아 내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말로서는 붓다의 고귀함을 과소평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실로 붓다의 품성을 결코 오염시키거나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The Buddha must have brought about the complete cessation of his kamma because he wiped out the mental defilements, which is the meaning of “ending kamma”. He transcended every kind of kamma, and it was this very fact that made him famous, that constituted his glory. The sage Gotama had become a sabbakammakkhayam-patto, that is, one who has succeeded in bringing about the cessation of all his kamma. The news of this event spread through India until it reached the adherents of other sects and religions. For instance, a certain brahmin called Bavari sent sixteen disciples to the Buddha, to ask him questions and obtain knowledge from him. Others came to test him. Because of the news that the sage Gotama had become a sabbakammakkhayam-patto, had achieved the complete cessation of his kamma, people in India at that period were full of admiration. They were overjoyed at hearing the words "sabbakammakkhayam-patto”. It was for just this reason that people became so interested in the Buddha. 붓다께서는 정신적 오염원을 완전히 제거하였기 때문에 업(깜마)의 그침을 의미하는 '업(깜마)의 완전한 소멸'을 이루었습니다. 붓다께서는 모든 종류의 업을 초월하였고, 이 사실이 붓다를 유명하게 했고 영광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성자 고따마는 '삽바
We too ought to follow the example of the Buddha and set about the task of putting an end to kamma. 우리도 붓다의 본보기를 따라 업(깜마)을 소멸시키는 일에 착수해야 합니다.
22) “What sort of inner life did the Buddha lead?” 22) "붓다께서는 어떤 종류의 내적 삶을 지냈습니까?"
THE BUDDHA ONCE said concerning himself, “The Tathāgata dwells in the Temple of Emptiness (suññatā-vihāra).” This “temple” is a spiritual temple, not a physical one. “Temple” (vihāra) refers to a spiritual dwelling place, that is, a state of mind. The Temple of Emptiness is an ever-present mental state devoid of any ideas of “self” or “belonging to self”. To dwell in the Temple of Emptiness is to live in full awareness that all things are devoid of selfhood. This is suññatā, emptiness, and what is called the Temple of Emptiness. The Buddha dwelt in the Temple of Emptiness, experiencing supreme bliss continuously. This is what the Master said of himself. 붓다께서는 자신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따타가따는 '빔의 사원(순냐따-위하라)'에 머문다." 여기서 '사원'은 물질적 사원이 아니라 정신적 사원입니다. 사원(위하라)은 정신적 거주처, 즉 마음의 상태를 지칭합니다. 이 '빔의 사원'은 '자아'나 '자아에 속한다'는 어떠한 생각도 없는 '항상 현존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빔의 사원'에 거주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에도 자아가 없다'는 완전한 알아차림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냐따, 즉 '빔'이고, '빔의 사원'이라고 부릅니다. 붓다께서는 항상 최상의 행복을 누리시면서 '빔의 사원'에 거주하셨습니다. 이것은 붓다께서 자신에 대해 한 말씀입니다.
23) "Why is it held that all things are empty, that this world, that every world, is an empty world?"
23) "왜 모든 것은 비었고, 이 세상과 모든 세상은 '빈 세상'이라고 생각합니까?"
FOLLOWERS OF OTHER religions will ask you these questions: "Why do you say the world is empty when it contains all these things? Isn't there matter? Isn't there mind? Isn't the world just full up with things?"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이 여러분에게 이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함유하고 있는데, 왜 세상은 비었다고 하십니까? 물질이 없습니까? 마음이 없습니까? 세상에는 바로 이 모든 것들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The point is that it is empty of any self or of anything belonging to a self. There is nothing that can be taken as being a self or belonging to a self. Self cannot be found in anything, not in mind, nor in matter, nor in the various products that arise out of mind and matter. The Buddha said that the assertion that all things are empty refers to nothing other than the awareness that they are empty of selfhood.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자아도 비었고 자아에 속하는 어떠한 것도 비었다는 것입니다. 자아로 여겨질 수 있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아는 어떠한 것에서도 발견될 수 없습니다. 마음에서도, 물질에서도, 마음과 물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생성물에서도 자아는 발견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비었다'는 말은 '모든 것은 자아가 비었다'고 알아차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붓다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24) “Now, why is a mind in this state of awareness described as an empty or free mind (Thai, cit waang)?” 24) "지금 이 알아차림의 상태에 있는 마음은 왜 ‘빈 마음’ 또는 ‘해방된 마음’(타이어로 칫왕)이라고 합니까? THERE IS A verse in the Texts which says, “That is truly empty which is empty of lust, hatred, and delusion.” A mind is empty (unencumbered, disengaged, or free) when it is free of lust, hatred, and delusion. 경전에 다음 구절이 있습니다.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이 비어 있는 것이 참으로 비어 있는 것이다.” 마음이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에서 해방되면 ‘비어 있는’(방해가 없는, 해방된 또는 자유로운) 것입니다. When, by whatever method or means, a mind has been rendered free of all traces of lust, hatred, and delusion, it can be said to be an empty or free mind (cit waang). But we are referring here only to what is done actively. When one is asleep, the mind is also empty! That state is likewise one of true emptiness, but we have not actively produced the state, we have not brought it about intentionally. This is not practising Dhamma; it doesn’t belong in that category. But if we have made an effort in some way so that the mind becomes emptied of lust, hatred, and delusion, even if only for a moment, then the mind is said to be free, void, empty. This freedom and emptiness can be increased in degree until it becomes complete — absolute freedom and emptiness. An arahant (fully perfected individual) is absolutely free. Ariyans at lower stages of development are largely free. An ordinary worldling can be free and empty occasionally. 어떤 방법이나 수단에 의하든지 마음이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이 조금도 없이 해방된 상태가 되었을 때, 빈 마음 또는 해방된 마음(칫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능동적으로 행해지는 것만 지칭합니다. 잠잘 때는 마음도 비어 있습니다! 그 상태(잠자는 상태)는 ‘진정한 빔(空)’ 중의 하나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능동적으로 그 상태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의도적으로 그 상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담마를 실천(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카테고리(부류)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에서 비도록(해방되도록) 어떤 식으로 노력한다면, 단 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그때에 마음은 해방되고 공하고 빈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해방됨’과 ‘빔(空)’은 완전하게 될 때까지, 즉 절대적 해방과 빔(空)에 이를 때까지 그 정도가 증대될 수 있습니다. ‘아라한’(완전히 빈 자)은 절대적으로 해방되어 있습니다. 수행 중에 있는 낮은 단계의 ‘아리얀’(성자)은 대체로 해방되어 있습니다. 일반 세속인은 때때로 해방되고 빈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If at any moment there is freedom from lust, hatred, and delusion, then in that moment there is no idea of self. This is known as empty or free mind (cit waang). 어떤 순간에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에서 해방되었다면, 그 순간에는 자아란 생각이 없습니다. 이 상태를 ‘빈 마음’ 또는 ‘해방된 마음’(칫왕)이라고 합니다.
25) “What is it when there is total emptiness?” 25) “완전한 빔(空)이 있을 때 그것은 무엇입니까?” TOTAL EMPTINESS OR freedom is called “nibbāna” (Sanskrit, nirvāna). The condition of emptiness resulting from the complete and thorough elimination of the self-idea is nibbāna. This can be summarized by saying “Nibbāna is supreme emptiness.” It is that unique vision that transcends ordinary knowledge. We can transcend the various types of ordinary knowledge through seeing that “nibbāna is supreme emptiness.” ‘완전한 빔(空) 또는 해방됨’은 닙바나(열반, 산스크리트어로 니르바나)라 부릅니다. ‘자아 개념’이 완전하고 철저하게 소멸된 결과로 인한 빔(空)의 상태가 ‘닙바나(열반)’입니다. 이것은 “닙바나(열반)는 최상의 빔(空)이다” 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열반은 통상의 앎을 초월하는 독특한 통찰입니다. “닙바나(열반)는 최상의 빔(空)이다”라는 앎을 통해 다양한 통상의 앎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Nibbāna is supreme emptiness, or supreme emptiness is nibbāna. Do remember that the perfection of emptiness is what we refer to as “nibbāna”. 닙바나(열반)는 최상의 빔(空)이고, 최상의 빔(空)이 닙바나(열반)입니다. 우리가 닙바나(열반)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한 빔(空)’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26) “What is nibbāna?” 26) “닙바나(열반)는 무엇입니까?” IF YOU COME across someone who insists on raising this question, answer that nibbāna is the immortal-element (amatadhātu). Say it is the element that does not perish. All other elements perish, but this one does not perish, because it is free of lust, hatred, and delusion. When there is freedom from delusion, there is no self-idea, there is no grasping or clinging to selfhood, and thus there is no perishing. Because it is what puts an end to perishing, it has been called the immortal-element. This immortal element is the cessation of the mortal element. 이 질문에 답해 달라는 사람을 만났다면, 닙바나(열반)는 ‘불멸 요소’(아마따다뚜)라고 대답하십시오.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 요소라고 말하십시오. 다른 모든 요소는 사라집니다. 그러나 닙바나는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습니다. 미혹에서 해방되었을 때, ‘자아 개념’이 없고 자아를 움켜쥐거나 자아에 집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라짐이 없습니다.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불멸 요소’라 부릅니다. 이 ‘불멸 요소’는 ‘사라지는 요소’의 그침입니다.
27) “We speak of a person finding satisfaction in nibbāna. What ought we to call that satisfaction?” 27) “닙바나(열반)에서 만족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만족을 무엇이라고 해야 합니까?” WE BUDDHISTS TEACH that one ought not to go about liking and disliking, finding satisfaction in this and dissatisfaction in that. So if someone finds satisfaction in nibbāna, what are we to call that? 불교에서는 이것에서 만족을 찾고 저것에 불만족하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닙바나(열반)에서 만족을 찾는다면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It has been said that satisfaction in nibbāna is Dhamma-rāga (lust for Dhamma) or Dhamma-nandi (delight in, Dhamma). On hearing this, there may be some alarm at the use of a Pali word like rāga (lust) together with the word “Dhamma”. But we must understand that the rāga in Dhamma-rāga is not the kind that desires visual objects, sounds, odours, tastes, and tactile stimuli; it is not sensual lust. It means satisfaction as intense as that which the ordinary householder finds in sensuality, but in this case the satisfaction is found in emptiness, in immortality, in nibbāna. 닙바나(열반)에 만족함은 ‘담마 라가(담마를 갈망)’ 또는 ‘담마 난디(담마에 기뻐함)’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 ‘라가(갈망)’를 ‘담마’란 말과 함께 쓰는 팔리어의 사용에 당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담마 라가’에서 ‘라가(갈망)’는 시각 대상, 소리, 냄새, 맛, 및 감촉 자극을 바라는 부류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감각적 갈망(욕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반 재가자’가 감각 대상에서 찾는 것과 같은 정도의 강렬함을 가진 만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 만족은 빔(空), 불멸, 닙바나(열반)에서 찾는 만족입니다. At the present moment we fear and hate nibbā.na, and do not want to go near it. As soon as we hear the word we shake our heads. We have never had any desire for Dhamma or for nibbāna. Our desires are all directed towards sensuality: colours and shapes, sounds, odours, and tastes. To be fair to ourselves we ought to find as much satisfaction in nibbāna as we now find in colours and shapes, sounds, odours, and tastes. Then our practice towards the transcending of suffering will go ahead easily. These words “Dhamma-rāga” and “Dhamma-nandi” were used by the Buddha in this sense. 현재에 사람들은 닙바나(열반)를 두려워하고 싫어하며 그것에 가까이 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닙바나(열반)란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흔듭니다. 사람들은 ‘담마’나 ‘닙바나(열반)’를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갈망은 형색(형상과 색상), 소리, 냄새, 맛 등의 감각 대상을 향해 모두 기울어져 있습니다. 자신에게 공정하려면 사람들은 형색, 소리, 냄새, 맛 등의 감각 대상을 찾는 것과 같은 만큼 닙바나(열반)에서 만족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고(정신적 괴로움)을 초월하는 실천(수행)의 길로 가기가 쉬울 것입니다. ‘담마 라가(담마를 갈망함)’와 ‘담마 난디(담마에 기뻐함)’라는 이 말은 이러한 의미로 붓다께서 사용하셨습니다.
28) Here is a question that definitely should be brought up: “Is nibbāna attained after death or here is this life?” 28) 여기 분명하게 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닙바나(열반)는 죽은 후에 얻어집니까? 아니면 여기 이 삶에서 얻어집니까?
TEACHERS WHO LECTURE in the fancy preaching halls only talk about nibbāna after death. In the Tipitaka, however, we don’t find this. There are expression!s such as sanditthika-nibbāna (nibbāna which a practitioner sees personally) and ditthadhamma-nibbāna (nibbāna here and now). We are told that the blissful states of consciousness experienced in the four rūpa-jhānas and the four arūpa-jhānas (eight degrees of deep concentration) are sanditthika-nibbāna or ditthadhamma-nibbāna. But for the present purpose, we may understand these states to be a foretaste of nibbāna. They have the flavour of, but are not identical with, real nibbāna. Because these states are not perfect and absolute, they have been called sanditthika-nibbāna or ditthadhamma-nibbāna. 고급 설교장에서 가르치는 교사들은 죽은 후의 열반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그러나 팔리 경전(삼장)에서는 이 (죽은 후의) 열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산딧티까 닙바나(수행자가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닙바나)’와 ‘딧타담마 닙바나(지금 여기의 닙바나)’와 같은 표현은 있습니다. 네가지 색계 선정(루빠 자나)과 네가지 무색계 선정(아루빠 자나)에서 경험되는 의식의 축복상태를 ‘산딧티까 닙바나’ 또는 ‘딧타담마 닙바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 목적을 위해서는 이러한 (선정의) 상태는 닙바나를 미리 맛보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선정의) 상태는 닙바나의 맛이 있기는 하지만 ‘진정한 닙바나’와는 다릅니다. 이러한 (선정의) 상태가 완전하지 않고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산딧티까 닙바나’ 또는 ‘딧타담마 닙바나’라 부릅니다. Yet there are still better words than these. On one occasion the Buddha described the cessation of lust, hatred, and delusion as “sanditthikam akalikam, ehipassikam opanayikam, paccattam veditabbam vinnūhi”, that is, “directly visible, giving immediate results, inviting all to see, leading inward, and to be individually experienced by the wise”. These terms imply a living person who has realized, felt, and tasted nibbā.na, and who can call his friends to come and see what he has found. This shows clearly that he has not died, and he knows the taste of nibbāna in his heart. 그러나 이러한 (선정의) 상태보다 훨씬 더 나은 말(닙바나)이 있습니다. 어느 때 붓다께서는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이 그친 상태를 ‘산딧티깜 아까리깜, 에히빠시깜 오빠나이깜, 빳찻땀 웨디땁밤 윈누히(sanditthikam akalikam, ehipassikam opanayikam, paccattam veditabbam vinnūhi)’, 즉 ‘직접 볼 수 있고, 즉시 결과를 주며, 모두에게 와서 보라고 청하고, 내부로 이끌며, 지혜있는 자에 의해 개인적으로 경험되는’ 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이 말은, 깨달아서 닙바나(열반)를 느끼고 맛보았으며 동료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것을 와서 보라고 부를 수 있는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죽지 않고 마음속에서 닙바나의 맛을 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There are other expression!s as well. Anupādā-parinibbāna is something attained while life still remains. Parinibbāyati refers to the eradication of suffering and defilements without any need for the extinction or disintegration of the five aggregates (the body-mind complex), that is to say, without one’s needing to die physically. 또한 다른 표현도 있습니다. 아누빠다-빠리닙바나(Anupādā-parinibbāna)는 살아 있는 중에 달성되는 닙바나(열반)입니다. 빠리닙바야띠(Parinibbāyati)는 다섯 무더기(오온, 몸과 마음의 복합체)가 절멸되거나 해체되지 않고도, 즉 육체적으로 죽지 않고도 괴로움과 오염원이 소멸된 것을 지칭합니다. Now this word “nibbāna” in ordinary everyday language simply means “coolness, absence of heat, absence of suffering”. Thus, I should like you to consider the wisdom of our Thai forefathers who had a saying “Nibbāna is in dying before death.” You probably have never heard this saying, but it is very common among rural people. They say: “Beauty is to be found in the dead body. Goodness is to be found in relinquishment. The monk is to be found, in earnestness. Nibbā.na is to be found in dying before death.“ Are we their descendents, more clever or more foolish than our forefathers? Do ponder over this saying “Nibbāna is in dying (to selfhood) before death (of the body).” The body doesn’t have to die. But attachment to the self-idea must. This is nibbāna. The person who realizes it has obtained supreme bliss, yet continues to live. 지금 일반적인 일상언어에서 ‘닙바나’라는 이 말은 단순히 ‘서늘함, 열이 없음, 괴로움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닙바나는 (육체의) 죽음 전에 (자아가) 죽는 것에 있다’는 격언을 간직한 (타이의) 선조들의 지혜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하였겠지만,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선조들은 말했습니다. “아름다움은 죽은 몸에서 찾아지고, 선함은 놓아버림에서 찾아지며, 승려는 진지함에서 찾아지고, 열반은 죽음 전에 죽는 것에서 찾아진다.“ 우리는 선조들보다 더 영리하거나 더 어리석은 자손들입니까? “닙바나(열반)는 (육체의) 죽음 전에 (자아가) 죽는 것에 있다”는 이 격언을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육체는 죽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자아 개념’에 집착함은 반드시 없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닙바나(열반)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최상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닙바나에 이르러도 삶은 계속됩니다.
