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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 白頭大幹 ]
* 위 치 : 경북 봉화
* 산행일시 : 2023년 02월 26일
* 교통편 : 안내산악회
* 회차 : 대간 60-24
* 산행코스 : 생달마을-(접속 3.5km)-늦은 목이-선달산(인증)-박달령(인증)-옥돌봉-도래기재(실거리 16.13km/6시간 30분)
* 산행시간 : 10:42~16:24 (산행 5시간 42분/휴식시간 45분)
* 산행속도 : 3.39 km/h
* 산행거리 : 16.76km
* 날씨 : 맑음
* 기온 : 6~10℃
* 약수터 정보 : -
* 조망점 : 선달산
* GPX 트랙 : 별도 첨부
* 산행 난이도 : 고도차: 힘듦 , 거리:힘듦
* 주요 볼거리 : 능선길. 정상 조망.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태백산 부근에서 서쪽으로 기울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에 이르러
우리나라 땅의 근골을 이루는 거대한 산줄기의 옛 이름이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이나라 골격의 틀 중에서 장대하고 당당한 산줄기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길게 연결된 장대한 산줄기로 그 길이는 약 1,400km이나 남한에서 종주할 수 있는 거리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향로봉까지 약 684km이다.
오늘은 일전에 도래기재에서 태백산으로 다녀왔었는데.
이번에는 중간지점인 늦은목이부터 도래기재까지 가는 주간 산행을 함께 하였다.
금북정맥을 가야 하지만 지인의 백두대간 완등에 사진을 담으려 다녀왔다.
아무래도 무박이 아니고 당일 산행이다 보니 여자 산우님도 많고 그렇다.
백두대간이니 정맥이니 하다 보니 그래도 처음 가는 차편에 아시는 분들이 몇 분 있었다.
백두대간길은 능선을 연결하는 등산로다 보니 이렇게 접속구간이 생기고
또 접속구간에서 본 등산로로 접어드는 거리가 상당한 곳도 있다.
이곳은 생달마을이라는 곳으로 선달산으로 향하는 마을이다.
다들 출발하고서
난 제일 뒤에 일행들과 함께 사진을 담으면서 산행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캠코더를 주고서 난 사진만 담기로 했다.
저기 저 뒤로 보이는 봉우리가 바로 선달산이다.
선달산까지는 5km가 넘는데 그래도 이렇게 완만한 경사를 오르면서 늦은목이까지 도로가 있고
등산로로 접어든다.
도로가 끝나는 지점 까지는 약 2.5km 정도로 용문사까지 이어지고서 등산로가 시작된다.
등산로도 육산으로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이곳은 양지쪽으로 눈이 하나도 없었는데 하산길인 도래기재 쪽에는 눈이 아직도 많이 쌓여 있었다.
제일 뒤에서 산행을 하고 또 인물 사진도 담고 있다.
저기 저 위가 바로 늦은목이이다.
대간 63기에서는 고치령에서부터 시작된 소백산 쪽 다음으로 고치령에서부터 이곳 늦은목를 거쳐서 도래기재까지 갈 것 같다.
이 늦은목이 전은 갈곶산쪽인 듯한데 아마도 산불방지기간이 들어가지 않았나 생각 든다.
늦은목이이다.
이곳까지는 완만한 경사인데 이곳부터 선달산까지는 지금까지 올라온 경사보다 조금 더 가파른 듯 하지만.
그래도 험하지 않은 등산로가 선달산까지 이어진다.
[늦은목이]
부석면 남대리와 물야면 오전리를 넘나드는 고개다. 차량은 오르지 못하는 곳이다. 종주자들이 구간을 끊거나 하룻밤 묵고 가기에 좋은 곳이다. 서쪽 100m 거리에 샘터가 있다. ‘늦은’은 ‘느슨하다’는 뜻이며 ‘목이’는 노루목이나 허리목 같이 ‘고개’를 뜻하는 말에 명사형 어미 ‘이’를 붙인 것이다. 따라서 ‘느슨한 고개’로 풀이된다. ‘낮은 고개’로도 볼 수 있다.
때때로 이렇게 눈도 있고 그렇지만 양지쪽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산을 오를 수 있다.
아마도 5km가 조금 넘는 것 같다.
어렵지 않은 선달산까지 산행이 어어졌다.
