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 호란과 심양에 얽힌 한
리문호
병자호란(丙子胡亂)이란 ?
리문호
력사는 그저 력사이다. 력사에는 정의요 비정의요 하는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력사는 절대적 강자의 력사이다. 힘과 모략(謨略)으로 야심으로 기존의 질서를 뒤 엎고 패권과 왕권을 수립하는 력사이다. 약하면 얻어 맞고 멸망하는 력사이다. 중국의 력사를 봐도 이러하고 삼국 사기나 고려와 조선의 력사를 봐도 이러하다. 그중 병자년 호란은 가장 치욕적인 력사로 남아있다. 아래에 세가지 방면으로 말해보려한다
(1), 정묘호란의 전후 (2), 병자 호란, (3), 심양 옥중에서 쓴 삼학사의 시 등이다
(1), 정묘호란의 전후
7년의 임진왜란(壬辰倭亂)은 명나라 이여송이 이끄는 지원군의 협조하에 물리치게 되였다. 그러나 왜구의 잔인한 살인, 방화, 약탈에 조선의 정국과 경제는 장기간 회복되지 않았다. 게다가 조정의 당파 싸움에 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선조가 돌아가고 광해군(光海君)이 등극하면서 당파 싸움은 더욱 격렬해졌다. 광해군은 동복 형인 임해군(臨海君,)이복 아우인 영창대군(永昌大君), 조카 능창군(綾昌君)을 죽이게 하고 계모 인목 대비(仁穆大妃) 가두게 한 죄로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였다. 인조(仁祖)가 등극한 후에도 당파 싸움은 그칠줄 몰랐으며 이괄(李适)의 난을 덥쳐 조선왕조는 도탄에 빠지게 되였다.
명나라 역시 임진왜란에 피폐해진 틈을 타 세종, 세조 때 꼼작 못하던 여진족이 만주에서 강대해지기 시작하였다.중국의 무순과 신빈을 관통하는 쑤즈허(蘇子河) 기슭 허투아라에서 누루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하고 만주를 차지하였다. 1616년 신빈을 도읍으로 정하고 흥경이라 하였으며 년호를 후금(後金)이라 하였다. 누루하치는 제왕의 자리 한(汗)에 오랐는데 바로 청나라의 태조이다.
누루하치는 군사를 일으켜 요동 땅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1618년 천조(天朝)의 나라 명에서 조선에 지원군 요청하에 강홍립(姜弘立)을 5도 원수(元帥)로 삼아 군사 2만을 거느리고 명군과 합세 하였지만 이듬해에 대패하여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조선으로 도망가지 못한 조선 군대는 깊은 산속에 숨어 살았았는데 지금의 요녕성 개주현 산골의 박씨촌 마을이 그 실례이다. 그들은 우리 말을 모르는 한족이 되였다. 그리고 이여송(조선인)의 손자 이성량은 성을 수비하다 항복하지 않고 자결하였다. 지금도 요녕성 철령시에는 이성량 종친회가 있는데 한족으로 되어 있다.
누르하치는 승승장구로 승리하여 도읍을 심양으로 옴겼으며 심양을 성경이라 하였다. 누르하치가 죽고 여덟번째 아들 홍타시(洪他時)가 뒤를 이어 1636년 4월에 등극하였는데 바로 청나라의 태종이다.
임진 왜란을 겪은 50년 후 1627년(인조5년) 정묘(丁卯)년 정월에 홍타시는 아민(阿敏)에게 군사 3만을 내주어 강홍립, 박난영을 길잡이로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을 점령하였다. 구실인 즉 전왕 광해군의 원수를 갚아 준다는 것이였다. 여러 성이 함락되자 세자를 전주쪽으로 내려 보내고 인조는 29일에 강화로 피난하였다. 대세가 기울어 지자 화의하기로 결정하고 2월 15일에 원창부령 이구(李玖)를 왕의 아우 원창군이라 가장하여 무명 1만 5천필, 면주 200필,백저포 250필, 호피(虎皮) 60장, 녹피(鹿皮) 40장, 왜도(倭刀) 8자루, 안구마(鞍具馬) 1필을 보내고 3월 3일에는 형제지국 맹약을 맺었다. 정묘호란은 한 단락 지었으나 수십일 동안 청천강 이북은 거이 폐허가 되였다. 10년후 병자호란이 일어 났는데 아래에 보기로 하자
(2), 병자호란
(ㄱ), 병자 호란의 배경
1632년 홍타시는 내몽고를 점령하고 1636년 4월에는 국호를 청(淸)으로 정하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하였다.