29) Now to give you a clearer and deeper under-standing of this subject, we shall consider the question. “Can the lower animals attain nibbāna?” 29) 이제 이 주제(닙바나)를 더 분명하고 더 깊이 이해해 봅시다. 다음 질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등 동물도 닙바나(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까?” IN ONE OF his discourses, the Buddha uses the words parinibbāyati and parinibbuto in reference to animals that have been trained until their self-assertiveness has been eliminated. For a dog, an elephant, a horse, or anything whatever that is trained until it is tame and no longer unruly, we can use the word parinibbuto, the same word used regarding an arahant (one who has eliminated the defilements completely). These two words are applicable to one who has put out the fires completely, a person who is completely cooled down. In the Pali language as spoken at the time of the Buddha, the word “parinibbāna” could be used in this way, also. When applied to a human being, it meant the achieving of the extinction of defilements, or arahantship (spiritual perfection). When applied to a lower animal, it meant attaining the extinction of self-assertiveness. Applied to a fire, it referred to the going out and becoming cool of the embers. In speaking of boiled or steamed rice which had been served into a bowl and had become cool, the word used was parinibbāna. It was an ordinary word, used in a general way for everyday worldly things, to indicate something become cool, something rendered harmless. 법문 중의 하나에서, 붓다께서는 ‘자아 주장’이 소멸될 때까지 훈련된 동물에 대해 ‘빠리닙바야띠(parinibbāyati)’와 '빠리닙부또(parinibbuto)'란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개, 코끼리, 말 등 어떠한 동물이든지 길들여져 더 이상 다루기가 어렵지 않은 동물에 대해 ‘빠리닙부또’란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말을 아라한(오염원이 완전히 소멸된 자)에게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두 말(용어)을 불이 완전히 꺼져 완전히 서늘하게 된 사람에게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붓다 시대에 사용된 빨리 용어에서, 빠리닙바나(parinibbāna)란 말도 이런 식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사용될 때 그것은 오염원의 소멸을 이룸, 즉 ‘아라한 성품(정신적으로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하등 동물에게 사용될 때 그것은 ‘자아 주장’의 소멸을 달성한 것을 의미합니다. 불에 사용될 때 그것은 꺼져서 잔화(타다 남은 불)가 식은 것을 지칭합니다. 밥그릇에 담긴 뜨거운 밥이 식었을 때 사용되는 말이 ‘빠리닙바나(parinibbāna)입니다. 그것은 일상의 세상 생활에서 서늘하게 된 것을 가리키며 해롭지 않게 된 것을 가리키기 위해 일상적으로 사용된 일상용어였습니다. So we ought to take good advantage of nibbāna and not remain worse off than the beasts to which words like these also can be applied. Don’t put it off until death comes. That is the height of stupidity, wasting the Buddha’s invaluable gift. Let us study afresh the terms “nibbāna” and “parinibbāna” with its derivative “parinibbuto”. Then there will arise the courage and ardour for the job of penetrating to and attaining that which is called “nibbāna”. Let us not shrink back like those people who on hearing the word “nibbāna” become drowsy, apprehensive, or just bored. 그러므로 닙바나(열반)의 좋은 점을 취하여야 합니다. 이 말이 사용될 수 있는 동물들보다 더 못한 자로 남아 있지는 않아야 합니다. 죽음이 닥쳐올 때까지 닙바나(열반)를 미루지 마십시오. 그것(미루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며 붓다의 귀중한 선물을 버려두는 것(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닙바나’와, ‘빠리닙부또(parinibbuto)’라는 파생어를 가진 ‘빠리닙바나(parinibbāna)를 새롭게 공부합시다. 그러면 ’닙바나‘라고 하는 것을 통찰하고 달성하는 일(실천 수행)을 하는 용기와 열정이 일어날 것입니다. 닙바나(열반)라는 말을 들으면, 졸리고 (소멸을) 걱정하거나 바로 지루해 하는 사람처럼 꺼리고 피하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I ask all of you to interest yourselves in the word “nibbāna”. The getting rid of harmful influences, even the passing of one’s youth, may be called a sort of nibbāna. Just as with animals which have been trained until their dangerous self-assertiveness has been eliminated, these are parinibbuto, that is, coolness, complete coolness. So let us be completely cool people who have nothing that can set fire to us and burn us. Let us not thoughtlessly produce heat, but rather win the prize that is nibbāna. To begin with the kind known as sanditthika-nibbāna or ditthadhamma-nibbāna, then by degrees we can work up to the level of real nibbāna. 여러분 모두가 ‘닙바나(열반)’라는 말에 스스로 흥미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해로운 영향을 제거하면, 젊음이 사라지는 것조차 ‘닙바나(열반)’의 일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위험한 ’자아 주장‘이 소멸될 때까지 훈련된 동물과 같이, 이것들이 ’빠리닙부또(parinibbuto), 즉 서늘함, 완전한 서늘함입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불을 지펴 태울 수 있는 어떤 것도 없는 완전히 서늘한 사람이 됩시다. 생각없이 불을 일으키지 말고 그보다 닙바나(열반)라는 상을 탑시다. ‘산딧티까 닙바나(sanditthika-nibbāna) 또는 ’딧타담마 닙바나(ditthadhamma-nibbāna)로 알려진 것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그러면 ‘진정한 닙바나’의 수준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30) Now, “What is the highest good for humanity?” 30) 그런데, “인류를 위한 최상의 선은 무엇입니까?” THE ENLIGHTENED ONE once said, “All Buddhas say nibbāana is the supreme thing.” Supreme thing means “the ultimate and highest good for humanity.” In the international language of ethics, it is known by the Latin term summum bonum, the utmost goodness, the best and highest thing attainable by a human being in this very life. Buddhist students agree that if there is a summum bonum in Buddhism, then it must be nibbāana itself. So if a foreigner asks what the summum bonum of Buddhism is, you should answer “All Buddhas say nibbāana is the supreme thing.” 깨달은 자(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모든 붓다는 닙바나가 지고한 것이라고 말한다.” ‘지고한 것’은 ‘인류를 위한 궁극적이고 최상의 선’을 의미합니다. 윤리학의 세계어에서 그것(지고한 것)은 라틴어인 ‘수멈 보우넘(summum bonum)'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생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선이고 가장 높은 것을 ’수멈 보우넘‘이라 합니다. 불교 학생들은 ’불교에 수멈 보우넘이 있다면 그것은 닙바나(열반)임에 틀림없다‘는 것에 의견을 같이 합니다. 그러므로 외국인이 불교의 ’수멈 보우넘‘이 무엇인지 물으면 ’모든 붓다는 닙바나가 지고한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으로 대답해야 합니다.
31) Next question, “Are there any arahants in the world at the present time?” 31) 다음 질문입니다. “현 시대에 이 세상에는 아라한이 있습니까?” THIS POINT CAN be answered by quoting the Buddha, “If all bhikkhus live rightly, the world will not be empty of arahants (worthy, undefiled beings).” He said this on the very day he died. 이 점에 관해서는 붓다의 다음 말씀을 인용하여 대답할 수 있습니다. “모든 빅쿠(승려)가 바르게 살아간다면, 세상에는 아라한(존귀한, 오염되지 않은 자)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붓다께서는 열반에 드는 바로 그날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If doubts or questions arise as to whether there are any arahants nowadays, don’t go answering simply “Yes” or “No”. This would be a serious mistake. You must answer by quoting the Buddha, “If bhikkhus live rightly, the world will not be empty of arahants.” ‘오늘날 아라한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 의문이나 질문이 생기면, 단순히 그렇다고 긍정하거나 아니라고 부정하는 대답을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대답은 중대한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붓다의 말씀을 인용하여 “빅쿠들(승려들)이 바르게 살아간다면, 세상에는 아라한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란 말로 대답해야 합니다.
32) This leaves us with the question, "What is meant by living rightly?" 32) 이 대답(앞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 질문을 하게 합니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RIGHT LIVING" REALLY has a special meaning of its own. To live rightly is simply to maintain conditions such that the mental defilements cannot obtain nourishment and cannot develop. Hence, it is nothing other than living all the time with a mind that is free and empty (cit waang), that is, a mind that views the entire world as something empty and does not clutch or grab at anything as being a self or belonging to a self. Then, though one will continue to speak, think, and act; to seek, use, and consume things; one will not have the idea of grasping at any one of them as being a self. Just acting with constant awareness, acting wisely, acting with insight into the circumstances in which one is involved that is what is known as "living rightly". In other words, living rightly is living in such a way that the defilements have no means of arising and no means of obtaining nourishment. '바른 삶‘은 실로 그 자체의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정신적 오염원이 육성되거나 발육될 수 없는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삶은 항상 ’해방되고 빈 마음(칫왕)‘, 즉 온 세상을 빈 것으로 보고 어떠한 것도 자아나 자아에 속하는 것으로 붙잡거나 움켜쥐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계속하고, 사물을 구하고 사용하고 소비하기를 계속할 것이지만, 그것들의 어떠한 것도 자아로 여겨서 집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단한 알아차림으로 행동하기만 하고, 자신이 연루된 상황을 통찰하여 행동하기만 합니다. 이것을 ’바른 삶‘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바르게 산다는 것은 오염원이 일어나고 육성되는 수단이 없는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We could also say it amounts to keeping to the Noble Eightfold Path. This is right living because right understanding, the first aspect of the Noble Path, is simply the knowledge, the understanding, the unobscured and perfect insight, that there is nothing that should be grasped at or clung to. Thus, in striving, in speaking, in any activity whatsoever, there is simply no grasping or clinging. 또한 ‘바른 삶’은 팔정도에 따라 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팔정도의 첫 번째 요소인 ‘바른 이해’는 ‘움켜쥐거나 집착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간단한 앎이고 이해이며 명확하고 완전한 통찰이므로, 팔정도에 따라 사는 것은 ‘바른 삶’입니다. 그래서 어떤 노력을 하거나 말하거나 무슨 행동을 하든 간에, 오직 움켜쥐거나 집착함은 없습니다. If we live rightly as described, the defilements become undernourished and emaciated. They fall away of their own accord and become completely extinct. There is no way they can arise again, because one has given up the habit of letting them arise. This is important because the things called anusaya (unwholesome tendencies), which build up within us, are only a matter of familiarity with defilement. However, one who doesn't know this looks upon the defilements as permanent entities or selves, and thus falls into the wrong view of eternalism (sasata ditthi). To hold that the defilements are permanent entities lying deep within the character is to be an eternalist, one who clings to belief in an eternal self or soul. Those who have insight and understanding based on Buddhist principles cannot regard these things as independent and permanent entities or selves. There is a reason for their existence; they arise in conformity with causal laws. When they arise too frequently, one becomes used to them and regards them as permanent aspects of one's nature. Believing them to be permanent misleads us to think they are lying in wait deep within us all the time. 설명한 대로 바르게 산다면, 오염원은 육성되지 않고 쇠약해지게 됩니다. 오염원은 저절로 약해져서 완전히 소멸됩니다. 오염원을 일어나게 하는 습관을 버렸기 때문에 그것들이 다시 일어날 길이 없습니다. 내부에 축적된 ‘아누사야(해로운 경향)’라는 것은 오직 오염원과 친숙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습관)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오염원이 습관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오염원을 영원한 실체 또는 자기 본성이라고 봅니다(생각합니다). 그래서 영원하다고 보는 그릇된 견해(상견)에 빠집니다. ‘오염원이 성격 내부 깊숙이 놓여 있는 영원한 실체라는 견해’를 간직하는 것은 영원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영원주의자는 영원한 자아 또는 영혼이 있다는 믿음에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불교 원리에 기초한 통찰과 이해를 하는 사람은 이것들(오염원)을 독립적이고 영원한 실체 또는 자기 본성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오염원은 존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인과법에 따라 일어납니다. 오염원이 너무 자주 일어날 때 사람은 그것에 익숙해져서 오염원을 자기 성격의 영원한 면이라고 간주합니다. 오염원이 영원하다는 믿음은 그것들이 항상 내부 깊숙한 곳에 자리잡아 일어나려고 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하게 합니다. Do understand that the anusaya are only our habitual tendencies, the results of a process of familiarization. This is how the word "anusaya" is used. ‘아누사야(해로운 경향)’는 단지 습관적인 경향이며 친숙한 과정의 결과라고 이해하십시오. ‘아누사야’란 말이 사용되는 용도는 이것입니다.
33) The next question asks, “Is it difficult or easy to be an arahant?” 33) 다음 질문을 한다고 합시다. “아라한이 되기가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ALMOST EVERYONE ANSWERS that it is extremely difficult. No one dares to think or speak of it as being easy. Here again, let us keep to the principle of not giving unqualified answers. Anyone who gives unqualified answers, saying, for example, “there is” or “there is not”, “it is easy” or “it is difficult”, is not a follower of the Buddha. 거의 모든 사람은 이 질문에 대해 ‘극히 어렵다’고 대답합니다. 아무도 감히 쉽다고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부적절한 대답을 하지 않는 원칙을 지키도록 합시다. 부적절한 대답을 하는 사람은 예를 들면, ‘있다’ 또는 ‘없다’, ‘쉽다’ 또는 ‘어렵다’ 등으로 대답합니다.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은 붓다(붓다의 말씀)를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The Buddha’s principle is that of causality. If we act rightly through understanding the principle of causality, being an arahant is easy. If we go against the principle of causality, it is extremely difficult. Only because we are accustomed to the defilements does it appear difficult to become an arahant. Here we ought to bear in mind that saying of the Buddha, “If we live rightly, the world will not be empty of arahants.” This living rightly is not difficult, it is not beyond our capacity. Blockade the defilements to prevent their obtaining nourishment. If we want to kill a tiger, we could pen him in with nothing to eat, and he would die of his own accord. It would not be necessary for us to go in, confront the tiger, and let him bite and claw us. This is what is meant by saying it is not beyond our capacity. This is the technique, and it lies within our abilities. 붓다의 원칙은 인과성의 원리입니다. 인과성의 원리를 이해하여 바르게 행동한다면 아라한(오염원이 완전히 소멸된 자)이 되기는 쉽습니다. 인과성의 원리에 따르지 않으면 아라한이 되기는 극히 어렵습니다. 단지 오염원에 익숙해졌기에 아라한이 되기가 어렵게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붓다의 다음 말씀을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바르게 산다면, 세상에는 아라한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바르게 산다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염원이 영양분을 얻지 못하도록 봉쇄하십시오. 호랑이를 죽이고자 한다면 우리에 가두어 먹을 것이 없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호랑이는 자연히 죽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가서 호랑이에게 대항하여 물리고 할퀴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능력 밖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기술입니다. 이 기술은 우리의 능력 하에 있습니다. Therefore, being an arahant will be easy or not depending on whether we use the right or the wrong methods. If we follow what the Buddha said, it is not difficult. “Live rightly and the world will not be empty of arahants.” 그러므로 아라한이 되는 것은 바른 방법을 사용하는지 또는 그릇된 방법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른다면 어렵지 않습니다. “바르게 살라. 그러면 세상에는 아라한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34) Here is another question: “Would we be able to recognize an arahant if we met one?” 34) 여기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라한을 만난다면 아라한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PEOPLE LIKE ASKING this very much. For instance there are some who doubt if we could recognize an arahant now living in the world. If asked whether we could recognize an arahant if one came walking along, we should consider the following. In the event that we didn’t recognize this one and never could recognize any of the them, then even arahants themselves would not be able to recognize one another as such.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예컨대, 우리가 세상에 지금 살고 있는 아라한을 알아볼 수 있는지 없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과 함께) 걸어오고 있을 때, 우리가 아라한을 알아볼 수 있겠는지에 관해 질문을 받으면, 다음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한 사람을 알지 못하고 그들 중의 어떤 사람도 결코 알 수 없는 경우에는, 아라한들조차도 그들은 서로를 그러한 것으로서 알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It is said that the Elder Sariputta did not know that Lakuntakabhaddiya was an arahant, also. He carried on expounding Dhamma to him, the purpose of which was to make possible the attainment of arahantship. This shows that Sariputta did not know that Lakuntakabhaddiya was an arahant. However, if it was always the case that we did recognize an arahant as such, then even a god in the Brahma world who was himself no arahant would be able to recognize which people were arahants. He could prophesy who would die having attained nibbāna and who would die without having attained nibbāna. 사리뿟따 존자는 라쿤따까밧디야도 또한 아라한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라쿤따까밧디야를 아라한에 이를 수 있게 할 목적으로 그에게 담마를 설명했습니다. 이 사실은, 사라뿟따 존자는 라쿤따까밧디야가 아라한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늘 아라한을 그러한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면, 아라한이 아닌 자신이 사는 브라마 세계의 신조차도 어느 사람이 아라한인지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신은 누가 열반을 얻고 죽을 것인지 누가 열반을 얻지 못하고 죽을 것인지 예언할 수 있었습니다. Thus, if asked whether we should be able to recognize an arahant or not, we must say that we might be able to or not, depending on the circumstances. Even arahants themselves might not recognize one another as such. So we ought not to give an unqualified answer, saying that we could recognize one or that we could not, as do the teachers in temple preaching halls, who like being dogmatic about such things. 따라서 아라한을 알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상황에 따라 알 수도 있고 알지 못할 수도 있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아라한들조차도 서로를 그러한 것으로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알 수 있다.’ 또는 ‘알 수 없다’와 같이 말하는 부적절한 대답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부적절한 대답은 그러한 것에 대해 교리를 만들기 좋아하는 교사들이 사원의 설교장에서 하는 대답입니다.
35) Now the next question is: “Where could we meet an arahant?” 35) 이제 다음 질문이 있습니다. "어디에 가면 아라한을 만날 수 있습니까?"