이곳 선달산에서 인증을 하고 60기의 시산제와 더불어 산우님의 백두대간 완등식을 함께 하였다.
[선달산] 1236m
소백산령에 속한 산으로 주위에 매봉산(梅峰山:1,268 m) ·어래산(御來山:1,064 m) ·봉황산(鳳凰山:819 m) 등이 솟아 있다. 북쪽 비탈면을 흐르는 수계는 옥동천(玉洞川)으로 흘러들고, 남서쪽 비탈면에서 발원하는 수계는 내성천(乃城川)으로 흘러든다. 남서쪽에는 소백산국립공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동남쪽 기슭에는 국민관광지인 오전(梧田)약수가 있다.
신선이 놀았다고 하여 “仙達山”, 먼저 올라야 한다고 하여 “先達山”,남쪽 기슭에 신선굴(神仙窟)이 있어 선달산이라 한다. 또한 선비의 기품을 닮았다고 해서 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 선달 先達
조선시대 미입사(未入仕) 무과출신(武科出身).
조선시대의 무관(武官)은 식년무과(式年武科)·증광무과(增廣武科)·별시무과(別試武科)·알성무과(謁聖武科)·중시무과(重試武科) 등을 통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한정된 정원 때문에, 급제하여도 상위 입격자인 갑과(甲科)·을과(乙科)는 바로 임관되어도 병과(丙科)의 일부는 임관되지 못하고 자리가 날 때까지 대기하는 예가 많았다. 그런 경우에 선달이라고 불렀다.
- 오전약수
물맛이 가장 좋기로 조선시대 최고의 약수로 뽑히기도 했다. 중종 때의 풍기 군수 주세붕은 오전약수를 마음의 병을 고치는 좋은 스승에 비길 만하다고 극찬했다. 오전약수 전설에 의하면 오전리의 후평장과 춘양면의 서벽장을 드나드는 보부상이 주실령을 넘어 가던 어느날 쑥밭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약수를 일러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약수를 쑥밭약수터라고도 부른다. 또 옛날 이 근처에 살던 여인이 남자와 정을 통하기 위해 약수터를 찾았다. 그런데 그때까지 맑게 샘솟던 약수가 흙탕물로 변하고 뱀이 나타나 부정한 여인의 행위를 못하게 했다고 한다.
시산제 후 단체사진을 담았다.
백두대간 완등식도 함께 겸했다.
나는 아마도 올 7월이나 되어야 끝날 듯 싶다.
블랙야크에서는 이미 백두대간 100%를 달성했지만.
세어보니 아직 가보지 못한 인증지가 17개소나 되었다.
인증도 그렇고 이렇게 가보지 못한 대간길을 걷는다.
또 끝나고서는 밤이라서 보지 못했던 풍경을 다시 담아봐야 하지 않나 생각 들고.
계절별로 틀린 풍경도 담아야 하고..!
몇 년을 더 걸어야 대간길이 이렇구나 알 수 있을 것 같다.
선달산에서 박달령으로 향하는 능선길은 아직도 이렇게 눈이 많이 쌓여 있다.
선달산에서 많은 시간이 지체되어서 조금은 서둘러야 했다.
6시간 30분이 주어졌는데 거의 1시간을 선달산에서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가지 않으면 정해진 시간에 산행이 쉽지 않을 것 같다.
뒤에서 이렇게 따라가다가 결국 내가 가장 앞서서 걸었다.
원래는 사진을 담으려고 제일 앞섰는데 가다 보니 조금씩 거리가 멀어져
결국 혼자서 산행을 하게 되었다.
박달령이다.
시산제에 참석을 하지 않은 분들은 이미 보이지 않았고.
뒤에 오는 사람들도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잠시 이곳에서 사진을 담고 도래기재로 향했다.
- 박달령 산령각
박달령 산령각은 선달산(先達山)과 옥돌봉(玉石山) 중간에 위치한 박달령 고갯마루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의 산령각은 노후되어 1994년도에 중수한 산령각이다. 매년 4월 초파일에 오전리 마을에서 박달령을 찾는 사람들의 안녕과 마을사람들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고, 자연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는 고사(告祀)를 지내고 있다. 산신(山神)에 대한 고사는 오래전부터 인간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공존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토속신앙이다. 특히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고갯마루에 세워진 산령각은 마을어귀에 세워진 성황당(城隍堂)과는 조금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사찰에 세워진 산신각(山神閣)과도 다른 의미의 성황당이 박달령 산령각이 아닐까 생각된다. 박달령을 넘나들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안식처로서 통행의 안전과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고 이웃의 행복을 위해 고사를 지내고 기도를 올린 개방된 신앙공간이 박달령 산령각이다.
