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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백대영
“I am ~” 다섯 번째 “나는 부활과 생명이다”는 말씀을 살피려 합니다. 세 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그 형제인 라자로가 병들었습니다.
라자로의 자매들은 예수님께 라자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전달하였는데 전화기가 없는 때인 까닭에 메신저를 보내어 메시지를 전달한 것입니다.
그 심부름꾼이 예수님께 가는 동안에, 그 형제 라자로가 죽게 됩니다. 그 심부름꾼은 라자로가 죽은 것을 모르고 그가 병들었다고 알렸습니다.
들으신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병은 죽음을 향하여 있지 아니하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니 하나님의 그 아들이 영화롭기 위해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4).
그가 들으신 때에 확실히 그가 계신 장소에서 이틀을 머무르셨습니다.
라자로가 죽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거기 이틀을 머무르신 것입니다. 라자로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서둘러서 떠나실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그 후에 그가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그 유대로 다시 인도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7).
그에게 제자들이 말하기를 “그 유대인들이 당신을 돌로 쳤기에 찾았고 다시 당신은 거기에 떠나가시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요 11:8).
그 당시 예수님도 위험한 상황이고 그 제자들도 위험한 상황이었기에, 그 제자들은 예수님께 다시 유대로 떠나가시는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기를 시작하셨기를, “그날의 12 시점이지 않으냐 어떤 사람이 낮에 돌아다닌다면 넘어지지 아니하니 빛을 보기 때문이나. 어떤 사람이 밤에 돌아다닌다면 넘어지니 빛이 있지 않기 때문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9-10).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시간을 아무것도 짧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날은 그 정해진 시점이 되기 전에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일들을 위해서 시간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예수님께서 대답하셨고 그가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잤으나 내가 가니 그를 깨웠기 위해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11).
그 제자들이 대답하였기를 “잠자면 구원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죽음에 관하여 “잠잤노라”라고 말씀하셨으나, 저 사람들은 잠의 쉬는 것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명백히 말씀하시기를 “라자로가 죽었고. 내가 거기에 있지 아니한 것을 내가 기뻐하나니 너희가 믿었기 위해서나 우리가 그를 향하여 떠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14-15).
2. 베다니에 예수님께서 무덤에 라자로를 발견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17-20절에 “그가 4일을 무덤에 가진 그를 발견하셨고. 베다니는 예루살렘의 가까이 약 15스타디온 떨어진 거리에서 있었으나. 많은 유대인이 마르따와 마리아를 향하여 왔으니 위로하기 위한 것이라. 그러므로 그 마르따는 예수께서 오시는 것을 들은 때에 그에게 만났으나 마리아는 그 집 안에 앉은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3일 동안 시체 안에 머무른다고 믿었는데, 죽은 지 4일째가 되었다는 것은 완전히 죽은 것을 뜻합니다(요 11:17). 이때는 시체의 얼굴빛이 변하고 썩어서 이제 살아날 가능성이 없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그녀들을 향하여 오니 위로하기 위해 것이며(요 11:19), 그럴 수 있었던 주된 이유의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 가족이 명망 있는 가족이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위로하기 위해 온 조문객이 많은 것을 볼 때 이렇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르따는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들은 때에 그에게 만났으나, 마리아는 그 집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요 11:20).
마리아가 그 집에 앉아 있은 것은 조객을 맞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둘 다 나가면 조객을 맞이할 사람이 없기에, 마리아는 집에 앉았습니다.
마르따가 말하기를 “당신이 계셨으면 내 형제가 죽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또한 지금도 제가 아나니 당신이 하나님을 요구하신 만큼을 하나님께서 당신께 주실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요 11:21-22).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셨다고 생각하나 날짜를 살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참이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식을 들으신 때, 라자로는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첫째 날 라자로가 나빠져 그 자매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었습니다. 그가 떠난 후에 얼마 안 되어 라자로가 죽었고 바로 매장하였습니다. 그 심부름꾼이 예수님께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라자로가 죽은 것입니다. 라자로가 죽은 때에 예수님께서 요르단에 이틀을 더 머무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 날에 예수님께서 도착하셔서 라자로를 살리셨습니다.
“당신이 계셨으면”이라는 말은 너무 늦게 왔다고 비난한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거기에 “계셨으면”이라고 마르따가 가정하는 말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셨으면 죽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마르따는 말하였는데 하나님의 약속 규모(scale)를 낮추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시간과 장소를 마르따는 제한시킨 것입니다.
그 말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고칠 기회가 이미 지났다는 뜻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믿었지만 죽은 자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녀는 실제 믿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요 11:22). 그녀는 자기 생각에 자기가 큰 믿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 나 그런 일 당하면 나는 할 수 있어’라고 자신을 강하게 생각합니다.
