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엔진 개발 실장 출신의 최재권 대표는 지난 2008년 테너지를 설립했다. 편안한 삶 대신 치열하게 뛰면서 엔진 개발에 대한 열정을 분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국 리카르도, 독일 FEV, 오스트리아 AVL를 지향하는 아시아 유일의 엔진 개발 용역회사 테너지는 현재 100여 명의 직원이 연간 25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그 중 절반은 해외에서 벌어들일 정도로 독자적인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기업가다.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은 참모들이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머리를 쥐어짜내 만든 기획서가 아니라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그가 “이봐 해보기나 했어?”라고 일갈하며 목표를 향해 돌진한 불굴의 도전 정신이 오늘날의 현대차를 비롯한 현대가(家), 아니 더 나아가 우리나라 제조업의 근간을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조선소를 지을 차관을 얻기 위한 추천서 문제로 세계적 선박 컨설턴트사의 회장을 만났을 때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로 상대를 설득한 일화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이라 불렸던 스티브 잡스도 고개를 숙일 만하다.
또한 포드차를 하루에 6대 정도 간신히 조립하던 초창기 현대차가 독자 모델 포니를 연간 5만 대 생산, 수출까지 하겠다고 나선 것에는 고 정세영 현대차 사장의 추진력과 정 회장의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쓰비시의 엔진과 변속기, 섀시를 기초로 이탈디자인의 조르제토 쥬지아로가 스타일링을 맡았지만 3년 남짓한 기간 동안 새차 개발과 동시에 공장을 건설하면서 부품의 90%를 국산화시킨 것은 그야말로 신화나 다름없다.사실 포니와 관련해 현대차는 미쓰비시로부터 뒤통수를 맞았다.
양사가 기술제휴를 체결할 당시 미쓰비시는 이미 앞바퀴굴림 소형차 플랫폼을 개발 중이었다. 하지만 미쓰비시는 이를 철저히 감추고 뒷바퀴굴림 랜서 섀시를 현대차에 넘겼다.
쥬지아로가 앞바퀴굴림 소형차 골프로 전세계 자동차 시장 트렌드를 이끌고 있을 때라 당시 현대차가 앞바퀴굴림 플랫폼만 있었다면 당연히 포니도 그렇게 나왔을 것이다. 이로 인해 현대차는 무려 10년 뒤에야 앞바퀴굴림 소형차 포니 엑셀을 내놓을 수 있었다.
기술 없는 설움을 뼈에 사무치게 느낀 현대차는 독자 엔진 개발에 나선다. 1984년 10명의 인재를 뽑아 마북리 연구소에서 알파(α) 엔진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이를 안 미쓰비시는 로열티 50% 인하를 내걸며 연구소 폐쇄를 요구했다.
현대차 순이익 800억원의 절반이 넘는 450억원을 미쓰비시에 지불하던 시절이기에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다. 하지만 ‘기술자립’을 열망한 젊은 엔지니어들의 열정과 정 회장의 뚝심으로 1991년 마침내 알파 엔진이 베일을 벗었다.
당시 엔진 개발에 참여했던 10명의 엔지니어들 가운데 1명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최재권(57) 테너지(TENERGY) 대표다. 1984년 현대차에 입사한 그는 기계설계학 박사로, 2001년 현대차 엔진 개발 실장을 끝으로 퇴사할 때까지 독자 엔진 개발에 모든 열정을 불태운 진정한 엔지니어다.
현대차에서 퇴직한 뒤 자동차 기술개발 용역업체인 독일 FEV사 한국지사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2008년 아시아 유일의 엔진 개발 용역업체 테너지를 설립한다. 고액 연봉이 보장된 지사장 자리를 버리고 테너지를 창업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세계 자동차 메이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는 엔진 개발 업체는 영국 리카르도, 독일 FEV, 오스트리아 AVL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중 FEV는 2위 업체로 꼽히는데 직접 근무하면서 내부 사정을 보니 별 것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직접 회사를 만들어보기로 결심했지요.”
1957년생인 그는 우리 나이로 현재 57세다. 아직 한창 일할 때이기는 하지만 안정적인 샐러리맨과 기업 창업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함께 일할 직원부터 사무실, 연구 장비 등 구비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게다가 기업가는 연구만 해서도 안 된다. 조직을 관리하고 대외 활동도 벌여야 한다. 도전 정신과 배포가 없으면 견디어내기 힘들다. 제조업은 더욱 그렇다.
