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정리:2002.2.1(금)
06:40달궁-07:00얼음골 이정표-10:00빙폭(식사)-10:40하산-13:20달궁
반야봉은 나에게 있어서 천왕봉보다 오르기 힘든 곳으로 항상 남아 있던 곳이었다. 심마니 능선에서도 그랬고, 심원마을의 대소골에서도 그랬다. 주능 길에서는 바쁜 시간과 일정에 쫓겨 스쳐 지나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나는 반야봉을 가슴속에 늘 품고 그리워 해왔다. 평상시에도 조망 때 넘버원으로 그치지 않고, 내가 있는 위치를 반야봉의 거리와 그에 따른 변화를 보고 가늠할 수 있는 척도였으니 반야봉은 나에게 있어서 지리산 지도 그 자체요, 나침반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오늘의 코스는 지난번 꿈에서 그리워하던 바로 그곳으로 가고 싶었다. 달궁에서 반야봉에 올라 조망을 즐긴 후 노고단을 거쳐 심원으로 하산하는 것으로. 물론 이 코스는 휴식년제에 걸려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구간이다. 하지만 그곳이 사무치게 그리웠고, 특히 노고단과 심원 구간은 가본지가 너무 오래되어, 설사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에게 적발된다면 범칙금도 불사할 정도의 각오도 이미 다짐한 바였다. 지리산 신이여. 오늘 통제된 당신의 구역으로 비장한 마음으로 들어갑니다. 부디 용서하시고 당신의 몸을 허락하소서.
새벽 3시 반에 문득 눈이 떠진다. 설경의 지리산이 눈에 아른거려 도저히 절제할 수 없는 나날을 보내던 시간이었다. 12월부터 매우 급하게 오르던 주가는 1월 들어서도 멈추지 않고 치솟아 하루하루를 환희의 나락 속에 나를 빠뜨렸고 안방 귀신이 되어 컴퓨터 앞에서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아내의 핀잔과 인터넷 게임을 하는 아들 녀석에게 미운털이 박힐 대로 박힌 때였다. 가파른 상승기를 접고 조정을 거치는 날. 주식을 대충 팔아 치우고 지리산으로 향한다.
분식집에서 김밥 도시락 2개를 준비하였고 비상식과 라면을 배낭에 쑤셔 넣고 시내를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접어 들었다. 지리산 휴게소에서 간식을 먹으며 한참을 머물다 인월을 거쳐 반선 마을로 향한다. 지난번 폭설로 인월과 반선 구간이 얼어붙고 미끄러워 상당한 주의를 한다. 특히 반선에서 달궁까지는 도로가 완전히 결빙되었고, 달궁마을을 조금 지나 더 오르지 못하고 장비를 점검한다. 지금의 시각이 오전 6시 30분. 아직도 사위는 캄캄하며 남쪽 서북 능선의 검푸른 하늘엔 둥근 달만 훤히 비친다. 아아. 달도 참 서럽게 밝구나.
얼어붙은 포장도로를 따라 성삼재로 향하는 도로 커브 길 여유 공간에 주차하고 가이드 레일을 넘고 목조 계단을 내려가 달궁 골을 가르는 철 다리를 넘는다. 쟁기소 입구를 들어서서 반야봉으로 향하는 얼음골 초입을 찾는다. 계곡의 상당 부분이 얼어붙었고 하얀 눈이 덮여 있어 입춘을 앞둔 지리산이지만 이곳의 겨울은 아직 봄을 맞이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아마 이 눈과 얼음은 봄을 한참 지나서야 녹을 것이다. 어둡고 홀로 산행이며 자주 오른 코스가 아니라 적잖은 부담감을 느끼고 왔는데, 다행히 어느 선배 산님이 벌써 이 길을 걸어갔는지 발자국이 선명하다. 으음 다행이군. 의외로 산행이 순조롭겠는걸. 하지만 발자국만 믿고 따라 올라가는 방심에 빠져 후에 낭패를 당하게 된다.
발자국을 따라 십여 분 오르다 어둠 속에서 눈에 익은 첫 이정표를 만난다. 반야봉 5.8km. 아무리 눈길이지만, 길만 잘 찾아 잘 오르면 반야봉까지는 3시간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최근 산행 때 반야봉에서 이곳으로 하산 길이 두 시간이 채 못 걸렸으니.
달궁계곡을 지나 산언저리로 돌면 얼음골 초입이다. 여러 산님이 지나간 듯한 선명하고 고마운 발자국을 계속 따라 걸으며 계속 얼음골로 진입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날이 밝지 않아 깜깜해 갈림길에서 능선 사면 위의 나무에 걸린 표지기를 보지 못하고(하산하다 확인), 달빛에 비친 뚜렷하고 확실한 발자국을 계속 따라 걷다가 길을 놓친 것이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들었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물론 얼음골로 들어서는 곳도 곧 능선 사면을 타게 되고 다시 계곡을 서너 차례 건너고 능선을 타는 과정이 반복되어 눈에 덮인 이 길이 결국은 심원마을의 안심소에서 올라오는 반야봉 길과 만나리라 확실히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시간 이상을 오른 후에야 뭔가 일이 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미 되돌아서기엔 지금까지 공들여 오른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아마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는 발자국에 미련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진리를 왜 나는 따르지 않았을까. 만약 되돌아가 산행을 다시 하였다면 2시간을 손해 보겠지만 일찍 산행하였기 때문에, 충분히 반야봉과 노고단을 거쳐 심원으로 하산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만복대가 하얀 백설기 떡처럼 먹음직스럽게 풍요롭다. 아직도 발자국은 간간이 이어진다. 도대체 누구의 발자국일까. 누군가 나처럼 길을 잘못 들어 이곳으로 오르게 된 것일까. 오를수록 발자국은 차츰 흔적을 감춰 버린다. 낭패다. 혹시 오늘 산행이 얼마 전 옥계동 덕두산의 산행처럼 실패로 돌아가지나 않을까. 눈 속에 파묻힌 계곡은 상류 측으로 갈수록 험난하고 경사가 가팔라져 한 걸음 나가는 것도 힘겹다. 돌 틈 사이로 무릎과 발이 빠지기도 하고, 바위 하나를 오르기 위해 한참을 짐승처럼 기어야 했다. 엄청 힘이 든다.