서낭신은 토지와 마을을 수호하는 신으로서 최근까지 가장 널리 제사지내던 신이다. 성황당은 중국의 성황(城隍)에서 유래하였다 하나 분명치 않으며 한국 고유의 민속신앙으로 보인다. 성황당은 서낭신의 봉안처인 동시에 거소로, 보통 신수(神樹)에 잡석을 쌓은 돌무더기거나 신수에 당집이 복합되어 있는 형태로 고갯마루, 한길 옆, 마을과 사찰 입구 등 전국 도처에서 발견되는 민간의 보편화된 신당(神堂)이다. 서낭신앙에는 내세관이나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이상이 없고 다만 현실생활의 문제로써 액, 질병, 재해, 호환(虎患) 등을 막아주는 마을수호의 관습에서 비롯된다.
지금도 고향마을에 더러 남아 있거나 없어진 마을이 많이 있는 성황당(城隍堂)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다. 박달령 산령각도 성황당과 괘를 함께하는 측면이 많이 있다. 그 성황당이 1960년대 후반부터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앙을 떠나 마을사람들의 공동체 형성의 공간이라는 긍정적인 면은 깡그리 무시되고 미신이라는 이름하에 많이도 때려 부셨던 메카시즘의 광풍이 몰려와 수많은 성황당이 폐쇄되는 운명을 맞았던 시절이 있었다. 농촌부흥의 기치를 내건 새마을운동이었다.
[박달령] 朴達嶺 1009m
선달산과 옥돌봉 중간지점에 위치한 박달령은 경상북도 봉화군과 강원도 영월군을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는 사연을 만들며 넘었을 박달령은 현재 임도가 개설되어 있고, 고갯마루에는 산령각이 있어 매년 4월 초파일에 고사를 지내고 있다. 옛날에 부보상(負褓商)들이 많이 드나들었다고 전해지며 그 부보상에 의하여 발견된 약수가 오전약수라고 전해진다. 2005년 12월 현재 고갯마루에는 산령각과 함께 정자가 있어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 박달의 뜻
배달(倍達)→백산(白山)의 다른 표기이다.
백산(白山)→백달(白達:밝달 .박달)→배달(倍達:ㄱ탈락)
배달은 백달의 음운변형이고, 박달은 백달의 모음변형이며, 백달은 백산의 다른 표기이다.
박달나무는 배달민족의 나무라는 뜻이며 우리는 백산(=배달)민족.곧 백두산 민족이다.
(대종언어연구소=박대종)에서 옮김
- 배달
배달은 고대 한국을 가리키는 말로 倍達이라는 한자를 사용하기도 하나 순 우리말로 추측된다. 배달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朝鮮)·한(韓)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말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으며, 고대로부터 계속 이어졌다는 증거 또한 없다. 일제 강점기 무렵에는 주로 단군 또는 고조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이후 개념이 확대되어 한국, 특히 한민족을 가리키는 순 우리말 표현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1979년에 공개된 《환단고기(桓檀古記)》에서 최초로 ‘배달’을 ‘환웅이 다스리는 나라’, 즉 신시(神市)라고 주장한 이후 이 주장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배달의 어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
《규원사화》에서는 ‘박달(朴達)’ 또는 ‘백달(白達)’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檀’, 즉 박달나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인식은 가장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규원사화》는 박달을 국가명으로 보지 않고 단군의 ‘단’을 의미하는 용어로만 사용되었다.
김교헌은 1914년 《신단실기(神檀實記)》에서 단군이 세운 국가, 즉 고조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조선을 단국(檀國)과 동일한 의미로 보았으며 배달이 단, 즉 박달의 어원이라고 보는 점은 《규원사화》와 동일하나 박달을 나무 이름이 아닌 고유 용어로 파악하였다.
최남선은 1918년 《계고차존(稽古?存)》에서 역시 박달의 어원으로 보고 있으나 그 본래 의미는 ‘백산’이라는 지명이라 보았다.