WE MUST LOOK for an arahant in the extinction of the mental defilements. Don’t go busily searching for one in the forest, in a monastery, in a cave, on a mountain, in a village, in a city, or in a meditation centre. You can go looking for an arahant in the extinction of the defilements. Carry out whatever tests or investigations or experiments will prove to you the extinction of the defilements. If this is not possible, then there is no need to search, no need to seek. You will know for yourself, that’s all. 아라한은 정신적 오염원이 소멸된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숲, 수도원, 동굴, 산, 마을, 도시 또는 명상센터 등에서 찾으려고 분주히 다니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오염원의 소멸에서 아라한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무슨 검사나 조사나 시험을 하든 간에 오염원의 소멸이 '아라한'임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이것(오염원이 소멸되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찾을 필요도 없고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알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Where there is extinction of the defilements, there is the arahant. 오염원이 소멸된 곳에 아라한이 있습니다
36) “Lay people cannot be arahants, can they?” 36) "재가자(평신도)는 아라한이 될 수 없습니까? 될 수 있습니까?"
DON’T GO GIVING an unqualified answer to this question either, saying they can or cannot. It must be answered by saying that an arahant has transcended laity and monkhood alike. Please note that the belief that one who becomes an arahant must hurry off and be ordained within seven days or else die was made by over-confident, assertive teachers of later ages, and appears only in commentaries, sub-commentaries, and other such post-canonical works. An arahant must always transcend laity and monkhood. No one can make an arahant into a lay person (i.e. a worldly person), but he lives above and beyond the state of monkhood too. 이 질문에도 '될 수 있다' 또는 '될 수 없다'고 말하는 부적절한 대답을 하지 마십시오. 아라한은 똑같이 평신도와 승려에서 초월했다는 말로 대답해야 합니다. 아라한이 된 자는 서둘러서 7일 이내에 출가계를 받지 않으면 죽는다는 믿음은, 자만심 많고 독단적인 후대의 교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오직 주석서와 복주석서와 다른 그와 같은 류의 후대 경전에서만 보이는 것임을 주목하십시오. 아라한은 항상 평신도와 승려를 초월합니다. 어느 누구도 아라한을 재가자(즉, 세속인)로 만들 수 없습니다. 아라한은 승려의 상태도 초월하여 삽니다.
Therefore, don’t go making statements as to whether an arahant can live at home or not. Even though they might take an arahant and force him to live at home, they could never make him into a householder. He has transcended both laity and monkhood. 그러므로 아라한이 가정에서 살 수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말을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아라한을 붙잡아 가정에서 살도록 강제하더라도 아라한을 결코 집주인(재가자)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아라한은 평신도(재가자)와 승려를 모두 초월하였습니다.
37) Now another question: “How is it that a ‘man-killer’ could be an arahant?” 37) 이제 다른 질문입니다. "어떻게 살인자가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까?"
THIS CAN BE very easily answered. That which is called “the person” (or “the individual”) has to be killed before one can be an arahant. If what we call “the person” has not been killed, there is no way one can be an arahant. One has first to kill the idea of “the person”, of “self”, of “I” and “he” or “she”, of “animal” and “being”. That is, there must cease to be any attachment to the ideas that this is an animal, this is a person, this is an abiding entity, this is a self. To do 이 질문에는 매우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사람(또는 개체)'이라 불리는 것은 아라한이 되기 전에 죽어져야(없어져야) 합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아라한이 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사람', '자아', '나'와 '그 남자' 또는 '그 여자', '동물'과 '존재'라는 개념(개념에 영원한 실재가 있다는 생각)을 우선 죽여야(없애야) 합니다. 즉, '이것은 동물이다', '이것은 사람이다', '이것은 영속적인 실재다', '이것은 자아다' 라는 관념에 어떠한 집착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람을 죽이는 것' 또는 '사람이라 지칭하는 것을 죽여 없애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동시에 아라한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이 될 수 있기 전에 사람을 죽여 없애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간혹 이보다 더 강한 말씀도 하셨습니다. '아라한이 될 수 있기 전에 부모를 죽여야 한다'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부모는 '무지', '갈망 및 집착', 또는 '어떤 업을 형성하는 행위'와 같은 '정신적 오염원'을 말합니다. 이 '정신적 오염원'은 '나'가 태어나고 '사람'이라는 관념이 생기기 위해 함께 일어나는 모체 또는 보급자로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죽여 없애야 합니다.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근원을 죽여야 합니다.
Then there is the story of Angulimala, a notorious killer. Angulimala became an arahant when he killed off the person. When he heard the word “stop” from the Buddha, he understood it in its right sense. Some people, through misunderstanding, try to explain that the Buddha, in saying that he had stopped, meant that he had stopped killing people as Angulimala was still doing when they met. That is, they explain that the Buddha had stopped, whereas Angulimala had not but was still going about killing people. This is not the right explanation. When the Buddha said (경전에) 악명높은 살인자인 '앙굴리말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앙굴리말라는 사람(사람이라는 개념)을 죽여 없앴을 때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는 붓다로부터 '멈추어라'란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을 올바른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은 붓다께서 자신은 멈추었다고 하는 것을, 앙굴리말라가 붓다를 만났을 때까지 하고 있었던 것과 같이 사람을 죽이는 것을 멈추었다는 의미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즉 앙굴리말라는 사람 죽이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는 반면에 붓다께서는 그런 행위를 멈추었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붓다께서 "나는 멈추었다"고 하셨을 때, 그 의미는 '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멈추었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을 완전히 그쳤다'입니다. 앙굴리말라는 '사람이 되는 것을 완전히 그치는 것'으로 바르게 이해했습니다. 그 결과로 그도 사람을 죽여 없앨 수 있었습니다. 즉, 이 개인이라는 관념을 죽여 없앨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앙굴리말라는 붓다처럼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Even the simple word “stop” in this story has been completely misunderstood by most people. It has been wrongly understood, wrongly explained, wrongly discussed, and wrongly taught, so that the account becomes self-contradictory. To say that one could become an arahant by merely ceasing to kill people is ridiculous. 이 이야기에서 '멈추어라'라는 간단한 말조차도 사람들은 완전히 오해하여 왔습니다. 그릇되게 이해하고, 그릇되게 설명하고, 그릇되게 논의되고, 그릇되게 가르쳐져 왔습니다. 그래서 그 설명은 자기 모순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것을 멈추면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스꽝스럽습니다.
So one has to stop being the person and kill the firm belief in individuals, selves, “I”, and “they”, before one can be an arahant. In other words, to become an arahant, kill “the person”. 그러므로 아라한이 될 수 있기 전에, 사람이 되는 것을 멈추고, 개체, 자아, '나', 그리고 '그들'에 대한 굳은 믿음을 죽여야 합니다. 즉, 아라한이 되기 위해 '사람'을 죽입니다.
38) Now we shall examine a minor point to help give us a better understanding of the foregoing questions and answers. I shall put the question, “What is the world full of?” 38) 이제 앞의 질문과 대답들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부수적인 문제를 검토해 보겠습니다. 다음 질문을 해 봅시다. "세상은 무엇으로 가득차 있습니까?"
SOME PEOPLE WITH a certain outlook answer, “This world is full of suffering (dukkha).” For instance they say that there is nothing that arises, persists, and passes away but it is a source of suffering. This is correct, but it is hard to understand.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은 고(둑카)로 가득차 있다"는 견해로 대답합니다. 예컨대, 그들은 '일어나고 머무르고 사라지는 것은 고의 근원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맞지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The question should be answered as the Buddha answered it. “This world is full of empty things. This world is empty. There is nothing that is a “self” or that belongs to a ‘self’.” 질문에는 붓다께서 대답하신 대로 대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빈 것으로 가득차 있다. 이 세상은 비었다. '자아'나 '자아에 속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Don’t be satisfied with saying simply “In the world there is only suffering, there is nothing that is not a source of suffering.” This is certainly a correct statement, but it is ambiguous and liable to be misinterpreted; for those same things, if one doesn’t go grasping and clinging at them, are not a source of suffering at all. Let this be well understood. Neither the world nor any of the things that comprise the world is or ever has been in itself, a source of suffering. The moment one goes grasping and clinging, there is suffering; if one does not grasp and cling, there is no suffering. To say that life is suffering is shallow, oversimplified, and premature. Life grasped at and clung to is suffering; life not grasped at or clung to is not suffering. 단순히 "세상에는 '고'만이 있다. 고의 근원이 아닌 것은 없다." 라고 말하는 것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확실히 바르게 말한 것이지만, 애매하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동일한 것에 대해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않는다면 전혀 고의 근원이 아닙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십시오.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을 이루는 어떤 것도 그것 자체로 고의 근원이거나 고의 근원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움켜쥐고 집착할 때만 고가 있습니다.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않는다면 고(둑카)가 없습니다. 삶이 고(둑카)라고 말하는 것은 표면적이고 지나친 단순화이며 너무 조급한 말입니다. 움켜쥐고 집착하는 삶은 고(둑카)입니다. 그러나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않는 삶은 고(둑카)가 아닙니다.
This life has purpose, it is not pointless. Some people like to say that life has no purpose because they do not know how to give it purpose. If we known how to use this life as an instrument for finding out about the world, about the causes of the world’s arising, about the complete cessation of the world, and about the way of practice leading to the complete cessation of the world, then this life does have purpose. Life, then, is a means of studying, practising, and obtaining the fruits of practice. It is a means of coming to know the best thing that human beings can and ought to know, namely, nibbāna. So remember, this life does have purpose, although for the fool who doesn’t know how to use it, it has no purpose at all. 이 삶은 목적이 있습니다.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삶을 의미있게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이 삶은 아무 목적이 없다'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이 삶을, '세상'과 '세상이 일어나는 원인'과 '세상의 완전한 소멸'과 '세상의 완전한 소멸로 이끄는 실천의 길'을 찾는 도구로 사용하는 방법을 안다면, 이 삶은 목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삶은 공부하고 실천하고 실천의 과실을 얻는 수단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고 알아야 하는 최상의 것, 즉 '닙바나(열반)'를 알게 되는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삶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삶이 전혀 어떤 목적도 없다고 하더라도, 이 삶은 목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What is the world full of? Look at it from one point of view and you say, “It is full of suffering,” or simply, “It is suffering.” But look at it from a higher point of view and you can say that it is nothing but an endless process of arising, persisting, ceasing, arising, persisting, ceasing. If we grasp at and cling to it, suffering will be produced. If we do not grasp at and cling to it, then it simply continues arising, persisting, and ceasing. So we must bear in mind that a person who has become free, who has become an arahant, does not regard these things as a source of suffering, nor of happiness either. The arahant’s unsoiled pañncakkhandha (five aggregates or body-mind complex) cannot be said to be involved in suffering. There is only the causally conditioned flowing, changing, and revolving of the five aggregates. 세상은 무엇으로 가득차 있을까요? 하나의 관점에서만 보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세상은 고로 가득하다" 또는 단순히 "세상은 고다." 그러나 더 높은 관점에서 보면 세상은 일어나고 머무르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머무르고 사라지는 끝없는 과정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세상과 세상을 이루는 것)을 움켜쥐고 집착한다면, '고'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을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때에는 그것은 단지 일어나고 머무르고 사라짐을 계속합니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된 사람, 즉 아라한이 된 자는 이것들을 고통의 근원으로 여기지도 않고 행복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는 것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아라한의 오염되지 않은 '빤착칸다(오온, 몸과 마음의 복합체)는 고(둑카)에 연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인과에 따라 조건지어진 오온의 흐름과 변화와 순환만 있습니다.
What is the world full of? It is full of things that arise, persist, and cease. Grasp and cling to them, and they produce suffering (dukkha). Don’t grasp and cling to them, and they do not produce suffering. 세상은 무엇으로 가득차 있을까요? 세상은 일어나고 머무르고 사라지는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들을 움켜쥐고 집착하면 고(둑카)가 생깁니다. 그것들을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고(둑카)가 생기지 않습니다.
39) People have asked, “What sort of merit has little effect and what sort great effect?” 39) 사람들은 질문했습니다. "어떤 공덕이 효과가 적고 어떤 공덕이 효과가 큽니까?"
THE BUDDHA TAUGHT, “The value of merit-making which is based on greed has not the sixteenth sixteenth part of the value of cultivating friendliness (metta).” 붓다께서 가르치시길, "갈망이 있는 공덕 형성의 가치는 자애(메따)를 기르는 가치의 1/16의 16제곱도 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Merit-making based on greed includes merit-making for publicity, merit-making in exchange for paradise or heaven, merit-making in order to be reborn beautiful or rich, and merit-making to gain sensual pleasure. Such merit-making is based on greed. It is solely grasping and clinging. Merit-making that consists of grasping and clinging is still merit-making, but it cannot have the sixteenth sixteenth part of the value of practising metta. Friendliness is not based on self-interest; it is practised for the sake of other people. There is universal love for all other people. Merit born of metta is great merit; merit based on greed does not amount to the sixteenth sixteenth part of that of metta. 갈망이 있는 '공덕 형성'은 명성을 위한 공덕 형성, 낙원이나 천상에 태어나기 위한 공덕 형성, 아름답고 부유하게 태어나기 위한 공덕 형성, 그리고 감각적 즐거움을 얻기 위한 공덕 형성을 포함합니다. 그런 공덕 형성은 갈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움켜쥠'과 '집착'입니다. 움켜쥠과 집착으로 이루어지는 공덕 형성도 공덕을 쌓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애를 실천하는 가치의 1/16의 16제곱도 될 수 없습니다. 자애는 자기 이익에 기초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 실천합니다. 그곳에는 모든 다른 사람을 위한 보편적 사랑이 있습니다. 자애로 이루어지는 공덕은 대단히 큰 공덕입니다. 갈망에 기초한 공덕은 자애에 기초한 공덕의 1/16의 16제곱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In the Pali language, when it was desired to indicate a great quantitative difference between things, this sort of expression! was commonly used, “the sixteenth part taken sixteen times”. Suppose we have one unit of something. Divide it up into sixteen parts and take one of these. Again, divide that part into sixteen parts and take one of them. Then divide that part yet again into sixteen parts. Again take one and divide it. Carry on like this a total of sixteen times to get the sixteeth sixteenth part. 팔리어에서, 사물 사이에 대단히 큰 차이를 나타내고자 할 때, "1/16을 16번 취한다"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합니다. 어떤 1단위량을 가졌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 1단위량을 16등분하여 그 중의 1개를 취합니다. 다시 그 1개를 16등분하여 그 중의 1개를 취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그 1개를 16등분하여 그 중의 1개를 취합니다. 이와 같이 16등분하여 1개 취하기를 16번 하는 것이 1/16을 16번 취하는 것입니다.
Merit which is based on greed is described as not worth the sixteenth sixteenth part of the merit based on friendliness (metta). 갈망에 기초한 공덕은 자애(메따)에 기초한 공덕의 1/16의 16제곱 가치도 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40) Now, “Where is great merit to be found?” 40) 그럼, "대단히 큰 공덕은 어디에서 발견됩니까?"
THE BUDDHA ONCE said, “Developing awareness-of-impermanence (aniccasanna) for only as long as it takes to click the fingers has more effect and merit value than providing meals for the entire Sangha when led by the Buddha.”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손가락을 한 번 튀기는 동안만 '무상을 알아차람(아닛짜 산냐)'하는 것은 붓다가 이끄는 상가(승가)의 모든 승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보다 더 큰 효과와 공덕의 가치가 있다".
This means that if we could invite the whole Buddhist Sangha together with the Buddha at its head and offer them food, we would still not gain as much merit as by successfully developing awareness-of-impermanence for the duration of a click of the fingers. This is a most fundamental point. 이 말씀은 붓다가 앞장서서 이끄는 불교 상가(승가)의 모든 승려를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한다고 하더라도, 손가락 한 번 튀기는 동안만 성공적으로 '무상을 알아차림'하는 것에 의한 공덕 만큼도 얻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요점입니다.
So, be wary of great deeds of charity such as some people display in temple halls, because they are concerned with sensual pleasures. Great merit, to be genuine, must be as the Buddha described. Developing awareness-of-impermanence for just a brief moment is far better than all this sort of providing for bhikkhus. 그러므로 사원 강당에서 과시하는 사람과 같은 큰 자선 행위를 경계하십시오. 그들은 감각적 즐거움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로 큰 공덕은 붓다께서 묘사하신 것과 같습니다. 단지 잠깐 동안만 '무상을 알아차림'하는 것이 빅쿠(승려)들을 위해 이러한 모든 보시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41) Now consider the “happy state” “Where is the happy state to be found? Where do we go to get happiness?” 41) 이제 '행복한 상태'를 생각해 보십시오. "행복한 상태는 어디에서 발견됩니까? 어디에 가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까?"