하지만 정면을 바라보니 반야봉 정상이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얼음골의 끝은 반야봉 북봉(중봉)이다. 그러니 저 위에 둥글고 긴 능선처럼 보이는 것이 반야봉인 것이다. 오른쪽으로는 남봉이 약간의 옆모습을 내다보였고 북봉과 남봉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헬기장 안부가 될 것이다. 내 뒤의 만복대가 이제 눈 아래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고도는 충분히 높였다. 간간이 나의 마음을 위로하던 발자국은 상류 지점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았고 그제야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10시가 되어 얼음골 최상류 지점에 도착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제법 높은 빙폭이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든다.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 배고픔을 느꼈고,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산행을 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내 몸과 함께 얼어붙은 배낭을 열어 김밥을 꾸역꾸역 입에 넣고 정신을 차린다. 눈앞의 빙폭을 보고 주눅이 들어 고민하다가, 도저히 오를 수 없어 우회한다. 헉헉. 허리까지 빠지는 능선 사면을 헤쳐 오른다. 엄청난 적설의 러셀에 온 힘을 다하여 버티어 보지만 체력의 한계를 느껴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꼼짝없이 쉰다. 시간이 지날수록 러셀 하며 걷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많아지니 공포가 엄습해온다.
아아. 절망적이다. 문득 장O수 선생님의 하봉 산행기 "6시간의 환희, 20시간의 사투" 가 떠오른다. 그 산행기는 한겨울 하봉을 오른 후 조난직전의 칠선계곡을 밤새도록 헤쳐나간 이야기였는데 나에게 무한한 감동을 불어 넣어 주었었다. 나는 그처럼 생생한 산행기를 읽어 본 적이 없었다. 그 산행기의 주인공이 필O님이기도 하다. 한참을 치고 올라 봉우리에 서니 가까운 거리에 반야봉이 마중 나온다. 휴. 다행이다. 이제 조금만 더 계속 좌측 사면으로 따라붙어 심마니 능선으로 오르면 반야봉 정상이다. 하지만 곧 산행 최대의 적을 만난다. 쓰러진 풍도목 등 잡목들이 많아 산행을 진행하기 어렵다. 지난여름의 끝자락. 심원의 대소골에서 반야봉을 치고 올라갈 때도 앞을 가로막는 조밀한 잡목들에 엄청난 체력을 소진하였었지. 그런데 눈과 함께 이곳에서 또 만나게 되다니. 곳곳에는 자신의 수명을 다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커다랗고 긴 고사목들이 눈 속에 파묻혀 걸림돌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고, 그것을 넘고 우회하며 허리까지 계속 빠져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걸음이 계속되고 있다.
군경 토벌군에게 쫓긴 파르티잔들의 겨울 행군도 이렇게 힘겨웠을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헐벗고 굶주리며 지리산의 겨울을 보낸 것일까. 토벌군들은 파르티잔들을 뒤쫓고. 파르티잔 들은 선과 비트를 찾아 토벌군의 눈을 피해 캄캄한 눈 속의 지리산을 어떻게 이동하였을까. 그것만으로도 살아남은 파르티잔들은 대단한 존재가 아닌가. 한참을 만복대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숨을 헐떡인다. 정령치로 오르는 길이 유난히도 하얗게 선명하다. 고리봉에서 계속 이어진 바래봉도 온통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하지만 나는 카메라 셔터도 누를 생각도 없었고, 이제 바닥난 체력을 가지고 하산을 어떻게야 할지 걱정할 처지가 되었을 뿐이다.
반야봉을 빤히 앞에다 두고 많은 적설에 자신감을 잃고 말았다. 체력은 고갈되고 허벅다리는 이미 천근만근이 되었고, 종아리 근육도 뭉쳐 자칫하다간 쥐가 올라 커다란 낭패를 볼지도 모르는 상태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여기서 무조건 오늘의 산행을 접는다. 마음이 아프다. 가슴이 저린다. 여기서 괜한 오기를 부렸다가는 늦은 봄에나 내 주검이 발견되겠지. 천왕봉과 달리 반야봉은 쉽게 정상을 내주지 않는구나. 아쉽지만 오던 길로 미련 없이 다시 하산한다.
첫댓글 그래서 내려 오심을 잘하셨습니다!~
반야봉은 몇년 전에 대간 지리산종주하면서 올랐었는데 오르기 직전에 도넛 반쪽 먹은것이 체해서 무진장 힘들게 올랐는데 반야봉의 멋진 매력을 다 보여주셔서 감사했답니다.
아~ 그리운 지리산!~
가서 뵙는날까지 건강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