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촌은 1899년 김약연을 비롯한 함경북도의 다섯 가문이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없이,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이상을 품고 북간도로 건너가 세운 마을이다. 이후 명동촌은 '동쪽을 밝힌다(明東)'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조국의 광복을 밝히는 등불이 됐다. 명동촌 항일운동의 중추 거점은 이곳에 세워진 근대식 학교인 명동학교였다.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 나운규 등 걸출한 인물들이 모두 이곳 명동학교 출신들이다. 명동학교를 졸업한 청년들 상당수는 이후 독립군 사관학교로 들어가 정예 독립군으로 활동했다.
용정에서 확트인 남쪽으로 20여분 달리다 보면 왼쪽에 큰 선바위가 버티어 서 있다. 그 입석을 지나면 오른쪽에 조그만 시골마을이 보인다.
윤동주 생가 표석을 굽어돌면 북풍받이가 전혀없고 마당 텃밭도 넓고 뒤란도 밭을 일구어놓은 전형적인 한옥이 보이는데, 바로 윤동주 생가다. 내가 몇 해전 생가를 찾았을 때 마침 서녘하늘 위로 저녁노을이 빨랫줄처럼 늘어져 있었는데 가슴이 뛰어 견딜 수가 없었다. 시인의 혼이 얼비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었다.
'가고 없는 날들이 모여/불타고 있는 저 꽃밭 좀 봐 !/가만 있질 못하고 떠서/흐르는 꽃밭 좀 봐! /식지 않은 하늘이 보여주는/뜨거운 심장의 꽃들이 뒤돌아보며/무어라 중얼거리네/죽어 말없는 시인은 하늘에 /넋을 묻었나?/저녁이면 찾아와 붉게 타올랐다가/저승길 먼 듯 썰물지는/저것 좀 보아!'(서지월 시 '尹東柱 詩人의 生家 저녁 노을' 전문) ◇ 일제치하 가장 불우했던 대표적인 두 서정시인 일제치하 가장 불우했던 대표적인 두 서정시인을 꼽으라면 김소월과 윤동주일 것이다. 김소월은 1902년 8월 6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아버지 성도와 어머니 장경숙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철도를 설치하던 일본인에게 폭행당해 정신이상이 되자 할아버지가 그를 돌보았다. 소월이 오산학교에 다닐 때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서춘·이돈화·김억이 교사로 있었는데, 김억에게 시적 재능을 인정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3년 도쿄상과대학에 입학했으나,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학교를 그만두고 귀국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돕다가 1926년 땅을 팔아 동아일보사 정주지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했다. 그뒤 생활이 어려워져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술만 마시다가, 1934년 32세 때 곽산에서 음독자살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교회 장로이면서 소학교 교사인 아버지 영석과 어머니 김룡 사이의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명동소학교에 입학해 1931년 졸업했으며, 이듬해 가족이 모두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때 송몽규·문익환도 이 학교에 입학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졸업기념으로 19편의 자작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시집 3부를 만들어 은사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1부씩 주고 자신이 1부를 가졌다. 1942년 도쿄에 있는 리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1학기를 마치고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편입했다. 그러나 1943년 7월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송몽규와 함께 검거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윤동주는 45년 2월 16일, 송몽규는 그해 3월 10일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각각 옥사했다. 윤동주의 경우 그나마 유해가 만주땅 용정의 동산교회 묘지에 묻혀 있어 지금도 많은 한국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비해 김소월은 어찌됐는지 모른다. ◇ 문익환 목사와 윤동주 시인 문 목사는 윤동주와 같이 명동에서 자랐으며, 윤동주와 함께 입학해 명동소학교와 용정중학교에 다녔다. 윤동주는 문익환과 동갑이고, 갓난 아기 때 문 목사 모친의 젖을 같이 빨아먹고 자랐다 한다. 명동소학교 같은 반이었고, 은진중학교도 같이 다녔다. 평양숭실학교에도 같이 다니다가, 신사참배 물결에 반대하여 자퇴하여 고향에 돌아와 다시 용정 광명학원 중학교에 편입한 것도 같다. 둘 다 공부를 잘 했는데 윤동주는 소년시절부터 시인이었으며 문 목사는 70대의 만년에 이르러 시를 쏟아낸 것이다. 문 목사의 시집 중 '옥중일기'의 머리말에 보면 '동주형! 나같이 평범한 시인도 감옥에 들어오면 시가 쏟아져 나오는데, 형같이 타고난 시인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억울한 죽음을 날마다 숨쉬며 얼마나 절절한 시들을 짓씹었을까?'라는 대목이 나온다. 문익환은 감옥 가면 윤동주 감옥을 생각하고, 시를 쓰면 윤동주의 시를 떠올리곤 했던 것이다. 문 목사가 70의 나이에 쓴 시 '동주야'도 있다.