In the texts, there is a passage which speaks of celestial beings (devatas) dying, passing away, coming to the end of their merit, and coming to the end of their life spans. It also tells of their wishing to attain the happy state, seeking it, and wishing to know where to find it. In the end they come to the conclusion that the happy state is to be found in the realm of human beings. The celestial. beings rejoice saying, “May your wishes be fulfilled! Go to the happy state in the human realm!” The expression! “happy state in the human realm” signifies that in the human realm impermanence, unsatisfactoriness, and non-selfhood can more readily be perceived than in the celestial realm. In the human realm there are enlightened beings, there are arahants, and there are the Buddha, Dhamma, and Sangha. In the celestial realm, that jungle of sensuality, there are none of these things. Thus, celestial beings come to the human realm in search of the happy state. It is ridiculous that human beings here should want to go to the celestial realm for happiness. Yet some people seek paradise, happiness in the next existence, in the realm of celestial beings. They invest in it by making merit, giving to charity, selling their houses and goods, and building things in monasteries. Where is the genuinely happy state to be found? Think it over. 경전에 보면, 공덕이 다하고 수명이 다하여, 죽고 사라지는 천신(데와따)에 대해 말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또한 천신들이 행복한 상태를 얻기 바라고 그것을 구하고 그것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 알기 원하는 것에 대해 경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천신들은 행복한 상태는 인간계에서 발견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천신들은 "원하는 것이 채워질 것이다! 인간계에서 행복한 상태로 가라!"라는 말에 기뻐합니다. '인간계에서 행복한 상태'라는 표현은 인간계에서 '영원하지 않음(무상)'과 '불만족(고)'과 '자아 아님(무아)'이 천상계에서보다 더 쉽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계에는 깨달은 자가 있고 아라한이 있으며, 붓다와 담마와 상가(승가)가 있습니다. 감각적 쾌락의 밀림인 천상계에는 이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천신들은 행복한 상태를 찾아서 인간계로 옵니다. 여기 인간들이 행복을 찾아 천상계로 가고자 하는 것은 우스꽝스럽습니다. 하지만 천상계에서 낙원을 찾고 다음 생에 행복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공덕을 짓고 자선을 하고 집과 재산을 팔아 수도원에 여러가지를 짓는 것으로 그것(천상계에 태어남)에 투자합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상태는 어디에서 발견될까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42) Next, concerning what are called iddhis (psychic powers) the question is, “How far should we take interest in these things called iddhis?” 42) 다음에, '잇디(신통력)'라 부르는 것에 관하여 질문이 있습니다. " '잇디(신통력)'라 부르는 이것에 얼마나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FIRST OF ALL, we shall say something about the iddhis themselves. The word iddhi means “power”. It was originally an everyday word, a household term applied to things with the ability to promote success in perfectly normal ways. Anything with the ability to promote success was called an iddhi. The meaning was then extended to cover success in marvellous, miraculous ways, until we come across the sort of iddhis that are exclusively mental phenomena. Because they are mental, they have productive and beneficial properties that render them far more marvellous and wide-ranging than anything physical. They are like our labour-saving devices. Nowadays we have tractors that can build roads and so on. These too would have been called iddhis. But these are physical marvels. The iddhis we are concerned with here have to do with the mind; they are mental, not physical. 우선, 잇디(iddhi) 그 자체에 대해 조금 말해 보겠습니다. 잇디(iddhi)라는 말은 '힘'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원래 '일상 언어'였으며, 극히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공도를 높이는 능력을 지닌 사물에 사용된 가정 말이었습니다. 성공도를 높이는 능력을 지닌 어떤 것을 '잇디'라 불렀습니다. 그 의미가 확장되어 놀랍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포함하게 되어, 전적으로 정신적 현상인 '잇디(신통력)'의 일종을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잇디'는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물질적인 것보다 훨씬 더 기적적이고 광범위한 결과를 주며 생산적이고 도움이 되는 힘을 가집니다. '잇디'는 노동력을 절감하는 기구와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도로 등을 건설할 수 있는 트랙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구들도 '잇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트랙터 등은 물리적인 경이로움입니다. 여기서 지칭하는 '잇디'는 마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잇디'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입니다. An exponent of iddhis (psychic powers) has trained his mind to such a degree that he can cause other people to experience whatever sensations he wishes to have them feel. He can cause others to see things with their own eyes just as he wishes them to see, to hear clearly and distinctly such sounds as he wishes them to hear, to smell just as he wishes them to smell, to experience taste sensations as if really experiencing them with the tongue, and to feel as if through the skin softness, hardness, and other such tactile stimuli. The process can then be extended until the demonstrator is able to cause the other person to experience fear, love or any mental state without realizing why. The iddhis are thus extremely useful and quite wonderful. 잇디(신통력)를 연출하는 자는 자신이 원하는 어떤 감각이든지 다른 자가 그 감각을 경험하게 할 수 있는 정도로 마음을 훈련한 자입니다. 잇디 연출자는 다른 자가 보도록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른 자 자신들의 눈으로 사물을 보게 할 수 있고, 다른 자가 듣도록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소리를 분명하고 명확히 듣게 할 수 있으며, 다른 자가 냄새 맡도록 자신이 원하는 대로 냄새를 맡게 할 수 있고, 마치 실제로 다른 자가 혀로 맛보는 것처럼 맛을 경험하게 할 수 있으며, 마치 다른 자가 피부를 통해 부드러움, 단단함, 또는 다른 감촉 자극을 느끼는 것처럼 감촉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출 과정은 연출자가 다른 자에게 왜 그런지 모르게 두려움, 사랑, 또는 어떤 정신적 상태를 느끼게 할 수 있는 정도까지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잇디(신통력)는 지극히 유용하고 아주 경이롭습니다. But this kind of mental phenomenon does not produce physical things. The psychic powers are incapable of creating real physical things of any practical value. They alone can’t create bhikkhu’s huts, temples, rice, fish, or food, so that one might live without any problems. This sort of thing can’t happen. The objects appear to exist or are experienced as existing in eye, ear, nose, tongue, body, or mind for only as long as the iddhi is being demonstrated. There after they disappear. So the iddhis are not capable of building a hut or a temple by themselves. There definitely has to be a lay supporter to build and offer it. For instance, Jetavana and Veluvana had to be built and offered to the Buddha. And several times the Buddha went without food because of famine and had to eat rice set out as horse feed, and only a handful of it a day. 그러나 이런 종류의 정신적 현상은 물질적 사물을 생성하지 못합니다. 신통력은 어떤 실제적 가치가 있는 진짜 물건을 생기게 할 수 없습니다. 신통력 만으로는 사람이 아무 문제없이 살 수 있도록 하는, 빅쿠(승려)의 오두막, 사원, 쌀, 고기, 또는 음식 등을 실제로 생기게 할 수 없습니다. (잇디에 의해)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대상물은, 잇디(신통력)가 연출되고 있는 동안만 나타나서 존재하거나, 눈, 귀, 코, 혀, 몸, 또는 마음에 존재하는 것으로 경험됩니다. 그 후에는 대상물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신통력은 그 자체로서는 오두막이나 사원을 건설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오두막이나 사원을 건설하여 제공하는 ‘재가 후원자’가 있어야 합니다. 예컨대, 제따와나와 웨루와나는 건설되어 붓다께 제공되었습니다. 그리고 기근 때문에 붓다께서는 여러 번 음식없이 지내셨고 말 사료로 비치된 쌀을 잡수셔야 했으며 하루에 소량의 음식으로 지내셔야 했습니다. This serves to remind us that the physical and mental are two distinct and different realms. It is possible to demonstrate iddhis of both types. The Buddha did not deny mental iddhis, but he strongly disapproved of demonstrating them because they are mere illusions. He therefore prohibited the demonstration of them by bhikkhus, and he himself refrained from it. We don’t come across it in the Tipitaka that the Buddha demonstrated iddhis. There do exist accounts of the Buddha demonstrating iddhis, but they occur only in commentaries and other works. Consequently, the truth of these accounts is dubious — though really there is no need for us to judge them true or false. 이것은, 물질과 정신이 명확히 서로 다른 두 개의 영역이란 사실을 우리들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양쪽(물질과 정신)의 잇디(신통력)를 연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붓다께서는 '정신적 잇디(신통력)'를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나타나는 것은 단지 환영이므로 잇디(신통력)를 연출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거절하셨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빅쿠(승려)들이 '잇디'를 연출하지 못하게 금지하셨으며, 자신도 삼가하셨습니다. 삼장(경전)에서, 붓다께서 잇디(신통력)를 연출하셨다는 구절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붓다께서 '잇디'를 연출하셨다는 설명이 있지만, 그것은 주석서나 그밖의 다른 경전에서만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설명의 진실성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그 설명의 진실과 거짓을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The Buddha once said, “The various iddhis that are demon-strated — flying through the air, becoming invisible, clairaudience, clairvoyance and the like — are sāsavā and upadhikā,” Sāsavā means “associated with āsavas” (the “cankers” of attachment to sensual pleasure, attachment to becoming, attachment to false views, and attachment to ignorance). In other words, iddhis performed with grasping and clinging, or motivated by grasping and clinging, are called sāsavā. The performance of upadhikā iddhis is motivated by upadhi. Upadhi means “grasping and clinging”. They are likewise iddhis motivated by attachment. They are demonstrated by a mind that grasps and clings. Iddhis of this sort are sāsavā and upadhikā.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늘을 날기, 보이지 않게 하기, 초인적 투청력, 초인적 투시력 등과 같은 다양한 잇디(신통력)를 연출하는 것은 '사사와(sasava)'이고 '우빠디까(upadhika)'이다". '사사와(sasava)'는 '번뇌(asava)와 관련된' 것을 의미합니다(감각적 즐거움의 번뇌, 존재의 번뇌, 사견의 번뇌, 무지의 번뇌). 즉, 움켜쥠과 집착으로 연출하는 잇디(신통력), 또는 움켜쥠과 집착에 의해 유발된 잇디(신통력)는 '사사와'라 부릅니다. '우빠디까 잇디'를 행하는 것은 '우빠디'에 의해 유발된 것입니다. ‘우빠디(upadi)는 ’움켜쥠과 집착‘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갈망‘에 의해 유발된 잇디(신통력)와 똑같습니다. 그것들은 움켜쥐고 집착하는 마음에 의해 연출됩니다. 이러한 종류의 잇디(신통력)는 ’사사와‘이고 ’우빠디까‘입니다. Now let us turn our attention to the opposite kind of iddhi - anāsavā and anuppdhikā - namely the ability to control one’s own mind at will. We shall take as a particular example the subject of unpleasantness. Here one causes oneself to see an unpleasant thing as unpleasant, to see a pleasant thing as unpleasant, to see everything as unpleasant to see everything as pleasant, then to see everything as neither of these, as neither pleasant nor unpleasant. This is one example demonstrating the ability to control the mind so completely that constant mindfulness and equanimity can be maintained in the presence of sense objects — shapes and colours, flavours, odours, sounds, and tactile objects — which influence the mind. The possession of mindfulness, constant awareness, and equanimity is an iddhi. It is an iddhi of the type called anāsavā (free of āasava) and anuppadhikā (free of upadhi, not defiled, not grasping, and not a basis for grasping). These are the things called the iddhis, and this is how we ought to view them. 이제 다른 종류의 잇디, 즉 아나사와(anasava)와 아눕빠디까(anuppadhika)라고 하는 ‘자신의 마음을 의지대로 조절하는 능력’에 주의를 돌려 봅시다. ‘즐겁지 않음’이라는 연제는 특별한 예로 취하겠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 ‘즐겁지 않은 것’을 자신이 ‘즐겁지 않은 것’으로 보게 하고, ‘즐거운 것’을 자신이 ‘즐겁지 않은 것’으로 보게 하며, ‘모든 것’을 자신이 ‘즐겁지 않은 것’으로 보게 하고, ‘모든 것’을 자신이 ‘즐거운 것’으로 보게 하며, 그리고 ‘모든 것’을 자신이 이것들의 어떤 것도 아닌 것, 즉 ‘즐겁지도 즐겁지 않지도 않은 것’으로 보게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마음을 완전히 조절하는 능력을 연출하는 한 예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조절할 수 있으면 마음에 영향을 주는 감각대상, 즉 형색, 소리, 냄새, 맛, 및 감촉물이 나타날 때 부단한 마음챙김과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마음챙김과 부단한 알아차림과 평정을 가지는 것이 잇디(신통력)입니다. 그것은 ‘아나사와(아사와에서 해방됨)’와 ‘아눕빠디까(우빠디에서 해방됨, 오염 안됨, 집착 없음과 집착의 뿌리가 없음)’라 부르는 형태의 ‘잇디(신통력)입니다. 이것들이 ’잇디‘라 부르는 것이고, 우리가 ’잇디‘를 보아야 하는 방법입니다. The real iddhis that are demonstrated in order to cause the arising of psychic miracles, the sāsavā and upadhikā types, are still difficult to perform. To master them involves much practice, which is organized into a great system. It can be done, genuinely achieved and demonstrated, by only a very few people. But there is a spurious variety too, based on pure deception, sheer trickery, sometimes involving the use of incantations. These are not the real things at all. 초자연적 기적이 일어나도록 연출하는, ‘사사와’와 ‘우빠디까’라 부르는 형태의 잇디(신통력)는 연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것을 자유로이 행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체계로 짜여진 많은 훈련이 요구되며, 실제로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진짜로 잇디를 달성하여 연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전히 사기이고, 전적으로 속임수이며, 때때로 마술의 사용을 포함하는 것에 기초한 다양한 사이비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전혀 잇디(신통력)가 아닙니다. There are people who can demonstrate what are apparently genuine iddhis, but to acquire those skills is very difficult and requires arduous training. By contrast, the anāsavā and anupadhikā iddhis lie within the capabilities of most people. This sort is worth thinking about. As it is, we are interested in the sort of iddhis we can’t perform but aren’t interested in the most beneficial ones (which we can produce). These things called iddhis certainly have a great attraction for us, but our thinking on the subject needs to be completely revised. 명백히 진짜 잇디(신통력)을 연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지만, 그 기술을 획득하기는 매우 어렵고 힘든 훈련이 요구됩니다. 반면에 ‘아나사와 잇디’와 ‘아눕빠디까 잇디’는 대부분 사람들의 능력 하에 있습니다.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것은 이 종류의 ‘잇디’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연출할 수 없는 ‘잇디(신통력)’에는 관심이 있지만, 가장 유익한 것(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잇디(신통력)라고 부르는 이것들은 확실히 큰 매력을 지니고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43) Now we can discuss the question, “Where do happiness and suffering originate?” or at least, “Where does suffering originate?” 43) 이제 다음 질문을 논의해 볼 수 있습니다. “행복과 고(둑카)는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또는 하나로 줄여서, “고(둑카)는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IT IS GENERALLY said that happiness and suffering arise from previous kamma. This is the least correct answer. Suffering is something that arises from causes and conditions, and these causes and conditions are of several sorts, kinds, and varieties. Ignorance is a cause, craving is a cause, attachment is a cause, and kamma is a cause too. Now in saying that suffering comes from kamma, we ought to have in mind new kamma, kamma in the present life, that is to say, the brand-new ignorance, craving, and attachment of this life. Think of these as the factors responsible for suffering, the roots causing the arising of suffering. We must realize that old kamma is unable to stand up to new kamma, because we have the power to produce new kamma. New kamma, the third type of kamma, is capable of abolishing old kamma completely (see No. 14). Old kamma consists of just good kamma and bad kamma. There is no other sort of old kamma. New kamma, however, can be any one of three lands, the third kind being simply the Noble Eightfold Path. When we cause it to arise, it suppresses the first and second types of kamma. If we live the Path thoroughly, that is, put a complete end to the defilements, the new kamma (the Noble Path) completely overwhelms the old kamma, both good and bad. That is to say, old kamma (the first and second types only) cannot stand up to new kamma (the third type). 일반적으로 행복과 고(둑카)는 과거업에서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가장 낮은 단계의 바른 대답입니다. 고(둑카)는 원인과 조건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며, 이 원인과 조건은 여러 부류, 종류, 및 다양함이 있습니다. 무지가 원인이고, 갈망이 원인이며, 집착이 원인이고, 업(깜마)도 원인입니다. 지금 업(깜마)으로부터 일어나는 고(둑카)를 말할 때에, ‘새로운 업(깜마)’을 마음 속에 두어야 합니다. 이 ‘새로운 업(깜마)’은 현재 삶의 업(깜마), 즉 새로운 무지, 갈망, 및 이 삶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것들을 고(둑카)의 원인 요소로, 고(둑카)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뿌리로 생각하십시오. 각자는 ‘새로운 업’을 생성할 힘을 가졌기 때문에, ‘과거업’은 ‘새로운 업’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 번째 부류의 ‘새로운 업’은 ‘과거업’을 완전히 없앨 수 있습니다(14번 참조). ‘과거업’은 ‘선업’과 ‘악업’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른 부류의 ‘과거업’은 없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업’은 세 부류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부류는 간단히 말해 ‘팔정도’입니다. 팔정도가 일어나게 할 때, 팔정도(세 번째 부류의 업)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류의 업을 억누릅니다. 완전히 팔정도에 따라 살면, 즉 오염원을 완전히 소멸시키면, 새로운 업(팔정도)은 과거업, 즉 선업과 악업을 완전히 압도합니다. 즉 과거업(첫 번째 부류와 두 번째 부류의 업)은 새로운 업(세 번째 부류의 업)에 대항할 수 없습니다. So we ought to take an interest in this thing called the Noble Path. I spoke before about what it is like if we practise the ordinary old way, and what it is like if we practise the short cut method (see No. 13). The practice of the short cut method consists in direct self-examination with a view to destroying grasping at the ideas of “self” and “belonging to self”. That new kamma will be of the third type, the most powerful kamma. Once arisen it will be razor-sharp and capable of destroying a great quantity of longstanding old kamma. Suffering arises from new kamma, from today’s ignorance, craving, and attachment. These arise through our having seen shapes and colours, heard sounds, smelt odours, and tasted flavours just yesterday and the day before. They can be wiped out by new kamma which we have to produce too. Don’t be deceived into thinking it is all due to previous kamma. Previous kamma can be traced back to a series of causes which can be wiped out! So don’t ignore new kamma of this third type. It is capable of annihilating old kamma absolutely and completely. 그러므로 고귀한 길(팔정도)이라 부르는 이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보통길을 실천한다면 무엇과 같고 지름길을 실천한다면 무엇과 같은지에 대해 앞에서 말했습니다(13번 참조). 지름길을 실천하는 것은 ‘자아’와 ‘자아에 속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움켜쥐지 않는 관점으로 직접 자신을 조사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업은 가장 강력한 업인 세 번째 부류의 업이 될 것입니다. 세 번째 부류의 새로운 업이 일어나면 그것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와서 많은 오래된 과거업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고(둑카)는 오늘의 무지와 갈망과 집착으로부터 새로운 업에서 일어납니다. 이 새로운 업은 바로 어제와 그저께 형색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맡고, 맛본 것을 통해 일어납니다. 이 새로운 업은 역시 우리가 생성해야 하는 (세 번째 부류의) 새로운 업에 의해 제거될 수 있습니다. 고(둑카)는 모두 과거의 업 때문에 생긴다는 생각에 속지 마십시오. 과거업은 역추적되어 그 원인의 연속이 제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번째 부류의 ‘새로운 업’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이 세 번째 부류의 새로운 업은 과거업을 확실하고 완전하게 절멸시킬 수 있습니다.