병자호란의 시발은 이러하다. 병자년 이른봄에 무신동지(武臣東知) 이곽(李廓)과 첨지(僉知) 나덕헌(羅德憲)이 춘신사(春信使)로 심양에 갔는데 마침 3월 11일은 홍타시가 황제를 참칭(僭稱)한 날이였다. 그들은 이곽등을 위협하여 참석하라고 하였으나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여 따르지 않았다.. 녀진족 관리들이 구타하여 옷이 찟기고 갓이 부서졌으나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이곽등이 돌아올때 한(漢- 청의 황제를 일컬음)은 답서를 주어 가져가게 하였으나 오는 도중에 버렸다.
이해 늦은 봄 용골대(龍骨大), 마부대(馬夫大) 두 장수가 인렬왕후의 조제(弔祭)를 드리러 왔는데 청나라 십왕자(十王子)가 인조에게 드리는 글을 보내 왔다. 내용인 즉 화호(和好)를 끊지 말며 이곽등이 의식에 참가하지 않을것을 비난하는 글이였다. 조정은 벼슬 자리를 잃고 있는 이명등에게 접대를 분부하였는데 너무 소홀하였다.장령(掌令) 홍익한이 상소를 올려 사신의 목 베기를 청하였다. 기미를 알아 챈 호장은 민가에서 말을 빼앗아 달아 났다. 묘당(廟堂)에서는 그제야 겁이 더럭나 만류했으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인조는 곧 팔도에 교서를 내려 척화(斥和)할 뜻을 효유하였는데 서로로 가져가던 교서가 호장에게 빼앗겨 트집 거리가 되였다
조선은 명나라 신하의 나라로 임진왜란 때 명의 지원을 받았으며 주인을 두개 모실수 없다는 이유에서 였다. 홍타시는 서정(西征)에 후방 조선을 큰 걸림돌로 삼았다. 청은 후환을 없애고 물자를 보충하기 위해 병자 호란을 일으킨 것이다.
정세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조선 조정에서는 주화파와 척화파로 나뉘어 논란이 분분했으며 청의 사신을 목 베고 국교를 끊자고 했다. 양반, 선비, 사대부의 나라가 붓과 세치 혀로 강대한 제국의 창칼을 맞서기는 만무하다.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면 무었하는가 ? 역사는 정의(正義)가 없다. 강자는 승리하고 약자는 멸망한다
이조 판서 최명길(崔鳴吉)은 정세의 심각성을 간파하고 화친을 주장하였으며 이에 영의정 김유도 동조하였다.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 교리(校理) 윤집(尹集,) 수찬(修撰) 오달제(吳達濟), 홍익한(洪翼漢)등이 대표로 하는 척화파가 우세였다.
그 동안 조정에서는 주화파와 척화파가 옥신각신 싸우는 바람에 비운의 대세로 기울어져 갔다. 인조는 소역(小譯)을 특명으로 청나라에 보내 화해를 전하였으나 한이 소역에게 <너희 나라가 만약 11월 25일 이전으로 대신과 왕자를 보내 화의를 정하지 않으면 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무찌를것이다>라는 답변을 가지고 왔다. 조정에서는 또 타투다가 결국 박노(朴魯)를 보냈으나 기일을 지키지 못했다
(ㄴ), 병자호란
병자호란은 드디어 터지고 말았다.
12월 9일 청병수천이 압록강 얼음타고 건너 들어오고 뒤이어 청에 편입된 몽골군을 망라하여 20만 대군이 잇다라 강을 건너왔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비켜 놓고 성읍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직진하는데 각진의 조선 군사들은 겁 먹고 감히 막지 못하니 그야말로 승승장구가 따로 없었다.