안호상은 1964년 《배달의 종교와 철학과 역사》에서 박달·배달을 두고 ‘밝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한밝산’이라는 지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유립은 1979년 《환단고기》에서 ‘신시(神市)’를 가리켜 배달이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 배달을 두고 상고시대부터 이어져 온 말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이 용어의 연원은 일제 강점기 이상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이 용어의 근거에 대하여 많은 비판이 있어 왔다.
신채호는 〈전후삼한고〉에서 배달의 말의 연원을 어윤적의 《동사연표(東史年表)》라고 들며 그 전래 과정을 통해 볼 때 믿기 어려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단군의 檀에 대해서도 壇을 사용하여 배달과의 관련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다.
이곳은 문수지맥길이면서 또 외씨버선길이라 되어 있었다.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 옥석산이다.
이곳까지 오르막이고 이제부터는 도래기재까지 내리막이다.
이곳부터는 눈이 상당하여 안전을 위해서 아이젠을 착용하고 하산을 하였다.
[옥돌봉] 玉石山 1222m
춘양 북서쪽 16km, 봉화 북쪽 14km 지점에 있다. 정상은 둔봉(鈍峰)을 이루나 능선이 방사상(放射狀)으로 뻗고, 특히 남쪽으로 뻗은 말단봉은 노암(露岩)의 대지를 나타내며, 남사면 일대는 수십 갈래의 깊은 계곡이 발달하여 아름답다. 옥석산은 남류하는 낙동강과 북서하는 남한강의 분수령이 된다.
특히 이 지역은 옛날 금강송의 주산지였다고 한다. 조선 수군의 거북선과 군함들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시대에는 전략물자였음이 틀림없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산에서 나무를 베어 춘양에서 집하한 후 운송했다 해서 춘양목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산림청에서 설치한 안내문에는 1980년대 까지도 그 귀한 금강송들이 제법 있었으나 솔잎혹파리로 인해 소나무 숲은 점점 쇠퇴하고 신갈나무가 그 자리를 대체해 나가고 있다고 적고 있다.
- 토종 '금강 소나무'
예부터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고 전해진 '금강소나무'는 토종의 대명사로, 국보 1호 숭례문이 화재로 전소되면서부터 세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금강소나무는 줄기가 곧게 자라며 꼭대기를 올려다 보면 좁은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나이테가 촘촘하고 나무에 윤기가 나 한눈에 봐도 뛰어난 품질을 자랑한다. 다른 소나무보다 몸통이 굵고 재질까지 단단해 최고의 목조 건축자재로 이름 높았고, 조선시대 이래 궁궐을 짓거나 임금의 관을 짜는데 주로 쓰여 왔다. 이런 까닭에 숭례문의 주요 뼈대 또한 금강소나무로 지어졌고, 숭례문 복원엔 수령 100년 이상에 지름 1m 안팎의 대형 금강소나무가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북 북동부는 금강소나무가 가장 울창한 지역이다. 금강소나무의 금강은 금강산에 자라는 형이라 해 붙여진 이름. 금강산 일대에서 자라난 금강소나무는 태백산령을 따라 남하했고, 봉화·울진 등지의 비옥한 동해안 내륙지역에서 최우량 형질로 거듭 태어났다.
봉화 춘양면 서벽1리는 최고의 금강소나무 군락지로 손꼽히는 곳. 일제 강점기 때 춘양의 우수한 금강소나무들이 춘양역으로 모여 반출됐는데, 형질이 너무나도 좋아 '춘양목'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정도다. 현재 서벽리 문수산 자락에는 1천500여 그루의 금강소나무가 살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남벌된 탓에 수령은 20~80년에 불과하지만 모든 금강소나무마다 페인트로 번호를 새겨 놓고 있다. 2001년 문화재용 목재 생산림으로 지정된 이후 이곳에서 반출되는 모든 금강소나무는 숭례문 복원 같은 문화재 보수와 재건용으로만 쓸 수 있도록 한 것. 영주국유림관리소가 금강소나무숲을 제대로 느끼며 산책할 수 있게 1.5km의 탐방로를 조성, 곳곳에서 토종 소나무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오늘 또 하나의 볼거리 바로 500년 되었다는 철쭉이다.
그리 크지 않은 철쭉인데 500년이나 되었다 한다.
철쭉이 이렇게 오래 사는지.!
처음 들어본 이야기다.
어차피 5월 중순에 63기 백두대간을 하면서 이곳에서 다시 꽃핀 철쭉을 담아봐야겠다.