(윤동주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별헤는 밤
- 윤동주 _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佩),경 (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세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한 게외다
(명동학교 칠판)
의열단 결성한 부지 - 지금은 동북증권회사 건물
1919년 11월에 만주의 길림에서 김원봉, 이종암, 윤세주 등 13명이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단장인 의백은 22세의 김원봉이 선출되었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파괴와 암살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그리고 파괴의 대상으로는 조선 총독부, 동양 척식 주식 회사, 경찰서 등을 설정하였고, 암살의 대상으로는 조선 총독 이하의 고관, 군부 수뇌, 매국노, 친일파 거두 등을 규정하였다.
의열단 단원들은 1920년부터 1929년에 해산할 때까지 적극적인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박재혁의 부산 경찰서 폭탄 투척과 최수봉의 밀양 경찰서 폭탄 투척, 1922년 오성륜의 다나카 대장 암살 미수, 1923년 김상옥의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1924년 김지섭의 도쿄 이중교 폭탄 투척, 1926년 나석주의 동양 척식 주식 회사 폭탄 투척 등이 의열단 의사들의 대표적 의거 활동이었다.
한편, 애국단은 임시 정부의 지도자인 김구가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고, 의열단과 비슷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2년 1월에 일어난 이봉창의 일본 국왕 암살 미수, 1932년 4월 윤봉길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투탄 등은 애국단 의사들의 눈부신 의거 활동이었다. 그 중에서도 윤봉길의 의거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 정부의 활동을 지원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의열단 결성한 부지 - 지금은 동북증권회사 건물 )
만보산사건 토구회 1931년 7월 2일 장춘시 교외의 만보산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관개수로를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다.는 이를 ‘만보산 사건’이라 한다. 일제는 이 사건을 왜곡선전하여 한·중 양민족을 이간하였다.
이에 김동삼 등 민족운동가들은 한인 동포의 주택이었던 이 자리에서 ‘萬寶山事件 討究會’를 개최하여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사태를 진정시킬 대책을 논의하였다. 지금은 시가지가 크게 변하여 과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만보산사건 토구회 장소를 설명하는 허영길교수)
도산 안창호선생 시국강연 자리
1927년 2월 14일 길림시 조양문 밖에 있는 대동공창에서 안창호는 《조선민족운동의 장래》라는 제목으로 시국대강연을 하였다.북한에 김일성장군도 많은 청년들과 함께 이 강연회에 참가하였고 무척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
지금은 중국 태평양보험 건물 자리이다
석주이상룡선생 마지막 살던곳 소과전자촌 마을 입구
석주선생 생가터-선생님이 살던 집의 흔적을 찾을수가 없다
1932년 석주 이상룡의 유해는 소과전자 마을 뒷산에 임시로 매장되었다.
5년 뒤 이상룡의 조카 이광국과 이광민이 다시 이곳을 찾았다. 석주의 유해를 자신들이 정착하고 있던 하얼빈의 취원창으로 옮겨가기 위해서였다. 이광국과 이광민은 소과전자에 가매장되어 있던 이상룡의 유해를 추려 군령역을 떠나 취원창으로 향하였다. 70년 전, 나라를 찾기 위해 이역만리에서 혼신을 다하던 이광국과 이광민은 이상룡의 유해를 안고 철길을 달리며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광복이 되기 전까지는 유해를 조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던 이상룡은 1990년 그토록 그리던 광복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은 서울국립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임종후 가묘 자리이다 (정확한 위치는 모름)
길림감옥 터 1927년 1월 말 길림에 와서 연설하던 安昌浩와 정의부 관련 독립 운동가들이 이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20여 일만에 석방되었다.
김일성도 육문중학 재학 중인 1929년 가을 다른 한인 학생과 함께 ‘독서회 사건’으로 한때 수감되었다.
또 1930년대 사회주의운동이 고양되면서 다수의 한인 사회주의자들도 수감되어 고초를 겪은 곳이다.
그러나 현재는 15층의 고층건물이 들어서 옛날 길림감옥 흔적은 찾을 수 없다.길림 법률중심 건물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 자리(후기) 지금은 소학교로 되어있다)
하얼빈시로 이동하는 길 양쪽에 끝없이 이어진 옥수수 밭
하얼빈시는 러시아풍 건물이 많이 자리잡고있고
아름다운 송화강이 흘 러 지나고 있다.
하얼빈시는 동북아 중심지역으로 유럽-아시아 대륙을 잇 는 중추이며 유라시아 대륙교의 '명주'로 불리고 있다.
하얼빈은 또 경합선, 빈주선 등 5대 국내 철도간선이 연결돼 있으며 송화 강의 황금수로는 러시아로 직통되어 있어 러시아와의 직접적인 통 상이 가능하다. 태평국제공항의 연 승객수는 200만 명 이상이며 110여 개 지역과 국가에 승객 화물 수송 작업을 하고 있다.국무원의 비준에 따라 하얼빈시는 2004년에 행정구역을 재확정했다.
하얼빈에서 731부대 이동중 차량이 정체되니까 중국 운전기사들 중앙선 넘어1-2차선을 모두 장악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