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 마 와 팥 칼 국 수
내 고향 전라도에서는 팥물에 새알심을 넣은 것을 동지죽,면을 넣은 것을 팥죽이라고 부른다. 요즘에야 전국 어디를 가나 쉽게 먹을 수 있지만, 팥칼국수는 전라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였다. 어릴 적 여름이 되면 마당 한 켠에 큰 솥을 걸어두고 솥 안 가득 잘 거른 팥물을 끓인다. 손잡이가 긴 나무주걱으로 부지런히 저어줘야 걸죽한 팥물이 바닥에 눌어붙지 않는다.
팥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퐁퐁 튀어서 뜨거운 팥물이 주걱을 쥐고 있는 손에 튀거나 솥 바깥으로 튀어 나간다. 자칫 잘못하면 얼굴에까지 튀어올라 깜짝 놀라곤 했다. 그게 무서워 팔을 길게 뻗은 채 얼굴은 가능한 한 솥을 향하지 않고 몸은 옆으로 돌아서서 여차하면 금방이라도 도망갈 듯한 자세로 팥물을 젖곤 하던 기억이 난다. 진한 팥물과 찰떡궁합인 쫄깃한 면발은 너무 얇은 것보다는 약간 도톰해야 걸죽한 팥물과 잘 어울린다.
부모님과 우리 5남매, 집에서 하숙하던 사촌 오빠,그리고 반드시 한두 명 정도는 객식구가 같이 밥상에 둘러앉아 있었다. 옆집에도 한 사발 갖다줘야 하기 때문에 그 양이 꽤 많았다. 큰 솥에 한가득 끓여도 식구도 많고 한창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던 오빠들은 두세 그릇 뚝딱 해치웠기 때문에 남는 게 거의 없었다. 평상이나 마루에 걸터앉아 다들 땀을 뻘뻘 흘리면서 후루룩후루룩 잘도 먹었다.
전라도에서는 팥칼국수에 설탕을 넣어 먹는다. 요즘도 팥칼국수집에 가면 탁자 위에 소금과 설탕 그릇이 나란히 놓여 있다. 설탕의 단맛이 팥물의 고소하고 쌉사한 원래 맛을 잘 못 느끼게 해서 소금만 살짝 넣어 먹는다. 중고등학교 친구들과 팥칼국수를 먹으러 가면 예외없이 나는 소금을 집어넣는다.
팥칼국수를 먹을 때면 함께 곁들여 먹어야 하는 반찬이 있다. 동지 팥죽에는 시원한 동치미가 제격이지만, 팥칼국수에는 홍고추를 거칠게 갈아 담근 열무김치가 잘 어울린다. 이제 막 익기 시작한 국물이 자작한 열무김치-새 김치의 신선함과 익어서 풋내가 사라진-와 같이 먹어야 진한 팥물의 느끼함이 사라져 꼬들꼬들한 면발을 건져 먹고 남은 팥물을 남김없이 마실 수가 있다.
팥칼국수는 지금이야 먹고 싶으면 계절에 상관 없이 음식점에 가서 손쉽게 사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집 밖에서 끼니를 해결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열 명 가까운 대식구가 어디 가서 그렇게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겠는가. 팔순이 넘은 엄마는 가끔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는 말씀을 하신다. 몸은 비록 고단했지만, 뭐든 해주면 한 그릇씩 뚝딱 비우고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커가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보람과 희망을 가지셨으리라. 애지중지 키운 5남매가 당신의 품에서 떠나 각자 자신들의 둥지를 틀고 이제 홀로 남겨진 엄마의 외로움과 적적함이 팥칼국수의 향수를 더해주는 것은 아닐까.
첫댓글 팥칼국수 먹고 싶어요~~
지역마다 별식이 다르죠. 생산되는 재료가 다른 것이 이유일까요. 수원지방에서는 여름에는 콩국수를 겨울 동지에나 팥으로 팥죽을 쑤어 먹었거든요. 그런 것들이 먹기만 하면 만들기가 대수롭지 않을 것 같은데 실제 만들려면 정성이 많이 들어가죠. 어머니들이 귀찮아하지 않고 자식들 가족들 수고를 아끼지 않고 먹여 살린 것이 지금 주부들과 비교하면 신기해요. 내가 추측하건대 그때는 모든 물자 특히 양식이 귀해서 음식을 할 수 있는 것 자체를 고마워 했었지 않았을까. 다른 집은 양식이 귀한데 우리 집은 음식할 만큼 더 풍족한 것이니까, 귀찮기 보다 신이 났을 것 같아요. 여쭤보진 않았어요. 저도 팥칼국수가 먹고 싶어요~~
그 많은 식구들 해 먹이느냐고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우리엄마는 손칼국수 만드셔서 지나가는 사람들 다 불러서 함께 먹던 때가생각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