12월 14일에는 청군이 이미 서울 가까이에 이르러 인조는 창황히 대궐을 떠났다. 서울안의 사대부들은 남녀노소를 부추기고 피난 가느라 수라장이였다. 인조는 강화로 가려 하였으나 적의 추격이 두려워 남한산성으로 도주하였다. 성안에는 서울과 지방군사 1만 2천명, 문무관과 산관이 200명, 종실과 삼의사가 200명, 하리가 백명,하종관이 데리고 있는 노복이 백명이였다. 이런 오합지졸로 대적하기는 역부적이였다.청병은 산성으로 진군하여 16일에는 완전히 산성을 포위 하였다. 뒤따라 태종 홍타시도 그믐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한편 강화도의 군사는 싸우지도 못하고 뿔뿔히 흩어졌으며 피난 간 빈궁(嬪宮)과 봉림, 인평 두 대군 및 부인은 청군게 붙잡혀 남한산성으로 끌려같다.
남한 산성이 포위된후 각 지방의 군사들은 감히 증원을 하지 못했으며 소부대가 증원 왔다해도 패배하고 흩어졌다. 하지만 성안에서는 이런 정황을 통 모른채 화친파와 척화파 간에 갈등이 심하였으며 응원을 고대하며 벝이고있었다. 고립무원의 상황하에 비축한 양식이 떨어지고 대세가 기울어 짐을 안 인조는 결국 항복하기로 하였다. 여기에 청의 한(漢)과 인조(仁祖) 간에 오고간 서신의 내용을 중점을 따 인용한다.
이조의 서한;
<소방(小邦)은 궁벽한 바다 한 구석에 있어 오직 시서(詩書)를 일삼고 전쟁을 익히지 않았읍니다. 약함으로 강한 것에 복종하고 작음으로 큰 것을 섬기는 이치인데 어찌 감히 대국과 맞서 겨루려 하겠습니까 ? 다만 우리는 대대로 명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원래 군신(君臣))의 명분이 정해져 있기 때움입니다…>
한의 서한;
<오직 시서를 일삼고 전쟁을 익히지 않았다 했지만 지난번 기미년(己未年)에 너는 까닭 없이 우리를 침노(주; 1619년 광해군 11년에 지원군을 명에 보내 녀진족과 싸운 일)했지 않느냐 ?…>
인조의 서한;
<조선 국왕은 절하고 글을 대청국 관온인성(寬溫仁聖) 황제게 올림니다. 엎드려 밝으신 뜻을 받자오니 간곡하신 타이름 내리셨읍니다. 그 책망하심이 엄하신 것은 곧 가르치심이 지극하심입니다 …>
이렇게 서한이 오고가고 사신이 오고 가면서 인조왕의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척화파를 내주고 세자를 인질로 보내며 해마다 청에 세공을 받히기로 하였다. 그리고 명 나라에서 준 고명(誥命,주; 고는 천자가 이르는 말, 명은 천자가 명령 하는 말)과 책인(冊印, 주; 임명장과 도장)을 받히며 명과 국교를 끊고 청의 정삭(正朔,주; 그 나라의 신하가 되어 따르는것) 받들기로 하였다.
(ㄷ)해마다 청에 세공(歲貢)할 물목은 ;
황금(黃金); 100냥, 백금(白金); 1,000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200부, 단목(丹木); 200근, 환도(環刀); 20파(把), 호피(虎皮); 100장, 녹피(鹿皮);100장; 차(茶); 1,000 포, 수달피(水獺皮); 400장,청서피(靑鼠皮);200장,호초(胡椒);10 두(斗), 호요도(好腰刀);26 파,호대지(好大紙); 1,000권, 호소지(好小紙); 1,000권, 오조용문석(五爪龍紋席); 4령, 각양화석(各樣花席); 40령, 백저포(白苧布); 200 필, 각색세주(各色細紬); 2,000필, 마포(麻布);400필,각색면포(各色綿布); 10,000필,포(布); 1,000필, 쌀 (米); 10,000 포(包).이다
(ㄹ) 1월 29일 최명길은 오달제와 윤집을 결박 시켜 성문을 나와 청군에 인도하였다. 인조왕은 그들에게 두분의 부모 처자를 종신토록 모시겠다고 약속 하였지만 몇 해동안 쌀을 내려 주고는 다시 은전(恩典)이 없었다. 김상헌과 홍익한은 후에 심양에 잡혀갔다.