특히 놀라운 것은 최 대표가 테너지를 세울 때 주식을 내어주면서 외부 투자자를 유치하지 않았고 현재도 지분 100%를 소유하고 있는 진짜 오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개인 재산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며 “무엇보다도 기술이 있으니까 자금을 융통할 수 있었다”고 웃으며 말한다.
수원시 광교 테크노밸리 차세대 융합기술원 자동차 연구동에 자리하고 있는 테너지는 현재 100여 명의 직원이 연간 250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인근 동탄 지역에 제2연구소를 준비하고 있을 정도로 사세가 날로 커지고 있다.
직원들에 대한 처우도 대기업 못지않다는 귀띔이다. 창업 6년 만에 일군 성과다. 최근 국내 행정당국과 손잡고 진행하는 대중교통 관련 프로젝트도 곧 가시화될 예정이다.
“국내 자동차 메이커 가운데 현대차를 빼면 독자적인 엔진 개발 능력을 갖춘 곳이 없습니다. 산업용 부문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는 그만큼 테너지가 일할 곳이 많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해외로 눈을 돌리면 그 대상은 그야말로 무한하지요.”
테너지는 창업과 동시에 국내 농기계 메이커인 국제종합기계의 2.4L, 3.4L 직분사 디젤엔진 개발을 맡아 컨셉트에서 설계, 테스트, 생산지원까지 모든 부분을 전담했다.
이때의 성공을 바탕으로 두산인프라코어와 대동공업 등의 산업용 엔진 개발에 참여한 데 이어 지난해부터 쌍용차가 해외에 수출하기 시작한 코란도 C 가솔린 모델의 엔진(G20DF)도 테너지의 작품이다.
실제로 테너지 연구동에는 위장막을 씌운 쌍용차가 그득했다. 이제 벤츠 엔진의 쌍용차가 아니라 테너지 엔진의 쌍용차 시대가 올 듯하다.
“제가 현대차에서 알파(α) 엔진을 개발할 때 리카르도의 기술지원이 있었고, 미국 워즈오토의 10대 엔진으로 꼽힌 최신 타우(τ) 엔진 역시 AVL의 기술이 뒷받침되었습니다. 현대뿐만 아니라 해외 주요 메이커들도 외부 업체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물론 기술이 부족해서 외부 개발 업체에 기댈 수도 있지만 선진기술이나 아이디어 습득차원에서, 또는 내부 일손이 모자라 개발 용역을 주기도 하지요. 테너지의 경우 현재 다양한 업체로부터 프로젝트를 수주받아 진행하는데 그 중 절반은 해외 업체입니다.”
실제로 회사 소개 카탈로그에 언급된 테너지의 고객사(자동차 메이커)를 보니 쌍용차 외에도 현대차, 한국GM, 토요타, 혼다, 르노, 볼보, 아우디 등 해외 유수의 자동차 메이커가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테너지의 기술력을 입증받았다는 것이 아닐까.
“포도주는 집에서도 담글 수 있지만 로마네 꽁티 같은 명주는 아무나 만들 수 없잖아요. 기계공학의 꽃인 엔진은 기술뿐 아니라 자본, 시간 등을 누가 효율적으로 투자하는지가 매우 중요한데, 최고 일류 업체가 엔진 개발시 1단계 진행 과정에서 100가지를 고려한다고 볼 때 저희는 대략 70가지 정도 수준입니다.”
그런데 기자가 꼭 강조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 테너지는 중국 업체에는 기술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것.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더욱이 영리를 목표로 하는 기업이라면 응당 나라와 업체를 가리지 않아야 할 텐데 그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최 대표는 “저를 비롯한 테너지 스태프들의 기술은 곧 우리나라의 재산이기 때문”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사욕을 위해 중국에 함부로 우리 기술을 넘겨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거의 모든 산업부문에서 우리나라를 맹추격 중인 중국은 비신사적으로 기술을 확보하려는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 자신이 연구하던 설계도를 빼내 팔아먹은 일부 국내 대기업 엔지니어들도 있는 상황 속에서 최 대표의 마인드에 존경심이 절로 인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엔진 배기량을 줄이는 다운사이징 열풍이 불고 있다. 기술 발전으로 과거 3.0L급 엔진에서나 구현할 수 있던 성능을 이제는 2.0L에서 충분히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직분사 장치와 터보차저가 만능 해결사로 떠올랐다.