44) This subject brings us to the question, “Where can we put an end to suffering (dukkha)?” 44) 이 주제(새로운 업)는 다음 질문을 하게 합니다. “어디에서 고(둑카)를 소멸시킬 수 있습니까?” WE DON’T PUT an end to suffering in the monastery, in the forest, in the home, or on the mountain. We have to put an end to suffering right at the cause of suffering itself. What we must do is investigate and find out the way suffering arises in us each day and from what root it originates. Then we have to cut off that particular root. Yesterday’s suffering has already been and gone. It can’t come back, it is over and done with. It is suffering that arises today, right now, that is the problem. Suffering that may arise tomorrow is not as yet a problem, but the suffering arising and existing right now must be eradicated. So then, where is it to be eradicated? It must be eradicated at its root. We must study life until we realize that, as the Buddha said, suffering arises simply from grasping and clinging. 수도원이나 숲이나 집이나 산에서 고(둑카)를 소멸시키지 않습니다. 고(둑카) 그 자체의 원인에서 바로 고(둑카)를 소멸시켜야 합니다. 해야 할 것은, 매일 우리 내부에서 고(둑카)가 일어나는 길과, 고(둑카)가 생기는 뿌리를 조사하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뿌리를 잘라야 합니다. 어제의 고(둑카)는 이미 있었고 이제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으며, 끝나고 종료되었습니다. 오늘 바로 지금 일어나는 고(둑카)가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내일 일어날지 모르는 고(둑카)는 아직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일어나서 바로 지금 존재하는 고(둑카)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고(둑카)는 어디에서 제거될 수 있을까요? 이 고(둑카)는 그 뿌리(근원)에서 제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붓다께서 말씀하신, 고(둑카)는 오직 움켜쥐고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삶을 공부해야 합니다. It is usually proclaimed eloquently, but ambiguously, that birth, aging, and death are suffering. But birth is not suffering, aging is not suffering, death is not suffering where there is no attachment to “my birth”, “my aging”, “my death”. At the moment, we are grasping at birth, aging, pain, and death as “ours”. If we don’t grasp, they are not suffering, they are only bodily changes. The body changes thus, and we call it “birth” the body changes thus, and we call it “aging” the body changes thus, and we call it “death” but we fail to see it as just bodily changes. We see it as actual birth, and what is more, we call it “my birth”, “my aging”, and “my death”. This is a multiple delusion because “I” is a delusion to start with; so seeing a bodily change as “my birth”, or “my aging” is yet a further delusion. We fail to see that these are simply bodily changes. Now just as soon as we do see these as only bodily changes, birth, aging, and death disappear, and “I” disappears at the same time. There is no longer any “I”, and this condition is not suffering. 보통 태어남, 늙음, 죽음이 고(둑카)라고, 유창하지만 애매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의 태어남’, ‘나의 늙음’, 및 ‘나의 죽음’이라고 집착하지 않으면, 태어남, 늙음, 및 죽음은 고(둑카)가 아닙니다. 집착할 때 우리는 태어남, 늙음, 고통, 및 죽음을 ‘우리 것’이라고 움켜쥡니다. 움켜쥐지 않으면, 그것들은 고(둑카)가 아니며 단지 몸의 변화일 뿐입니다. 몸이 그렇게 변화합니다. 그 변화를 태어남, 늙음, 및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남, 늙음, 및 죽음을, 몸이 단지 변화하는 것으로 보지 못하고, ‘실제적인 태어남 등’으로 보고, 게다가 ‘나의 태어남’, ‘나의 늙음’, 및 ‘나의 죽음’으로 보고 이렇게 부릅니다. 이것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미혹(무지)이기 때문에 ‘복합적인 미혹(무지)’입니다. 그래서 몸의 변화를 ‘나의 태어남’ 또는 ‘나의 늙음’ 등으로 보는 것은 한층 더 깊은 미혹입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단순한 몸의 변화로 보지 못합니다. 지금 바로 이것들을 단순한 몸의 변화로 보자마자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 사라지고 이와 동시에 ‘나’가 사라집니다. 더 이상 어떠한 ‘나’도 없습니다. 이 상태는 고(둑카)가 아닙니다. The Buddha said, “Birth is suffering, aging is suffering, death is suffering”, and the majority of people, almost all in fact, misunderstand him. They point to the condition of birth, the condition of aging, and the condition of death as being suffering. Some can’t explain it at all. Some, hesitant and uncertain, explain it vaguely and ambiguously, evasively hemming and hawing. This is because they forget that the Buddha said “Sañ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the five aggregates, when clung to, are suffering). The aggregates are body and mind; together they constitute the person. If there is grasping at anything as being “I” or “mine”, then the five aggregates are suffering. Those five aggregates are a heavy burden, a source of suffering. There is fire and brimstone in those five aggregates. So the five aggregates, if associated with grasping and clinging, are suffering. 붓다께서는, “태어남은 고이고, 늙음은 고이고, 죽음은 고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사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합니다. 사람들은 태어남의 상태, 늙음의 상태, 및 죽음의 상태를 고(둑카)가 되는 것으로 초점을 맞춥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전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주저하고 의심하며 모호하고 애매하고 파악하기 힘들게 더듬거리며 설명합니다. 이러한 오해는 사람들이 붓다께서 말씀하신, “산킷떼나 빤추빠다낙칸다 둑카(Sankhittena pancupadanakkhandha dukkha)”, 즉 “집착할 때 오온(다섯 무더기)은 고(둑카)이다”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이 (다섯) 무더기는 몸과 마음이며, 함께 ‘사람’을 구성합니다. 만일 어떤 것을 ‘나’ 또는 ‘나의 것’으로 움켜쥐면, 그때에 다섯 무더기(오온)는 고(둑카)가 됩니다. 다섯 무더기(오온)는 무거운 짐이고 고(둑카)의 근원입니다. 다섯 무더기(오온)에는 불과 유황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섯 무더기(오온)는 움켜쥐고 집착하여 그것에 연루되면 고(둑카)가 됩니다. Now suppose these five aggregates are in the condition known as “aging”. If the mind does not grasp at and cling to them as “aging”, or as “my aging”, then they will not be suffering. We shall then see the body as empty, the feelings as empty, the perceptions as empty, the willed activities as empty, and consciousness as empty. We shall see the whole flowing and swirling conditioning of everything as empty. Without clinging it cannot be suffering. Such are pure pañncakkhandha (aggregates dissociated from grasping). Such are the five aggregates of an arahant, or what we presume to call the five aggregates of an arahant. For really, an arahant cannot be described as being the owner of the five aggregates, but we look on those aggregates as being the receptacle of the virtues of arahantship. That type of mind cannot grasp at the aggregates in any way as being “mine”, still we presume to call them the pure pañncakkhandha of an arahant. 이제 이 다섯 무더기(오온)가 ‘늙음(나이를 먹음)’이라는 상태에 있다고 해 봅시다. 마음이 ‘다섯 무더기’를 ‘늙음’이나 ‘나의 늙음’으로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않는다면, 다섯 무더기(오온)는 고(둑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몸을 빔(空)으로, 느낌을 빔(空)으로, 인식을 빔(空)으로, 의지적 행위를 빔(空)으로, 의식을 빔(空)으로 볼 것입니다. 모든 것의 ‘흐름과 소용돌이 상태 전체’를 빔(空)으로 볼 것입니다. 집착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것도 고(둑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할 때 ‘순수한 오온(집착하지 않는 무더기)’이 됩니다. 그러한 (순수한) 오온은 아라한의 오온이며, 우리는 아라한의 오온이라 가정하고 그렇게 부릅니다. 실제로 아라한은 오온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 오온을 아라한 상태의 덕성이 있는 무더기로 간주합니다. 아라한의 마음은 여하튼 오온을 ‘나의 것’이라고 움켜쥘 수 없지만, 그 오온을 아라한의 순수한 오온이라고 가정하여 부르는 것입니다. Where to put an end to suffering? We have to eliminate suffering at the root of suffering, namely grasping and clinging to things. Suffering due to attachment to wealth must be eradicated there in that attachment. Suffering due to grasping and clinging to the illusions of power, prestige, honour, and fame must be eradicated there in that grasping and clinging. Then wealth, power, and prestige will not be in themselves suffering. So find out where it arises and eliminate it there. In the words of the old-time Dhamma experts, “whichever way it goes up, bring it down that same way.” 어디에서 고(둑카)가 끝날까요? 고(둑카)의 뿌리, 즉 사물에 집착하는 것에서 고(둑카)를 제거해야 합니다. 부(재산)에 집착하여 생긴 고(둑카)는 그 집착을 근절시켜야 합니다. 권력과 위세와 명예와 명성의 환영에 집착하여 생긴 고(둑카)는 그 움켜쥠과 집착을 근절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부(재산)와 권력과 위세는 그 자체로서는 고(둑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둑카)가 일어나는 곳을 찾아 그곳에서 제거하십시오. 옛날, 담마에 정통한 사람들의 말 중에, “어떤 식으로 올라오든지 똑 같은 식으로 떨어뜨려라”는 말이 있습니다.
45) Now I wish to discuss a question concerning what we may call “really knowing”: “To really know something, how much do we have to know?” 45) 이제 ‘참된 앎’이라 부르는 것에 관련된 질문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어떤 것을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이 알아야 합니까?” I ADVISE AND BEG you to listen particularly to the words of the Buddha that I am about to quote. The Buddha said that to really know any object, we must know five things about it, namely: (1) What are the characteristics or properties of the object? (2) From what does the object arise? (3) What is its assāda, its enticing quality, its appeal, its allurement? (4) What is the ādīinava, the hidden danger, the sinister power to harm that lies concealed in it? (5) What is the nissaraṇa, the trick by means of which we can get the better of it? What is the device, the skillful means of escaping from the grip of this object? 다음에 인용하는 붓다의 말씀에 특히 귀를 귀울여 듣기 바랍니다. 붓다께서는 어떤 대상을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해 다음 다섯가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그 대상의 특성 또는 품성은 무엇인가? (2) 그 대상은 무엇에서 일어나는가? (3) 그 대상의 ‘아싸다(assada)', 즉 유혹하는 성질, 매력, 매혹은 무엇인가? (4) 그 대상의 ’아디나와(adinava)', 즉 감추어진 위험, 그 내부에 숨겨져 해를 주는 음험한 힘은 무엇인가? (5) ‘니싸라나(nissarana)', 즉 그 대상을 이길 수 있는 요령, 그 대상의 지배를 피하는 능숙한 수단, 책략은 무엇인가? So, to really know something we must answer these questions: First: What are its properties? Second: What is its origin, its birthplace? Third: What is its assāda, its attraction? Fourth: What is its ādīnava, its harmful property, its danger? Fifth: What is the nissaraṇa, the means of escape from the power of the object? There are five questions altogether. If you study any object from these five points of view, you will get the better of that object. At the present time, you may be studying on the graduate level or post-graduate level. But if we are not studying from these five points of view, then we are mastered by objects, that is to say, by the world. If we study the world in terms of these five aspects, there is no way we shall be mastered by the world. So let us be careful about study-ing the world. Why are we studying? For what ultimate purpose are we studying? If we are studying so as to build peace in the world, then let us be very careful. Our studies will bring no beneficial results at all if not based on this Buddhist principle. 그러므로 어떤 것을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다음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첫째 : 그것의 성질은 무엇인가? 둘째 : 그것의 근원, 원천은 무엇인가? 셋째 : 그것의 아싸다(assada), 매혹은 무엇인가? 넷째 : 그것의 아디나와(adinava), 해로운 성질, 위험은 무엇인가? 다섯째 : 니싸라나(nissarana), 그 대상의 지배를 피하는 수단은 무엇인가? 모두 다섯 개의 질문이 있습니다. 이 다섯 면으로 어떤 대상을 공부한다면, 그 대상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은 학사과정이나 석사과정 또는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다섯 면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대상, 즉 세상의 노예가 됩니다. 이 다섯 면으로 세상을 공부하면, 세상의 노예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의깊게 세상을 공부합시다. 왜 공부합니까? 무슨 궁극적 목적을 위해 공부합니까? 세상을 평화롭게 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면, 매우 주의합시다. 이 불교원리에 기초하여 공부하지 않으면, 공부를 한다고 해도 전혀 유익한 결과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You have probably never heard of these things called the assāda, āadīnava, and nissaraṇa, yet the Tipiṭaka is full of them. These three words — assāda, āadīnava, and nissaraṇa, hardly ever present themselves to our eyes or ears, but please remember that they appear frequently in the Tipiṭaka. When the Buddha wished to impart a real knowledge of anything, he taught along these lines. Sometimes he cut it short, considering only the last three points. What is the nature of the object’s assāda (its allurement)? What is the nature of its ādīnava (its harmful properties)? Every object has both attractive and harmful qualities. What is the nature of the nissaraṇa (the cunning manoeuvre by means of which we can get the better of it)? 여러분은 아싸다(assada), 아디나와(adinava), 및 니싸라나(nissarana)라고 하는 이 말을 아마 결코 듣지 못했을 것이지만, 삼장 경전에는 이 말이 가득합니다. 아싸다(assada), 아디나와(adinava), 및 니싸라나(nissarana)라는 이 세 개의 말은 우리 눈이나 귀에는 좀처럼 나타난 적이 없지만, 삼장 경전에는 자주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붓다께서 어떤 것에 대한 참된 지식을 전하고자 하셨을 때, 이 (다섯)면에 따라 가르치셨습니다. 때때로 이 다섯 면을 줄여서, 뒷부분 3개만 언급하셨습니다. 대상의 아싸다(유혹)는 무엇인가? 대상의 아디나와(해로운 성질)는 무엇인가? 모든 다섯 대상에는 매혹과 해로운 성질이 있습니다. 대상의 니싸라나(이길 수 있는 요령)는 무엇인가? There is, so to speak, a hook hidden in that bait hanging there. The assāda is the juicy bait enticing the fish to bite. The concealed hook is the āadīnava, that is, the dangerous, cruel power to harm which lies hidden inside the bait. And the nissaraṇa is the technique for outwitting the hook and bait. The fish must have a technique for eating the bait without becoming hooked. The thing called the bait then no longer functions as bait, but becomes instead a good piece of food, which the fish can happily swallow without getting hooked. 요컨대, 걸려 있는 미끼에 감추어진 낚시바늘이 있습니다. ‘아싸다’는 물고기가 물도록 유혹하는 감미로운 미끼입니다. 감추어진 낚시바늘은 ‘아디나와’, 즉 미끼 안에 숨겨져 해로움을 주는 위험하고 끔찍한 힘입니다. 그리고 ‘니싸라나’는 낚시바늘과 미끼를 이기는 요령입니다. 물고기는 낚시바늘에 걸리지 않고 미끼를 먹는 요령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미끼라고 부르는 것은 더 이상 미끼로 작용하지 못하고, 대신에 고기가 낚시바늘에 걸리지 않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유익한 음식이 됩니다. Therefore, we ought always to look at the world in terms these five aspects. One aspect of the world, the assāda, the bait, lures us until we become so deeply engrossed in it that we turn a deaf ear and a blind eye to all else. But there is a hook inside it. People who get hooked up on the world cannot break free; they have to drown in the world, that is, in suffering. Now, the ariyans (individuals well advanced in practice) look and see that the assāda, the ādīnava, and the nissaraṇa are such and such. They are thus able to live in the world, swallowing the bait of the world without becoming caught on the hook. They know every object well enough to be fully aware of these five things. Its properties, its samudaya (root cause), it assāda (bait), its ādīnava (hook), and the nissaraṇa (strategem). To know any object we have to learn about and come to know all these five factors, or at a minimum the last three. 그러므로 항상 이 다섯 면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한 면인 ‘아싸다(assada)', 즉 미끼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그것(미끼)에 깊이 빠지게 하여 그 외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미끼 안에는 갈고리가 있습니다. 세상의 갈고리에 걸려든 사람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걸려든 사람은 세상, 즉 고(둑카)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리얀(성자, 실천 수행에 능숙한 자)은 아싸다(assada)와 아디나와(adinava)와 니싸라나(nissarana)를 여차 여차한(그렇고 그런)것으로 보고 압니다. 그래서 아리얀(성자)들은 갈고리에 걸리지 않고 세상의 미끼를 먹으면서 세상에서 살 수 있습니다. 아리얀(성자)들은 모든 대상을 이 다섯가지 면으로 충분히 잘 압니다. 대상의 성품, 대상의 사무다야(samudaya, 근원), 대상의 아싸다(assada, 미끼), 대상의 아디나와(adinava, 갈고리), 대상의 니싸라나(nissarana, 책략)을 충분히 잘 압니다. 어떤 대상을 알기 위해서는, 이 다섯가지 모두, 또는 최소한 뒷부분 세가지를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No matter what things we come into contact with in the course of our studies and other activities, we ought to apply this principle to them all. Then we shall know how to discriminate, and shall be able to reap the greatest reward without being hurt. This is called “really knowing”. By acting on this knowledge, it will be an easy task to practise Dhamma and leave behind the defilements. Viewing the world in terms of these five aspects, we shall see it as filled up with assāda or attractive allurement on the outside and āadīnava or danger on the inside. We shall know the world as a swindle, a counterfeit, a deception, an illusion, and shall not become hooked upon it, not become infatuated with it. A mind that always operates with insight will view colours and shapes, flavours, odours, sounds, tactile objects, and mental images rightly in terms of these five aspects. It will not be overpowered by them and there will not develop craving and attachment to the idea of selfhood. Freedom will become its normal day-to-day condition. Ultimately it is not beyond our power to practise Dhamma and make progress towards nibbāna. 공부와 행위를 하는 중에 어떤 것을 접하더라도 그 모든 것에 이 원리를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식별하는 법을 알게 될 것이고, 다치지 않고 최대의 이득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참된 앎’이라 부릅니다. 