마르따는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면 하나님께서 주심을 안다고 고백하나 지금 그녀의 남동생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지 아니하였는데, 마르따는 그녀가 실제로 믿는 것보다 더한 믿음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요구하실 것을 다 주실 수 있으십니다.
마르따는 예수님이 행동하실 것이라는 그녀의 소망을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요구하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다 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은 우리가 이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입니다. 나중에 믿음이 더 커질 때 이런 믿음을 가질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현재가 바로 우리가 가진 모두이므로 우리는 현재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1) 이제라도 예수님께서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요한복음 11장 22절에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당신이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마르따의 “이제라도”라는 말을 우리에게 적용하여야만 하는데 예수님께서 이제라도 예수님의 양을 구원하시리라고 믿어야 합니다.
나의 아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는데 이제라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나의 오빠가 언니가 믿지 않지만, 이제라도 믿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이미 죽어서 아무 소망이 없어 보이기 순간에 “이제라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능력을 갖추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어 있는 영혼을 살리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에 열병이 났을 때 예수님께서 듣지 않으셨습니다. 소망이 없는 영혼을 예수님께서는 “이제라도” 살리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는 “이제라도” 예수님께서 도우실 수 있으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 때문에 지금까지 고통당하다가 포기하였을지라도 “이제라도” 예수님께서는 그 영혼을 살리실 수 있으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절망시키는 상황일지라도 예수님께서는 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거스틴의 어머니인 모니카의 기도에도 응답하셨습니다.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소망의 줄을 끝까지 놓지 아니하여야 하겠습니다.
소망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아도 “이제라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겠고 예수님께서 시체도 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믿어야만 합니다.
오래 기도하였어도 기도가 허공을 치다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집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까?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절망의 상황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포기하시기 전에 “이제라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시기 전에 우리는 포기하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이셔도 이미 늦었어’라고 포기하지 아니하여야만 합니다.
존 뉴턴은 가장 악한 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 자신이 아프리카에서 온갖 비행을 저지르다가 구원을 받게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이제라도” 가장 비열한 자도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비록 방탕 어린 아들이나 방황하는 딸이 땅끝에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거기까지 가셔서 죽은 영혼을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예수님께서는 “이제라도” 도우실 수 있으십니다.
만일 여러분 중 어느 누가 매우 악한 아들이 있어 그를 돌보는 중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자 노심초사하고 있다면 그 아들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친척에 대하여 절망감이 들지라도 포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은 그를 버려도 여러분은 혈연이니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어머니는 “이제라도” 테일러의 구원을 확신하였는데 테일러는 자기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 여러 책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테일러는 작은 책자를 발견하고 그것을 읽으려고 책을 펼쳐 들었습니다. 몇 킬로미터 떨어진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해 부탁하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테일러는 책을 읽으면서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테일러는 중국 선교사가 되었는데, 인도에도 예수님의 양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제라도” 믿을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에 너무 늦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기에 너무 늦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하며, 예수님께서는 “이제라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라도” 죽은 영혼에 생명을 주실 수 있으십니다.
지금이 소망의 때며 “이제라도” 죄인은 예수님을 믿어야만 합니다. 나중으로 미룬다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기회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 은혜받을 시간이요 지금이 구원받을 순간입니다(고후 6:2). 나중은 사람에게 속하지 않았고 mRNA 백신을 맞은 현실이 그렇습니다. 사람이 언제 죽을지 우리는 알 수 없으니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라도” 소망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지금 살아 계신 까닭입니다. “이제라도” 소망이 있는데 예수님의 피에 능력이 있는 까닭입니다.
피로 채워진 샘이 있으니 임마누엘의 혈관들로부터 나오게 된 것이고, 넘침의 아래에 던져진 죄인들은 모든 그들의 유죄의 더럼들을 없앱니다.
(찬송가 258장 “샘물과 같은 보혈은” 영어 1절 가사 번역)
속죄 희생의 효력이 “이제라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이유인 것인데 성경에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의 효력이 분명하게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 “너의 형제가 일어날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따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마지막의 날에 부활에 그가 일어날 것을 내가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요 11:24).
예수님 시대에 일반 사람들도 부활의 교리를 널리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녀는 가련한 믿음을 나타내었는데, 곧 반신반의하는 믿음입니다.