1637년 1월 30일 인조와 세자는 남융복(藍戎服)을 입고 서문으로 성을 나갔다. 홍타시 한은 일찌기 삼전포(三田浦)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남쪽에 9층 계단을 만들어 황색 장막을 치고 황색 일산(日傘)을 세우고 군사를 줄세워 위엄을 과시하고 있었다. 군진이 엄숙하고 병기가 해빛에 번쩍이고있다.
인조는 앞에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려 항복하였다.
서울은 약탈방화 살인으로 페허가 되여 버렸다. 향교동구(鄕校洞口)에서 부터 좌우의 붓방(筆肆), 행랑(行廊)과 대광통교(大廣通橋),소광통교(小廣通橋,주; 서울의 종로,종루 남쪽 청계천에 있는 다리)에 이르기 까지 좌우 인가는 모두 불타버렸으며 도처에 죽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불모로 세자와 대군이 심양으로 잡혀 갔으며 사대부의 부녀자와 민간인 아녀자 3만이 끌려가 청의 종, 첩으로 되였다. 환향녀에 대한 이야기는 다 아는 사실이다
병자호란 후에도 청은 명나라를 치는데 조선의 보병,기병, 수군들을 충당 시켰으며 물자를 공급하게 하여 시달림이 끝임 없었다.
(ㅁ)
이런 치욕의 병자호란으로 부터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된 조선은 줄곧 도탄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런 치욕을 당하면서 국토만은 자손에게 물려 준 것은 다행이 아닐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청국에 편입되어 지금은 한국(북한을 포함해)이라는 나라가 중국의 서부의 루란(樓蘭)이라는 나라처럼 종적을 감췄는지 모른다. 또한 페쇠적이고 보수적인 양반제도와 유생들이 죽은 글을 고집하여 나라 일을 그르쳤는지 반사(反思)해 보아야한다. 그때 왜 청은 조선을 통치하여 자기 땅으로 편입하지 않고 그것으로 끝났는가 ? 그것은 청이 그 보다 더 큰 고기 덩이 서정(西征)의 전략적 욕심이 있어 후방에 정신을 분산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청나라 황제가 담략가이며 정치가이며 모략가로서 영웅호걸임을 충분히 설명한다. 그때 양반제도의 조선에서는 절대로 이런 인재가 나올수 없다는것을 후세로서 우리는 한탄할 뿐이다.
이 문장의 서두에서 말한것 처럼 력사는 강자의 력사이다. 또 다시 말해서 반역의 력사이다. 반역이 없으면 력사는 발전하지 못한다. 이런 과정이 없으면 력사도 없다. 한반도라는 땅에 모국이 존한다는것은 행운중의 행운이고 다행중의 다행이다. 현대인 누구던 한 민족이라면 소중히 여겨야 할것이다.
(3) 병자호란 때 심양에 얽힌 한
1637년 삼학사 홍익한(洪翼漢), 오달재(吳達濟), 윤집(尹集)이 척화한 죄로 청나라의 성경 심양에 잡혀왔고 1642년에는 김상헌(金尙憲)이 심양에 잡혀와 투옥 되였다. 그들은 청나라 황제 홍태극(洪太極)이가 자기의 신하로되여 준다면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송죽같은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홍익한은 붓을 달래서 <천만 번 죽더라도 마음에 달게 여기고 피를 북에 바르면 넋은 하늘을 날아 고국으로 날아 갈것이다> 라 하였다.
여기에 심양 옥중에서 쓴 김상헌과 삼학사의 시를 소개한다.