이 앎에 따라 행동하면 담마를 실천하고 오염원을 뒤에 내버려두기가 쉬울 것입니다. 이 다섯가지 면으로 세상을 보면, 외부에는 아싸다(assada), 즉 매혹적인 유혹으로 가득차 있고, 내부에는 아디나와(adinava), 즉 위험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사기, 가짜, 기만, 환영으로 알게 되어, 세상에 걸려들지 않을 것이며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통찰이 작용하는 마음은 형색, 소리, 냄새, 맛, 촉각대상, 및 정신적 이미지를 이 다섯가지 면으로 바르게 볼 것입니다. 감각대상에 압도되지 않을 것이며 갈망과 집착이 진전되어 자아라는 생각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해방이 자연적인 나날의 조건으로 될 것입니다. 결국 담마를 실천하여 닙바나(열반)을 향하여 진척시키는 것은 우리 능력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46) Now I shall put the following question: “What is it to attain the Stream of Nibbāna?” 46) 다음 질문을 상정해 보겠습니다. “닙바나 흐름(예류)에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THINK BACK TO the word “nibbāna” in the sense already discussed, that is, as the highest good attainable by humanity (see No. 30). If, in any one lifetime, one does not come to know the state called nibbāna, or fails even to taste the flavour of nibbāna, that life has been wasted. 이미 논의한 의미, 즉 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최상의 선’으로서 ‘닙바나(열반)’란 말을 상기해 보십시오(30번 참조). 어떤 자가 한 생에서 닙바나(열반)라고 하는 상태를 알지 못하거나 열반을 맛보기조차 못한다면 그 삶은 허비한 것입니다. “Stream of Nibbāna” refers to a course that has reached the stage that ensures a flowing and tending only towards nibbāna. It flows towards the extinction of suffering, with no backflow in the direction of suffering and the Woeful States. We call this course “The Stream”. ‘닙바나 흐름(예류)’은 확실히 단지 닙바나 만을 향해 흘러가는 단계에 이른 진로를 지칭합니다. 고(둑카)와 비참한 상태의 방향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고(둑카)의 소멸을 향해 흘러갑니다. 이 진로를 ‘예류’라 부릅니다. One who has attained the Stream is a sotapanna (Stream-enterer). A sotapanna has not yet attained complete nibbāna. The Stream-enterer attains diṭṭhadhamma-nibbāna (see No. 28), or tadanga-nibbāna (coincidental nibbāna), or whatever sort of nibbāana is appropriate in one’s case. But having attained the real Stream of Nibbāna, one will never again become attached to the assāda and āadīnava (bait and hook) of the world. The world never again will be able to deceive one. This doesn’t mean, for instance, that one gives up all connection with the world, or even all indulgence in sensuality. It means simply that one’s mind has begun to view these things as unworthy of grasping and clinging. It is practically certain that it will not grasp and cling, though it may still do so in occasional moments of unawareness. ‘예류’에 이른 자는 소따빤나(sotapanna, 예류자)입니다. 소따빤나(예류자)는 아직 완전한 닙바나(열반)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소따빤나(예류자)는 ‘딧타담마 닙바나(지금 여기의 닙바나, 28번 참조)’나 ‘따단가 닙바나(우연히 일치하는 닙바나)’ 또는 각자의 경우에 특유한 어떤 종류의 닙바나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예류’에 이른 자는 결코 다시는 세상의 ‘아싸다와 아디나와(미끼와 갈고리)’에 이끌리지 않게 됩니다. 세상은 결코 다시는 예류자를 속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컨대, 예류자가 세상과 관련된 모든 것 또는 감각적 쾌락에 빠지는 모든 것을 버린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단순히 마음이 이것들을 움켜쥐거나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때때로 알아차림이 없는 순간에 여전히 그럴지는 몰라도, 실지상으로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않을 것은 확실합니다. To be a sotapanna, one must give up three of the “fetters” (sañyojana), namely belief in a permanent ego-entity (sakkāya-diṭṭhi), doubt (vicikicchā), and superstition (sīilabbata-parāmāsa). To give up ego-belief is to give up one kind of delusion, to give up doubt is to give up another kind of delusion, and to give up superstition is to give up a third kind of delusion. He has not yet given up sensual desire (kāma-rāga), the fourth fetter. A sakidāgāmī (“Once-returner”, one stage more advanced than the sotapanna) has not altogether given it up either. This means that though one may not be able to give up sensual desire, still one does not fall right into the pit of sensuality. Though one may make contact with or indulge in sensuality, one will do so mindfully, as an ariyan. But don’t forget that one has given up ego-belief, doubt, and superstition. This is the criterion for one’s having attained to the Stream of Nibbāna and being certain to carry on toward nibbāna itself. 소따빤나(예류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가지 족쇄(산요자나), 즉 영원한 자아실재가 있다는 믿음(삭까야 딧티), 의심(위치낏차), 습관적인 미신(실랍바따 빠라마사)을 버려야 합니다. ‘자아가 있다는 믿음’을 버리는 것은 한 종류의 미혹(무지)을 버리는 것이고, 의심을 버리는 것은 다른 종류의 미혹(무지)을 버리는 것이며, 습관적인 미신을 버리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 미혹(무지)을 버리는 것입니다. 아직 네 번째 족쇄인 감각적 욕망(까마 라가)을 버리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사끼다가미(일래자, 소따빤나보다 한 단계 더 오른 자)도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이것은 감각적 욕망을 버릴 수는 없을지 몰라도 감각적 쾌락의 구덩이에 바로 빠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감각적 쾌락에 접하거나 탐닉하게 될지라도, 아리얀(성자)으로서 그렇게 마음챙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아가 있다는 믿음’과 ‘의심’과 ‘습관적인 미신’은 버렸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이 ‘닙바나 흐름(예류)’에 이르렀는지 이르지 못했는지를 가르는 기준이며 닙바나를 향해 나아가는지를 확실히 하는 기준입니다. So it is a matter of giving up misunderstanding. One must give up misunderstanding before giving up sensual desire (kāma-rāga). Sensual desire is not as yet a dangerous and terrifying problem or enemy. What is terrifying is delusion. In the texts there is a saying that the most putrid thing of all is a mind clinging to self, to ego. The Buddha did not point to sensuality as the most foul-smelling thing; he pointed to delusion. We generally tend to overestimate and overvalue the extent of a sotapanna’s giving up of involvement in sensuality. When its standard is thus misconceived, the whole picture becomes distorted and there is no way things can be brought into agreement. So it is essential that we know what it is to attain the first stage, the Stream of Nibbāna. Not sensual desire but ignorance is what must be given up first. 그러므로 ‘잘못된 견해’를 버렸느냐 버리지 못했느냐가 관건입니다. 감각적 욕망(까마 라가)을 버리기 전에 ‘잘못된 견해’를 버려야 합니다. 감각적 욕망은 아직 그렇게 위험하고 무서운 문제나 적이 아닙니다. 무서운 것은 미혹(무지)입니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악취를 풍기는 것은 자아 또는 에고에 집착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말이 경전에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감각적 쾌락을 가장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것으로 지칭하지는 않으셨고, 잘못된 견해를 지칭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소따빤나(예류자)가 감각적 쾌락을 버리는 정도를 과대평가하고 지나치게 중시합니다. 그 기준이 이와 같이 잘못 생각될 때, 전체 교의가 뒤틀리게 되어 여러 가지가 부합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단계인 ‘닙바나 흐름(예류)’에 이르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감각적 욕망이 아니라 무지를 우선 버려야 합니다. Ego-belief (sakkāya-diṭṭhi) consists in self-centredness. Self-centredness, as it normally occurs every day, comes from failure to perceive suññatā (emptiness) even in a crude way. The mind is confused and not free; consequently there is ego-belief. So to be a sotapanna one must give up ego-belief for good and all. In the normal course of events it arises and ceases, arises and ceases. Every day ego-belief is present many times, over and over. But there are also times when it is not present. We have to study what it is like to have ego-belief and what it is like to be free of ego-belief. When there is self-centredness, that is sakkāya-diṭṭhi. 첫 번째 족쇄인 ‘자아가 있다는 믿음(삭까야 딧티)’은 자기를 중심에 놓는 데 있습니다. 보통 매일 일어나는 것과 같이 ‘자기중심’은 가장 거친 상태에서조차 순냐따(빔)를 인지하기 못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마음이 혼란되고 해방되지 않으면 그 결과, ‘자아가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따빤나(예류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아가 있다는 믿음’을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일상 중에 ‘자아가 있다는 믿음’은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매일 그 믿음이 수없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나타나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자아가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는 어떻고 그 믿음에서 해방되었을 때는 어떤지를 배워야 합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을 때 그것이 ‘삭까야 딧티(유신견)’입니다. Now vicikicchāa is doubt or hesitancy as to what may be taken as certain, hesitancy as to whether or not to believe the Buddha, and hesitancy as to whether or not to practise for the absolute and complete extincition of suffering on the supramundane level. Because there is this hesitancy, one is not sufficiently interested in Dhamma. It is hard to be interested in Dhamma even for five minutes a day. Yet one is interested in such things as fun and laughter, food and drink, study and learning, business and work, for hours and hours a day. If the time spent on fun and laughter were devoted instead to developing an interest in Dhamma, one would come to understand it quickly. The most important kind of hesitancy is hesitancy about whether or not it would be a good thing to adopt the Buddha’s means of extinguishing suffering. Indecision about setting out on the Path to the extinction of suffering constitutes a great problem and a great danger. Most people consider the prospect lacking in flavour, unpleasant, unagreeable, and devoid of attraction, because they are infatuated by the allurements of the world. So hesitancy must be eradicated. We are subject to suffering; we must be resolute about putting an end to suffering. 두 번째 족쇄인 위치낏차(vicikiccha)는 어떤 것으로 취하려고 할 때 의심하거나 망설이는 것입니다. 붓다를 믿을지 믿지 않을지 망설이고, 초세속의 수준으로 고(둑카)를 절대적이고 완전하게 소멸시키기 위한 실천을 할지 하지 않을지 망설이는 것입니다. 이 망설임이 있기 때문에 담마에 충분한 관심이 없습니다. 하루에 5분 정도조차 담마에 관심을 가지기가 힘듭니다. 반면에 재미있고 웃기고, 먹고 마시고, (세속적) 공부를 하고 배우고, 영업하고 일하는 그러한 것에는 하루에 몇 시간이나 관심을 가집니다. 재미있고 우스운 것에 보내는 시간을 그 대신 담마에 흥미를 가지는 것에 돌린다면, 담마를 빠른 시간에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망설임은 고(둑카)를 소멸시키는 ‘붓다의 방법’을 받아 들이는 것이 좋은지 아닌지 망설이는 것입니다. 고를 소멸시키는 길에 착수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망설임이 큰 문제이고 큰 위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세상의 유혹에 빠져 있으므로 이 전망(고를 소멸시키는 전망)을 맛없고 즐겁지 않고 상쾌하지 않으며 매력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망설임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고(둑카)를 받게 되어 있으므로 고(둑카)를 끝내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The third fetter is sīlabbata-parāmāsa (chronic superstition). Have a look at yourself and see what sort of chronically superstitious behaviour is to be found in you. You have been taught to fear harmless little lizards and similar animals until it has become a habit. This is superstition. It is primitive and childlike. You have been brought up to believe in sacred trees, sacred mountains, sacred temples, sacred spirit houses: all this too is superstition. To sum up, sīlabbata-parāmāsa is superstition with regard to things one does oneself. Taking certain things which should be used in a particular way and using them in a different way - for instance, letting charitable deeds reinforce selfishness when they should be used to eliminate it - this is superstition. So there are charitable deeds which are superstition, and there is rigorous adherence to moral precepts by both bhikkhus and lay people which is superstition. Chronically superstitious and false understanding with respect to anything at all is covered by the term sīlabbata-parāmāsa. 세 번째 족쇄는 ‘실랍바따 빠라마사(습관적인 미신)’입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어떤 부류의 습관적인 미신에 따른 행동이 있는지 알아 보십시오. 여러분은 해롭지 않은 작은 도마뱀과 이와 유사한 동물이 무섭다고 배워서, 이제 습관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습관적 미신입니다. 이것은 유치하고 어린애 같습니다. 그리고 신성한 나무, 신성한 산, 신성한 사원, 신성한 영혼의 집을 믿도록 길러져 왔습니다. 이 모든 것도 습관적 미신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실랍바따 빠라마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하는 일과 관련된 습관적 미신입니다. 특별한 방식으로 사용되어야 하는 어떤 것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 예를 들면, 이기심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자선행위를 오히려 이기심을 강화시키도록 사용하는 것, 이것이 습관적 미신입니다. 그러므로 습관적 미신인 자선행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승려와 재가자가 계율에 강하게 집착하는 습관적 미신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어떤 것에 관하여 습관적인 미신과 잘못된 이해가 있으면 ‘실랍바따 빠라마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Please bear with me while I give just one more example of the third fetter: the four Woeful States, which are depicted on the walls of temples - hell, the realm of beasts, the realm of hungry ghosts (petas), and the realm of cowardly demons (asuras). These are known as the Four Woeful States. We are taught to believe that on dying we may descend into the Woeful States. We are never taught that we fall into woeful states every day. Such woeful states are more real and more important than those on temple walls. Don’t fall at all! If you don’t fall into these woeful states now, you will be sure not to fall into any woeful states after death. This is never taught, so people never get to the essence and real meaning of the words “Four Woeful States”. The Buddha was not a materialist. He did not take the body as his reference standard as does the story of the hell where one is boiled and fried in a copper pan. The Buddha took mind as his reference standard. 세 번째 족쇄에 대해 예를 하나 더 들어 볼테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원(절)의 벽에 그려져 있는 네가지 비참한 상태(영역), 즉 지옥계, 축생계, 아귀계, 아수라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사악처’라고 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악처에 떨어질지 모른다고 믿도록 배웠습니다. 우리는 매일 악처(비참한 상태)에 떨어지고 있다는 가르침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매일 매일의 비참한 상태는 사원(절)의 벽에 그려진 것보다 더 실제적이고 더 중요합니다. (비참한 상태에) 조금도 떨어지지 마십시오! 지금 이 비참한 상태에 떨어지지 않는다면, 죽은 후에 어떤 악처에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 확실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이 전혀 없었기에, 사람들이 ‘사악처’란 말의 본질과 실제 의미에 결코 이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붓다께서는 물질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육체(육체의 상태)를 기준으로 하여 사람들이 무쇠 팬(냅비)에서 끊여지고 튀겨지는 지옥 이야기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붓다께서는 마음(마음의 상태)을 기준으로 하여 말씀하셨습니다.
47) Now, let us see, “What is the meaning of the Four Woeful States?” 47) 이제 다음 질문을 봅시다. “네 가지 비참한 상태(사악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THE FIRST OF the Four Woeful States is hell. Hell is anxiety (in Thai, literally “a hot heart”). Whenever one experiences anxiety, burning, and scorching, one is simultaneously reborn as a creature of hell. It is a spontaneous rebirth, a mental rebirth. Although the body physically inhabits the human realm, as soon as anxiety arises the mind falls into hell. Anxiety about possible loss of prestige and fame, anxiety of any sort - that is hell. 네 가지 비참한 상태의 첫 번째는 지옥입니다. 지옥은 근심(태국어로 문어적 의미는 “뜨거운 마음‘)입니다. 근심, 성냄, 헐뜯음을 경험할 때마다 동시에 지옥의 존재로 재탄생합니다. 이것은 자연히 일어나는 재탄생이며, 정신적 재탄생입니다. 몸은 비록 물리적으로 인간계에 거주하지만, 근심이 일어나자 마자 마음은 지옥계로 떨어집니다. 명성과 명예를 잃을 지도 모른다는 근심이나 어떤 종류의 근심이 있든지 그것이 지옥입니다.
Now rebirth in the realm of beasts is stupidity. Whenever one is inexcusably stupid about something: stupid in not knowing that Dhamma and nibbāna are desirable, stupid in not daring to come into contact with or get close to Buddhism, stupid in believing that if one became interested in Dhamma or Buddhism it would make one old-fashioned and odd. That is how children see it, and their parents too. They try to pull back and move far away from Dhamma and religion. This is stupidity. Regardless of what sort of stupidity it is, it amounts to rebirth as an animal. As soon as stupidity arises and overwhelms one, one becomes an animal. One is a beast by spontaneous rebirth, by mental rebirth. This is the second Woeful State. (두 번째의 비참한 상태인) 축생계에 재탄생하는 것은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을 때마다 축생계에 재탄생합니다. 담마와 닙바나(열반)를 바람직한 것으로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 불교에 접하거나 가까이 함에 대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담마나 불교에 관심을 가지면 구식이고 별난 것으로 믿는 어리석음 등이 있습니다.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불교를 이렇게 (어리석게)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담마와 종교에서 물러나 멀어지고자 합니다. 이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어떠한 종류의 어리석음이든지 어리석음은 동물로 재탄생하게 합니다. 어리석음이 일어나 압도하자마자 동물이 됩니다. 자연적인 재탄생, 정신적인 재탄생에 의해 동물이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비참한 상태입니다.
