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브랜드인 동화약품의 부채표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등록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임에도 이를 기념하기 위한 의미 있는 행사는 전혀 없었다. 이 점이 안타까웠던 필자가 개최했던 근현대디자인박물관의 <한국브랜드백년전>(6월 28일~7월 25일)이 유일했을 뿐이다. 이 전시에 이어 한국 브랜드 100년 역사와 세계디자인수도 서울 선정을 기념하는 의미로 근현대디자인박물관, 서울디자인재단이 공동으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세워지고 있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이벤트홀에서 <한국포스터디자인백년전>(8월 16일~9월 13일)을 개최하기도 했는데, 이 두 개 행사의 개최 의의와 숨은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디자인 역사에 모두가 무심할 때, 또 우리나라 디자인 역사가 대략 1960년대부터 활동한 1세대에 의해 시작됐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할 때, 필자는 ‘한국디자인백년사’라는 의미심장한 타이틀로 1995년 8월호부터 6회에 걸쳐 월간 <디자인>에 우리나라 근현대 디자인사에 관한 연재를 시작했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연재를 시작한 ‘한국디자인백년사’는 접하기 어려웠던 근대 초기, 정확히 말하면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의 귀한 자료들을 대거 소개하며 당시 많은 디자이너의 호응을 얻었다. 이후 디자인계에서도 근대 한국 디자인사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미약하나마 연구 성과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1 1910년 일본상표법에 따라 ‘부채표’ 상표를 국내 최초로 등록한 한국 최고(最古) 브랜드이자 국내 최초 상표등록 제품 부채표 활명수. 2 활명수 달력.
개화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어렵게 싹을 틔운 한국 디자인 역사가 드디어 공식적·기록적으로 100년을 맞이하게 된 것은 동화약품의 부채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채표 활명수는 한국 최고(最古)의 브랜드이자 국내 최초 상표등록 제품이다. 활명수는 대한제국 선전관 민병호가 설립한 동화약방에서 1897년에 선보인 액체 소화제로 서양의 기술을 접목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이기도 하다. 동화약품은 1910년 8월 15일 일본상표법에 따라 ‘부채표’ 상표를 국내 최초로 등록했고, 1910년 12월 16일 특허국에 부채표 활명수를 등록했다. 191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유사 상표 방어용으로 ‘활명액’ 상표를, 1937년 7월 27일에는 만주국 봉천중앙특허사무소에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 상표를 등록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인정받아 활명수는 1996년 한국기네스협회로부터 국내 최고(最古) 제조 회사 및 제약회사 부문을 비롯해 국내 최초 등록상표, 등록 상품 등 4개 부문에 걸쳐 인증서를 받고 등재되었다. 한마디로 부채표는 우리나라의 브랜드 역사를 실증적으로 확인해주는 역사적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브랜드백년전>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전시회이자 한국 브랜드 100년의 역사를 정리한 의미 있는 특별전이었다.
한편 <한국포스터디자인백년전>은 <한국브랜드백년전>의 연장 선상에서 지난 100년의 역사를 정리하고 이제 새로이 시작될 100년의 한국 디자인 역사를 접목하는 의미를 지닌 전시회로 기획되었다. 전시가 열린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이벤트홀은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를 맡아 화제가 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안에 자리 잡고 있다. 2012년 7월 준공을 목표로 건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이 건물은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서 한국의 디자인의 위상을 전 세계에 드러낼 장소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데, 여기에 한국 디자인 100년의 역사를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는 점을 의미 있게 생각한다. <한국포스터디자인백년전>은 개화기부터 2008년까지의 포스터 136점을 소개했다. 말 그대로 포스터는 시대상을 온전히 담아내는 디자인의 표상이다. 대한제국 황실 관련 자료와 110년 전의 국가 상징 태극을 활용한 디자인, 일제 강점기 한국 디자인의 백미인 경성방직주식회사의 태극성 홍보포스터, 삼일운동을 지지했고 한국을 무척 사랑한 엘리자베스 키스의 크라스마스실 포스터, 어려웠던 시회 환경이 반영된 미군정 시절의 계몽 포스터와 1960~70년대의 경제개발 독려 포스터,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난 한국적 아이덴티티 기반의 포스터, 1990년대의 한국형 디자인 포스터, 2000년대 들어 세계 유수의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 등 포스터를 통해 지난 100년을 조망해볼 수 있었던 전시회가 바로 <한국포스터디자인백년전>이다. 앞서 소개한 두 전시회가 열리게 된 배경을 이 지면을 빌려 소개하면서 디자인계가 한국 디자인의 지난 100년과 앞으로 100년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1 경성방직주식회사 태극성 홍보 포스터(1920년대 후반) 현존하는 경성방직주식회사에서 제작한 이 포스터는 일제 강점기에 제작한 포스터 중에서 한국성이 가장 잘 드러난 대형 포스터다. 태극성이라는 브랜드가 찍힌 흰 무명천을 들고 있는 아낙 모습의 포스터로 곳곳에 삼각산, 천도복숭아, 호미, 산삼, 불로초 등 상징적 아이콘이 장식으로 들어간 것을 볼 수 있다. 포스터에 실린 문안 또한 전부 한글로 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다.
2 한미 연합군 안전 포스터(1950년대). 한미연합군사령부에서 발행한 계몽 포스터로 미군의 역할이 사회 치안과 국민 생활 안정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포스터다. 미군과 한국군이 등을 맞대고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제작했으며, 당시 이런 계몽적이고 계도적인 포스터를 정부나 군 관련 기관에서 인쇄해 많이 배포했다.
3 조선방직주식회사 쌍봉표 홍보 포스터(1930년대) 조선방직주식회사는 경성방직주식회사와 쌍벽을 이루는 방직 회사였다. 포스터의 크기와 인쇄 수준 등을 통해 당시 우리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산물인 방직물의 홍보를 위한 치열한 경쟁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길이가 1m에 이르는 대형 포스터로 이름 모를 아름다운 기생을 모델로 등장시키고 있다.
4 크리스마스실 포스터 ‘팽이 치는 소년’(1937년) 한국 화가인 김기창의 작품. 평양의 대동문을 배경으로 팽이 치며 노는 아이들과 이를 바라보는 아기 업은 여자의 모습을 그렸으며, 국민병인 결핵을 예방하고 박멸하자는 구호와 크리스마스실의 용도가 적혀 있다.
5 대한석유공사 유공스페샬 홍보 포스터(1969년). 디자인의 수준이 낙후돼 있던 1960년 당시 선진화된 디자인 기법은 해외 기업과 관련을 맺고 있는 국영기업 등에서 쉽게 받아들였다. 대한석유공사에 재직하던 디자이너 박재진은 당시 모든 디자이너가 손으로 직접 물감을 칠해 원화를 그리고 그 원화를 촬영해 포스터를 제작할 때 과감하게 사진, 그것도 화려한 옷차림의 여성을 등장시켜 포스터를 제작했다. 당시의 수준을 뛰어넘는 포스터로 사진은 상업 사진가로 유명한 김한용이 촬영했다.
6 제7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 포스터(1971년). 문화공보부가 제작한 포스터로 당시의 디자인 수준이 잘 드러나 있다. 태극기를 배경으로 깔고 그 위에 인물 사진을 합성하는 방법으로 제작했다. 대통령 취임식 축하 포스터임에도 사진 합성 수준이 부족해 인물 사진과 배경이 일치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제목 글씨의 경우도 일일이 손으로 쓰는 레터링 기법이 나타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