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영동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전쟁 전 정치적 학살>
전쟁 전 영동 상촌면에서는 불법적인 공권력 남용사건을 중심으로 경찰과 시민들의 대규모 충돌이 벌어졌다.
1948년 6월 28일 상촌면 상촌우체국장 남기명이 경찰에게 연행되어 고문․살해당하자 이에 항의하기 위해 그의 가족들이 상촌지서로 몰려 와 지서를 점거하고 살인을 저지른 김모 순경을 잡아오라며 밤을 세웠다.
이에 대해 충북도경은 진실을 은폐하고자 ‘남로당원이 지서를 습격했다’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 소식은 면내 주민들을 자극하여 300~500여 명의 주민들이 지서로 모여들어 이에 항의했다.
그러자 충북도경찰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트럭 6~7대에 경찰을 급파하여 200여 명의 주민을 영동경찰서로 연행했다. 경찰은 이를 진압하면서 총을 쐈다고 하는데, 당시 사상자는 없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1949년에는 좌익활동 혐의로 영동경찰서로 연행된 임영성이 영동읍 주곡리 임실에서 총살당했다. 영동경찰서는 고문으로 걸음도 못하는 임영성을 산에 풀어놓고 “너 멋대로 나가보라”라고 하고 뒤에서 총을 쏘았다고 한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충북내 다른 지역과 달리 7월 초부터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이 있었다.
영동군 용산면 보도연맹원 5명은 1950년 7월 초 경찰에게 연행돼 옥천군 청산면 샘티재에서 희생되었다. 이후 예비검속된 주민들 중 간부급으로 보이는 주민들이 7월 10일경 상촌면에서 희생되었다. 희생장소는 상촌면 상도대리 3개 지점과 고자리 1개 지점이다.
7월 18일 다시 충북도경국장으로부터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하여 특무대(CIC) 영동파견대장에게 인계하라는 지시가 영동경찰서장에게 하달되었다.
이에 따라 다음 날인 7월 19일 오전, 특무대 영동파견대장 김 아무개 일등상사가 경찰서를 방문하여 전황 설명과 함께 서장에게 경찰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영동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300여 명의 주민들이 7월 18부터 20일 사이에 영동읍 부용리 어서실, 영동읍 설계리 석쟁이재에서 학살당했다.
이 사건이 지나고 얼마 뒤 각 면단위 청년방위대원들이 경북 경산으로 이동 했는데, 이 중 국민보도연맹원이라며 색출된 주민들이 다시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사살되었다. 당시 희생자는 최소 89명에 이른다. 또한 경북 왜관 등 영동 주민들의 피난지역에서도 보도연맹원 사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된다.
영동경찰서 근무자의 증언에 의하면, 영동의 보도연맹원들을 소집․사살하라는 명령은 CIC에서 내려왔는데, 이들은 영동에 주둔하던 CIC가 아니라 북쪽에서 후퇴하던 CIC였다고 한다. 트럭에 태워져 영동읍 부용리 어서실로 이송된 주민들은 10명씩 99식 소총으로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총살 지시는 CIC가 했는데, 주민 10명 씩 1열로 세운 CIC 군인은 “공산당을 지지한다던가 앞으로 개심한다던가 이야기 해라. 네가 1번이니까 너부터 얘기해라”라고 한 후, 손을 위에서 아래로 저으면 뒤에 있던 경찰이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영동 노근리사건>
영동에서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벌어진 직후인 7월 23일 영동에서 후퇴하던 미 1기병사단 7기병연대가 영동읍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 600여 명을 거주지에서 소개시켜 임계리와 안점에 집결시켰다.
미군은 7월 25일 이들을 주곡리를 거쳐 하가리로 몰았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방공호를 만든다며 흙을 파게 만들었다. 하가리 하천변에서 하룻밤을 지낸 주민들은 미군이 사라진 것을 알고 일부는 마을로 돌아갔으나 나머지 주민 대부분은 경부국도를 따라 계속 피난했다.
7월 26일 피난 가던 주민들은 다시 미군에 의해 경부선 철길로 올라가 이동하던 중 미군 비행기의 폭격을 받아 100여 명이 사망했다. 이때 폭격을 피한 주민들은 노근리 쌍굴로 피했다.
그러나 이후 3일 동안 미 육군에 의해 총격을 받아 300여 명이 사망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7월 29일 미군이 물러나고 인민군이 도착한 후에서야 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미군을 따라다니던 이복훈이 주민들을 빨갱이라고 알려주어 생긴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부역혐의 피해>
영동의 수복은 미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미 24사단은 9월 26일 영동에 진입했으며, 27일에는 옥천을 경유하여 28일 대전에 진주했다. 영동군 영동읍에서 부역혐의로 미군에게 연행된 주민들은 모두 거제도에 수용되었다고 한다.
이는 의용군으로 강제징집되어 상주까지 갔던 당곡리 주민 강씨의 증언에서 확인되는데, 그는 전투상황에서 탈출하여 9월 26일경 집으로 돌아왔으나 마을에 진입한 미군에게 연행되어 같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갔다.
이상 영동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을 종합하면 다음 <표>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