도래기재에서 오르는 산이 저 건너편 산인데 구룡산이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다.
밤에 올라서 지형지물을 파악하기 어려워 어디가 어디인지 기억이 없다.
도래기재로 하산하는 길의 삼나무 숲인 듯하다.
이렇게 오늘의 마지막 지점인 도래기재이다.
이곳에 와보니 차량도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통화를 해보니 터널 지나서 조금 내려가면 쉼터가 있는데 그곳에 차량이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저녁을 간단하게 마치고 6시경 서울로 향했다.
[도래기재] 763m
도래기재는 춘양면 서벽리와 우구치리를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고갯마루에는 금정굴로 불리는 터널이 있어 사람과 차량이 통행하였으나 근래에 폐쇄되고 현재는 고갯마루를 관통하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과 경북 봉화군 춘양면을 이어주는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인 88번지방도가 지나간다. 도래기재는 서벽리 북서쪽 2km 거리에 있는 마을이름을 따와서 도래기재라고 한다. 도래기 마을에는 조선시대에 역(驛)이 있었기에 역촌마을이라 하여 도역리(導驛里)라 부르다가 이것이 변음이 되어 현재는 도래기재로 통용되었다. 재넘어 우구치는 골짜기 모양이 소의 입모양을 닮아서 우구치(牛口峙)라 불린다.
- 금정광산
금정광산은 백두대간 구룡산의 심장에 해당하는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일대에 위치. 일제 강점기 때부터 50년 이상 금을 캐온 금정광산이 문을 닫으면서 구룡산 계곡 한쪽에 광미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그리고 여기에 어설픈 광해 방지 작업이 더해져 5년이 지난 2002년 여름 끝내 무너져내렸다. 태풍 루사에 의해 폐기물 더미가 완전히 무너진 것.
초기 복구를 담당한 산업자원부는 폐기물을 흙으로 덮고 그 위에 아카시아를 심었지만, 주변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부실하게 복구를 한 것이 화근이었다. 큰 비를 맞고 무너져내린 중금속폐기물은 한강 상류에 해당하는 우구치리계곡을 비소, 구리, 수은 등 중금속으로 오염시켰다.
우구치리는 '창지개명(創地 改名)'된 명칭이다. 애초 강원도 영월군에 편입돼 있었으나 지금은 폐광된 금정광산에서 캐낸 금을 봉화로 실어내 오면서 행정구역이 바뀌었고 폐광지역 침출수가 영월로 흐르는 하천을 오염시켜 지역간 환경 분쟁을 낳고 있다.
도래기재 터널이다.
이곳은 위의 포장도로가 있기 전에 통과할 수 있는 금정굴 동굴이다.
지금은 철망으로 막혀서 갈 수 없다.
동굴 안쪽에 쏟아지는 물로 만들어진 종유석 모양의 어름이다.
한길 사람키보다 더 큰 얼음 종유석이 대단하다.
이렇게 오늘도 즐거운 백두대간을 마쳤다.
GPS 트랙
본산행의 트랙
설명이 포홤 된 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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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간팀분들이 많네요.
수고 하셨어요.
이번에 다른 대간팀에 있는 지인이 완등한다고 하여 다녀왔습니다.
카메라멘으로 다녀왔네요.
가야할 산행지인데.
미리 다녀왔네요..!
대부분 이렇게 28인승이나 36인승으로 거의 다 차서 가는것 같아요.
고정 멤버는 절반쯤 되는 것 같고요.
나머지는 그냥 땜빵..!
대간팀이 많기 때문에 정해서 가는 경우도 있는데 구간구간 찾아서 다니시는 듯 하더라구요..!
@누리사랑 아 그렇군요.
저도 땜빵 산행좀 해야하는데, 일정 맞으면 신청해서 마무리 해봐야 겠네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군요~
시산제와 완등식
참석해주시고
카메라에 하나하나 아낌없이~
더 담아주시려고~ 바쁜 발걸음에 감사했었는데 ᆢ
또다시 보니
새롭네요~^~👍👍
시간은 참 빠른것 같아요.
눈 쌓여 있을 때 갔는데.
초록한 봄날에 가니까 또 풍경이 완전히 틀리던데요..!
그래도 항상 이렇게 같은 곳 이라지만 산을 찾는데.
참 좋네요..
갈 때마다 새로운 것 같아요.