그녀는 라자로가 부활할 것을 아나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모두 부활할 때에 라자로도 부활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말씀을 먼 장래에 일어날 일을 가리킨다고 믿었으나, 그것을 그녀 자신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녀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바다 안에서 건진 골동품과 같이 보였는데, 값있다고 믿으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크리스천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렇게 취급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도움 얻어야 하나 그러지 못합니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금괴를 통용되는 돈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나에게 적용하여서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금송아지가 있어도 그것이 나의 생명을 살리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2) 예수님께서는 그 부활과 그 생명이십니다.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 “나는 그 부활이고 그 생명이니 내 안으로 믿는 자는 비록 그가 죽을지라도(even if) 살 것이고. 지금 살고 내 안으로 믿는 모든 자는 그 영원 안으로 죽지 아니할 것이니 너는 이것을 믿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에 6장 35절에 “나는 생명의 떡(the bread)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앞에 8장 12절에 “나는 그 세상의 빛(the light)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앞에 10장 7절에서는 “나는 양들의 문(the door)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앞에 10장 11절과 10장 14절에는 “나는 좋은 목자다”라고 말씀하셨으며 본문 11장 25절에는 “나는 부활과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과 생명”은 오로지 예수님만을 통하여 주어집니다(요 11:25).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곧 “부활과 생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부활과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니, 예수님께서는 “부활”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이시다는 진술의 뜻은 26절에 그 설명이 나옵니다.
“부활”과 “생명”, 이 두 가지는 서로를 보완하는 용어입니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계시는 어디에나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질상으로 죽어 있던 그의 백성의 “생명”이십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자신에게서는 어떤 생명도 찾지 못함을 내포합니다.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만이 생명을 믿는 자에게 주실 수 있으십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의 범주 밖으로 벗어난 것은 모두가 사망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생명을 믿는 자에게 끌어오는 전선과 같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생명을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전달해 주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믿음으로 딱 달라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과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25). 예수님을 믿는 자는 비록 그가 죽어도 소생하는(come to life) 것입니다.
“죽을지라도”는 부정과거시제며 이는 육체적인 죽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비록 그가 죽을지라도(even if)” 살 것입니다.
죽음을 정복하는 생명의 선물은 예수님 안에서 현재의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력을 가지고 이 순간을 살아가야 합니다.
3) 우리는 자신에게 “나는 이것을 믿느냐?”고 물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6절 끝에 “이것을 너는 믿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살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는 결코 영원 안으로 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너는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요 11:26).
예수님께서는 유일무이한 부활과 생명이신 분이십니다(요 11:25). 본문 11장 26절의 “살다”라는 말은 영적 생명을 가짐을 뜻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입에서부터 나왔으니 확실성을 가진 말씀입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자므로, 영원히 죽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살 것이고 결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입니다.
마르따는 “이것을 믿느냐?”라고 예수님께 교리문답을 받았습니다.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거의 늘 우리의 실수라고 확신해도 좋습니다. 믿는 자에게 시련이 없지는 않으나 그 시련 중에 피난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관하여 특별한 교리를 “믿느냐”고 질문하셨는데 우리도 자신에게 성경의 진리를 “믿느냐”고 질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틀림없는 이 성경으로 시선을 돌려 거기에 기록된 것을 보며 나는 “이것을 믿느냐?”라고 자신에게 질문하여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운용하고 바르게 던지면 믿음의 폭을 대단히 넓혀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 넘어가지 아니하고 한 줄 한 줄 자세히 읽으며, 나는 “이것을 믿느냐?”라고 나 자신에게 정말 믿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됩시다!
1)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278-279.
2)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493.
3)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495.
4)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07-308.
5)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07.
6)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07.
7)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07.
8)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08.
9)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70.
10) Brown,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Ⅰ: 표적의 책』, 913.
11)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73.
12)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74.
13)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75.
14)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76.
15)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77.
16)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78.
17)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79.
18)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80.
19)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81-82.
20)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83.
21)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84.
22)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85.
23)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86.
24)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88.
25)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89.
26)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90-91.
27)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92.
28) Brown,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Ⅰ: 표적의 책』, 914.
29)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09.
30)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10.
31)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09.
32)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09.
33)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09.
34)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10.
35) Maier, 『요한복음』, 마이어 주석, 498.
36)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109.
37) Brown,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Ⅰ: 표적의 책』, 914.
38) D. A. Carson, 『요한복음』, PNTC 주석, 박문재 옮김 (서울: 솔로몬, 2017), 760.
39) Boice, 『요한복음 강해 Ⅲ』, 311.
40)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116.
41)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117.
42)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118.
43)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119.
44) Brown,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Ⅰ: 표적의 책』, 898.
45) Carson, 『요한복음』, PNTC 주석, 760.
46) Brown, 『앵커바이블 요한복음 Ⅰ: 표적의 책』, 914.
47) 박윤선, 『요한복음』, 성경주석 (서울: 영음사, 1984), 363-364.
48)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125-127.
49)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128-129.
50)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132.
51)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138.
52) Spurgeon, 『예수님의 이적·비유 강해 3』,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