The third Woeful State is the condition of a peta, a ghost that is chronically hungry because his desires continually outrun the supply of goods. It is a chronic mental hunger which a person suffers from, not hunger for bodily food. For instance, one wants to get a thousand baht. Then having just got the thousand baht, one suddenly wants to get ten thousand baht. Having just got the ten thousand baht, one suddenly wants to get a hundred thousand baht. No sooner has one got the hundred thousand baht, it’s a million baht that one wants, or a hundred million. It is a case of chasing and never catching. One has all the symptoms of chronic hun ger. One further resembles a hungry ghost in having a stomach as big as a mountain and a mouth as small as a needle's eye. The intake is never sufficient for the hunger, so one is all the time a peta. The peta's direct opposite is the person who, on getting ten satang *, is content with getting just the ten satang, or on getting twenty satang is content with twenty. But don't get the idea that being 세 번째 비참한 상태는, 갈망이 항상 물건의 공급 범위를 넘어 앞지르기 때문에 만성적인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귀의 상태입니다. 이것은 몸에 필요한 음식이 부족한 배고픔이 아니라, 고통받는 만성적인 정신적 굶주림입니다. 예를 들면, 1천 바트(baht, 역주-태국의 화폐단위)를 갖고 싶어, 1천 바트를 가지자마자 1만 바트를 갖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1만 바트를 가지자마자 10만 바트를 갖고 싶어 합니다. 10만 바트를 가지자마자 100만 바트 또는 1억 바트를 원합니다. 이와 같이 추구하기 때문에 결코 원하는 것을 따라 잡을 수 없습니다. 이런 자는 확실히 만성적 굶주림의 증상이 있습니다. 이런 자는 위장은 산만큼 크고 입은 바늘구멍만큼 작은 ‘허기진 유령(아귀)’과 매우 유사합니다. 아무리 먹어도 배를 채울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자는 항상 아귀입니다. 아귀의 반대는 10 사트앙(1 바트는 100 사트앙)을 가지면 단지 10 사트앙에 만족하고 20 사트앙을 가지면 단지 20 사트앙에 만족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쉽게 이와 같이 만족하면 열의가 저하하여 어떤 것도 구하지 않게 된다는 생각을 갖지 마십시오. 지혜는 해야 할 일을 알려 주므로, 일을 바르게 열심히 합니다. 이런 식으로 일하는 자는 어떤 것을 추구할 때마다 만족으로 가득합니다. 따라서 즐겁게 구하고 만족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아귀가 되지 않고, 즉 만성적인 허기짐이 없이 사는 방법입니다. 어떤 것을 갈망으로 추구하는 것은 아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지혜롭게 추구하는 것은 갈망이 아닙니다. 그때에는 아귀가 아닙니다. 단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Thus, a wish such as the wish to extinguish suffering is not craving. Don't go telling people the wrong thing, spreading the word that mere wishing is craving or greed. To be craving or greed it must be a wish stemming from stupidity. The wish to attain nibbana is a craving, if pursued with foolishness, infatuation, and pride. Going for lessons in insight meditation without knowing what it is all about is craving and greed; it is ignorance that leads to suffering because it is full of grasping and clinging. However, if a person wishes to attain nibbana, after clearly and
따라서 고(둑카)를 소멸시키고자 원하는 것과 같은 원함은 갈망이 아닙니다. 단순히 바라는 것도 갈망 또는 탐욕이라는 말을 퍼뜨리면서 사람들에게 잘못된 것을 가르치지 말기 바랍니다. 갈망 또는 탐욕이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음에서 생기는 원함이어야 합니다. 닙바나를 얻고자 하는 원함이 어리석음, 홀려 있기, 및 자만으로 추구된다면 갈망입니다. 통찰명상이 무엇인지 전부 알지도 않고 명상코스에 참가하는 것은 갈망이고 탐욕입니다. 이것은 움켜쥠과 집착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고(둑카)로 이끄는 무지입니다. 그러나 고(둑카)와 그것이 소멸될 수 있는 수단을 분명하게 이성적으로 인지한 후, 닙바나(열반)를 얻고자 한다면, 이런 마음의 상태에서는 꾸준히 열의를 가지고 바른 방법으로 통찰명상에 대해 배웁니다. 그러면 닙바나(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그런 원함은 갈망이 아니며 고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함이 반드시 항상 갈망은 아닙니다. 원함은 모두 그 근원에 따라 갈망일 수도 있고 갈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원함이 어리석음이나 오염원에서 생긴다면 그 징후는 충족될 수 없는 추구를 하는 만성적인 허기짐과 유사할 것입니다. 이 만성적으로 허기진 상태를 '아귀로서 자연히 생겨나는 재탄생'이라 합니다.
The last Woeful State is the realm of the asuras (cowardly demons). First to explain the word asura: sura means "brave", a means "not", thus asura means "not brave" or "cowardly". Take it that whenever one is cowardly without reason, one has been spontaneously reborn an asura. Being afraid of harmless little lizards, millipedes, or earthworms is unjustified fear and a form of suffering. To be afraid unnecessarily, or to be afraid of something as a result of pondering too much on it, is to be reborn as an asura. We all fear death, but our fear is made a hundred or a thousand times greater by our own exaggeration of the danger. Fear torments a person all the time. He is afraid of falling into hell and in so doing becomes an asura. Thus he is actually falling into the Four Woeful States every day, day after day, month after month, year in and year out. If we act rightly and don't fall into these Woeful States now, we can be sure that after dying we shall not fall into the Woeful States depicted on temple walls. 마지막으로 비참한 상태는 아수라(겁 많은 악귀)계입니다. 먼저 아수라(asura)란 말을 설명해 보면, 수라(sura)는 '대담함'을 나타내고 아(a)는 부정을 나타내므로, 아수라(asura)는 '대담하지 못함', '겁 많음'을 의미합니다. 이유없이 겁날 때마다 그 상태에 빠지면, '아수라'로 자연히 재탄생한 것입니다. 해롭지 않은 작은 도마뱀이나 노래기나 벌레를 두려워하는 것은 이유없는 두려움이며 고(둑카)의 한 형태입니다. 불필요하게 두려워하거나 과도하게 숙고한 결과로 어떤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수라'로 재탄생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이 두려움은 위험을 1백 배 또는 1천 배로 과장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항상 사람을 괴롭힙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이렇게 두려워함으로 인해 아수라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매일, 매달, 매년 연중 내내 실제로 네 가지 비참한 상태(사악처)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바르게 행동하여 지금 악처에 떨어지지 않으면, 사원(절)의 벽에 그려져 있는 악처로 죽음 후에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This interpretation of the Woeful States agrees in meaning and purpose with what the Buddha taught. These sorts of false belief regarding the Four Woeful States should be recognized as superstition. The most pitiable thing about Buddhists is the inaccurate way we interpret the teaching of the Buddha and the stupid way we put it into practice. There's no need to go looking for superstition in other places. In the texts there are references to people imitating the behaviour of cows and dogs; these were practices current in India at the time of the Buddha. There is no more of that these days, but behaviour does exist now which is just as foolish and much more undersirable. So give up all this superstition and enter the Stream of Nibbana. To give up belief in a permanent ego-entity, to give up doubt, and to give up superstition is to enter the Stream of Nibbana and have the Dhamma-eye the eye that sees Dhamma and is free of delusion and ignorance. 비참한 상태(악처)에 대해 이와 같이 설명하면, 붓다께서 가르치신 의미와 목적에 부합합니다. 네 가지 비참한 상태(사악처)에 대한 이러한 부류의 잘못된 믿음을 (습관적) 미신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불교인에게 가장 불쌍한 것이 붓다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고 어리석은 길을 따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습관적인) 미신을 찾으려고 다른 곳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경전에 보면 소와 개가 행동하는 것과 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의 예가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붓다 시대에 인도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실천)수행의 하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런 (실천)수행이 더 없지만, 그와 같이 어리석고 훨씬 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들이 지금도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습관적) 미신을 버리고 '닙바나 흐름(예류)'에 들어 가십시오. 영원한 자아 실재가 있다는 믿음과, 의심과, (습관적) 미신을 버리는 것이 닙바나 흐름(예류)에 들어가는 것이고, '담마를 보는 눈(법안)'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로서, 미혹과 무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Bear in mind that in us worldlings there is always a certain measure of ignorance and delusion in the form of ego-belief, doubt, and superstition. We must move up a step and break free of these three kinds of stupidity in order to enter the Stream of Nibbana. From that point on there is a flowing downhill, a convenient sloping down towards nibb.na, like a large stone rolling down a mountain-side. If you are to become acquainted with nibb.na and the Stream of Nibb.na, if you are to practise towards attaining nibb.na, then you must understand that these three kinds of delusion and stupidity must be given up before one can give up sensual desire and ill-will, which are fetters of a higher and more subtle order. Simply giving up these three forms of ignorance constitutes entering the Stream of Nibb.na. To completely give up self-centredness, hesitancy in pinpointing one's life objective, and ingrained superstitious behaviour is to enter the Stream of Nibb.na. You can see that this kind of giving up is universally valuable and applicable to every person in the world. These three forms of ignorance are undersirable, Just as soon as a person has succeeded in giving them up he becomes an ariyan, a Noble One. Prior to this he is a fool, a deluded person, a lowly worldling, not at all an ariyan. When one has improved and progressed to the highest level of worldling, one must advance still further, until one reaches the stage where there is nowhere to go except enter the Stream of Nibbāna by becoming a sotapanna. Then one continues to progress and flow on to nibbāna itself. 우리 내부세계에는 항상 어느 정도의 미혹과 무지가 '영원한 자아실재가 있다는 믿음'과 '의심'과 '습관적 미신'의 형태로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닙바나 흐름(예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 단계 올라서 이러한 세 가지 종류의 어리석음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닙바나 흐름(예류)의 단계부터는 내리막길이며, 마치 큰 돌이 산 아래로 굴려 내려가는 것과 같이 닙바나(열반)를 향해 쉽게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습니다. 닙바나(열반)와 닙바나 흐름(예류)에 가까워지고 닙바나(열반)에 이르기 위해 실천(수행)하고자 한다면, 감각적 욕망과 악의를 버릴 수 있기 전에 이 세가지 종류의 미혹과 어리석음(무지)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감각적 욕망과 악의는 더 높고 미묘한 상태의 족쇄입니다. 단지 이 세 가지 형태의 무지를 버리기만 하면 '닙바나 흐름(예류)'에 들어가게 됩니다. 자기 중심과, 삶의 목적을 정하지 못하는 망설임과, 깊이 새겨진 미신 행위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 닙바나 흐름(예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종류의 버림은 보편적인 가치가 있고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형태의 무지는 바람직하지 못하며, 사람이 이 무지를 버리는데 성공하자마자 바로 아리얀, 즉 성자가 됩니다. 이 무지를 버리기 전에는 바보이고 미혹된 자이고 세속인이며, 전혀 아리얀(성자)이 아닙니다. 사람이 세속의 가장 높은 단계로 향상되고 진보되었을 때는, 소따빤나(예류자)가 되어 닙바나 흐름(예류)에 들어가는 것 외에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계속 진보되어 닙바나(열반)로 흘러가게 됩니다.
The practice that leads away from grasping, self-centredness, and delusion is to observe all things as unworthy of being grasped at or clung to. This results in the eradication of hesitancy, blind grasping, and self-centredness. So we ought to start taking an interest in non-attachment right this very minute, each of us at the level most appropriate for us. If you fail in an examination there is no need to weep. Determine to start again and do your best. If you pass an examination you should not become carried away; you should realize that this is the normal way of things. This will then mean that there has arisen some understanding of non-grasping and non-clinging. 집착과, 자기 중심과, 미혹에서 멀어지는 실천(수행)은 모든 것을 움켜쥐거나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망설임과 맹목적인 움켜쥠과 자기 중심을 제거하는 결과에 귀착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무집착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야 합니다. 각자는 이 순간이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 단계에 있습니다. 시험에 실패하면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결심을 하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시험을 통과하면 흥분하여 즐거워함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만물의 정상적인 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때에 움켜쥐지 않고 집착하지 않음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When you are sitting for an examination, you should forget about yourself. Take good note of this! When starting to write an examination answer, you should forget about being yourself. Forget about the “me” who is being examined and who will pass or fail. You may think beforehand of how to go about passing the examination and plan accordingly, but as soon as you start to write, you must forget all that. Leave only concentration, which will pierce through the questions and seek out the answers. A mind free of any “me” or “mine” who will pass or fail immediately comes up agile and clean. It remembers immediately and thinks keenly. So sitting for an examination with proper concentration will produce good results. This is how to apply cit waang (a mind free of the self-illusion), or Buddhist non-grasping and non-clinging, when sitting for examinations. In this way you will get good results. 시험을 치기 위해 앉아 있을 때에는, 자신에 대해 잊어야 합니다. 이 말을 잘 새기십시오! 시험 답을 쓰기 시작할 때는 자신을 잊어야 합니다. 지금 시험을 보고 있으며 시험을 통과하거나 통과하지 못하게 될 '나'를 잊으십시오. 시험 통과와 그에 따른 계획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인지 미리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답안을 쓰기 시작하면 그 모든 것을 잊어야 합니다. 단지 집중하기만 하여 문제를 꿰뚫어보고 답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시험을 통과하거나 통과하지 못하게 될 어떠한 '나' 또는 '내 것'에서 해방된 마음이 즉시 나타나서 기민하고 능숙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즉각적으로 (답)을 기억해 내고 예민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집중으로 시험을 보는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것이 시험을 볼 때 �왕(자아 환영에서 해방된 마음), 또는 불교도의 '움켜쥐지 않음'과 '집착하지 않음'을 적용하는 방법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Those who don’t know how to make use of this technique always feel anxious about failing. They become so nervous that they are unable to call to mind what they have learned. They can not write accurate and orderly answers. Consequently they fail thoroughly. Others become carried away by the idea that “I am brilliant, I am certain to pass.” A student carried away by this sort of grasping and clinging is also bound to do poorly, because he lacks cit waang. On the other hand, for the “person” with cit waang there is no “me” or “mine” involved, so he cannot become panicky or over-confident. There remains only concentration, which is a natural power. Entirely forgetting about self, he can pass well. This is an elementary, most basic example of the effect of non-attachment and of cit waang. 이 기술을 사용하는 법을 모르는 학생은 항상 실패에 대해 근심합니다. 이런 학생은 초조한 마음이 되어 배운 것을 기억해 낼 수 없으며, 정확하고 바르게 답안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완전히 (시험에) 실패합니다. 한편 '나는 우수하다', '나는 확실히 시험을 통과할 것이다'라는 생각에 빠진 학생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움켜쥠과 집착에 빠진 학생들도 '�왕'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나쁜 결과를 얻게 됩니다. 반면에 '�왕'이 있는 학생은 '나' 또는 '내 것'이 개입되어 있지 않으므로 겁에 질리거나 자만할 수 없습니다. 단지 자연적 능력(힘)인 집중 만이 있습니다. 자아에 대해 완전히 잊었으므로 시험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집착과 �왕의 효과에 대한 초보적이고 가장 기본적인 예입니다.
Now a stupid and deluded person, as soon as he hears the word suññata mentioned in temple lecture halls, translates it as “utter emptiness or nothingness”. That is the materialistic interpretation and is how certain groups of people understand it. The suñnñnata of the Buddha means absence of anything that we should grasp at and cling to as being an abiding entity or self, although physically everything is there in its entirety. If we cling, there is dukkha; if we do not cling, there is freedom from dukkha. The world is described as empty because there is nothing whatsoever that we might have a right to grasp at. We must cope with this empty world with a mind that does not cling. If we want something, we must go after it with a mind free from grasping, so that we get the desired object without it becoming a source of suffering. 현재 어리석고 미혹에 빠진 사람은 사원의 강당에서 언급하는 '순냐따(빔, 空)'란 말을 듣자마자 이것을 '완전한 텅빔' 또는 아무것도 없음'으로 번역합니다. 이것은 유물론적인 해석이고 어떤 집단에서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순냐따(빔, 空)'는 비록 물질적으로 모든 것이 고스란히 거기에 있지만, 내재하는 실체 또는 자아가 있는 것으로 움켜쥐거나 집착할 만한 것은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집착하면 고(둑카)가 있습니다. 집착하지 않으면 고(둑카)에서 해방이 있습니다. 세상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움켜질 권리를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빈 것이라고 말합니다.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이 빈 세상에 대처해야 합니다. 어떤 것을 원할 때는, 고(둑카)의 근원이 되지 않으면서 원하는 대상을 얻기 위해 집착에서 해방된 마음으로 추구해야 합니다.
Misunderstanding the word “empty”, just this one single word, is a great superstition (sīlappata-parāmāsa) and constitutes a major obstacle to people attaining the Stream of Nibbāna. So let us understand the word “empty”, and all other words used by the Buddha, properly and completely. He described the world as empty because there is nothing in it which can be taken as a self or ego. He answered King Mogha’s question by saying, “Always regard '빔(空)'이라는 바로 이 한 단어를 잘못 이해하는 것이 중대한 미신(실랍빠따 빠라마사)이고, 사람들이 '닙바나 흐름(예류)'에 이르지 못하게 방해하는 큰 장애물입니다. 그러므로 '빔(空)'이란 말과 붓다께서 사용하신 모든 다른 말을 바르고 완전하게 이해합시다. 붓다께서는 '자아' 또는 '에고'라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세상이 비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붓다께서는 '모가 왕'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항상 세상을 빈 것으로 여기십시오. 세상이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이 세상을 빈 것으로 바라보십시오." 세상을 빈 것으로 보면, 마음은 자동적으로 움켜쥠과 집착에서 해방됩니다. 갈망과 미워함과 미혹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 실천을 완성하면 아라한이 됩니다. 이 실천을 완성하지 못했다면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이 실천을 하면 아직 보통의 세속인이지만 고(둑카)를 덜 받을 것입니다. '�왕'이 있는 한, 어떤 고(둑카)도 생기지 않습니다. (세상에) 빠져 정도를 벗어나면 다시 고(둑카)가 생깁니다. 주의 깊은 알아차림을 유지하여 (자아 개념에서) '빔'을 점점 더 자주, 오랫동안 생성하면 (마침내) 불교의 핵심을 꿰뚫어 닙바나 흐름(예류)에 이르게 됩니다.