瀋獄送秋日感懷
金尙憲
忽忽殘方斷送秋 (홀홀잔방단송추)
一年光景水爭流 (일년광경수쟁류)
連天敗草西風急 (연천패초서풍급)
羃碛寒雲落日愁 (멱적한운낙일수)
蘇武幾時終返國 (소무기시종반국)
仲宣何處可登樓 (중선하처가등루)
騷人烈士無窮恨 (소인열사무궁한)
地下傷心亦白頭 (지하상심역백두)
어느덧 이국에서 가을철 보내니
한해 세월은 물보다 빠르구나
하늘가 시든 풀에 서풍이 세차고
겹겹 싸인 찬 구름에 지는 해 슬프다
이 몸 어느 날에 고국에 돌아가랴
고향을 바라 볼 높은 루각도 없구나
마음 열렬한 선비의 크나 큰 한은
옥 안의 시름으로 머리가 또 희네
瀋獄踏靑日詠懷
洪翼漢
陽坡細草坼新胎 (양파세초탁신태)
孤鳥樊籠意轉哀 (고조번롱의전애)
荊俗踏靑心外事 (형속답청심외사)
禁城浮白夢中來 (금성부백몽중내)
風飜夜石陰山動 (풍번야석음산동)
雪入靑凘月窟開 (설입청시월굴개)
饑渴僅能聊縷命 (기아근능료루명)
百年今日淚沾腮 (백년금일루첨시)
양지바른 언덕에 가는 풀 새싹 움트는데
조롱안에 갇힌 외로운 새처럼 마음만 애닲아라
남의 나라 답청하는 풍속 상관할 바 있으랴만
궁 안에서 즐겁게 술 마시던 일 꿈속에 떠오르네
밤 바람이 돌을 들춰 싸늘한 산 흔들리고
눈은 성애로 녹아 달은 활짝 밝구나
배고프고 목말라 애오라지 실날 같은 목숨 이어가니
하루가 백년인듯 지루해 눈물이 뺨을 적시네
瀋獄寄內南氏
吳達濟
琴瑟恩情重 (금슬은정중)
相逢未二朞 (상봉미이기)
今成萬離別 (금성만이별)
虛負百年期 (허부백년기)
地闊書難寄 (지활서난기)
山長夢亦遲 (산장몽역지)
吾生未可卜 (오생미가복)
順護腹中兒 (순호복중아)
우리의 사랑 그지없는데
서로 만난지 두해가 안 되서
오늘은 아득히 헤어졌으니
백년의 가약 허사가 되였구려
먼먼 이국에서 글 보내기 어렵고
산이 첩첩하여 꿈 또한 더디오
내 살기를 짐작할수 없으니
뱃속의 아이나 잘 부탁하오
除夜
尹集
半壁殘燈照不眠 (반벽잔등조불면)
夜深虛館思悽然 (심야허관사처연)
萱堂定省今安否 (훤당정성금안부)
鶴髮明朝又一年 (학발명조우닐년)
벽에 가물거리는 등잔불 보며 잠들지 못해라
밤 깊은 허전한 방에서 오늘 따라 심란도 하여라
늙으신 어머님 오늘도 편안하신지
시름 많은 백발로 또 한 해를 맞겠구나
이상 심양에 얽힌 한을 삼학사와 김상헌의 시로 소개하였다.나는 심양에 살면서 고궁에 가 볼 때마다 그들의 시가 생각난다. 지조 높은 조선의 선비 삼학사는 형장의 이슬로 되였다. 그러나 선비와 유생의 지조로서 나라를 구원 할수 없는 친통한 교훈을 남긴다. 형세를 판단하지 못한 결과는 국난을 초래한다.고구려가 당에 멸망한 후 신라, 고려, 조선은 줄곧 당, 료, 금, 원, 명, 청에 세공을 받히며 신하의 나라로 되였으며 성을 쌓지 못하고 군대를 발전하지 못하는 감시와 통제를 받아 왔다. 굴복으로만이 살아남을수 있었다.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로 부터 해방되였지만 대국들 사이에 끼여 또 분단이란 아픔을 가지고있다. 글로벌 시대에 어떻게 발전과 통일을 할것인가 ? 이는 민족 앞에 나선 가장 큰 과업이다. 과연 이를 완성할수 있는 인물이 한반도에 나올수 있는가 ? 현재로서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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