“강화되는 배기가스 규제를 만족시키면서 연비가 뛰어난 엔진을 개발하는 데 포커스가 맞춰진 상황입니다. 그러다보니 직분사 장치와 터보차저를 선호합니다. 물론 직분사 장치는 성능을 높이는 데 유리하지만 연비 향상 관점에서는 메리트가 적고 값도 비쌉니다.
또 터보차저는 실용영역과 조화시키는 문제가 있습니다. 자동차의 경우 평상시 주행할 때 95%가 엔진회전수 3,000rpm 이하, 1/4 로드 이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대한 낮은 엔진회전 영역에서 충분한 토크가 플랫하게 나오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최재권 대표는 일반 오너들이 타고 다니는 노말 승용차 엔진의 연비를 높이는 데 이상적인 장치로 BMW 밸브트로닉으로 대표되는 CVVL(Continuously Variable Valve Lift)를 꼽았다.
문제는 이 역시 값이 비싸 고급차에만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토요타는 자사의 CVVL(밸브매틱) 장치를 코롤라 같은 엔트리 모델에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우수한 엔진은 자동차에 최적화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실험실 다이나모 계측기에서 적은 연료로 고출력을 뽑아내고 배기가스가 작게 나오면 뭐합니까. 실제 자동차와 궁합이 맞아 운전자 의도대로 잘 달리고 멈춰야지요. 물론 값도 싸야 하고요. 그런 점에서 토요타 엔진이 밸런스가 뛰어난 것 같습니다. 독일 프리미엄 브랜드는 차값이 비싼 만큼 뭔가 과시할 수 있는 엔진을 선호하지요.”
엔진 박사인 그를 만나기로 했을 때 꼭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바로 엔진 길들이기다. 과거엔 새차를 뽑으면 설명서에 ‘1,000km 달리고 엔진오일을 꼭 교환하라’고 명시됐었다.
또 ‘엔진 부품이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 길들이기를 하라’고 권장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오일 교환 항목이 사라지며 적당한 시기까지 과격한 주행을 삼가라고만 한다.
“엔진 길들이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연비가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러 시간을 내서 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술적으로 엔진이 일정 기간 가동되면 저절로 길들이기가 끝나거든요. 다만 엔진 컨디션을 오랫동안 베스트로 유지하려면 피로도를 줄여줘야 합니다. 지나친 과속과 급가속은 엔진에 스트레스를 줍니다. 따라서 엔진회전수를 지나치게 높이거나 부하를 많이 주는 운전은 피하는 게 좋지요. 물론 어떤 엔진이라도 20만km는 끄떡없으니 괜히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근 현대차 고객들이 제기하고 있는 엔진 블록 파손 문제에 대해서도 물어보았다. 최 대표는 “중, 고속 성능을 너무 높여서 밸런스가 좋지 않은 것 같다”며 자세한 대답을 피했다. 다른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듯했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사실 현대차를 비롯한 국내 대기업들은 테너지 같은 국내 기술 용역 회사를 꺼린다. 자신들의 기술을 빼내갈 우려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자동차산업 전체를 보고 기술 생태계를 육성하는 마인드가 필요하다. 폐쇄적인 쇄국정책은 결국 스스로를 퇴보시킬 수 있다.
그의 신조는 ‘치열하게 살자’다. 테너지를 세운 것도 엔진 개발에 대한 열정을 분출하고 싶은 욕구가 컸기 때문이다. 이공계 엘리트 상당수가 의사 등의 고소득 전문직이나 고시패스를 통한 공무원이 되는 것이 꿈(?)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그의 선택과 삶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이 시대의 청년들이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것’을 강조한다.
“인생에서 어느 게 옳다는 정답은 없죠. 어떤 일을 하든 후회나 아쉬움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따라서 남들에게 좋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하지요. 스스로 원하는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하면 그게 가치 있는 삶 아닐까요?”
㈜ 테너지 (031)888-9870 www.tenergy.co.kr
- 글
- 박영웅 편집국장(heropark@carlife.net)
- 1984년 창간되어 국내 첫 자동차전문지 시대를 연 <자동차생활>은 사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국내 자동차 문화와 미디어 시장을 이끌어 오고 있습니다. 29년 축적된 국내 최대 규모의 자동차 컨텐츠와 발 빠른 최신 소식, 냉철한 기획 등을 아우르며 오너드라이버들의 한결 같은 벗이 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