48) Now in the short time remaining I shall put the final question: “What were the Buddha’s last instruction to us?” 48) 이제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으므로 마지막 질문을 하겠습니다. "붓다께서는 마지막으로 우리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AS EVERYONE KNOWS, a person who is about to die usually makes out a will, a set of last instructions. When the Buddha was on the point of dying, he said these last words: “All compounded things are subject to decay. Be well equipped with heedfulness!” All things are nothing but a perpetual flowing-on, that is, they are empty (of selfhood). All things are anicca, they change incessantly, they flow on endlessly. That perpetual flux is devoid of any self or of 사람이 죽을 때는 보통 마지막 말, 즉 유언을 한다는 것을 모두 잘 압니다. 붓다께서 돌아가실 때에는 마지막으로 다음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든 형성된 것들은 사라지게 되어 있다. 주의 깊은 알아차림을 갖추도록 하라." 모든 것은 단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 즉 (자아가) 빈 상태입니다. 모든 것은 아닛짜(anicca)이고, 끊임없이 변하며, 끝없이 흘러 갑니다. 이 끊임없는 흐름에는 어떠한 자아도 없고 자아에 속하는 것도 없습니다. 주의깊게 잘 알아차리십시오. 다른 말로 하면, 어리석지 말고, 만물에 혹하여 빠지지 말고, 어떤 것도 움켜쥐거나 집착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어떤 것에 집착하여 부주의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주의 깊은 알아차림의 의미입니다. 이런 주의깊은 알아차림을 항상 잘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Now young people are a problem. Look how completely heedless they are. They regard all sorts of things as thoroughly desirable, as worth grasping at and clinging to. Attaching to things as either desirable or hateful is ultimately a source of distress to oneself and to others. Such people are not carrying out the instructions given in the Buddha’s will. They are wasting the benefit of having been born a human being and of Buddhist parents. They are not carrying out the Buddha’s last wishes. 요즈음 젊은이들은 문제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얼마나 완전히 부주의한지 보십시오. 모든 종류의 사물을 전적으로 바람직하고 움켜쥐고 집착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마음에 들거나 미워하는 것으로 만물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괴로움의 원천입니다. 이런 사람은 붓다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가르침을 따르지 않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고 불교 가문에 태어난 유익한 상태를 허비하고 있습니다. 붓다의 유언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All of us, young and old, are in a position to carry out the Buddha’s last instructions. Let us not be heedless or mindless. Let us not go thoughtlessly regarding things as worth grasping at and clinging to. Let us always view the world as devoid of any self or of anything belonging to a self. Our minds will be free of grasping; lust, hatred, and delusion will not arise in them. Thus we will accomplish the highest thing which is possible for humanity. In other words, all problems will cease, and that’s all there is to it. 나이 어린 사람이든 나이 많은 사람이든 우리 모두는 붓다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주의 깊은 알아차림을 유지합시다. 부주의하게 만물을 움켜쥐거나 집착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항상 세상을 어떤 자아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 비어 있는 것으로 보도록 합시다. 그러면 마음은 집착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갈망, 미워함, 및 미혹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즉 모든 문제(둑카)가 그칠 것입니다. 이것(둑카가 그침)이 거기에 있는 모두입니다.
The Buddha gave another final instruction: “Go forth and preach well the doctrine, splendid in its beginning, middle, and end.” I like to interpret this as enjoining us all to teach non-grasping and non-clinging on an elementary level to children, on an intermediate level to adults, and on the highest, most advanced level to those who are heading for the Supreme State and for whom nothing else matters. The Buddha taught only non-grasping, nothing more. It can be taught on different levels to children, to people of middle age, and to old people. Or it can be taken in another way. Teach Dhamma for the benefit of people living in this world, on a low level; for benefits in other worlds, at an intermediate stage; and then for the sake of the highest benefit, which transcends all worlds.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은 다른 마지막 가르침도 주셨습니다. "가서, 처음도, 중간도, 끝도 훌륭한 담마를 잘 가르쳐라." 이 말씀은, 각 레벨의 사람들에게 그에 맞게 무집착의 가르침을 펴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청소년들에게는 초급수준으로, 성인들에게는 중급수준으로, 더 높은 상태가 없는 최상의 상태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최고급 수준으로 무집착의 가르침을 펴라는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다른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오직 무집착을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은 소년, 중년, 및 노년의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수준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또는 이 가르침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거나 살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낮은 수준으로, 다른 세상에 살거나 살 자들의 이익을 위해 중간 수준으로, 세상을 초월하고자 하는 자들의 최상의 이익을 위해 최고급 수준으로 담마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The whole essence of the teaching can be summed up as freedom from suffering through non-attachment. Hence this non-grasping and non-clinging, this absence of any idea of self or of anything belonging to a self, is the most important teaching. So please, every one of you, bear well in mind one word, the one single word that reveals the entire Dhamma, the single syllable waang (empty, void, free), which in Pali is suññatā - the core and essence of Buddhism. People break the moral precepts because they lack cit waang (mind free of the self-idea). People lack concentration because they do not have cit waang. People have no insight because they do not have cit waang. The Buddha had cit waang. Cit waang is just what Buddhahood is. The Dhamma is simply the teaching of cit waang, the practice that leads to cit waang, and the fruit of that practice, which is cit waang and ultimately nibbāna. The Sangha consists of people following the Buddha’s system of practice in order to attain cit waang. Buddha, Dhamma, and Sangha are summed up in the word waang (free, void, empty). One succeeds in keeping the moral precepts through abstaining from grasping and clinging, and through being free of the mental defilements, free of grasping and clinging. When cit waang has been attained, the defilements are absent and concentration is at its best. When one has come to see things (the world) as empty, one doesn’t grasp or cling to any of them and one has full insight. The Path and Fruit of Nibbāna consist in knowing emptiness and in successively gaining the fruits of emptiness right up to the very culmination. Charity, morality, taking refuge (in Buddha, Dhamma, and Sangha), concentration, insight, Path and Fruit, and nibbāna — all these are summed up in the single word waang (empty). 가르침의 전체 핵심은 무집착을 통해 고(둑카)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아나 자아에 속하는 어떠한 것도 없다는 무집착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이 한 단어를 마음에 잘 새기십시오. 바로 한 음절 '왕(waang, 빔, 공, 해방)', 팔리어로 순냐따(sunnata)가 불교의 핵심이고 본체이며 모든 담마를 나타냅니다. '찌트 왕(cit waang, 자아 관념에서 해방된 마음)이 없으므로 계율을 어깁니다. '찌트 왕'이 없으므로 집중하지 못합니다. '찌트 왕'이 없으므로 통찰력이 없습니다. 붓다께는 찌트 왕이 있습니다. 찌트 왕은 바로 깨달음의 표시입니다. 담마는 바로 '찌트 왕'의 가르침이고, '찌트 왕'으로 이끄는 실천의 가르침이며, 실천의 결실, 즉 찌트 왕과 궁극적 닙바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상가(sangha, 승가)는 '찌트 왕'을 얻기 위해 '붓다의 실천 체계'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붓다, 담마, 및 상가는 '왕(waang)'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움켜쥠과 집착을 절제하여 계율을 잘 지킬 수 있고, (정신적) 오염원에서 해방되어 움켜쥠과 집착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찌트 왕이 있을 때, 오염원이 없으며 집중이 최상의 상태에 있습니다. 사물(세상)을 빈 것으로 볼 때, 세상의 어떤 것도 움켜쥐거나 집착하지 않으며 통찰력으로 차 있습니다. 닙바나(열반)의 길과 결실은 '빔(空)'을 알고 계속하여 빔의 결실을 얻어 최고조의 상태로 오르는 것입니다. 자비, 덕목, 귀의(붓다, 담마, 및 상가에), 집중, 통찰, 도(길)와 과(결실), 및 닙바나(열반) 등 이 모든 것은 '왕(waang, 빔)'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This is why the Buddha said, “Emptiness is what I teach. A teaching that does not treat of emptiness is someone else’s teaching, an unorthodox teaching composed by some later disciple. All discourses which are utterances of the Accomplished One are profound, have deep significance, are the means of transcending the world, and deal primarily with emptiness (suññatā). “This was spoken by the Tathāgata. On the other hand, “A discourse of any kind, though produced by a poet or a learned man, versified, poetical, splendid, melodious in sound and syllable, is not in keeping with the teaching if not connected with suññatā. “There are these two kinds of discourses. Those dealing with suññatā are utterances of the Buddha; those not dealing with suññatā are utterances of later followers. 이것이 붓다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따타가따(붓다)는 빔(공空)을 가르친다. 빔(공空)을 다루지 않는 가르침은 다른 자의 가르침이고, 후대의 제자들에 의한 비정통의 가르침이다. 따타가따가 말한 모든 법문은 심오하고 깊은 의미가 있으며, 세상을 초월하는 수단이며, 기본적으로 빔(순냐따, sunnata)을 다룬다." 이것은 붓다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인이나 학식있는 사람에 의해, 작시되고, 시적이며, 미려하고, 소리와 음절이 음악적인 어떠한 법문도 '빔(공空)'과 관련없다면,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러한 두 종류의 법문이 있습니다. '순냐따(sunnata, 빔)'를 다루는 법문은 붓다의 말씀이고, 순냐따(sunnata, 빔)를 다루지 않는 것은 후대 제자들의 법문입니다.
So the Buddha considered suññatā and discourses dealing with suññatā to be real essence of Buddhism. This is why he said, “When the teaching of suññatā had died out and no-one is interested in it any longer, then the real essence of the Dhamma will have been lost.” 그러므로 붓다께서는 순냐따(빔)를 고려했으며, 그 법문은 불교의 참 핵심인 순냐따(빔)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순냐따(빔, sunnata)'의 가르침이 사라지고 아무도 더 그것(순냐따)에 관심이 없다면, 그 때에는 담마의 참 핵심이 없어질 것이다."
It is like the drum owned by the Dasāraha kings in ancient times, which was handed down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As it became worn out and dilapidated, it was patched and mended time and time again, over a long period, until eventually consisted of nothing but new materials. The real substance of it had completely disappeared. 담마의 참 핵심이 없어지는 것은, 대대로 전수되어 고대에 '다사하라 왕'이 소유하고 있는 북과 같습니다. 그 북은 닳아 헤지고 낡으면 그때마다 다시 깁고 수선하기를 오랜 기간에 걸쳐 하였으므로, 결국 모든 것이 새로운 재질로 바뀌었습니다. 원래의 진짜 재질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When the time comes that bhikkhus no longer are concerned with studying and listening to topics relating to suññatā, which is the subject that they ought to be studying and practising, at that time it can be said that the original substance of Buddhism has been lost completely and that nothing remains but new material, utterances of later disciples, just as happened with the drum. Think it over! The Buddha urged us to teach the Dhamma, splendid in its beginning, middle, and end, in terms of non-grasping and non-clinging. But what is the condition of Buddhism at the present time? Is it like the original old drum or does it consist of just new material, just patches? We can find this out for ourselves by simply examining it to see whether or not people are interested in suññatā and practise suññatā. 승려가 공부하고 실천해야 할 순냐따(빔)에 관해 공부하지않고 듣지 않는 시대가 오면, 그 때에는 북의 예와 같이 불교의 원재질이 완전히 없어져 새로운 재질, 즉 후대 제자들의 법문만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붓다께서는 움켜쥐지 않음과 집착하지 않음을 통해 처음과 중간과 끝이 모두 다 훌륭한 담마를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의 상황은 어떨까요? 원재가 있는 북과 같을까요? 아니면 기워서 새로운 재질만 있는 북과 같을까요? 사람들이 순냐따(빔)에 관심을 갖고 실천하는지 아닌지만 보고 검토해 보면 우리 스스로 불교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These were the Buddha’s last instructions to his disciples: to practice heedfulness of this teaching, to proclaim this teaching and to restore the decayed material to fresh and good condition by studying suññatā. This is to be done by digging, probing about, studying, and discussing until such time as the understanding of this teaching has been revived and it can be said that the genuine material has been restored to its original condition. 이것이 붓다께서 제자들에게 한 마지막 가르침이었습니다. 즉, 이 가르침을 주의깊게 실천하고, 널리 알리고, 순냐따(빔)를 공부하여 부패한 상태를 신선하고 유익한 상태로 복원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이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생겨 가르침이 원상태로 복원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파고들고 조사하고 공부하고 토의하는 과정을 통해 달성할 수 있습니다.
Conclusion 마무리말 WE HAVE SUMMED up the Teaching in the form of short sections, so divided as to be easily understood and remembered, together with quotations from the texts. I hope you will remember the points we have discussed in so far as they illustrate fundamental truths that you can keep in mind, and are general principles to make use of in judging and deciding the various questions you will encounter in the future. The Buddha said that if doubt arises on any point, we must compare the doubtful proposition with the general principles. If it fails to fit in with the general principles, reject it as not being a teaching of the Buddha. Whoever made the statement has got it wrong; such a teacher is teaching the wrong thing. Even if he claims to have heard it from the Buddha himself, don’t believe a word of it. If it doesn’t fit in with the general principles, that is, doesn’t fit in with the Suttas and the Vinaya, reject it as not being an utterance of the Buddha. The Buddha’s teaching is non-grasping, non-clinging, suññatā, anattā (non-selfhood), and anything dealing only with elements, rather than with beings, individuals, selves, “I”, and “he” or “she”. 이제까지 가르침을 쉽게 이해하고 기억하도록 나누어서 경전에 있는 말씀을 함께 인용하여 짧은 항목의 형태로 가르침을 요약했습니다. 마음에 품을 수 있는 근본 진리를 설명하는 범위에서 지금까지 논의한 점들을 기억하여, 훗날 접하는 여러 가지 질문을 판단하고 결정하는데 일반 원칙(원리)으로 이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붓다께서는, 어떤 점에 의심이 생기면 의심스러운 문제를 일반 원칙과 비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반 원칙에 맞지 않으면 붓다의 가르침이 아닌 것으로 버리십시오. 누가 말했더라도 그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스승의 말이라면 그 스승은 잘못되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붓다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 말을 믿지 마십시오. 일반 원칙, 즉 경장(sutta)와 율장(Vinaya)에 맞지 않는다면, 붓다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 버리십시오. 붓다의 가르침은 움켜쥐지 않음, 집착하지 않음, 순냐따(빔), 아낫따(자아 아님, 무아), 및 요소로 취급하기만 하는 것 등입니다. 존재, 개체, 자아, ‘나’, 및 ‘그 남자’ 또는 ‘그 여자’를 취급하지 않습니다. Out in the country, in the district where I come from, people used to have to learn this Pali verse on the first day they went to live in a monastery: “Yathā paccayaṃ. pavattamanaṃ. dhàtumattamevetaṃ. (These things are merely natural elements ceaselessly concocted by conditions,) Dhātumattako(Just elements only,) Nissatto(Not real beings,) Nijjavo(Not individual lives,) Suñño(Void of any self-entity.) They had to learn this as the first thing on the very first day they went to stay in the monastery. They had not yet learned how to pay respect to the Buddha’s image, how to chant, or how to perform the morning and evening services; they had not yet learned how to carry out the pre-ordination procedures. In other words new arrivals were equipped with the highest knowledge, the very essence of Buddhism, right from the first day they entered the monastery to ask for ordination. Whether this custom still exists anywhere I don’t know, and whether applicants for ordination would understand what the verse means I don’t know either. But the objective of this custom was excellent, to give a person the essence of Buddhism right from the day he arrived. “Yathā paccayaṃ., (these things are causally conditioned, that is, they are devoid of selfhood). Dhātumattamevetaṃ., (these things are only elements, that is, they are devoid of selfhood). Nissatto, nijjavo, suñño, (they are empty, nothing individual or personal, devoid of selfhood).“ This they were taught on the very first day, but their descendants have let this custom die out. Who will be to blame when the day comes that suññatā is so little understood that there is. nothing left of the original Buddhism? (내가) 태어난 지역의 시골에서는 사람들은 사원에서 생활하려고 간 첫 날에 이 팔리 게송을 배워야 했습니다. 야타 빳차얌 빠왓따마남 다뚜맛따메웨땀(Yatha paccayam pavattamanam dhatumattamevetam, 이것들은 단지 조건에 의해 끊임없이 형성되는 자연요소이다.) 다뚜맛따코(Dhatumattako, 단지 요소일 뿐이다) 니�또(Nissatto, 실재 존재가 아니다) 니짜보(Nijjavo, 개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순뇨(Sunno, 어떤 자아 실체도 없다) 사람들은 사원에서 살려고 간 바로 첫날에 처음으로 이 게송을 배워야 합니다. 불상에 예배하는 법, 영창하는 법, 또는 아침 저녁으로 공양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으며, 수계절차를 배우지도 않은 상태로 이 게송을 배웁니다. 바꾸어 말하면, 신입자는 수계를 받기 위해 사원에 들어온 첫날부터 바로 불교의 참 핵심인 최상의 지식을 갖추었습니다. 이 전통이 어떤 곳에 아직 존속하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수계 신청자가 그 게송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신입자가 들어온 날부터 바로 불교의 핵심을 알게 하는 이 전통의 목적은 아주 탁월합니다. “야타 빳차얌(Yatha paccayam ; 이것들은 조건에 따라 형성된 것이다. 즉 자아가 없다). 다뚜맛따메웨땀(Dhatumattameveta; 이것들은 단지 요소들이다. 즉 자아가 없다). 니�또, 니짜보, 순뇨(Nissatto, nijjavo, sunno ; 이것들은 비어었고, 개체나 사람이 아니며, 자아가 없다).“ 이것을 사원에 들어간 첫날부터 가르쳤으나 그 후손들이 이 전통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빔(순냐따)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때가 와서 본래의 불교가 남아있지 않다면 누가 비난 받을까요? I hope this has done something to stimulate you good people to do some thinking, and so help nourish and sustain Buddhism. 이 법문이 여러분을 고무하여 바람직한 생각을 하는 선인으로 태어나게 하여 불교를 번창시키고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For the sake of the peace and happiness of the world, forget all about that “self”! 세계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자아’를 완전히 잊어 버리십시오.
원불사한국불교개혁源佛寺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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