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담폭포에 있던 출렁다리는 당시 탐승객들에게 스릴 만점의 장소로 각광받아,
설악산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제일 많이 찍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겁니다.
아래는 그 중에 당시 어떻게 다리를 통과했는지를 고증할 수 있는 꺼리로 삼을 사진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53C384258EF81B712)
당시 도립공원도 아니고 표고 1000m에도 못미치는 대둔산이 전국적 유명세를 갖고 있었습니다.
국립공원들과 맞짱을 뜰 수 있었던 건 바로 스릴만점의 구름다리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스릴'을 요구하고 있었던 건 확실한 사실이죠.
설악산에서는 육담폭포의 출렁다리가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5277F4658EF848602)
등산객들 중에 눈길을 끄는 건 (1번) 돌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어머니입니다.
등에 유치원생쯤 되는 아이를 업고 있군요.
더 눈길을 끄는 건 파란색 2번 공간입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235344658EF850A0B)
1번) 얼굴만 보이는데요. 하얀 모자를 쓰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과
2번) 통나무 사이에 의자를 걸치고 앉아 있는 할머니입니다.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사진을 확대하고 포토샵 처리를 조금 해 보았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449424158EF80E017)
1번 아저씨는 이곳에서 통행세를 받고 있는 분으로 보입니다.
2번 할머니는 단순히 출렁다리가 무서워서 건너가지 못하고 저곳에서 일행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통행세 때문에 돈을 아끼려고 안건너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말의 주제인즉슨. 당시에 저곳 다리를 통과하려면 돈을 내야 했다는 거죠.
1971년에는 20원(학생 할인 10원), 1973년에는 30원(학생, 단체 20원)이었습니다.
뭐라고요?
1974년 이전에는 국립공원 입장료도 없었는데, 어떻게 저곳 다리를 건너는 데 통행세를?
아래는 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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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설악산의 명승지를 찾으려면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수익자 부담의 원칙이 냉정하게 적용되었습니다.
1971년 자료에서는 신흥사, 울산암, 금강굴, 권금성(도보), 비룡교 등에서 입장료를 각각 20원(학생 10원)씩 받았다. 그러니까 당시 탐승객들에게 인기 많았던 이런 곳을 찾으려면
주머니에 동전을 두둑히 넣고 가야 했습니다..
통행세는 곧 50퍼센트 인상되었습니다.
1973년 자료에서는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일주문을 새로 세운 신흥사는 40원(학생 20원), 향군적교,
비룡적교, 울산암 사도(私道), 금강굴 사도, 권금성 사도 등은 30원(학생, 단체 20원)으로 말이죠.
‘사도’라는 표현에서 보면 그 당시에 수익을 노린, 지금식 표현으로 하자면 민자 사업인 셈입니다.
이렇게 탐승하고자 하는 곳마다 사용료를 받는 것에 당시 시민들은 불쾌해 했을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신흥사를 들리지 않고 산행을 하고자 하는 이들이 입산료와 문화재 관람료를 분리하자는
주장도 어쩌면 이와 유사한 논리라고 하겠죠.
![](https://t1.daumcdn.net/cfile/cafe/253C384258EF81B712)
통행세를 낸 기록도 두어군데서 발견했습니다.
고려대 산악부원이었던 김유인의 1967년 10월 25일 일기에 의하면
‘잠시 후 우리는 육담폭포에 도착하니 구름다리가 걸린 것이 참으로 멋있었다.
통과하는 데 10원이었다.
마침 돈 받는 사람이 졸고 있어 살금살금 통과하여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었다....
내려오는 길에 기념품 몇점 사고, 머루즙을 3병 사왔다.
1967년에는 10원이었군요.
대구에서 활약한 청산회의 1970년 창간호에는
1969년 10월 5일, ‘금강굴 입구 일인당 입장료 20원, 굴 자체보다 내려다보는 조망이 좋다’라고...
그러니까 늦어도 1969년에는 10원이 20원으로 100퍼센트 인상된 걸 알 수 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3334D3758F054EA01)
1974년 8월 사진입니다.
재향군인회에서 설치한 비룡교(향군적교)입니다.
저쪽 왼쪽에 있는 건물 역시 입장료 관련한 건물이기 쉽겠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돈을 내는 문화가 사라졌을까요
그게 궁금한데...앞으로 연구^^꺼리입니다.
이상, 많은 분들이 잊어버렸을 그때 그시절 설악산 등산 풍속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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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인공이 가미되지 않는(즉 자본을 투여하지 않은) 자연 상태의 산에 돈을 받거나 주어야 한다는 개념은 이 이후에야 등장했습니다. 그러니까 국립공원 입산료 문제 말이죠.
1974년 봄부터 건설부는 설악산을 비롯한 8개 국립공원에서 어른 50원(학생 30원)으로 해서 국립공원의 보호 및 환경시설을 확보하는 데만 사용하도록 했죠. 입산료를 받는다는 것과 위의 인공 시설물 사용료는 다른 개념으로, 이후에도 정부는 부족한 재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간자본을 유치하여 관광지에 필요한 숙박시설과 오락시설 등을 건축하는 기조를 유지했습니다.
참고로) 경향신문 1966년 7월 9일 기사 ‘1966년 여름 인촌송도해수욕장은 입장료 어른 80원, 튜브 30원, 수영복 30원, 탈의장 20원, 의자 50원, 비치 패러솔 150원, 2평 천막 300원, 보트 시간당 60원, 유람선 400원, 어린이 놀이터 입장료는 별도 20원, 돗자리 30원, 샤플보드 게임 1인당 20원, 탁구 한게임 60원으로 책정되어 있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